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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9장, 새언약의 특징

LNCK 2022. 8. 13. 11:38

◈새언약의 특징           히9장           여러 설교 정리

 

히브리서에는 5대 논증과 5대 경고가 나오는데,   -클릭-

본문 히9장은, 그 중 네번째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예수님"을 비교해서,    *롬8~10장

 

신약에 예수님이 가져오신 '신약의 율법'(즉 새언약)의 우월성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서의 수신자들이, 구약의 유대교로 되돌아 가서는 안 된다는 논지를 설교하는데요...

 

 

▲서론 / 히브리서의 신학적 위상     주1) 강추

중요한 내용이나, 성경 지식, 신학적 지식에 그칠 수 있어서, 각주로 돌립니다.

 

◑새언약의 핵심은 "마음의 변화, 양심의 변화"

 

새언약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가장 쉽게 말하면, 신약에 시작된 예수님의 복음이 '새언약'입니다. 

 

그럼 새언약이 무엇인가? 하는 그 실체를 우리가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과 대비되는 새언약, 신약의 복음의 가장 뚜렷한 특징 두 가지입니다.

 

▲1. 새언약의 특징은, 옛 언약과 비교 또는 대비되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회개>입니다.

본문에 '회개'라는 말은 직설적으로 안 나오지만, 행간에 깔려 있습니다. 특히 13~14절에요.

 

-구약의 율법은, 겉을 깨끗하게 하고, 겉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면,  (소와 양과 짐승의 피로)

-신약의 율법인 새언약은, 속마음,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그 일은, 다시 말하면 <회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 서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그리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히6:1, 6:6, 12:17

신약성경 전체를 볼 때,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언약의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그 일이 정말 내게 효력을 이루려면.. 내가 성령의 역사로 '회개'할 때,

내가 새언약의 수혜자가 받는 혜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9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구약 시대의 성막과 제사로는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새언약과 대조됩니다.

신약의 율법(새언약)은.. 그 특징이 사람의 내면=양심=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복음의 첫마디 - 회개 (강추)

 

구약에서 새언약을 예언하는 구절들을 보십시오.

겔36:25~27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를 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거죠.

 

이것을 다른 말로, 신약의 복음, 새언약의 복음은 신앙의 내면화, 내면적 신앙이라고 말하는데,

즉 겉으로 살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미움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신앙의 내면화는..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고마우신 피를 믿을 때.. 내 속에 성령의 감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내면의 변화, 속사람의 변화인데..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히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내면적 신앙을 나타낸 구절인데요, 이는 다름 아닌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새언약의 모든 것은 자기에게 그저 또 하나의 '성경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피의 능력, 그 피의 효력은 자기가 마음으로 믿는데, 

자기는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 나 스스로 정확히 모르겠다.. 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회개가 안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회개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분명히 압니다.

자기가 회개했다고요. 그런 확신이 들지 않고 아리송한 것은, 아직 회개가 안 된 것입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3절은 구약의 제사 방식을 통한 속죄를 설명했는데, 그건 사람의 겉(육체)을 깨끗하게 하는 방식이었죠.

14절은 신약의 새언약을 통한 속죄를 설명하는데,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했어요.

 

이것은 지식적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을 때, 내 심령에 일어나는 감격과 감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이죠.

 

▲2. 새언약의 두 번째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완성되는 언약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간헐적으로 임하셨고, 영구히 임하지 않으셨습니다. 행2장의 오순절에 영구히 임하셨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루어주신 새언약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완성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신약성도가, 하나님의 새언약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된 것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나,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히8장, 새언약의 놀라운 은혜  click  에서 대강 설명했습니다.

 

 

◑적용

 

예수님을 믿어도 바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가 긴 것 같아도 핵심은 하나입니다. 당시 배교의 위기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구원해 내는 강력한 십자가 복음 메시지입니다.

 

보혈의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14절에서 분명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회개를 통해)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보혈의 능력은 한 마디로 말하면, 회개를 통해 자기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피흘리신 것을 생각하면..

성령의 역사로 회개가 일어나는 거죠.

 

우리 삶의 문제가 많고 복잡하지만 근본 뿌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생사화복의 주관자인데, 하나님을 떠난 사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고 사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죄사함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원인은 죄입니다.

