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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7장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

LNCK 2022. 8. 10. 19:49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         히7장             여러 설교 정리

 

 

◑본문 설명 / "구약의 제사 제도와 대제사장은 폐지되었다"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A.D.65년경

 

우리는 구약의 율법 아래 살아보지 않았기에 히브리서의 내용이 이해하기 힘들고 지루해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비교하면서 전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율법에는 제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요제, 소제, 화제 등

복잡하고 많지만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속죄 제사와 또 하나는 감사 제사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제사 제도의 중심에 제사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는 지파로 레위 지파를 따로 떼어

“너희는 전문적으로 성전 봉사를 하라!”고 정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개인적 소유나 성공을 꿈꾸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하며 살았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역할에는 제사만 아니라, 중보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사 제도를 폐하시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흠없으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이후 다시는 율법에 의하여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어버린 지 오래여서 왕도 없었고, 예언자도 그쳤던 때입니다.

오직 남은 것은 제사장 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시고

레위 지파 제사장들을 폐하셨다는 말씀이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인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성경의 근거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신비한 존재인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복을 받고 또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이 참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3절 '그에게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의 본문 히7장으로, 구약 창14장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 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워두셨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곧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2절 ‘첫째로,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요,

다음으로, 그는 또한 살렘 왕인데, 그것은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정의의 왕이시며, 동시에 평화의 왕이십니다.  주1)

예수님을 굳이 의의 왕, 평화의 왕이라 함은 완전한 의, 완전한 평강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완전하다’는 단어가 네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은 불완전한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드렸던 제사도 당연히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11절 ‘만일 그 제사직으로 완전한 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아론의 계통이 아닌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다른 제사장이 생겨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은 자신도 죄에서 온전하지 않았기에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속죄 제사를 드리기를 반복하여야 했습니다.

 

18-19절 ‘전에 있던 계명은 무력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24-25절에 보면 예수님을 레위 지파 제사장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24-25절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계시는 분이므로, 제사장직을 영구히 간직하십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완전한 구원자이십니다.

늘 살아계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 단락 출처

 

 

◑적용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세 직임을 모두 한 몸에 다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이란 사실은, 세 직임 중에 우리가 가장 친근히 잘 압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란 사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꽤 익숙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란 사실은,  제게 좀 생소한 내용이라서, 앞으로 많은 묵상을 필요로 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목사님 자제분을 좀 부러워했던 때가, 누구나 한 때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큰 교회 목사님 자제분이면.. 그는 또래 친구들에게 큰 부러움을 샀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고등학생 아들이, 주일날에 집에서 혼자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교회 선생님 두 분이, 이 목사님 아들을 깨우러 그 집에까지 찾아와서 침대를 흔들었습니다.

‘목사님 아들이 예배에 빠지면 되겠나요? 빨리 옷 입고 학생부 예배드리러 갑시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그 목사님 아들이, 교회 친구들에게 아주 자랑하듯 떠벌리며 나누었습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있을 법한 얘기지요.

그런데 우리는 목사님 자제분을 부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또는 큰 교회 목사님을 자제분으로 두신 장로님이나 권사님을 부러워햘 이유가 전혀 없고요,

또는 큰 교회 목사님을 형님으로 두신 개척교회 목사님을 부러워할 이유도 당연히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대제사장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황, 영국 성공회 대주교, 한국의 메이저 교단 총회장, 큰 교회 담임목사 정도와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대제사장 예수님!

