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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0장, 새언약을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

LNCK 2022. 8. 14. 06:54

◈새언약을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           히10장           여러 설교 정리

 

히브리서는 5대 논증을 하면서, 각 논증마다 한 번씩 5번의 경고를 하고 있는데,    -클릭-

히8:6~10장은 4번째 논증으로 "구약의 율법과 vs 새언약을 주신 예수님"을 논증하면서,

그 말미에, 새언약을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히10:26~31

 

앞서 9장의 해석에서, 새언약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특징 2가지는

'회개'와 '성령'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중요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1) 회개

구약의 옛언약은 돌비에 십계명을 새겼으나 

신약의 새언약은 그것을 마음, 심비, 양심에 새긴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언약)을 어떻게 사람의 마음과 양심에 새길 수 있나요?

그것은 회개를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새언약으로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 예언도 있었는데, *겔11:19, 36:26

어떻게 신자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요? 그것은 바로  회개를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에스겔과 예레미야는 새언약을 예언을 했고,  *렘31:31-34, 겔36:25~27, 11:19

예수님은 새언약을 실제로 이 땅에 가져오셨는데,

 

그래서 세례요한, 예수님, 사도 베드로(행2장에서) 외치신 신약의 새언약의 복음의

제 일성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였습니다. 그래야 새언약의 수혜자가 된다는 거죠.

사복음서의 표현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2:38

 

2) 성령

구약의 옛 언약,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의 겉은 깨끗게 할 수 있었으나

 

신약의 새 언약, 예수님이 단번에 피로 드리신 제사는, 죄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자원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억지로 마지 못해 하나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헌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간헐적으론 성령의 인도를 받은 적이 있음

아직 그들에게 성령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예수님을 대신하실 성령님을, 행2장의 오순절에 그들의 심령 속에 보내주셨는데,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인격적으로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언약의 여러 특징들 중에 가장 중대한 두 번째 특징입니다.

 

(과거에 한국교회에 '성령의 역사'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1년 내내 '말씀, 말씀'만 외치던 시절이 한 때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옛 언약'적인 특징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새언약'을 예언한 대표적 몇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겔36:25~27,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자원해서)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위 말씀은 새언약은, 

우리 속에 영이 있는데, 거기에 주님이 새 영, 곧 성령님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목적은, 그래서 우리가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새언약이 성취된 때는, 

예수님이 오시고, 이어서 성령님이 오신 후부터 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속에 내주하시게 되었는데,

이것은 첫 언약, 곧 시내산 언약의 갱신이자, 더 진보된 형태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가 훨씬 더 쉽게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신 것은

짐승을 잡아 죽여서 제사드리던 옛 언약을 폐하시고 (이게 본문 히9~10장에 자세히 나오죠)

영단번에 우리 죄를 속죄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본 제자들이 “이제는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나 보다.

가서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자” 할 때, 예수님께서 “아직 아니야”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행1:4~8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고후1:22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누구나 마음에 하나님께서 임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히8:11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기 이웃과 자기 동족을 가르치려고,

주님을 알라고 말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 성령의 시대에 복음이 세상에 편만하게 증거될 것을 예언한 것이죠.(합2:14등)

 

이제 신약의 새언약 아래의 성도들은  *진정 회개하고 거듭한 신자를 뜻함

하나님께서 마음에 율법을 새겨주셨기에, 또 성령의 인도를 받기에

이제는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괴로운 것입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보증)을 받았느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이 사실이 너무나 귀한 은혜요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귀하게 여기고 집문서나 주식이나 증권, 패물을 귀하게 여기시지요.

건강도 귀하고, 명예도 귀하고 성공도 귀하지요,

그러나 진짜 귀한 보물은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입니다.

 

 

◑네 번째 경고   

 

1) 첫번째 경고는, 천사(=선지자)들을 통해 들은 말씀도 중대한데, 

아들을 통해 친히 말씀하신 것은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라' 였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히2:1~4

 

2) 두번째 경고는, 모세보다 크신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모세 때 광야에서 거역하던 자들이, 결국 안식(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너희 중에도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어도, 못 들어갈 자들이 있을 것이다'  3:7~4:2

 

3) 세번째 경고는, 대제사장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6:4~8

 

예수님을 살아생전에 보고, 듣고, 믿은 자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고 배도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약 35년 전에, *히브리서는 AD 65년 경

너희도 한 번 예수님을 믿고서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배도할)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4) 네번째 경고는, 오늘 본문인데,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이 가져오신 새언약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즉 언약을 어긴 자도 죽었거든

하물며 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님과의 언약을 어긴 자가, 얼마나 큰 형벌을 받겠는가?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군대의 예를 들면, 중대장의 명령을 어긴 군인도 벌을 받겠지만

중대장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합참의장의 명령을 어긴 자는.. 얼마나 더 큰 형벌을 받겠느냐는 거죠.