그것을 창세기 3장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인간이 죄를 짓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복된 삶의 시작입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회개를 통해,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게 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14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기 전에 이미 구약에

짐승의 피를 흘리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죄 문제 해결책이었습니다.

 

왜 피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영적 생명을 잃어 버리게 되는데,

생명을 다시 회복하려면 생명의 상징인 피가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22절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제사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9절에 보면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도 짐승의 피 제사로는 양심이 완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절 ‘..그 장막 제의를 따라 예물과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의식 집례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내면 양심의 변화를 주지 못함, 구약에 신자들이 회개했더라도, 일시적인 뉘우침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주 보혈의 능력으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회개를 통해) 씻음을 받고

죽은 행실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바로 믿는지는 바로 이것을 점검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은 양심이 깨끗해졌습니까?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두려움이 없이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십니까?

 

9절에 보면 구약의 짐승의 피 제사로는 양심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짐승의 피로는, 내면의 변화, 즉 신약의 회개를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혈의 능력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괴로워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구원의 감동과 기쁨이 충만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그 회개를, 하나님이 아직 받아주시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여전히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를 통과한 사람들은,  놀라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주셨습니다. 그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는데, 그 효력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겠지요.

 

그런데도 예배드리러 올 때나 갈 때 마음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십자가와 보혈과 속죄를 교리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눈으로 보는 것이고 예수님의 보혈은 지식일 뿐일 때, 이렇게 됩니다.

 

지식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모태신앙인 사람은 어려서부터 십자가 복음을 듣고 자랐습니다. 다 압니다.

그런데 감격이 없습니다. 보혈의 능력이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한 때, 진정한 회개를 통해 새언약의 복음과 용서를 체험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격이 식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가슴으로 느꼈던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너무 감격해서 울었고, 밤새 기도했고, 가슴이 뜨거워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도 했었지만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 버리고 덤덤해져 버렸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깨달음에서 그쳤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것으로는 아무리 큰 은혜도 1년 동안 계속 감동적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1만 달라트 탕감받은 종이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10년 20년 30년 지나 보세요.

아무리 큰 은혜받은 감동도 세월이 지나면 식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혈의 능력이 항상 충만하고 항상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보혈은 항상 새로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청년 시절 노방전도하던 마포삼열 목사님에게 돌을 던져

턱을 깨뜨렸던 사람이었다가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여 목사가 된 분입니다.

 

그가 제주도에 가서 목회를 하였는데,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그 편지를 받고 그 자리에 쓰러져서

(사역지를 떠나려던 마음을)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이야기입니다. 이기풍 목사에게 마포삼열 선교사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우리에게 예수님은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자리에 실제로 서 본다면, 실제 지옥을 바라본다면,

거기서 구원받은 것을 실제 경험한다면, 십자가에서 피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예배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감사 감사, “피!” “보혈!” 하면 울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실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분으로 믿어지면 십자가 사건은 항상 현재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지금 흘리시는 보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보혈과 짐승의 피와 다른 것입니다.

짐승의 피는 죽은 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살아있는 피입니다.

짐승은 흘리고 죽었으나 예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면

십자가도 보혈도 생생한 감동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십자가의 보혈은 단지 죄 용서뿐 아니라

우리를 죽은 행실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게 만듭니다.

 

28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때는 죄인인 사람의 몸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이” 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두 번째로는 죄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 ‘죄와 상관없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신 것은 단지 지은 죄만 깨끗케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죄성이 다 사라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성 때문에 탄식하였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런 삶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요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서커스단의 사자는 야성을 가진 진짜 사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조련사에게 훈련을 받고나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재주도 부리고

심지어 그 사자를 만지기도 합니다. 그 때 이 사자는 조련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자는 여전히 살육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으르렁거릴 수 있지만,

조련사의 발아래 암전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조련사가 없으면 그 사자에게 다가서면 즉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마귀의 역사에서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도 죄의 종노릇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 모르게 더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마음이 더러운 생각으로

날마다 들끓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못 고칩니까?

 

2천년 전 십자가만 바라보지 말고,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 육신 안에 임재하셔서 살아있는 주님과의 교제를 갖게 해주신 것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절별 해석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저자는 첫 언약 곧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기 위해 첫언약에 대해 먼저 진술하고 있다.