 

그 예수님을 모신 내가, 교단 총회장 아들, 큰 교회 담임목사 자제분을 부러워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유명인사나, 그 자제분들이 겪는 남모를 고충도 많습니다)

 

▲1. 오늘도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7:25           
   
예수님은, 생전에 주로 설교 사역에 치중하셨죠. 
그렇지만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주로 하시는 일은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7:2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갈보리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구원에 대해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그 분의 계속되는 기도 사역>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강한 유혹을 받는 그 순간에 그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 같이,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19세기의 스코틀랜드에서 사랑을 받았던 로버트 맥체인 목사는 말하기를,
"내가 만일 그리스도가 내 옆방에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적 이백만 명이라도 무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천국과 지상의 거리)
그 분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는 동안, 

나(보쉬 목사)는 히브리서 7장의 진리를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사방에서 나를 대적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나를 위해 중보해 주실 것을 간구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그 문제가 해결되었고
나는 그것이 주님의 특별한 간섭이셨음을 알았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의 대제사장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절실히 체험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예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분이 당신의 필요를 아버지께 아뢸 것입니다.
그분의 중보사역을 통해, 오직 그분의 기도로만 얻어 낼 수 있는 놀라운 결과를
당신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기도의 능력 앞에서 무력한 존재입니다.
Satan is powerless against the power of Christ's prayer.
 
▲2. 중보자, 대제사장 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가는.. 우리는 불에 타 죽습니다.

 

점점 더 후기기독교 (포스트 크리샌덤) 문화가 되고 있는 우리의 환경에서
"당신은 구원받았나요?"
"구원 받는다"는 말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면,

자기 가정의 문제, 정신적 문제 해결.. 정도로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 받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중인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로부터 구원받음" 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를 중보자 라고 말씀합니다
딤전2:5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나의 진행중인 구원 사역은
오늘도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중재(중보) 사역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보자가 하시는 일은

잘못된 것이 바로 잡히도록 중간에 개입하거나
바로잡힌 것이 앞으로 계속 그 상태가 유지되게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이제 휘장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필요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한 번 보좌 앞에 나아갔더라도, 다시 태양보다 더 뜨거운 (하나님의) 불에 타 죽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며 기도를 마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중보를 의지해서, 우리가 매일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관건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시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제 John Piper 생각에
우리들은 감정의 시대에 살기 때문에
기독교에 심리학이나 마음의 치료라는
생각이 너무 깊이 침투하여서
 
성경이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자기 심령의 안정을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그 정도로 믿는 사람들이 있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돕기 위해서 기록되었지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거대한 불이시고
죄를 증오하시며 죄와 함께 거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개미 같이 작은
죄의 잿가루들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 상태로 (중보자 그리스도가 없이)

나 스스로 만약 하나님께 백만 킬로미터 이내로 접근해도 

우리는 곧바로 하나님의 불에 소멸될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긴급한 문제는
우리의 어려움에 처한 결혼, 가정, 직장, 건강, 자녀 문제가 우선이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는 
회사에서의 어떤 갈등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 우주적인 문제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파멸되지 않은 채, 불에 소멸되지 않는 채 
도저히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중보자가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못하고,

구원 받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중보자, 대제사장이 계셔서
나를 자신의 존재로 완전히 감싸안은 채로 
이 진노의 불의 중심 가운데로 지나서, 즉 하나님께로 데려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론의 후손과 같은, 인간 대제사장의 역할로는 불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인간 대제사장은, 매일 제사를 드려야 했고,

또 남의 죄를 사하기 이전에, 자신의 죄를 먼저 사하는 제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히5:3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이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의 불길, 진노의 불길 가운데를 지날지라도

전혀 불살라지지 않고,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안전하게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를 위해 영단번의 속죄제사를 드려주신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우리에겐 구원의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관한 겁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
우리의 정신 건강이나, 결혼, 자녀들과
직장을 위한 부수적인 효과가 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효과일 뿐입니다
 
내 삶에 혹시 모든 것이 잘못되고 엉망이 되어도

이것 하나만 바로잡히면
우리는 영원히 영원히 기뻐 뛸 겁니다.

사실 내 인생 문제는 98%이상 다 해결된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중보자,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아가서,

내가 안전하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그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불의 진노를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매우 짧고 죄는 매우 경악스러워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신은 오늘, 무슨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세상 일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미 당신의 문제는 98%이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해결되었습니다. 

