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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2:14~26, 행함으로 온전해지는 믿음

LNCK 2022. 8. 11. 16:04

행함으로 온전해지는 믿음 (야고보서 2:14-26)│2022.03.06 - YouTube

 

◈행함으로 온전해지는 믿음        약2:14~26         2022.03.06.


※2:20절부터가 하이라이트 입니다.


◑1.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요?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지금 교인 중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서는 불신자나 초신자를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 받은) 기존 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중요
그러므로 칭의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칭의 받은 후에 삶의 열매인 행함을 강조하는 거죠.

 

교인들 중에서 누군가가 '아~ 저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는데 
근데 그 사람이 믿음을 확증할 만한 아무런 삶의 행함이 없다면... 

즉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선을 행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주님 앞에 경건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라면... 과연 그게 가능한가요? 

데살로니가전서 1:3절에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1:3

여기에 '믿음의 역사 work'라고 했지요. work of faith
믿음은 반드시 '행함 work'이라는 열매를 맺게되어 있다는 거죠. 

근데 그런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는 개념일 뿐이고, 탁상공론이며, '사상누각' 같은 믿음이에요. *모래 위에 집

그러니까 공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입력을 했는데 출력이 안 나오는 거죠.
믿음을 입력하면, 행위가 그 열매로 출력되어야 되어야.. 그 입력된 믿음이 정상인 것입니다. 

개인 간의 거래를 하거나 기업간에 거래를 하면서 
분명히 저쪽에서 송금을 했다고 하는데, 만약 여기에 입금이 안 된다면 
이거 문제가 심각하잖아요.
그런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저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두 가지 예외적인 상황을 먼저 나누고 싶습니다.  주1)

▲2:15~16절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지금 형제 자매가 헐벗고 굶주려 있어요. 그런데 뭐라고 얘기 한다고요?
'평안히 가라(샬롬),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삶이 평안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가 평안이 가겠어요?
옷이나 땔감이 없는데 어떻게 따뜻하게 지내겠어요?
당장 먹을 양식이 없는데 어떻게 배불리 지내겠냐고요?

말만 그렇게 축복 인사를 해 준다는 거죠.
그리고서는 하나도 도와 주지 않는다?

모세오경에 보면, 유대인들에게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모세오경 입니다. 
그러면 그 모세오경에, 객과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사람들은 
반드시 친척이나 이웃들이 돌봐야 된다고 하나님이 간곡하게 당부 하셨잖아요. 

그걸 너무나도 잘 아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 
모세오경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실천하지 않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중보기도를 진심으로 열심히 하잖아요. 
'하나님, 이 사람이 정말 삶의 어려움이 있는데 
그 어려움이 해결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열심히 진심으로 기도하면 

어느 순간에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 도와주면 될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내게 해결책이 있을 때는, 내가 직접 가서 도와 주게 되는 것이죠. 

    지금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인해서 너무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잃게 되고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고 있잖아요. 

    그럼 우리 마음 가운데,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이렇게 탄식하게 돼요. 

    도대체 하나님, 왜 이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도록 가만히 보고 계십니까? 
    왜 그들을 도와 주지 않으십니까? 

    그럼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물론 이것에 대해서는 교리적으로 신정론의 주제인데 
    굉장히 다양한 답변들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하는 당신이 움직이길 원하신다는 거예요.

'왜 저 집사님은, 저렇게 인생이 힘들게 가난하게 놔두십니까?' 
하나님은, 그 기도를 하고 있는 당신이, 움직이기를 원하신다고요. 
그 사람의 인생을 모두 책임질 수는 없지만.. 뭔가 액션을 취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요.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한 우리가 
우리 안에 그 사랑이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그 사랑이 삶으로 흘러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된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천국 문 앞에서 양과 염소가 나누일 것이다.. 그 비유를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니까 여러분 사복음서(특히 마태복음)를 정직하게 잘 읽어 보시면 
예수님이 '너희가 불완전하고 죄가 많아도 
나만 믿으면 천국 가는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기 보다는

'선행을 행해야지, 이웃을 사랑해야지, 연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지.. 
그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이다' 이렇게 (행함을 강조하는) 말씀을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교리적으로 '행위 구원은 틀렸고, 믿음 구원만이 맞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마25장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상한 얘기를 하시네? 예수님이 틀린 얘기를 하시네?' 이렇게 보입니다. 