첫 언약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방법은 임시적인 것이다(10절).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본절에서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쪽에 있던 '향단'(출30:1-10)은 언급되지 않는다.

 

‘등대’ 이것은 성소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가운데에 중심 줄기를 기준으로

양편에 세 개의 가지가 나와 있고

7개의 등잔과 22개의 꽃모양의 받침대가 있다(출25:31-39, 27:20,21).

 

‘상과 진설병’ '상'은 조각목, 즉 아카시아 수종의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진설병을 놓아두는 곳이다.

'상과 진설병'은 성소의 북쪽에 위치하며 12개의 진설병이 각각 6개씩 두 줄로 놓여 있고

안식일마다 교환되었다(레 24:8).이 떡은 무교병이었다.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향로는 본래 성소에 속한 기물로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앞에 있었다(출 30:6, 40:26).

그런데 본절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기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향로'와 지성소와의 관계에서 해결할 수 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곧 속죄일에, 향을 피운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는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 앞에 분향하여 그 연기로 속죄소를 가리웠다(레 16:12, 13).

향의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와 속죄소를 가리워

범죄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면하도록 하였다(출 20:18, 19).

 

그래서 향로는 항상 지성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소에 속한 기물로 볼 수 있다.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이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던 양식임을

알리기 위한 증거였다(출 16:32-34).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것은 아론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에서 제사장 직분을 위해서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은 사람임을 알리기 위한 증거였다(민17:1-11).

 

‘언약의 비석들’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의 돌판이며, 그 내용은 십계명이다.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저자는 70인역을 따라 언약궤 뚜껑을 '속죄소'라고 부르고 있다(출25:17, 21).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속죄제의 피를 속죄소에 뿌렸다(레 16:14,15).

속죄소인 언약궤의 뚜껑에는 한쌍의 그룹(cherubim)이 있었다.

이 그룹은 언약궤의 뚜껑 위에서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 대하는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수호하는 천사들이다(겔 10:1-8, 계 4:6-8).

 

지금 저자는, 옛 언약과의 비교를 통해 새 언약의 우월성과 완전성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첫 장막'은 '성소'를 가리킨다.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섬기는 예(禮)는 세가지였다.

1) 아침마다 금향단에 분향하였다(출30:7-8).

2) 저녁마다 등대에 불을 밝혔다(출 27:20, 21).

3)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열 두개의 진설병을 교체하였다(레 24:8, 9).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둘째 장막'은 '지성소'를 가리킨다.

'한 번'은 횟수로 한 번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루씩'으로 보는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최소한 두 번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이다(레 16:12,15).

 

한 번은 대제사장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들어갔다.

이렇게 두번 외에도 수송아지의 피를 뿌리기 위해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으며(레 16:14),

랍비 전승에 의하면 앞서 언급한 세 번의 경우 외에도

번제를 드리고 나서 놓아둔 기구와 불 담는 그릇을 제자리에 갖다 놓기 위해서 들어갔다.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매개체로서 ''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후에 언급될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저자는 성령께서 옛 언약의 성막이 주는 의미를 가르쳐 주신다고 진술한다.

옛 언약의 성막이 주는 의미는,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7절에서 언급한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제의적인 규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장막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상징이다.

'현재까지’

본 절은 당시의 성막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대조로

성막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함을 시사한다. 이 두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구약 시대의 성막과 제사로는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새언약과 대조된다.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옛 언약의 제의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양심이 깨끗해지고(11-14절)

성소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10:19,20) 새 언약이 성취될 때까지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새언약이 성취됨으로 그것의 지위와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1-10절에 언급된 불완전하고 제한된

첫 언약으로부터 새 언약으로 주제가 바뀜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장래 좋은 일'은 옛언약이 제공해주지 못한 온전한 죄의 씻음과

하나님께로 자유롭게 나아가게 해주는 새 언약의 구속을 의미한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아'('통해서')는 도구격으로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혹자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천국이라고 주장하나(Bruce)

'그리스도 자신의 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Calvin, Morris,Westcott).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서 새언약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24절, 10:20).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는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으며

송아지는 대제사장 자신과 가족을 위한 희생 제물이었으나

그 효력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기에 매년 속죄일마다 희생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온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희생 제사는 영원하며 완전한 것이었다.