‘하물며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29

 

경제 원리에, '리스크가 크면 이윤이 크다' 이런 말이 있죠.

반대로 은행 예금은 '리스크가 작으니 이윤도 작은' 거죠.

 

비슷하게 새언약을 통해 받은 은혜와 구원의 혜택이, 구약의 율법보다 어마무시하게 크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새언약을 어겨서 받을 형벌은, 구약의 율법을 어겨서 받을 형벌보다 훨씬 더 크다는 논지죠.

당연합니다. 혜택이 클수록 리스크(형벌)가 큰 것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배교 행위를, 본문에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1)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29

'짓밟고'의 헬라어 '카타파테사스'는 모욕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배교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당시 배교자들은, 유대교 회당 모임에서 사람들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께 대한 모욕적인 언사를 공개적으로 발설함으로써.. 자신의 배교를 선언했다고 합니다.

 

2)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29

'언약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 곧 십자가상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것은, 

배교자들이 그러한 그리스도의 피를 가볍게 여기고 사소한 것으로 이해하며

보통 사람의 죽음과 동일하게 여겼다는 뜻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3)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29

앞서 새언약의 가장 큰 특징 두 가지는, 회개와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그를 회개로 인도하며,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그가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준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줍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배교했다는 것은,

성령님의 존재와 내주와 역사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욕되게 한 것입니다.

 

이런 배도자들은, 사실은 처음에 입교할 때, 정확하게 회개하고 입교한 것이 아니고,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입교했거나, 지적 동의로 입교했거나..

마치 돌밭, 가시밭과 같이.. 한 번 은혜를 받기는 했느나.. 그 속에 믿음의 뿌리가 없어서

결국 넘어지고 마는.. 연약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배교, 배도> 관련글 모음

 

△1960년대에 미국에서 히피 운동이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청년들이 상당수 히피운동에 휩쓸리면서, 교회에 청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존 교회들이 타격을 입었는데,

그 중에 타격을 입지 않고, 여전히 교회가 끄떡 없이 건재한 곳들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성령운동하던 교회, 은사주의 교회, 오순절파 교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세기 초에 시작된 미국의 오순절 운동이,

그동안 기성 교회로부터 많은 시달림과 무시를 당해오다가,

기존 교단 교회들이, 오순절교회나 은사주의 교회를 새롭게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히피 운동이 유행해도, 성령운동 하는 교회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행2:17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말세는 배도가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딤후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성경은 말세에, 이런 배도적 현상들이 판을 치는 시대가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라고 약속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말세는 '배도의 세력' vs '성령의 세력'이 거대한 용호상박

한 판 승부가 펼쳐지는 시대인 것입니다.

 

말세의 배도를 이기는 길은... 행1:8, 2:17절 말씀처럼,

오직 성령이 임하여, 능력을 받고서... 모든 육체가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며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절별 해석  ......................................................................................................................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8:3-5, 23-26과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본문에서 `율법'과 '장차오는 좋은 일'의 대조를 통해 율법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율법'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제사 제도를 포함한 모든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저자는 본절에서 율법을 두가지로 정의한다.

1) 그림자

2) 참 형상이 아님.

 

율법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초월적인 실체 자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한편 율법의 대조 개념인 '장차 오는 좋은 일'은 `톤 프라그마톤'('그러한 실체들')과 동일한 의미로

새 언약으로 이루어진 새 시대의 축복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서(9:11)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곧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의미하며

동시에 불완전한 옛언약이 성취할 수 없는 완전함을 뜻한다.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본절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논증이다.

본절의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신 하마르티온'은 문자적으로 '양심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율법이 정결케 할 수 없었던 내면적인 죄를 가리킨다.

 

율법에 의해서 행해진 희생 제사만으로는 외적인 죄만을 정결케 할 뿐

내적인 죄인 양심의 죄는 단번에 완전히 정결케 할 수 없었다(9:9).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저자는 옛 언약하에서의 제사의 역할이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새 언약에서 약속을(8:12) 대조시켜서

반복적인 제사와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번에 드린 제사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나니'의 헬라어 '아남네시스'(*)는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면서 당신을 '기념하라'하실 때에도 사용되었다(눅 22:19, 고전 11, 24, 25).

 

두 언약에 사용된 `아남네시스'는 옛 언약의 제사가 죄를 기억하고 그것을 용서받기 위해

매년 드려져야 하는 반면에,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더 이상 죄를

기억지 아니하심을(렘31:34) 비교하여 옛 언약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처럼 속죄일에 드려진 동물의 희생 제사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인 죄를 깨끗이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나 양심의 죄까지 깨끗게 할 수는 없었다.

