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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척교회 시절 회상

LNCK 2022. 8. 12. 12:46

두레수도원 사모수련회 폐회 예배 2022/08/03 - YouTube

 

◈나의 개척교회 시절 회상         롬8:12~13           2022.08.03.녹취 

 

두레수도원 사모수련회 폐회 예배 설교  2022/08/03


롬8: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제가 과거에 시골(경기도 화성)에서 목회를 하는데, 두레마을 마을도 하고 교회도 섬기는데 
목포 부근에 농촌 목사님이, 주일낮 11시에 예배 시작하기 10분 전에, 제게 전화를 했어요. 

아주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진홍 목사님, 너무 답답해서 목사님한테 전화드립니다. 
목사님이 스승 같고 형님 같아서, 다른데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전화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한돐 지낸 아들 놔놓고 사모가 가출해 버렸대요. 
'이제 예배를 11시에 시작해야 되는데, 애는 울고, 예배는 시작해야 되고 
교인들한테 그런 사정을 말할 수도 없고, 애기 업고 안고 달래면서 
하도 낙심돼서 목사님한테 전화를 드립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글쎄, 나는 그런 걸 안 당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마땅치 않으면, 애를 업고 두레 마을로 오세요. 그렇게 힘들게 살지 말고 
두레 마을에 와서 같이 농사 짓고, 같이 살면서 정신 차려 봅시다.' 

그랬더니 '그래도 예배는 드려야지요' 그러기에
'그런 거 다 알면서 왜 나한테 전화했어요? 
일단 여집사 한테 애기를 좀 봐 달라고 맡기고, 
예배를 드리고 나서 내일 좀 다시 전화하세요. 
내가 전도사님 같으면, 다 싸짊어지고 두레 마을로 오겠습니다.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하세요.' 내가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농촌 목회, 섬 목회가 참 어려운 분들이 많지요. 
우리가 <농어촌 목회자 사모 수양회>를 처음 시작한 지가 거의 30년 되었습니다. 

처음 내가 농촌 목회자들을 위해서 수련회를 하려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농촌 목회자들보다 더 고생하는 분들이, 사모들이겠더라고요. 

목사는 뭐 그래도 설교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교인들에게 대접도 받고 그렇지만 
농촌 교회, 섬교회 사모들은 뭐 그런 기회도 없지 않습니까. 얼마나 힘들까.. 생각해서 
'농촌 목회자 수련회'를 준비하다가 바꿨어요. '사모 수양회'로 바꿉시다...

농어촌교회 사모들이 제일 고생하겠다 싶어서
성령충만, 회개... 이런거 하지 말고 
쉬고, 그냥 위로 받고.. 그런 집회를 하자 해서 
우리가 <농어촌 목회자 사모 수양회>를 시작 했었습니다. 

첫해에 이제 한 150~200명의 사모들이 모였는데 
사모님 한 분이 앞 자리에 앉아 가지고, 시간마다 날 쳐다보며 우는 거예요. 

하도 시간마다 우니까, 내가 민망해서 쉬는 시간에 물었습니다. 
'사모님은 우는 게 은사입니까, 왜 시간마다 그래서 자꾸 웁니까?' 하고 물어보니 

'아이고 목사님, 죄송합니다. 목사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오고.. 
얼굴 안 봐야지 하고 눈 감고 있으면.. 음성만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그러면서 자기 얘기를 이렇게 했습니다. 

목포에서 배타고 두 시간 가는 섬에 
남편이 공무원 잘 하다가 은혜 받았다고, 사명감을 받았다고 
공무원 사표 내고 신학교로 가가지고, 늦게 목사가 되었대요. 

우리가 받은 은혜 생각해서, 다른 목회자들이 안 가는 저 외딴 섬에 가서 
평생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자... 그렇게 생각하고 부부가 섬으로 갔대요. 

그래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갔는데, 이제 섬에 들어간지 9년 만에 처음 나왔는데 
9년 전에 신고 들어갔던 구두, 그걸 선반위에 얹어 두었다가 
그걸 닦아서 신고 처음 육지로 나왔고, 이렇게 사모 수양회에 왔답니다. 

근데 (김진홍) 목사님이 옛날 처음 목회하시면서 고생하던 간증을 들으니까 
어쩜 우리 내외가 지금 당하는 고생과 꼭 같아서 
목사님 얼굴만 쳐다봐도 눈물이 나오고, 음성만 들어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이 참 아프더라고요. 
'사모님, 내외분이 그렇게 충성스럽게 섬을 지키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럼요. 그 위로받고 우리가 거기서 살지요. 
우리는 그 섬에서 죽을 작정하고 
우리가 묻힐 묘지까지 봐놓고, 둘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래도 참 고생은 고생이지요.' 

'목사님이 사모 수양회를 두레 마을에서 한다는 말을 듣고 
차를 세 번 갈아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배 타고 목포까지 나오는데 두 시간, 
목포에도 버스 타고 수원역에 내려서 또 버스 갈아타고 
세 차례나 갈아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모님, 하나님이 기뻐하실 테니까 
그저 안식을 누리고, 이번에 푹 쉬십시오. 
사모님, 그리고 수양회 마친 뒤에도, 괜찮으면 며칠 더 푹 쉬다가 가십시오. 