물질, 건강, 직장, 자녀, 가정, 외모, 관계 등 .. 그 모든 것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다 맡기십시오.

 

그게 어떻게 되든지.. 내가 원하는 방향이든지 / 원치 않는 방향이든지 결판 나더라도,

중보자 그리스도는, 다 합력하여 "내가 온전히 구원받는데 도움되는 방향으로"

나를 섭리해 가실 것입니다.

그 큰 그림에 따라서.. 나의 물질, 건강, 직장, 자녀, 가정, 외모,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이 결정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큰 그림입니다. (그 속에 작은 그림은, 내가 채워 넣겠지요.)

내 인생은 내 하기에 달린 것도 있지만, 그것은 작은 그림이고,

외모, 키, 가정 배경, 국적, 피부색, 성격, 결혼, 재정, 건강 .. 등의 큰 그림은, 주님이 그려나가십니다.

나의 온전한 구원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주님이 그렇게 중재해 나가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히브리서의 위상

 예수님의 죽음의 값어치 click 강추  

 

 

 

◑절별 해석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이 멜기세덱은...복을 빈 자라’ 본절은 창 14:17-20에 대한 언급으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에 왕이 제사장 직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저자는 4-10절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탁월함을 강조한다.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저자는 본절에서 멜기세덱의 두 가지 칭호를 제시한다.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멜기세덱'은 '나의 왕'을 의미하는 '말키'와 '의'(義)를 의미하는 '체덱'이 결합된 형태로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왕은 의롭도다'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로 부른 것과 연결된다.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살렘'이라는 지명(地名)은 '평강'을 의미하는 '샬롬'과 동일한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

'평화'로 번역될 수 있다. 장차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평강의 왕'(사 9:6)이라 칭한 것과 연결된다.

저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강을 주러 오셨으며(마 11:28),

자신의 의를 통하여 공의가 넘치는 나라를 완성하며 다스리신다.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토르 아메토르'는

사생아나 천한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신적으로 태어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저자가 멜기세덱을 천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 멜기세덱의 부모에 대한 언급이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음을 나타낸다.

 

멜기세덱의 부모와 족보가 없다는 사실은 그의 탄생이 기적적으로 되어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제사장적인 특질을 설명하려는 것으로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탄생이나 족보와 같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거나, 레위계통의 제사장직의 승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저자는 멜기세덱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에 착안하여

그의 제사장직이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임을 나타낸다.

저자는 이러한 예표와 강조를 통해서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는 다른 제사장임을 진술한다.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본문은 창 14:18-20의 내용에 대한 해석인 시110:5(LLX)의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저자는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4-10절까지는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함을 논증한 진술이다.

 

멜기세덱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일체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략물 중 좋은 것'은

문자적으로 '쌓인 것들 중에 가장 높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것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것을 받은 멜기세덱의 권위를 시사한다.

 

아브라함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사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에게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십일조를 드렸음을 나타내며,

멜기세덱이 레위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위대하고 우월함을 암시한다.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저자는 본절과 6절에서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놓고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논증한다.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칠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민 18:21, 24),

레위인들은 다시 그들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의무화하고 있었다(민 18:26).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율법에 의해 십일조를 거두었으나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2절; 창 14:18-20).

 

저자는 앞절과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 멜기세덱을 십일조를 받는 문제로 비교하여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이 훨씬 우월한 존재임을 진술하고 있다.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그 약속 얻은 자'는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을 빌어 주었다(1절;창 14:19,20).

고대 사회에서 축복의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신분상(身分上)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사실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1절)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보다

더욱 위대한 존재였음을 암시한다(Cockerill).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여기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십일조를 백성에게서 받았으나

저기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로서 십일조를 받았다.