 

저자는 본절에서 희생 제물의 피를 통해서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불충분한 것임을 드러냄으로

죄를 완전히 제거해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피를 강조하고 있다.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본문은 시 40:6-8(시 39:6-9, LXX)의 인용이다.

시편은 본래 다윗의 시였으나 저자는 본문을 인용하면서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여

다윗에 관한 내용이 아닌 그의 자손 즉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인용을 통해서 옛 언약하에서 드렸던 희생제물보다

새 언약하에서 드려진 그리스도가 더 탁월함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성육신의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 즉 성육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다음에 언급되는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와 연관된다. 저자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다음 인용문들의 화자(話者)가 다윗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저자는 본문에서 옛 언약을 나타내는 네 가지 종류의 제사를 언급하고 있다.

 

'제사'(제바흐)는 종류에 상관없이 동물 희생 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화목제와 연관되며

'예물'은, 일반적으로 제사를 가리키나 레위기에서는 곡물 제사 즉 소제와 연관되어 사용된다.

 

그래서 제사(화목자), 예물(소제), 번제, 속죄제

이러한 네 가지의 제사는 레위기에 묘사된 주요한 종류의 제사들을 모두 내포하는 것으로

옛언약을 대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불만족은 제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단순히 의식적인 행위만을 반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불만족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새 언약을 맺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삼상 15:22, 시40:6, 50:8-10, 51:16-17, 사 1:10-13, 66:2-4, 렘 7:21-24, 호 6:6, 암 5:21-27).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시고 열납하시는 제사는 자발적으로 드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제사이다.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드린 제사가 율법에 의해서 드려진 동물 희생 제사보다

질적으로 우월함을 시사한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저자는 율법에 기록된 사실을 언급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을 성취함은 물론

율법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음을 시사한다(막 14:49).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본문은 5-7절의 인용문에 대한 설명으로 저자가 그 본문을 본서에 인용한 강조점을 나타낸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는

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본질적인 언급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자신을 희생시킨 그리스도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희생 제사임을 시사한다.

 

‘그 첫것을 폐하심은 둘째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헬라어 본문은 구조적으로 교차 대구법으로 되어있다.

저자는 본문 자체를 교차 대구법으로 기록하면서 앞서 언급된 시편 인용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첫 것'은 8절에서 묘사된 율법과 희생 제사를 가리킨다.

둘째 것: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된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다.

 

둘째 언약 즉 새 언약이 효력이 있고 유용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언약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세우신 새 언약은 옛 언약인 첫 것의 폐지를 요구한다.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한 방법과 결과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방법'은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는 것이다.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성소에 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였다.

지상의 제사장들이 '서서' 직무를 감당한다는 사실은 그 직무가 완성되지 않았으며

동물 희생 제사로는 죄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아 양심을 온전히 깨끗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반복되었음을 시사한다.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본문은 시 110:1의 인용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영원성을 나타낸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지상의 제사장들의 직무와 비교되는 예수의 대제사장 직무에 대한 진술이다.

 

'앉으사'는 지상의 제사장들이 '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11절)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옛 연약의 속죄 사역과는 달리 온전히 성취되어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단번에' 드리신 희생 제사로

그 죄를 제거하는 효력은 더이상 반복할 이유가 없는 영원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중보사역을 행하신다(8:1-6).

 

‘그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본문은 시110:1의 인용으로 시 8:6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이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등극한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고전 15:24-28)

중보 사역을 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중보로서(8:6) 모든 원수가 멸망할 때까지 중보 사역을 행하신다.

 

저자는 이런 진술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암시하며

수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대적하여 멸망당하는 원수들의 자리에 동참하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다(3:14).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이 10,12절과 연관됨을 시사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한 제물로'의 헬라어 `미아 프로스포라'는 10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프로스포라스)와

12절의'한 제사를 드리시고' 와의 연관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강조점은 `미아프로스포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에 있다.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의 영원한 결과를 시사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게 된 자들'로 만드셨으며 완전케 하셨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단지 외적인 면만이 깨끗게 된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양심까지

깨끗하여졌으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이러한 사실은 성령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을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서 실현시키셨으며,

새 언약의 약속이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상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렘 31:31-34이 본문 외에 이미 8:8-12에서 인용되었으나

8장의 인용은 옛 언약의 희생제사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반면에

본문의 인용은 그리스도인에게 미친새 언약의 완전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저자는 본문에서 렘 31:31-34의내용 중 31:33,34만 선별하여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이 선별된 본문의 인용을 통해서새 언약의 두 가지 약속에 대해 언급한다.