자 여러분 교리가 먼저 있는 것인가요, 진리가 먼저 있는 것인가요?
진리가 먼저 있는 것이고요. 교리는 진리를 명확하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리적 관점으로 진리를 흐트리면 안 됩니다. 

지금 야고보는, 사실 마25장의 예수님과 거의 같은 뉘앙스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너무나 이신칭의의 교리적 관점에 많이 매여있다 보니까 
야고보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질 뿐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야고보서를 보면서 
건강한 신앙적 관점의 균형을 다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2: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과연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 믿음은 깨어있는 믿음인가, 아니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인가? 

많은 분들이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순모임도 참여하고, 또 영적 성장을 위해서 성경공부도 수강하고, 또 봉사활동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하는 어떤 종교활동의 행위 말고요,
정말 내 안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흘러넘쳐서 
자연스럽게 행하는 삶인가? 

아~ 나 같은 죄인을,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게 때문에 

또 (과거의 나같은) 그런 사람을 보면 안타깝게 여기며
내가 구령의 열정을 갖고서, 그를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가요? 

또 우리 주변에 보면, 삶에 상처가 있어서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좀 가시가 돋힌 분들이 있잖아요. 
그러나 그런 순원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가요? 

또 냉담에 빠져서 교회를 등지고 있는 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랑의 마중물을 내가 기꺼이 붓는가요? 

▲자 그래서 18~19절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라는 주장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18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18절에, 독특한 상황 설정을 했어요.
한 사람은 믿음이 있고, 한 사람은 행함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 믿음 따로, 행함 따로 라는 게 가능한가요?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9절에 그 근거로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성경의 가장 근간이 되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성경에 가장 근간이 되는 진리를 여러분이 믿으십니까? 하고 이렇게 물었어요. 

갑자기 하나님의 유일성을 야고보 사도가 왜 언급을 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 때문인데 

1) 첫 번째는, 하나님은 나누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신 것처럼 
믿음과 행함도 나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뉘앙스로 얘기한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그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적인 믿음 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가 없다..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지식적인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믿는다' 라는 단어가 '안다, 이해한다, 신뢰한다' 와 같은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19절에서 보신 것처럼 
'여러분이 한 분 하나님을 믿으시죠? 좋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도 그걸 믿습니다.' 

귀신들도 믿는다는 얘기는 뭐냐면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가시면,
귀신들린 사람들이 나와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있어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이렇게 고백을 한다고요. 

그러니까 귀신들도 지존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식적으로는 안다고요. 

    한국에서도 뭐 그런 경험들을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강신무 들이 있잖아요. 진짜 신내림을 받아서 무당 일을 하는 사람들! 

    강신무들이 굿을 하다가 갑자기 멈추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주위를 둘러보면서 '여기 큰 신 믿으시는 분 있냐고?'
    즉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신내림에 집중이 안 되니까 
    그런 분은 좀 나가달라고 요청을 하는 거죠.

이렇게 귀신도 인정을 한다고요. 
귀신도 절대자에 대해서, 지존자 하나님에 대해서 인정을 한다고요. 

그러나 자기가 지식적으로 믿는 것에 대해서 
귀신이 순종하나요? 하나님께 순종하나요?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귀신들은 구원 못 받지요.

그러면서 야고보는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냐면
'여러분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외면으로 순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으로 여러분은 구원 못 받는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의 종교적 지식이, 당신이 갖고 있는 수많은 성경의 지식이
당신을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건져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 
그 감격과 은혜가 내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서...

정말 생명은..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것이잖아요. 
어린 싹, 어린묘목 하나도 심어놓으면, 스스로 자기 생명의 길을 찾아가는 거잖아요. 

어린아이가 연약해 보이지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성장하는 거잖아요.

그것처럼 생명은, 살아있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라는 논지를 야고보가 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활 논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2)

▲2:20절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는 왜 '허탄한 사람아!' 하고 말씀하는 걸까요?

그것은 자기가 생명줄이라고 붙잡았는데 
알고 보니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었다면... 

내가 믿고 있는 이 교리, 내가 믿고 있는 종교로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렇게 살다가 천국문 앞에 섰는데 
'네가 가진 믿음으로는, 네가 가진 그런 교리적 지식으로서의 믿음으로는
이 천국문 안에 못 들어온다!' 

