후기 기독교 사회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의학을 공부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의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인간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건강하게 살기 하기 위해서 의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내용은, 전부 다 질병에 대한 것입니다. 건강을 얻게 하기 위하여, 질병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병이 들고, 증상이 어떻고, 왜 병이 들고... 또 어떤 사람이 병이 들고, 어떤 환경에서 병이 전염이 되는가... 등을 연구합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의학을 공부하는데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병자와 병의 아픔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의학도들이 처음 공부할 때는, 내용이 전부 다 자기에게 해당하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내게 이런 병도 있고, 저런 정도 있는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느낀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후기 기독교 사회의 선교전략을 공부하는 목적은 예수님을 잘 믿고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배우기 위해, 안 믿는 사람을 연구합니다. 그들은 왜 안 믿고, 왜 믿음을 잃고, 왜 마음이 식고, 왜 교회가 쇠퇴하고, 교회가 비게 되느냐를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치 독일의 전범 헤르만 괴링이, 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군목이 그를 찾아 갔어요. '이제 당신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앞두고, 자기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되지 않느냐?' 라는 의도로 군목이 그를 찾아갔더니
헤르만 괴링이 그 군목을 비웃으면서 '나는 성경을 신뢰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어요.
여기에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불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불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또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불신하는 것과, '성경'을 불신하는 것은 성격이 좀 달라요. 성경 어디에도 '성경말씀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라는 말씀은 없지만 성경말씀을 불신하게 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불신하는 한, 하나님도 믿기 어렵고, 예수님도 믿기 어렵고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어요.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가, 후기 기독교 사회가 된 중대한 이유 중 하나는 <성경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훨씬 복잡하고, 그냥 단숨에 반박할 수 없고, 이것은 상당한 대화와, 상당한 설득과, 그리고 전략적인 접근을 필요로 합니다.
서구의 현대인들이 상당후 성경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어라', '복음을 받아들이라' .. 이런 말을 하기 이전에 성경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주어야.. 그들이 하나님, 예수님, 복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으니, 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가 거할 곳이 많다..'
이런 모든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인 성경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되는 것이 첫단추인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성경을 몰랐던 사람이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가르쳐 주면 되지만
(서구인들은) 한때 믿었다가 성경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것이 약간 복잡한 것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해서 성경을 한때 믿었다가, 성경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습니까? 이제 어떡하면 그 믿음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훨씬 더 깊은 생각(변증)을 요구하고, 진지한 대화를 요구하고, 다시 연구를 할 필요가 있고,
그 사람들이 어떤 방향에서 접근하는지를, 우리가 알고 이해하고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제대로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느냐를.. 준비해야 됩니다.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신학교 교육의 맹점 중에 하나는 '신학은 성경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리 신학을 공부해도, 믿음이 생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고 *knowing the Bible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공부하기 때문에 *knowing about the BIble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만으로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어요.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면, 성경 자체를 공부해야 되고, 말씀을 읽어야 되는데 *성경신학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 공부하기보다는 성경에 대해서, 성경의 역사, 성경의 저자, 성경의 배경... 뭐 이런 것만을 공부하게 되면 그렇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신학, 역사신학 등주1)
저는 신학교 교수님들을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고, 기독교인들 중에 가장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고, 그 사실을 인정을 하지만 신학교 교수님들은, 신학생들에게 믿음을 심어 줄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신학교 교수 중에, 자기가 알고 공부한 것만을 가르칠 뿐이지 학생들의 신앙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신학교육의 한계입니다.
신학교는 채플도 있고, 사경회도 있지만 여러 신학교의 근본 존재 목적은, 학생들의 신앙을 키워주기 위한 게 아니고..
그건 교회가 하는 것이고, 신학교는 더 명성있는 신학교가 될수록 우수한 신학자들을 데려다가, 다른 데보다 앞선 신학, 더 발전한 신학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적인 질문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교회와 신학교육의 양상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 과정을 이수해야 했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일반 정통신학교를 나온 목사들이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서구에서) 이제는 신학교를 의지하지 않고, 교회 목사들을 배출하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어느 신학교든지, 거기 출신이 교회를 부흥지키지 못하고 신앙을 뜨겁게 가르치지 못하고, 오히려 성도들에게 의구심을 가르치고, 의구심을 심어 주더라.. 는 것입니다. '의심'이라는 바이러스를 옮겨 주더라..는 것입니다.
(신학생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졸업 후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죠)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한번 의심의 바이러스가 돌기 시작하면 이건 통제하기가 어려워요. 바이러스라는 게 금방 금방 전달이 되는데 의심이라는 게 마치 바이러스와 같아서.. 확산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믿음 있어 보이는 청년을 신학교에 보냈더니, 그가 신학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기도하고 뜨거운 믿음을 가졌던 청년이었는데, 신학교에 갔다와서는, 겉멋이 들어서 그런지, 뭐 어쩌고저쩌고.. 어떤 신학이 어떻고..