그리고 새벽기도회 이런 것도 나오지 마시고, 두 다리 쭉 뻗고 그냥 자십시오. 
친정 왔다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쉬다가 가세요.' 제가 그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충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우리가 찬송은 그렇게 (쉽게) 부르지만 
실제로 산골짜기에서, 섬의 오지에서 부부가 평생을 걸고 목회한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지요. 


◑신대원 2학년 때, 청계천에서 활빈 교회를 개척하게 된 사연

 

내가 지금 51 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1971~2022
서른 살에 '내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난한 마을에 들어가 보자!' 
이왕 목회하려면 뭐 부자도 구원받아야 되고, 지식인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다 복음으로 구원받아야 되지만, 특별히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거듭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 사는 동네에 들어가보자!'
그 때가 1971년입니다. 장로회 신학대학원 2학년 학생 때, 
그 해 여름 방학 때 내가 두 달 간을 서울 시내를 샅샅이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 청계천 마장동 끝나는 데서부터, 청계천 하류 한양대학 뒤 편에 판자촌이 있는데 
1600세대가, 그 강둑에 판잣집 짓고 살아가는데 
서울시에서 제일 가난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맨 처음에, 동네 사정도 알아볼 겸 전도하러 그 동네로 찾아갔습니다. 
옛날에 전도지 중에 <박군의 심정> 이라는 전도지가 있었습니다. 

미국 선교회에 가가지고 요청하니까, 전도지는 무료로 그냥 주더라고요. 
그걸 내가 받아서 가방에 가득 넣고, 청계천 판자촌 거기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그때는 전도할 줄도 잘 모르니까, 신학교 학생이니까 
그냥 집집마다. <박군의 심정> 이란 전도지를 쭉 쭉 나눠주면서 다녔는데,

어느 집에 갔더니, 문은 열렸는데, 방문 앞에 신발도 있는데 
'여보세요!'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없나 하고 방문 앞에 가서, 열린 문 사이에 방 안을 들여다 봤더니 
12살 쯤 된 아이가 병에 걸려서 방바닥에 누워있는데 
쳐다보는 순간 내가 가슴이 섬짓함을 느꼈어요.

몸은 젓가락처럼 여위었는데, 배는 올챙이 배처럼 불렀어요. 
근데 보니까 배꼽 밑에 한 치 되는 곳에서 구멍이 뚫어져서 
거기서 고름이 흘러내리더라고요. 고름이 흘러서 등을 타고 땅바닥에 흐르는데 
구더기가 고름을 좋아하는 가봐요. 구더기 한 열댓마리가 슬금슬금 기면서 
그 아이 허리 밑으로 파고들더라고요. 고름떨어지는 쪽으로 파고 들어서 

내가 너무 끔찍해서, 돌아서지를 못하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 옆에 앉아서 '얘야, 너 왜 이러니?' 그랬더니 
눈동자는 움직이는데 말이 없어요. 

'너 왜 이렇게 누워 있니, 어떻게 된 거냐?' 물어도
눈알만 움직이고 아무 대답이 없어서 
누가 오도록 기다렸습니다. 거기서 기다리는 동안에

제가 빗자루 찾아가지고 구더기는 쓸어서 밖에 버리고 
수건 찾아가지고 아이의 고름을 닦고
한 시간쯤 넘도록 기다리니까, 한 오십 된 아주머니가 오셨어요. 그 애 엄마 같아요. 

그래서 날보고 '누구신지요?'  
'네, 저는 이 동네에 전도하러 왔는데 
얘 모습을 보고 차마 돌아설 수가 없어서, 지금 누가 오도록 기다리고 있었지요. 
아주머니가 엄마됩니까?' 

그랬더니 '예 그렇습니다.' 
'얘가 왜 이렇지요?'

그랬더니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아이고 저 녀석이 이 애미를 못 잡아 먹어 가지고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자식이 아니라 원수인가 봐요. 
저는 저 녀석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이 무너집니다.' 

그러길래 제가 '사연이 어떻게 됐길래 이렇게 심해졌나요?' 그랬더니 
다섯살 여섯살 때 자꾸 감기를 앓더래요. 
그래서 뜨거운 국물에 콩나물국 끓여서 먹이고 한번 낳았다가 
또 아스피린 사다 먹이면 좀 덜 하다가... 
지금은 12살인데, 저렇게 두 달 전부터 배에서 고름이 흐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머니, 그러면 병원에 가보셨나요?' 그랬더니 
'병원이 뭡니까?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운데 
그냥 옥도정기(빨간약) 사다가 고름 흐르는데 발라 주고 그러고 있지요.' 

'아이고 아주머니, 배 안에서 고름이 나오는데, 밖에 옥도정기 발라서 되겠습니까? 
진찰을 해가지고 다 조사를 해서 약을 써야 지요.' 그러니까 

'뭐 그렇게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생활에 여유가 없으니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길래 

'아주머니, 그러면 나한테 허락해 주시면 
내가 내일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한번 가볼게요.' 그랬더니 

'아이고 그래만 해주시면 고맙지요' 이러더라고요. 

그때 내가 장로회 신학대학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기숙사 방방마다 다니면서, 신학교 동료들에게 모금을 했습니다. 

'주머니에 식비 놔두고 다 내시오. 사람을 살려야 됩니다.' 
그랬더니 우리 신학교 동료 전도사들이, 뭐 오천원도 내고 만원도 내고 해서 돈을 모아주더라고요. 