만약 그래서 자기 앞에서 천국문이 덜컹 하고 닫힌다면 
그건 정말 낭패잖아요. 이건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두 가지로 정리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1) 종교적인 실천만 강조하는 율법주의가 있고요. 
이 율법주의는 구원이 없어요. 

하나님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율법'이라는 종교적인 행위가 중요하다고 믿는 거예요. 종교적 형식이 중요한 거예요.

2) 또 정반대로, 종교적인 지식, 영적 지식만 강조하는 영지주의, *영적 지식 주의
이 영지주의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율법주의하고 씨름을 하신 거고, 
그 후에 초대교회는 영지주의와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그런 양극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없는 행위만 강조한 율법주의와 
-행함이 없는, 믿음의 지식만 강조하는 영지주의의 양극단이 초대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예를 들면 
예수님이 가장 신랄하게 불편하셨던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죠. 
또 예식만 강조했던 중세 로마 가톨릭도, 율법주의의 늪에 빠져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정반대로 초대교회에서, 영적 지식만 강조했던 영지주의는 
'영적 지식을 갖고 있고, 나는 이미 구원 받았으니까 
몸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면서, 윤리 도덕적으로 엉망진창으로 살았어요. 

그럼 오늘날 현대교회에는 영지주의가 없을까요? 있다는 거죠.  *오늘날의 지적동의

'나는 구원의 교리를 알고 있고, 이 공식대로 하면 나는 구원 받는 거야, 
난 천국에 갈 수 있어!' 라고 생각하면서, 안심하면서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 세속주의자로 사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과연 그 신앙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천국문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정직하게 나의 신앙을 말씀 앞에서 비춰보고 성찰해야 합니다. 
본문은 아주 심각한 주제인 거죠. 


◑2.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됩니다. 

▲2:21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지금 야고보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두 성경 인물을 예로 들었는데, 아브라함과 라합입니다.

라합도 믿음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잖아요. 
믿음의 실천이 중요하다 라는 것을 지금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21절에 보면 '아브라함도 아들을 바치는 행함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았다'
라고 예를 들었어요. 근데 이상한 주장 아닙니까? 

왜냐면 성경을 좀 아는 분들은 
로마서 4장, 갈라디아서 3장을 읽어 보면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을 <이신칭의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구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들었단 말입니다.
 
근데 오히려 야고보는, 그 아브라함을 똑같이 예로 들면서 
<이행칭의' 즉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논지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일 인물 아브라함에 대해서 
두 사도가 정 반대의 관점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래서 이 부분을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게 만들어 주겠다' 
라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나요?

창15: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가 믿음을 가졌을 때, 그것을 의롭다고 여겨 주셨어요. 

그리고 결국에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은, 믿음의 결실이었던 거죠. 

근데 하나님께서 또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나에게 번제로 죽여서 바치라고 하셨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인 거죠. 

아니 그 아들을 통해서 수많은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아들을 죽이면, 그럼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잖아요.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아~ 내가 아들을 바쳐도, 
그 아들을 다시 살려서라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실 거야' 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종의 실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창22장의 아들을 바치는 사건이에요. 

그러니 바울은 창15을 예로 들어 믿음을 강조한 것이고,
본문의 야고보는 창22장을 예로 들어 행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22:12절에 나오는 말씀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왜 '이제야' 인가요?
창15장과 22장 사이는, 굉장히 긴 기간이거든요. 몇 십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지만 
그렇게 그 하나뿐인 아들까지 내어 드릴 때 
'진짜 네가 나를 신뢰하는구나!, 네 믿음이 이제 정말 온전해졌구나!' 
라고 인정해 주셨다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은, 창15장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인생 여정에서 그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어요. 창15장에서. 
그런데 창22장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내용을 보면 
그가 부부간에 잘못 합의해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잘못된 자녀를 낳기도 했으며

'우리가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과연 자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중간에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었다고요. 

그러니까 그의 믿음이 처음부터 뭐 완성형 이어서 
쉽게 결실을 거둔 게 아니라 

중간에 그의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도와주셔서 
그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결국에 믿음의 결실인 이삭을 얻은 거죠. 