 

'단번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 팍스'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사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매년 반복되는 옛 언약의 구속 사역과는 달리 반복의 가능성이나 필요성이 없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시사한다(Lane).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염소와 황소의 피'는 일반 제사에 드려진 제물이었음은 물론 속죄일에 대제사장과 가족,

그리고 백성의 속죄를 위한 피였으며 (12절),

'암송아지의 재'는 정결케 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으며,

'재'는 부정한 것을 깨끗게 하는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민19:1-10).

 

이러한 희생 제물의 피와 재는 효과가 있는 것이나

단지 외형적이며 상징적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에 불과하였다.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본문은 새 언약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 사역의 효과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옛 언약의 제사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옛 언약의 제사가 성취할 수 없는 것

즉 양심을 깨끗이 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막던 죄를 제거하는 구속 사역을 성취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 언약의 목적이다.

 

새 언약을 통해서 양심이 깨끗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하에서 불완전한 속죄로 인하여

제대로 섬길 수 없었던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순절날 내리신 성령으로 인해, 성령이 내주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새언약이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첫 언약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첫 언약하에서 외형적인 면만 속죄한 불완전한 요소를 해결하여

온전한 속죄를 이루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해결하여 양심까지 깨끗하게 속죄시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기업을 얻게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녀들에게 주어질 '기업'은 죽은 사람의 유언에 따라 얻는 재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원한 구원을 시사한다(1:14, 5:9).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언약. (2) 유언.

'디아데케'는 신약성경에서 보통 '언약'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유언'을 의미한다.

유언은 언약과는 달리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죽음의 필요성은 언약의 절차에서 비롯된다.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저자는 본절에서 구약 시대에 언약 체결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다(출 24:3-8).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구약시대에 언약을 맺는 과정은 세가지 단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중 본절은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명을 백성들에게 선포함으로

언약을 맺기 위한 항목과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언약의 조건들을 선포하면 백성들은 받아들일는지에 대한 가부(可否)를 결정해야만 한다.

조건의 선포 후에 두번째 과정은 언약의 내용들을 책에 기록하는 것이나

본절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본문은 언약 체결의 세번째 과정이다. 피뿌림의 과정을 통해서 언약의 비준이 결정된다.

 

출 24장에는 피를 백성에게 뿌렸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으나

'물과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였다'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물과 양털 그리고 우슬초'는 대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자나(민 19:1-22)

문둥병자(레 14:4-6, 49-51)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구약성경에서 '책'에 뿌렸다는 사실 역시 나타나지 않으나

이것은 사람의 손이 닿은 책이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정결례를 행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본문은 출 24:8(LXX)의 인용이다.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본절은 후대에 이루어진 장막의 정결 과정과 연결된다.

장막의 봉헌은 첫 언약과의 연속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첫 언약이 보다 구체적이고 제도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는 장막과 모든 기구에 기름만 바른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피를 뿌렸던 것처럼 장막과 기구에도 피를 뿌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대부분의 경우 희생 제물이 피를 통해서 정결케 되었다.

 

첫 언약에서는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고 생명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온전한 사함과 생명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피흘림은 죄사함을 얻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다.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저자는 본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그 모형인 '지상에 있는 것들'을 비교하여

희생 제물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를 대조시키고 있다.

 

한편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 허락하신 첫언약과 장막을 통한 희생 제사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다.

이러한 모형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라 정결케 하는 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2절).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더럽혀진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하늘 성소에 들어갈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해석중 후자가 타당하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지상에 있는 것들은 피로써 정결케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외형적인 정결케 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더 좋은 제물' 즉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영적이고 내적인 양심의 정결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엡 2:22).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통해 들어가신 곳은 지상의 성소가 아니다.

지상의 성소는 단지 외형적(外形的)인 것만을 속죄하는 불완전한 것으로

하늘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지상 성소의 실체인 하늘이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거하는 성소인 참하늘에 들어가신 것은

이미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들처럼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위함이었다.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일년에 한번씩 속죄일에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레 16장).