그걸 모아서 그 다음 날 택시를 한 대 대절했어요. 
그래가지고 그 아이 이름이 김학현 입니다. 

학현이를 데리고 택시에 태워서 시립아동병원에 갔습니다. 
서울에 가면 사직공원이라고 있습니다. 
사직공원 옆에 시립아동병원이 있었습니다. 

거기로 데려갔더니 엑스레이 찍고 뭐 다 해보더니, 진단이 '척추결핵'이라 그래요. 
척추에 결핵균이 붙어서, 척추 세 마디는 벌써 먹어버렸고, 
척추 두 마디는 지금 폐병 균이 먹고 있는 중인데, 거기서 고름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랬더니 
'얘는 벌써 약 먹고 나을 단계는 지났고, 대수술을 해서, 상한 척추 5개는 드러내고 
거기에 인조 뼈를 넣어서 대수술 해야 됩니다' 

'수술비가 얼마나 들지요?' 물어보니까 
뭐 천문학적 돈이에요.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의사 선생님, 수술길 열리도록 기도할 테니 
그동안에 약이라도 먹게 결핵약 좀 지어주세요.' 그랬더니 

'얘는 약먹고 낳을 단계는 지났습니다. 수술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래도 수술길 열릴 동안에 약이라도 먹으면서 기다려야지요. 
매일 고름이 저렇게 나오는데, 약 먹으면서 수술길 열리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졸라가지고 결핵약을 두 달치를 타왔어요. 
이제 결핵약 하고 또 스트렙토 마이신 이라는 주사약이 있습니다. 

그런 약을 얻어서 와가지고, 택시에 태워서 집에 와서 
'학현아, 니도 옆에서 들었지? 척추결핵이라는 거래 
약 먹고 낳을 단계에 지났다 하지만, 약이라도 먹으면서 우리 기도하자. 
약 먹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다. 

병은 예수님이 고쳐주시는거야. 
약을 먹으면서 예수님께 기도하자! 
니 기도 할 줄 아냐?' 

모른다고 그래요. 

네가 '글은 읽을 줄 아니?' 
안다고 그래요. 

'그럼 내가 기도문을 적어줄 테니까 
꼭 수제비라도 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그 다음에 약을 먹고는, 기도문을 읽어라!' 

그래서 내가 기도문을 종이에 적어줬세요. 
'예수님 나 학현이는 병이 낫고 싶어요. 
나도 나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다니고 싶습니다. 
나중에 자라서 예수님의 일꾼이 되겠습니다. 나를 고쳐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그렇게 일러줬어요. 

근데 걔가 참 착하더라고요. 그 뒤로 꼭 식사하고 약 먹고 나면, 그 기도문을 읽는 거에요. 
한 끼니도 걸르지 않고, 또박또박 기도문을 읽고 약을 먹고 그러니까 
20 일이 지나니까 고름 나오는 게 멈추더라고요. 

30일이 지나니까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와요. 그걸 보고 엄마도 희망을 가진 거지요. 
엄마가 희망을 가지니까, 엄마도 아들 옆에서 기도를 하는데 

내가 하루는 신학교 수업 마치고, 학현이를 찾아갔더니 
애 엄마가 뒷 마당에 상을 펴놓고, 상 위에 냉수 한 그릇 떠놓고 
기도한다고 손을 비비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예수님, 우리 학현이 고쳐주시길 비나이다'
하고 또 절하고 또 몸을 세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러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기가 차서 '아주머니 뭐 하세요?' 그랬더니 
'기도하잖아요'

'뭔 기도를 그렇게 산신령한테 빌듯이 비나이다, 비나이다.. 합니까?' 
'기도를 안 해봤어요. 옛날에 하던 기도 식으로 하는 거지요'

'그러면 물그릇은 왜 떠 놨어요?' 그랬더니 
'아무것도 없으니까 허전해서 떠놨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그릇은 치우고, 내가 성경 드릴 테니까 
상 위에 성경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가 아니고 
기도는 친정 아버지한테 이야기하듯이, 하늘 아버지한테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친정 아버지한테 비나이다 비나이다 안 그렇잖아요. 

아버님, 우리 아들이 어렵습니다. 고쳐주세요. 
뭐 이게 친정 아버지하고 이야기 아닙니까? 

하늘 아버지도 영혼의 아버지니까 
아버지한테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하고 가르쳐 줬어요. 

'하나님 우리 학현이 불쌍히 여겨주시고, 고름도 그치고 눈에 생기가 돌아옵니다. 
완전히 낫도록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렇게 한 뒤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하세요' 
그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 줬어요.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가 이제 상 위에 물그릇 대신에 성경책을 놓고 그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두 달을 그렇게 지냈더니, 빠듯이 일어나더라고요. 
문고리 붙잡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무릎을 잡고,
아주 땀을 흘리면서 일어나는데 

걔 엄마랑 제가 옆에서 응원하는 거예요. 
'하나님, 힘주십시오. 학현이 허리에 힘 주십시오!' 
옆에서 막 기도하며 응원하는데, 
학현이가 땀을 흘리면서 무릎을 짚고 일어서더니 

갓난 어린 아이가 걸음 걷듯이 한 발 두 발 걷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보람이 있어 가지고 
신학교 공부가 마치면 학현이 집에 달려오는 거에요. 