근데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결국 그의 믿음은 정점에, 완성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

그렇습니다. 믿음생활, 신앙생활은
천국을 향해가는 순례자의 긴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으니까 
나는 교리상, 믿음의 공식상, 이제 천국이 보장된 거야!'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가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칭의는 한순간이지만, 성화는 일평생입니다!
중요해서 다시 얘기합니다.
칭의는 한순간이지만, 성화는 일평생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그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통회 자복하고 
주님을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은.. 대부분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내가 정말 그 은혜 감사하며 살아야지.. 
그렇게 매일의 삶에서 실천해가는 삶, 이것은 평생의 마라톤 레이스와 같은 것입니다. 

자 이어지는 22절이 본문의 핵심구절입니다.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위 구절은 2가지를 말씀합니다.
-믿음은 행함과 동역한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

자 그러면 어떻게 동역하는 것인가요? 
지금 우리가 바울과 야고보를 다시 한 번 비교해 보면 

바울은 믿음을 강조해서 <이신칭의>를 주장한 것 같아보이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에서 <이칭의>를 주장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바울과 야고보는 반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위 표를 보면, 첫 번째 줄에 행위구원은 틀린 거예요. 
두 번째 줄의 믿음 구원이 맞는 것입니다. 

행위구원 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 그게 선행이 되었든지, 종교적 수행이 되었던지 
내가 이런 행위를 해서 그래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성경은 그거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근데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게 때문에 
우리 삶에서 그 감사와 감격과 순종이.. 삶의 실천(행함, 순종)으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믿음의 결과입니다.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그러니까 행함만 맞고 믿음은 틀렸다,
뭐 믿음만 맞고 행함은 틀렸다... 
이렇게 한쪽만 옳다고 주장하는 게 지금 아니에요. 야고보도. 
둘 다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칭의>가 이루어졌지만 
<믿음의 증거요, 결과인 행함으로도 칭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어 구문으로 표현하자면 
    not A but B .. A는 틀렸고 B만 맞다..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고요. 

    not only A but also B .. A뿐만 아니라 B도 맞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라는 얘기를, 24절에서 야고보가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때 믿음만 강조했고,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주장했던 사도바울! 

근데 그 사도 바울도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얘기를 했어요. 
바울이 언제 그런 얘기를 했을까요? 여러 번 했어요. 

고전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우리가 아는 바울이, 그 바울이 맞습니까?
바울이 행위구원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게 아니죠. not A but B 가 아니라
not only A but also B 라는 거죠.
처음 믿을 때는, 믿음으로 칭의를 받는 거고요,
칭의 받은 후에는, 행함으로 즉 순종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결국엔 야고보와 똑같은 얘기를 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라면 완벽해진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이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변화 되지 않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또는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하게 살면 
그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 영혼 가운데 사랑의 마중물로 부어져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성령의 감동하심이 흘러넘치고 
삶 가운데는 그 사랑과 감동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그런 거룩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를 보면서. 
'나는 안 되는데.. 그래도 내가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윤리적으로 살아야지.. 도덕적으로 살아야지.. 좀 착한 척 하면서 살아야지..' 
그런 거 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거는 율법주의이고, 그건 종교생활인 거죠.
야고보서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죠. 

진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그 생명은, 반드시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는 거죠.

예수님이 요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잖아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그냥 붙어있기만 해도 
그 생명의 영양분이 공급되니까, 자연히 자라서 포도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내가 막 열매를 맺어야 돼!' 애를 써서 맺는 게 아니잖아요.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께 맞대어 있기 때문에, 생명의 결실을 거두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22절에서 또 눈 여겨 볼 것은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된다"
'완성'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보셔야 됩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b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온전해진다'는 말이고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 perfect, complete 라는 단어로 번역했는데요.
완전하다, 온전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런 것이죠.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면 
이게 어린묘목 일지라도 사과나무인 것은 맞죠. 

그러나 이 사과나무가 잘 자라서 사과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똑같이 권면했어요. 
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work out your salvation

아니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게 아니라, 그 분이 이루어 주시는 것인데 
'너희가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핼쓰장에 가면 work out 한다는 말을 쓰는데,
자기 몸을 '만들어간다' ..는 뜻입니다.

그러면 빌2:12절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그 구원을 네가 만들어 가라'는 뜻입니다.