 

여기서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는 저자가 3절에서 언급한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성경은 멜기세덱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죽을 수 밖에 없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된 '레위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진술에 대한 이유임을 시사한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레위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그러기에 레위가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는 없으나

레위를 대표하는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으므로

그것은 곧 레위가 바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본절은 '에이'('만약')로 시작하는 가정법으로 율법과 연관된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불완전함을 나타낸다.

'온전함'의 헬라어 '텔레이오시스'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혹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온전한 행위를 뜻한다.

 

'다른'의 헬라어 '헤테론'(*)은 '전혀 다른 종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새 제사장이 과거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며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이 할 수 없었던 '온전케 함'을 하시는 분이심을 암시한다.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제사장 직분과 율법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맺고 있다(11절).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이 불완전하여 백성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제사장 즉 멜기세덱 계통의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제사장직과 관련된 율법도 불완전하여 바뀌어야 함을 시사한다.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본절은 12절에서 언급된 '율법의 변역'에 대한 내용이다.

율법은 오직 레위 지파만 제사장직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새로운 제사장은 율법에 규정된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곧 유다 지파에 속한 제사장이었다.

 

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은 시 110:4의 인용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11절).

 

16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본문은 11절의 부정적인 표현 곧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와 동일한 의미로

11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은 포괄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레위 계통의 합법적인 후손, 혹은 어떤 신체적 자격 요건 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율법에 나타난 바대로

레위 자손의 혈통이나 외적 조건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만세의 왕'으로서(딤전 1:17)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생명를 부여하는 영원한 것이다.

 

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본절은 시110:4의 인용으로서 16절에서 저자가 말한 것

곧 그리스도가 무궁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이다.

 

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본절과 다음절은 저자가 11절부터 언급한 내용의 결론이다.

 

'계명'은 문맥상 제사장직에 관련된 율법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있느나,

1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타당하다.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온전케'로 번역된 헬라어 '에델레이오센'은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는

온전한 관계를 의미한다(11절).

 

율법은 단지 외형적인 것만 깨끗하게 하고 내적인 양심은 깨끗게 할 수 없어서(9:9,14)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

즉 사람들은 제사장직이나 성결 의식과 같은 율법적인 제도에 의해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리라’

레위적인 율법 제도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20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본절과 다음절은 새로운 제사장이신 예수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사이의 비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엄숙하신 맹세로 말미암아 제사장으로 지목된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맹세없이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부여받았다(28절).

 

'맹세없이 된 것이 아니니’

하나님의 맹세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확고한 보증이 됨으로

신자들은 그의 제사장직에 소망의 닻을 드리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6:18-20)

 

21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는 시110:4의 인용이다(17절).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 부여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맹세하신 약속의 신실성으로 인해 보증된 것이다.

 

반면에 율법하에서 이루어진 레위인의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맹세나 약속 혹은 보증이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다만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16절)을 좇아 이루어진 직분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제사장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며,

완전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언약에 대한 보증임을 암시한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저자는 '언약'의 헬라어 '디아데케스'를 본서에서 17회나 사용하여 중시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나타난다.

 

'디아데케'는 '유언', '서약', '의지'라는 의미로 70인역(LXX)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은혜로운 '의지'를 가리킨다.

동시에 그 단어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함축되어 있다.

 

문맥상 본절의 언약은 제의적(祭儀的)인 것으로

옛 언약 즉 구약의 제의는 하나님께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었으나

외형적인 것만 정결케 하고 내적인 양심은 정결케 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었다(18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시고(8:8-10;9:15-20),

새 언약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온전히 나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25절;9;14,15).

 

새 언약은 구약의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다.

한편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에 대한 '보증'은 영원한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9절;13:20).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귀오스'(*)는 '보증인'이라는 의미로

이 보증인은 '중재자'의 뜻인 헬라어 '메시테스'와는 달리(8:6;9:15;12:24)

보증인 자신의 인격과 생명을 담보로 자신이 행한 말에 대해 보증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담보로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저자는 새 언약의 제사장은 예수 한분 뿐인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그 수효가 많음에 주목한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수효가 많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그들이 행하는 제의가 불완전함을 반영한다.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인하여 제사장직을 감당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였던 반면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므로 뒤를 이을 다른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뒤이을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행하신 사역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뜻한다.