와서 기도 하고 응원하고 '예수 사랑하시면' 찬송가도 가르치고 그랬는데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요. 

또 돼지고기 사다가 끓여주고 그렇게 했더니 
애가 살도 붙고, 나중에는 길에서 뛰어다니는 거예요. 

어느날 한번은 신학교 공부마치고 갔더니, 이 녀석이 골목에서 동네 애들하고 씨름하는 거예요. 
내가 간 떨어질 뻔했어요. '학현아, 너는 허리가 약해가지고 씨름하면 허리가 주저 앉아 버려.
씨름하면 안 돼!' 그랬더니 

'괜찮아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애 엄마한테 물었지요. 
'아주머니, 학현이가 동네에서 동무들하고 씨름하기에 내가 놀랬습니다. 
척추 다섯 마디가 망가졌는데, 씨름하다가 남은 척추마처 주저앉저버리고 어떡합니까?' 

그랬더니 '글쎄요. 애를 보면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애가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그 다음 날 내가 학교 수업 빠지고, 학현이를 데리고 
시립아동병원에 다시 진료 받으로 간 거예요. 

다시 가서 엑스레이 다 찍고, 가래 검사하고 뭐 다 해보더니 
의사 선생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얘는 완치되었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 말이 믿어지겠습니까? 
'아니 대수술 아니면 안 된다 그랬는데, 혹시 기계 고장 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기계가 고장나다니요. 틀림없습니다. 
하여튼 의학적으로는 얘가 완치됐습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아~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셨구나. 얼마나 기쁜지...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사탕 잔뜩 사고, 과자 사가지고 청계천 뚝방 동네에 들어와 가지고 
동네 애들 다 불러 모았어요. '얘들아, 우리 학현이 나았다. 우리 잔치 벌이자' 

그렇게 애들 모아서, 막 사탕놓고 동네 애들 잔치한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그 뒤에 그 동네 전도하러 가면 
동네 노인들이 나한테, 내가 지나가면 할아버지들끼리 서로 말해요.

'저 어른이 아무개 집 아들 꼽추병 고친 선생이야. 
우리 동네에 예배당 세워 달라고 하세!
이런 동네에 예배당 세우면, 우리 손주들의 교육에 좀 좋겠는가!'
노인들이 그러더라고요. 

어떤 동네 아줌마 길에서 만나가지고 '선생님, 예배당은 언제 서나요? 
예배당이 서면, 우리 부부는 예배당에 다니기로 했습니다!' 뭐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하, 그 학현이를 통해서 
이 동네에 교회를 세워서 영혼들에게 전도하라는 거구나. 
하나님이 학현이를 쓰셨구나..' 그래가지고 이제 그 동네에 교회가 세워진 거에요. 

그 동네 주민들이 교회 세우자 그러니까 
내가 그때 전셋집 살고 있었는데 
전셋집을 빼가지고, 판잣집 한 채 샀어요. 판잣집이니까 값이 싸니까요. 

판자 집 한 채 사가지고, 방을 다 헐고, 바닥 흙을 고르고 
거기에 사과 궤짝 두 개를 포개 놓고, 이제 흰 천을 가려놓고.. 그게 강대상이에요. 

흙바닥에 가마니 깔고, 사과궤짝을 강대상으로 삼아서
청계천 뚝방촌에서 처음 교회를 개척했던 때가 1971년 이에요. 
그러니까 51년 전이지요. 

1971.10.03일, 그날이 개천절이자 주일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3시에 우리가 창립예배를 드린 거예요. 

우리가 창립 예배 드릴 때 설교 본문이 이사야61:1~4절로
제가 창립 예배에 설교하면서 
'우리가 이 동네에 교회를 세우는 목표는 신앙으로 가난을 이긴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활빈교회로 지었어요. 살 활, 가난한 빈,  

'믿음으로 가난을 이기고 행복하게 살자!' 


◑교회를 개척할 때, 정한 5가지 목회 철학과 방향 

 

그런 뜻에서 교회를 세우는 선교 목표로 다섯 가지를 정했어요.

그게 변치않고 지금까지 내려옵니다. 
여전히 우리 두레 선교회의 5대 목표입니다. 
51 년간 변함없이 선교 목표가 된 거지요. 

1) 첫째가 뭐냐면, 빈민, 영세 농민, 저임금 근로자 등,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수! 

2) 둘째는, 교회가 있는 마을 주민들에게 봉사하고 
주민을 건사하고 마을을 개발하고 발전시킨다. 
주민 봉사와 지역사회 개발.. 이게 두 번째 목표였습니다.

3) 세 번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사랑으로 믿음을 실천한다'
그래서 세 번째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열매 맺는 교회가 된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사랑합시다' 그러면서, 예배당 문밖에 나서면 다 잊어버려요. 
아주 예배당 밖에 나서면 사랑 안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아요. 
말로만 '사랑합시다 - 아멘!' 하는데, 실제로 사랑의 실천이 없어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고 배우고 훈련하는 교회가 되자!
이게 세번째 목표예요. 

4) 네 번째는, 우리는 미국 교회도 아니고, 독일 교회도 아니고, 한국교회다.
한국에 맞는 전도방법, 한국에 맞는 신학, 한국에 맞는 목회를 발전시키는 교회가 되자! 

5) 다섯 번째는, 사회 정의 social justice, 정의로운 사회,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이루자! 
정의를 실천하고 평등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자! 