'너는 차라리 신학교에 안 가는 게 나을 뻔했다'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섣불리 신학교에 가 가지고, 겉멋이 들어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꽤 있어요.
'의심'이라는 바이러스를 옮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일이 만연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 목회를 하면, 이단으로 보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목회자는 인가된 신학교육을 받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러나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라든가, 심지어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부흥을 하는 오순절 교단, 또는 은사주의 교회 목사들은 기존의 신학교 보다는, 그 교회가 (단독으로) 세운 신학교라든가 그 교회가 만든 목회자 양육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목사가 되는데
그들은, 신학교육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 목회의 은사입니다. '과연 이 사람이 설교와 사역에 은사가 있느냐?' 하는 것을 '정규 교육을 얼마나 받았느냐' 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데 저는 이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신학교육이 은사를 대신할 수 없고 신학교육을 받은 것으로, 은사를 갖추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은사가 있으냐.. 하는 것은, 신학교육을 아무리 받아도,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유학을 다녀오고, 책을 써도 은사가 없으면.. (목회, 설교, 부흥 등의) 은사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사가 있는 사람은 신학교육을 받기 전에, 이미 십대의 나이에 이미 목회를 할 수 하는 것입니다.
▲제(김영준 목사)가 만일 23살의 나이에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토론토 한인교회에 가서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를 제가 인도할 때 그때 성령이 불 같이 역사하시고, 강력히 임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목회를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지금 있는 거죠. 23세의 나이에, 그 때 목회를 시작했으면 아주 뜨겁게 했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직 신학교를 가지도 않고 미처 대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목회를 하느냐?
이런 고정관념에 묶여 있었던 것이.. 제게는 오히려 아쉬움과 후회로 지금 남아 있습니다.
도저히 23세에, 성령의 은사가 강력히 임했을 때, 목회 사역을 시작한다는 것이
당시의 통상적인 생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는 부득이하게 대학교로 돌아가서, 학부과정을 졸업하고, 대학원도 졸업하고..
그 이후에 신학교에 갔자민, 그때는 이미 과거의 뜨거움을 상실하고, 그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수련회 때 뜨거웠던 것이.. 그 후로 쭈욱 지속되지를 못 했지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이런 것을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희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오고, 석사 박사 과정 마치고 오고...' 그때까지 성령께서는 기다려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마치 바람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때 우리가 즉시 그분을 따라가야지... 아니면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런 식으로 기다려 주시지 않아요. 이게 이제 우리에게 상당한 결단과 용기를 요구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껏 수 십 년 목회를 했지만 23살 때, 그러니 대학교 3학년 마치고 여름방학 때 성령이 역사하시는 그런 뜨거움을 그때처럼 경험해 본 적이, 그 후로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얼마나 뜨거웠는지 집회 끝나고 밤에 자는데 잠꼬대를 방언으로 했을 정도니까, 얼마나 성령충만하면 자면서 방언으로 잠꼬대를 할 정도였습니다. (주위에서 나중에 말해 주었겠지요)
그러니까 신학교에서는 은사가 교육이 안 되는 겁니다. 뭐 이 사람에게 목회 은사가 있느냐? .. 이것을 검증해 봐야 됩니다. 목회자가 되려면, 그게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느냐? 그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면 은혜가 있느냐? 그걸 통해서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검증을 해야지..
이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일 수 있어요. 잔인할 수 있어요. '당신은 은사가 없다'고 누구에게 정직하게 말해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네는 아무리 봐도 이 부분에 은사가 없는 것 같네!' 이건 잔인한 말이죠. 그러나 그가 자기 일평생을 투자하기 전에, 그런 말은 누군가가 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목회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 공부만 많이 해서 뭐가 되냐면... 교수가 됩니다. 그래 가지고 앞으로 장차 목사될 사람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이건 이상한 것 아닙니까. 목사가 될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이 목회 은사가 있는 사람,
또는 그 목회 은사가 검증이 된 사람이 해야 되는데
일찍이 자기에게 목회 은사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방향을 틀어서 교수가 된 사람이 주의 종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되돌아 설 수는 없고 이제 목회에는 은사가 없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가르치는 일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이제 그들이 장차 목사가 될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다면 '의심 바이러스'를 심어줄 수가 있는 거죠.
목회자가 될 사람을 가르치려면,
목회 실력이 검증된 사람이 가르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으나, 이견이 있을 수 있음)
△많은 신학교가 이런 지적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유는 '아니에요, 우리 학교 졸업생들 중에 목회하는 사람은 40% 밖에 안 돼요' 이런 식으로 변명합니다.