이러한 속죄 행위는 매년 반복되었으며 이 속죄 행위를 위해 매년 다른희생 제물의 피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구속 사역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다.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옛언약의 대제사장처럼 자주 자신을 드렸다면 여러 번 죽음을 당하셔야 했을 것이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본문은 앞서 언급한 사정에 대한 대답이다. 저자는 그 대답으로 '단번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단번에'는 앞서 언급한 '자주'와 대조되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죄를 완전히 제거하셨음을 나타낸다.

 

한편 '세상 끝'은 구속사역의 성취의 때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구속 사역을 성취함으로써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을 도래케 하셨다.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본절은 사 53:12(LXX)에 나타난 주의 종의 사역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앞서 언급한 모든 인생에게 적용된 죽음의 원리가 적용되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으셨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 인생의 최종성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목적 또한 최종적(最終的)인 것이다.

그가 자신을 '단번에' 드린 것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온전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본절은 구약의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 연결된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백성들은 근심 가운데 대제사장이 직무를 마치고 지성소에서 나오기를 밖에서 기다린다.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왔을때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대신 드린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가(24)

자신을 기대하는 자를 위하여 두번째 나타나시는'파루시아'('강림')와 대비된다.

 

옛 언약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제의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초림과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백성들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시고

하나님 존전에서중보 사역을 행하시며(24절), 또한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제를 드리고

성소에서 나올 때 밖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받으셨음을 확신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그리스도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들은 구원의 상속자로서(1:14, 2, 3, 10, 5:9)

영원한 기업을 누리며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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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떻게 구원이 됐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한 책이 무엇이냐? 의외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가 신약성경 맨 뒤에 있기 때문에, 그 위상에 대하여 과소평가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의 제사와 빗대어서 설명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백성의 죄 사함을 위하여 제사를 드렸듯이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더 나은 제사를 드리셨다’ 히7:27, 9:12, 10:10

이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란 무엇입니까. 제사란 죄인의 죄를 제물에 전가하는 개념이에요.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러므로 원래는 죄인이 죽어야 되지만

죄인의 죄를 양이나 염소에 전가해서

양이나 염소가 대신 죽음으로 죄인이 사함을 얻는다,

이것이 제사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대속’(대신 속죄)으로써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보혈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가장 많이 언급한 책이 히브리서입니다.   

 

로마서는 예수님의 보혈을 두 번 언급하고,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 골로새서도 각각 두  번씩 언급하는데

(그 외 바울서신에는 더 이상 '예수님의 피'에 대한 언급이 안 나옵니다.)

히브리서는 피에 대한 언급이 19번이나 나옵니다.     주1)

 

구약시대에 양이나 염소의 피를 뿌려 죄 사함을 얻었을 시

예수께서 당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

 

예수님의 피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는데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피에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는다,

이모든 설명이 히브리서에 담겨 있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이런 모든 찬송가 가사가 히브리서에서 따왔다는 사실이에요.

 

그럼 다른 책에는 예수님의 죽음 (설교의 key word)이 어떻게 구원이 되는지

설명이 없는가요? 당연히 있지요.

 

로마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화목제물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화목제물.

누가 화목했다는 얘기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라는 담이 있어서

사람이 하나님에게 원수가 되었었는데,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써

이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죄인이 화목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 자신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남들이 이후에 뭐라고 해석했든 간에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셨느냐... 이것이 중요한데

 

예수님이 하신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말씀은

마지막 만찬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말로 하신 것이 아니고

성찬식이라는 구체적인 예식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것을 먹으라 이것은 나의 살이니 너희를 위한 나의 살이라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새언약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니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한 죽음이라든가 순교적인 죽음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새 언약을 맺기 위한 죽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여러 번 설명하셨어요.

이것을 주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말씀이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니라’

 

로마서에서는 ‘화목제물’이라는 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했는데

예수님은 ‘대속물’이라는 말로 당신의 죽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이 단락 출처-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피' ..

히브리서에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히브리서가, 신약성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의 복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유독 '(예수님, 어린양의) 피'를 여러 번 언급하는 이유는

이 책이, 구약의 피의 제사와 비교해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 세 곳 나오지만, 사실 공통된 한 구절)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14:24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행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그외 고전10:16, 11:25, 엡1:7, 2:13, 골1:14, 1:20,  

 


히9:7 '
오직 둘째 장막(지성소)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브리서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
 

히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계시록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