이게 우리가 1971.10.03일에 교회를 창립할 때에 설교내용이에요. 
지금도 내가 그 다섯 가지 내용을 가만히 읽어보면 
'야 그때 내가 서른 살 이랬는데, 서른 살 때가 지금보다 더 똑똑한 것 같네.. 
그때 어떻게 그런 걸 내가 설교했을까?' 나이 들어가면서 제가 좀 둔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까. 
그 때는 지금의 북한 같았어요. 
굶는 사람도 많고, 일자리 없는 사람도 많고.. 
또 사람들이 술 먹고 저녁에 마누라 두들겨 패고, 싸움질하고... 

뭐 빈민촌이 밤 열시쯤 되면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내가 교회 세우고 남은 돈으로
굶는 집에 밀가루 사다주고 
병든 사람들은 택시 태워가지고 병원에 가서 치료시키고, 약 사주고... 

그렇게 하다보니까, 한 팔개월 지나니까 돈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이제는 내가 굶는 거예요. 
내가 한 삼 일을 굶고, 물만 마시고, 주일날 설교한다고 서 보니까 
삼 일 굶고나니까 설교가 안 되더라고요. 

냉수 한 그릇 마시고 설교한다고 섰는데 
교인들 한 20~30명이 모여서 날 쳐다보는데 
교인들 얼굴이 밥그릇처럼 보여요. 

뭐 굶으니까 어지럽고 설교가 안 돼요. 
'아~ 설교도 먹어야 하는 거구나'

근데 내가 뭐 돈 떨어지고 했으니 어떡합니까? 
내 친구 전도사들은 '김진홍 전도사, 그러지 말고 
우리 교단 교회 중에 큰 교회, 영락교회나 새문안교회 이런데 가서 보조를 좀 신청하소. 
그리고 크리스천 기업인들 중에 상당히 큰 회사하는 분들도 찾아가서 
빈민선교에 좀 지원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서 내가 광나루 신학교 뒷산에, 그 아차산 자락에 올라가 가지고 
무덤 사이에서 내가 저녁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굶으면서 전도할 수 없는데 
내 동료들은 큰 교회에 가서 보조금을 신청하라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가 그렇게 며칠간 기도했어요. 

기도하다가 며칠 만에 내가 응답을 받았어요. 기도중에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내 고향이 경북 청송인데, 우리 외갓집이 부자였어요. 

그 외갓집 행랑채에 우리가 사는데 
우리 외갓집에 머슴이 세 명이에요. 

머슴들이 아침에 일 나갈 때, 우리 외할머니 한테 
'신호댁(외조모 호칭), 나는 오늘 못 자리에 갑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고개만 끄떡끄떡 해요. 
두 번째 머슴이 와 가지고 '신호댁, 나는 과수원에 갑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또 고개를 끄떡끄떡해요. 
그리고 참 때가 되면, 외할머니가 우리 숙모 시켜서 참 보내고, 마실 물 보내고 
점심 때가 되면 또 점심 보내고... 
또 저녁 오후에도 또 참 보내고, 우리 할머니가 외숙모하고 
머슴들을 다 뒷바라지 해주는 거예요. 

마실 물, 식사.. 다 뒷바라지 해주니까 
머슴들은 종일 일하다가, 저녁 때 들어오면서 
마을 앞에 시내에서 손발 씻고 들어와서 자면 되는거에요. 

그게 생각이 나서 '맞아, 바로 그거다!
나는 머슴이고 주인은 하나님 아닌가. 
나는 청계천 빈민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는 청계천 빈민촌에 갑니다.. 이렇게 신고만 하면 
먹는 거, 입는 것은 주인되신 하나님이 다 뒷바라지해 주실 거 아닌가!' 

내 고향에서 우리 외할머니 외갓집 일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나 혼자 마음속으로 작정하는 거에요. 

'누구한테 보조받으러 다닐 게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 신고만 분명히 하고,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겠지.. 
그래 해줘야 하나님이시지, 뭐 그것도 안 해주면 하나님도 아니지 않냐!' 
그런 생각하고, 내가 큰 교회에 보조 신청 안 하고, 거기서 자립하기로 했지요. 

동네 청년들이.. 그때는 청년들 실업자가 엄청 많았습니다. 20대 청년들이에요. 
그들이 대낮에 길에서 노는 거예요. 그 좁은 골목에서, 
저 앞에 작은 돌을 세워놓고, 멀리서 돌을 던져가지고 
그 세워놓은 돌을 맞추어 넘어뜨리면, 내기로 걸은 담배를 따는 겁니다.
그걸 '담배 치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청년들이 좁은 골목에서 담배 치기하면서 돌 던지며 하루 종일 노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지나가다가 '야 이 사람들아, 젊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대낮에 담배 치기나 하고 있냐, 
일을 해야지!' 그랬더니 

'아이고 일자리가 없어서 그러지, 일자리 있으면 뭐 이래 놀겠어요?' 그래서 

'그럼 내가 일자리 소개해 줄 테니, 일 하러 가려는가?' 그랬더니 
'아이고 일자리만 구해주시면, 평생 형님으로 모시지요.' 

그래서 그때 내가 동네 청년들하고 넝마주이를 시작했었거든요. 
자립하는 데는 그게 제일 빠르더라고요. 