이미 주신 구원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 갑니까? 
삶의 성화의 실천으로 그것을 이루어 가라는 말씀을 하는 거죠! 

아까 사과의 어린 묘목이 심어졌어요. (칭의의 구원)
그때까지 완전한/성숙한/장성한 자리에 이르기까지 점점 자라가야 하는 거죠. (성화의 구원)
이제 그 묘목이 완전히 성장해서, 온전한 사과 열매를 맺는 거죠. (구원의 완성)

또 가령 이런 거죠.
결혼도.. 뜨거운 연애가 전부가 아니며, 
한 번의 결혼식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두 사람이 매일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면서, 
결혼을 work out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결혼과 가정을 점점 더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거죠.
사실 진짜 결혼의 핵심이고 소중한 거죠. 

그러니까 젊은이들은 몇 개월에 걸쳐서 
자기들의 결혼식으로 얼마나 화려하고 멋있게 만드느냐.. 거기에 온갖 집중을 하지만 

그러나 인생의 연륜이 있는 어르신들은 
매일 매일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이것이 (화려한 한 번의 결혼식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평생 사랑하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책임지기 위해서, 평생을 함께 살아가고 계시는 거잖아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주님과의 결혼 생활이.. 그렇게 work out 점점 만들어져 가야 하는 것이죠1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과 과거에 한 번 연애만 하고, 결혼식만 하고
지금은 마치 이혼한 관계처럼.. 그 결혼 생활을 work out 즉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진정 회개를 통한 칭의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진정한 칭의가 있었지만, 실족한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탈선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다시 트랙으로 돌아와서, 
이미 받은 '칭의 구원'을, '성화 구원'을 통해 매일 온전히 이루어가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내용을, 야고보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주1) 

1) 첫 번째는 "행함이 없는 믿음"인데, 구원 받는 경우도 있어요. 예외적인 경우이지만요. 
십자가 우편에 있던 강도가, 그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믿음은 가졌는데, 그것을 행함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행함은 없었고 믿음만 있었지만, 구원받는 거예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이 그를 받아 주셨잖아요. 

하지만 누군가가 정말 하나님을 잘 알아요. 
근데 인생은 내 맘대로 살고 싶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가끔 이런 담대한(간 큰)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내 맘대로 평생 살다가, 마지막 죽기 직전에 내가 믿겠다고!' 여러분 이게 가능할까요?
이 분이 간과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내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 소중한 자기 영혼을 걸고 도박을 하는 셈인 것이죠. 
아주 위태로운 것입니다. 

2) 두 번째 "믿음이 없는 행함"의 경우입니다. 
엔도 슈샤쿠가 쓴 <침묵>이란 소설이 있죠. <사일런스>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나왔지요.

일본에 도착해서 선교를 하던 예수회 사제들이 
너무나 심한 박해 시즌에, 일본 신도들을 고문을 하면서 
'만약 사제들이 배도를 하면 이들 일본 신자들을 풀어주겠다'고 조건을 거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니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지금까지 얘기했는데 
사랑하는 일본 신도들이 고문으로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죽게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러면 사제들이 결국에는 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거예요. 

영화의 말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제가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는 행위는 했지만 
사실 그 신앙은 여전히 갖고 있었다... 뭐 이런 이상한 결말을 맺습니다. 

과연 이 사제들의 배도 행위가, 일본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랑의 행위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을 해 주실까요? 이게 참 애매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일본 복음화가 그렇게 힘들고, 요원해지게 된 것은 
결국에 행함은 선택했지만, 복음의 대해서,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배도하고 
내려 놓았기 때문에 아닌가요? 이것도 참 어려운 문제이고, 위험한 주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야고보가 참 힘든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주2)
그때 아주 특수 상황을 거론하면서, 7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여자와 다 결혼을 하고 죽었다는 거예요. 

유대인들 계대결혼법이 있는데,  *수혼법이라고도 함 (혼인을 이어 받음) 
근데 독특하게 첫째가 결혼했는데 일찍 죽고 
둘째도 그랬고, 그래서 7명이다 결혼해서 죽었다... 
그럼 천국에 가서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예수님이 한마디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마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가장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오늘날 우리도, 성경 말씀 잘 한다고 생각하지만,
(구원론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점검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