'나머지 60%는 다른 일을 하는데 그들이 다 목회자가 되는 거가 아닌데 어떻게 목회 위주로 가르칠 수 있습니까?'
그럼 왜 목회 안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데려다가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가르친다는 얘기입니까?
'그럼 신학교 졸업생들이 다른 어떤 분야로 갑니까?' 사회 복지사.. 뭐 그런 걸 한다는 거예요.
그럼 그런 사람들은, 아예 그걸 전공하게 하지 뭐하러 신학교까지 와서, 신학을 공부한 다음에 사회복지사 .. 그런 걸 하게 합니까?
신학은 주의 종이 되기 위한 준비를 위한 것이고, 그게 주된 목적인데 어떻게 이제 그게 보조적인 신학교의 목적이 됐습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진실을 말해야 돼지요. 사람들이 좋아하던/ 싫어하던지요...
▲미국에 이름 있는 대학들, 하버드, 유니언... 그 외에도 많은 학교에 신학부 Divinity School 가 있는데
신학교가 있지만, 더 이상 스스로 신학교 라고 부르지 않고 종교학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문선O 교주의 아들이 하버드 신학교를 다니면서 승려의 복장을 입고 다녔어요.
당시에 하버드 신학교가 그 정도로 변질됐어요. 그건 신학교가 아니에요. 사실을 사실로 말을 해야지요.
임금님이 벌거벗었으면 벌거 벗었다고 말을 해야지, 사람들이 그 말 하는 것을 주저 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이, 한때 기독교 사회가 '후기 기독교 사회'가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일들이 있는데, 당연히 후기 기독교 사회로 발전할 수 밖에 없지요.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얼마나 많은 미션 대학이 있었습니까. 선교사들을 위해서 세워지고, 신앙으로 시작한 학교들이 아직도 채플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색채를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죠.
오늘 본문 말씀, 고전14:8절에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기독교 나라들이, 지금 후기 기독교 사회가 된 이유는 목회자들이 성경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설교를 하게 되면 분명히 하지 못한 나팔 소리를 낸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분명해서, 전진하라는 소리인지, 작전상 잠시 후퇴하라는 소린지, 좌측으로 진격하라는 말인지, 우측으로 이동하라는 말인지, 분명해야 되는데 만약 분명치 못한 나팔 소리를 내게 되면...
왜냐하면 성경 말씀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데 성도들이 들을 말씀이 없으면, 불분명한 나팔소리를 들으면, 성도들이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죠.
성도들이 믿음을 상실하기 시작하면,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처럼, 성도가 목사를 닮게 되고, 성도의 신앙이 목사의 신앙을 닮게 되면서 목사가 성경에 대한 확신을 상실해 버렸으니까 성도들도 성경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교회의 쇠태와, 믿음의 쇠퇴와 사람들이 교회로 올 이유가 없지요. 뭐하러 교회로 오겠지요?
교회로 오게 하려면, 성도가 은혜를 받게 해야 돼요.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교회에 오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은 모여들게 되어 있어요.
곽선희 목사님이 아주 쉽게 말씀하셨죠. '교회가 성장하려면 세 가지 조건만 있으면 된다. -성도들이 졸지 않게 해야 되고 -다음 주일에 또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되고, -친구를 데리고 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된다... 고 했습니다.
즉 예배시간에 반드시 은혜를 받게 해야 된다는 얘기죠. 은혜를 받으면, 친구를 데리고서까지 온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를 받지 못하면, 교회에 와서 졸게 되고, 다음 주일에 오지 않게 되지요.
▲이제 우리는 원론적인 차원에서 왜 수많은 교회가 성경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가?
거기에 대해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제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말하는데
1) 첫째는 내용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다는 거죠. 성경이 기록한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지창조를 안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고, 성경의 기적을 안 믿고... 그걸 믿을 수가 없다는 거죠.
이건 후기 기독교 뿐만이 아니고, 어느 시대든 있었던 일입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불신 등, 성경 내용에 대한 의구심!
2) 둘째는 저자에 대한 의구심, 성경은 누가 썼대? 그 사람이 정말 썼을까? 뭐 어떤 책은 그 원래 저자가 다른 사람이라던데? 저자를 알 수 없다고 하던데?
이렇게 저자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면, 당연히 성경 내용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게 되지요. 또 저술했던 시기에 대한 의문도 있죠. 그때 기록된 게 맞나요? 훨씬 이후에 기록된 게 아닌가요?
3) 세 번째는 성경이 그동안에 보존되었고, 필사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과정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게 정확히 보존된 게 맞나요? 그거 원본하고 같은 거예요? 뭐 일부분 상실된 성경도 있다면서요?