그때 망태가 구백 원이에요. 집게가 40원이에요. 
940원 투자하면 넝마주이 사업자가 돼요. 

새벽기도 마치고 어깨에 망태 메고, 손에 집게 들고, 
우리 구역이 뚝섬이었어요. 그걸 넝마주이들은 그때 일본말로 '나와바리' (내 영역) 라고 했지요.
우리 나와바리가 뚝섬, 세종대, 건국대 지역이었어요. 

새벽기도마치고 나가서 공장에서 버린 박스, 쇠조각, 비닐, 빈 병
이런 거 다 망태에 주워 담아가지고, 저녁 때 그걸 다 분류해서 저울에 달아 팔면 
하루에 내 몫으로 밀가루 2포대 살 돈은 나와요. 

한 포대는 내가 먹고, 또 한 포대는 교회에서 쓰고 
즉 그 밀가루 한 포대는 매일 굶는 집에 갖다 주는 거예요. 그 참 보람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동네 청년들이 놀길래 
'일자리 얻으려면 내일 아침 6시에 우리 교회 앞으로 와라' 그랬더니 

그 다음 날 아침 6시에 동네 청년들이 왔는데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구두를 닦아서 신고, 넥타이를 매고서 왔어요. 

내가 '야 이 사람들아, 넝마 일 나갈 사람들이 
뭔 포마드를 바르고 넥타이를 메고 왔냐?' 그랬더니 

'아이구 일 나가는 첫날 그래도 인상이 좋아야지요. 
이 양복도 빌려 입고 왔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생각을 잘못 했서. 
인상은 나한테만 좋으면 되니까 
얼른 집에 가서 신발도 운동화로 갈아 신고, 작업복 입고, 머리도 다시 감고 와라'

그래서 청년들 모아가지고 뚝섬 넝마주의 센터(고물상)에 데리고 가서
망태 하나, 집게 하나씩 쥐어 주면서 
'이거 940원 어치다. 이거 일해서 벌어서 갚아라!' 그랬더니 

'이거 넝마주이 아닙니까?' 
'그렇다' 그랬더니 

'넝마주이 하는 줄 알았으면, 아예 오지도 않았지요. 
전도사님이 우리한테 사기 친 거네요.' 그러기에

'자네들 무슨 소리 하는거야?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 
넝마주이가 애국사업이야. 우리나라는 자원이 없는 나라인데 
종이, 비닐, 쇠붙이.. 버려지는 걸 주워가지고 공장에 들여보내면 이게 생산사업이야. 
맨날 먹고 놀면 몸이 병 들게 돼! 열심히 주워서 자립하면 인간다운 거야. 

열흘만 해 봐, 열흘! 열흘 해보고 못 하면 그 때 그만 둬도 돼! 
내가 점심은 사줄 테니까 한 번 해 봐!'

그렇게 해서 낮에는 같이 국밥 먹고, 저녁에 마치고 나면 삼겹살 같이 먹고... 
그래서 열흘 뒤에 '어때, 할만 하냐?' 물었더니
'예, 할만 합니다'
그래서 이제 넝마주의 단체가 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내가 자연히 그 동네 대장이 되지요. 
넝마주의 업계에서는 대장을 왕초 라고 그래요. 내가 왕초 노릇을 했는데...  


◑개척교회를 문 닫고 떠나려다가, 못 떠나게 된 사연

그러다가 내가 한 여름에 병이 들었어요. 40도 넘게 고열을 앓는 거예요. 
병원에 갔더니 감기도 아니고.. 무슨 균인지 모르겠다고 그래요. 

제가 열흘 동안 40 도 넘게 고열을 앓고 나니까, 기운이 푹 떨어졌어요. 
'아이구야, 내가 이 동네에 더 있다가는 병들어 죽겠다. 
하나님의 일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짐을 다 꾸려가지고, 신학교 기숙사로 다시 들어가고 
예배당으로 쓰던 건물은 동네 노인정으로 기증하고 끝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짐을 대충 묶어 놓았어요. 이제 용달차 부르러 나오니까 

하필 그날따라 동네 아이들이 교회 마당에 바글바글 놀고 있어요. 
걔들이 나를 보고서는 '전도사님 동화해 주세요. 찬송가 불러요.' 라며 졸랐어요.
 
'얘들아 내가 지금 그럴 정신이 없다. 지금 그럴 사정이 아니다. 너희들끼리 놀아라!' 
근데 내가 애들이 다 보는데, 그 앞에서 내가 용달차에 짐 싣고 떠나갈 수는 없는 거예요. 

'애들이 놀다가 다 흩어진 뒤에 가야 되겠다' 생각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가지고 두 시간쯤 누웠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보니까 
애들이 흩어진 게 아니라, 더 불어났어요. 

또 방으로 들어왔다가 또 나가보니까 
그날따라 애들이 흩어지지를 않네요. 

'할 수 없다. 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밤에 야반도주 해야지.. 
낮에는 도저히 내 양심에 못 떠나겠다..' 

그래서 밤이 되도록 기다리는데 
마지막으로 청계천 빈민촌 한바퀴 도는 거예요.