 

예수의 영원성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일시성과는 달리 그의 제사장직이 영구적임과 동시에

최종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덴'은 본절이 23, 24절의 논리적 귀결임을 나타낸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온전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판텔레스'는 '완전히', '절대적으로'라는 의미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구원의 완전성을 뜻한다.

 

한편 '구원하실'의 헬라어 '소제인'은 현재시상이다. *소조

본서에 나타나는 '구원'이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인 유업을 가리키는 반면(1:14, 5:9, 9:28)

본절의 '소제인'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구원'을 시사한다(2:3,4, 6:4,5,9).

 

그리스도는 옛 언약의 제의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새 언약인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에게 현재 구원에 참여케 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구원에의 참여를 보증하신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간구하심이니라'의 헬라어 '엔튕카네인'은 '중재하다'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특별한 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심을 가리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이러한 대제사장'이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원하시며(24절),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25절),

항상 살아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중재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새 언약에 합당한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도록

모든 길을 마련해 놓으신 분이다. 저자는 영원한 구원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신 대제사장

그리스도에 대해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이 다섯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지녀야 할 성품과 지위를 나타낸다.

 

‘거룩하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시오스'는 70인역에서 '충실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1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낸다(5:7,8).

 

‘악이 없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코스'는 '교활하지 않은', '순수한'이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순수하셨으며 어떠한 악과도 접촉하지 않으셨음을 시사한다.

 

‘더러움이 없고’ 이의 헬라어 '아마안토스'는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이라는 뜻으로

제의적 순결성을 나타낸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제의 의식을 통해서 외적으로 더럽혀진

자신을 깨끗이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온전한 도덕적 순결성을 소유하셨다.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성품과 연결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죄인들과 분리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죄인인 인류와는

다른 존재이시다.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

예수께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는 달리

승천하셔서(4:14)곧바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신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중재자가 되신다.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속죄일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항상 자기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린다(5:3;레 4;3-12;16:6-10).

왜냐하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도 역시 불안전한 인간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 자신과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렸으나

저자는 본절에서 '날마다'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 자신도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드리는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9:7,25;10;1)

대제사장이 제사를 매일 드렸다는 의미보다는 그가 부주의로 죄를 범했을 때

매일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므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4:15)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드린 한 번의 제사는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저자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을

그의 대제사장직의 핵심적인 기능으로 제사한다.

죄 없으신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완전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그의 속죄사역은

일시적인 레위 계통 제사장들의 속제 사역과는 달리 한 번으로 영구화 될 수 있었다.

 

저자는 본절을 통해서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의 불완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설명하고 있다.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저자는 본장을 결론지으면서 사람인 제사장과 온전하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세 가지 차이점을 제시한다.

1) 율법과 맹세의 말씀. 옛 언약에 속한 레위 제사장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셔서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맹세의 약속을 성취하였으며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2) 사람과 아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유한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반복적이고 일시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계셔서 온전한 중재 사역을 행하셨다.

 

3) 약점을 가진 자와 온전케 되신 자. 옛언약의 제사장은 약점을 가져서 불완전한 사역을 행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하셔서 지상 생활의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사람의 구원의 근거가 되셨다(2:10;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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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예수님은 정의의 왕이시며, 동시에 평화의 왕이십니다.

사람들도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만든 정치 체계 중에 가장 정의로운 정치 체계가 공산주의인 것을 아십니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가장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빈부의 격차가 없는 사회, 이 비전에 수많은 지식인과 청년들이 목숨도 바쳤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세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정의가 가진 한계입니다.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와 사랑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하지만,

평화를 사랑하다가, 부패가 일어나고 불의한 일도 용납하는 경우 역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정의와 완전한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