왜 이 사본과 저 사본이 조금 다른가요? 이런 식으로 성경의 보존과 사본의 전수 과정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 예언하셨는데,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 복음서가, 진짜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기록이 됐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전이 무너진 것을 알고, '전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주장하죠. 이런 의심이 생기면, 당연히 내용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기게 되죠.
▲그럼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런 세 가지 질문, 문제 제기에 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1) 먼저는 <성경 내용>에 대해서, 불신하는 질문에 대해서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배경과 경위와 내용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공부해야 돼요.
성경이 어떻게 기록이 됐느냐? 성경이 무슨 말을 하려고 기록이 된 것이냐? 성경을 알아야 돼요.
성경이 기록되었던 그 배경, 이것을 책과 공부를 통해서 배울 수 밖에 없습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강의를 듣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로 신뢰하는 훌륭한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1) 한 가지 예를 들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 저자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진짜 예수님이란 분의 고유한 말씀을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비유사법" 입니다.
"비유사법"이란, 그 당시에 유행하고 잘 알려졌던 방식과 상당히 다른 것이 있으면, 그건 그 시대 사람들이 자기들의 전통에 따라 지어낸 것이 아니고 그 비유사한 방법을 가진 그분의 말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다... 라는 이론입니다.
즉 예수께서 말씀을 시작하실 때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런 식으로 말씀을 많이 시작하셨죠. 헬라어로 '아멘 아멘' 이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진실로)
당시에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했던 사람이 없었어요. 그건 유행하지 않고, 사람들이 쓰지 않던 (예수님의 고유한) 워딩이었어요.
그런데 복음서에 예수님만이 '아멘 아멘' (우리 말에 '진실로'로 번역) 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된 것을 보니까 이건 정말 예수님이 그렇게는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죠.
왜냐면 어느 누구도 자기들이 익숙한 방법으로 말하지, 예수님처럼 그런 워딩을 쓰지 않았다는 거죠. 그러므로 그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기록한 것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거죠.
성경이 우리가 그냥 예사롭게 함부로 여길 수 있는 책이 아닌 것입니다. 이게 정말 예수님이란 분의 정확한 역사적 사건과 말씀을 기록한 책임을 우리가 믿게 되는 것입니다.
2) 또 다른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최초로 증언한 사람들이 전부 다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성경이 지어낸 책이라면, 정신이 나갔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지어내기 위해 '여자들이 목격했다'고 성경에 쓰겠습니까? 당시에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신뢰하겠습니까? 당시는 여자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내가 직접 경험을 해 봐야 돼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내가 은혜를 받으므로 경험을 해 봐야 됩니다. 그래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됩니다.
'어~ 이 말씀이 정말 내 심령에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구나!' 정말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는 말씀인 것을, 우리 각자가 체험해 봐야 됩니다.
그리고 다른 고전문학을 읽을 때도 똑같은 감동이 있는지를 비교를 해 보면 됩니다. 삼국지를 읽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느냐, 논어, 맹자를 읽을 때 그런 감동이 된 적이 있느냐? 감동이 없다면, 성경은 다르지 않느냐는 거죠.
3) 세 번째는, 오랜 기간 동안 성경을 묵상을 해야 됩니다. 섣불리 성경을 묵상해 본 적도 없고, 그냥 한 두 번 읽고 누구의 강의를 듣고, '성경 저자가 누군지 확실히 모른다면서요?' 뭐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말하면 안 되고
성경을, 깊이 묵상을 통하여 성경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얼마나 옳은지를 발견해야 돼요.
△제가 오랫동안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어요. 계시록이 어렵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책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었는데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발견하는 것들이 있었어요.
거기에 깊은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과 그 당시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갖고 있었던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사실,
기독교는 애초부터 엄청난 위기의식 속에서 태동을 했고 그 위기의식 속에서 생존했고 발전했다는 사실! 그 위기의식 때문에 언제든지 종말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날도 교회는 이런 똑같은 위기의식 속에서 생존하고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걸 담아낸 책이 요한계시록이에요.
계시록은 위기의식 속에서 우주를 봤어요. 그러나 믿음으로,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리시로다. 옛원수 마귀는 이제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이 땅에 누가 당하랴?'
그런 어떤 엄청난 위기가 있는데 그 상황에서 큰 장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신다... 이걸 믿은 것입니다.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팔자 좋게, 편한 상황에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이 겪었던 위기의식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후기 기독교 사회가, 이제 교회가 생존하느냐, 믿음이 살아날 것이냐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위기, 또 하나의 위기의식을 교회가 갖게 되는 것이고 이 상황에서 우리는 비로소 교회가 교회 역할을 하고 그 교회가 갖고 있는 엄청난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