내가 골목 골목 들여다 보면서 
'이 사람들은 갈 데가 없어서 청계천 썩는 물 가에 이렇게 사는데 
나는 갈 데가 있다고 짐을 묶어두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자꾸 제 마음에 갈등이 생겨요. 
'내가 이 동네에서 죽자 하고 시작했는데 
떠나가면 되겠냐?' 고민하다가 

'에이, 이러다가 내가 신경쇠약 걸리겠다.
이왕 떠나기로 결심한 거, 확 떠나버려야지.
나중에 큰 목사 되어 가지고, 빈민촌 도우면 될 거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고 떠나려고 짐을 가지러 교회로 들어왔어요. 
교회 바로 앞에 애들 다섯 명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대낮에 애들 다섯 명 신발이 다 방문 앞에 흩어져 있고, 문이 닫혀있었어요. 
한 여름에 문이 닫혀 있으니까, 내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여보세요..' 하고 문을 두드리고 열어보니까 
13 살에서 3살까지 다섯 남매가 쭉 누워있어요. 

그래서 내가 방에 들어가면서 '너희가 감기 걸렸냐, 대낮에 왜 누워 있니?' 
그랬더니 제일 큰 13살 먹은 애가 일어나 앉으면서 말하기를 
'전도사님, 배고파요. 엄마가 사흘 전에 장사 나가시고 안 들어와서 
지금까지 굶고 있어요!' 그러더라고요. 

그 아버지는 술 먹고 사람을 때려가지고 감옥에 가 있고 
그 엄마가 남편이 나올 때까지 포장마차 끌고서
거기서 참새구이, 우동 이런 것을 을지로 6가에서 팔았는데,

엄마가 사흘 전에 리어카 끌고나가서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집에 엄마가 안 들어오니까 
애들이 삼 일을 굶고 방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큰 애가 일어나서 훌적이면서 '엄마 안 들어와서 사흘 굶었어요' 하는데 
'그럼 예배당에 연락을 하지, 그러면 수제비라도 같이 갈라먹을 건데...!'

그러자 동생이 같이 일어나 앉으면서 우는데요. 
그 세 살짜리 막내아들이 '엄마, 배고파!' 하고 눈에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우는데 

그 순간에 (기적적으로) 그 세 살짜리 얼굴에, 예수님의 모습이 딱 나타난 거에요. 
나는 지금까지도 모르지요. 실제 예수님인지, 내가 환상을 본 것인지... 
내가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 예수님의 얼굴을 내가 본 순간, 내 몸에 전기 같은 게 지릿하고 왔어요. 

'아~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내가 이 마을을 떠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구나! 
애들의 눈물이 있는 동네에 내가 같이 사는 걸 원하시지, 
내가 이 동네를 떠나는 걸 원치 아니하시는구나!'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얘들아 여기 잠깐 있어라.' 
그리고 교회 방에 가서 먼저 짐부터 풀어놨어요. 묶었던 짐을 풀어놓고 
그리고 가게에 가서, 옛날에 물국수 라고 있었어요.

국수 반죽을 해서, 기계에다 돌리면 국수 가락이 쭉 나와요. 
그걸 물국수 라고 그래요. 물국수 6인분 사다가 연탄불에 끓여서 
애들하고 한 그릇씩, 나도 같이 놓고 먹었어요.

'얘들아, 먹기 전에 같이 기도하자' 
얘들과 다함께 손잡고 기도하면서 
'예수님, 예수님은 이 아이들의 눈물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나는 떠나려고 짐ㅇㄹ 싸 두었는데 
예수님이 이 아이들의 눈물을 통해서 
제가 있어야 될 곳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서는 물국수 먹고, 그 엄마를 찾으러 갔지요. 
찾으러 갔더니 을지로 6가 장사하던 터에 갔더니 
사람도 없고 손수레도 없어요.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여기에 우동 장사하던 아줌마 어디간지 모르십니까? 
삼 일간 집에 안 들어와서 애들이 굶고 있어서, 찾아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사흘 전에 집에 안 들어왔으면, 사흘 전에 후리가리가 있었는데요..
경찰서에 잡혀 있는가봐요..' 그래요. 

'후리가리'라는 것은 노점상하는 사람들을 
경찰이 와서 양쪽 길을 딱 막고 전부 잡아가서 
즉결재판에 넘기는 것을 '후리가리'라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동대문 경찰서에 찾아 갔지요. 
찾아갔더니 유치장에 엄마가 갇혀 있는데, 즉결재판에서 벌금을 1만2천원 받았어요. 

근데 수중에 6천 원은 있어가지고 벌금 내고, 
나머지 6천원은 없어가지고, 하루 유치장 사는데, 5백원씩 깎아요. 그러니 열이틀 살아야 되는 거에요. 
당직 경찰관이 바뀔 때마다 '경찰 아저씨, 우리 동네 연락 좀 해주십시오. 
내가 열이틀 살고 나가면 애들 굶어 죽소. 
우리 동네에 김진홍 전도사라고 있으니, 연락만 해주면 애들을 돌봐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직 경찰관들이 '거기에 전화 있으면 걸어주지' 
애들 엄마는 '그 동네는 전화가 없네요' 

경찰관이 '그럼 내가 가서 직접 연락하라는 거요?'
그러고서는 아무도 연락을 안 해줬어요. 

당직이 바뀔 때마다 그 아줌마가 울면서 부탁해도, 아무도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내가 그집 애들을 데리고 갔더니, 애엄마는 그 쇠창살을 붙들고 자기 이마를 거기에 찍으면서 
'아이고 내 새끼들아, 어미 애비 잘못 만나서 굶었지? 
차라리 굶어 죽어버리면 편할 끼다..' 하고 통곡을 하는데 

애들은 '엄마~' 부르면서 울고, 
엄마는 쇠창살에 머리 찍으면서 울고..
이거 뭐 경찰서 유치장이 난장판이 되어버린 거죠.
그러니 경찰관은 나한테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그때 내가 동대문 경찰서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동네를 떠나려고 짐을 묶고 했던 거 회개합니다. 
예수님이 얘들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자식 굶기는 어머니의 한을, 복음의 능력으로 풀어주십시오. 그 일에 내 인생을 걸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잠깐 기다리십시오. 애들 데리고 동네에 돌아가서 6천원을 구했어요. 
그 돈을 구해가지고 범칙금을 내고, 그 엄마를 데리고 나왔지요. 

나는 그때 어린아이들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내가 깨달은 거예요. 
여러분, 시골의 어떤 교회는, 교인이 다섯 명, 열 명 있지요. 

다섯 명, 열 명 교회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몇만 명 교회인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숫자를 헤아리겠습니까? 

예수님은 고작 제자가 12명이에요. 
우리는 교인이 2천 명이 되어도 적다 그러런데, 

네 어떤 교회는 성도들이 몇만 명 되고, 월드비전 외치고 
'오늘은 서울을, 내일은 세계로!' 뭐 이렇게 거창하게 나오지만 

우리 예수님이 관심 가지는 것은 한 영혼, 한 영혼이에요. 
어린아이 한 명, 한 명의 눈물,
자식 굶기는 어머니의 탄식과 아픔,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는거 아니겠습니까!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되자,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으로 두레 마을을 옮기다

여러분, 내가 그래서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될 때
그 사람들 중에 지원자들을 뽑아가지고 
경기도 화성군 간척지로 옮겨갔는데 
간척지에서 이제 소금 땅에 농사지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거 뭐 농사 안 지어본 사람들이 너무 농사 일이 힘들어서 
양돈 단지 하다가.. 뭐 돼지 키우는 기술이 있습니까.. 
그때 하필 돼지고기 파동이 왔어요. 

파동이 와가지고 돼지고기 한 근에 칠백원은 받아야 사료비가 나오는데 
이백 원에도 안 팔리는 거예요. 파동이 오면 값이 뚝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내 말 듣고 돼지 먹이던 농민들이 
막 교회를 원망하는 거예요. 
'김진홍 목사 말 듣다가 집구석 망했다. 
김진홍 목사는 꼭 생기기도 돼지같이 생겨가지고 
맨날 돼지 타령하는 말 듣고 따라갔다가.. 우리 다 망했다'

내가 그 말 듣고, 하도 민망해서 
'너무하네요. 내가 잘 생기지는 못했지만, 돼지한테 비교합니까?' 그랬더니 

'죄송합니다마는 실제는 돼지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우리가 화가 나서 그러는 거지 뭐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래서 내가 도저히 힘들어서 금식을 했어요. 
금식하면서 '하나님, 내가 어째야 좋겟습니까, 다 싸짊어지고 떠날까요?'
아니면 여기 (화성 남양만에) 계속 있을까요?'

금식 다섯째 날에 받은 말씀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로마서8:13절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내가 응답받은 거지요. 

롬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내가 이 말씀 읽고서 '어? 성경에도 빚쟁이에 대한 말씀이 있구나!' 하고 눈이 번쩍 뜨였지요. 
'그러므로 김진홍 목사야, 네가 빚진 목사라야 돼!'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회한다 그러면서 
성령님 의지하고, 기도로 응답받고, 말씀 붙들고 나아가지 않고 
농민들 소득증대 하는 거, 돼지단지 소단지 소득 증대 그거에 매달리다가 
빚더미에 앉은 것을 내가 회개 한 거예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게 목회가 아니다'
그 다음에 뭐라 그랬습니까?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세상적으로, 육적으로, 물질 앞세우고 목회해 봐라 
너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롬8:13

'육신을 죽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뒤로 하고 
목회를 영적으로 해라! 

성령님 의지하고, 말씀 붙들고 기도 하고, 교인들과 합심기도 하고, 
부르짖어 응답받고 그렇게 해야 살 길이 열린다...' 

이 말씀을 읽고 제가 용기를 얻어 가지고 
'영적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그리고 이제 주일날 교인들 앞에서 
'내가 육신대로 살다가 교회가 어려워졌는데, 영적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가 '천부여 의지없어서' 회개하면서 부른 거예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막 울면서 불렀어요. 
강대상에서 나도 울고, 교인들도 울고... 

'여러분 손들고, 지금 이 시간, 한 번 같이 부르겠습니다!'

그렇게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찬송 부르고 예배를 끝냈는데 
그 다음 날부터 역사가 있더라고요. 

빚진 거 하나 하나 하나, 하나님이 갚게 해주시고 
교인들이 힘을 내서 교회가 부흥되고 
얼마나 우리가 그 뒤에 은혜를 받았는지 
여러분, 하나님 의지하고 빈손 들고 나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약하고, 우리는 부족하고,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낙심해서 갈팡질팡합니다. 
성령님 의지하고, 빈손 들고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너희는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다는 말씀 붙잡고 
부르짖어 응답 받게 하옵시고, 영으로 육신을 이기고 승리하는 
귀한 사모님들, 귀한 교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