 

1)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이것은 새 언약 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이상 외적인 율법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율법을 이마나 팔에 기록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출 13:16, 신 6: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결단과의지를 나타내며 내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2)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옛 언약 하에 있던 희생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지만(3절)

새 언약 하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더이상 기억지 아니하시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그리스도인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더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제사임을 시사한다.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앞서 인용된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해 초래된 새로운 상황과 연결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다시 기억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더이상 속죄제사가 필요하지 않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희생제사의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다.

그 결과 새언약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19-22절).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1) 새로운 길 .. `새로운 길'은 두 가지 차원 즉 시간상으로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길이

그리스도의 희생 결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현재 주어진 것임을 나타내며,

질적으로 옛 언약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새 언약에서는 변할 수 없는 영원한 것임을 시사한다.

2) 산 길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길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시사한다.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본절은 4:14절과 병행을 이룬다.

 

'큰 제사장'은 히브리어 '해헨 하가돌'('대제사장')을 직역한 것으로(레 21:10, 민 35:25, 28, 슥 6:11)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대제사장으로서(12-14절)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다스리시며 중재사역을 행하신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마음에 뿌림을 받아'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피를 뿌림으로 깨끗하여진 것을 연상케 한다(출 29:21, 레 8:30).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옛 언약하에서 깨끗게 할 수 없었던 양심이 온전히 깨끗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맑은 물'은, 정결 의식에 사용되는 물을 가리킨다(민 5:17, 겔 36:25).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성취된 내적 정결을 나타내는

외적인 표징으로 '세례'를 의미한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내적인 정결을 경험하고

세례를 통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고백을 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에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것을 권면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1) 참마음.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 언약하에서 자기 백성에게 '새 마음'을 창조하시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킨다(렘 31:33).

이러한 약속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성취되었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의 더럽혀진 양심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정결케 되었다(18절, 9:13,14).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양심

곧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2) 온전한 믿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성과

확실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제사장이시며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신뢰해야만 한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믿는 도리의 소망'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이라는 의미이다.

이 '소망'은 예수의 제사장적인 행위와 연관된 것으로 그 내용은 현재와 미래의 구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행위에 의해 약속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을 의심치 말고 확신 가운데 바라보아야 한다.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며’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서로 돌아볼 것을 권면하고 있다.

돌아보는 방법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두 가지 덕목을 서로 격려하는 것이다.

 

‘선행’은 돌보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이다(6:10).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저자는 그 날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더욱 열심을 내어

다가오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서로 격려와 위로를 통해 담대해지기를 권면하고 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본절에서부터 31절까지는 6:4-8과 병행된 구절들로 배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시사한다.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의 개시를 의미하며

'죄를 범한'의 헬라어 '하마르타논톤'은 현재 분사로 계속적으로 범죄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계시와 그리스도를 통해 드려진 희생제사의 효력을

거부하고 계속적으로 범죄하는 자는 더 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는 의도적이며 자발적으로 배교하였으며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의도적으로 배교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자에게는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고 오히려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맹렬한 불'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로스 젤로스'는

문자적으로 '불의 질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백성의 배교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손상되어

생겨난 격정적인 질투를 시사한다.

 

이것은 사26:11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을 멸망시킴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대적자로서 그들에게는 오직 맹렬한 불의 심판만이 존재한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모세의 율법을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거부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훨씬 더 엄한 심판을 자초하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본문은 신 17:2-7을 인용한 것이다. 신명기 본문은 우상 숭배를한 자에 대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두 세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그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하물며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본문은 새언약을 성취시킨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한 자에 대한 징벌이 옛 언약하에서

우상 숭배로 인해 죽임을 당한 징벌보다 훨씬 더 엄함을 나타낸다.

그 형벌이 훨씬 더 엄한 것은 옛 언약보다 새 언약이 훨씬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새 언약을 성취시킨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고 배교하는 것은

옛 언약하에서 우상 숭배하는 것보다 더 강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배교 때문에 고소를 당하는 이유는 세가지이다.

1) ‘하나님 아들을 밟고’ 예수의 칭호로 사용된 '하나님 아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내에서

이미 잘 알려진 공식적인 신앙고백이었다(4:14, lane).

한편 '밟고'의 헬라어 '카타파테사스'는 모욕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배교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2)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언약의 피'는 옛 언약을 세울 때 사용되었던 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출 24:8)

새 언약을 세울 때 희생되었던 그리스도의 피 곧 십자가상의 죽음을 의미한다.

(9:20, 마 26:28, 막 14:24, 눅22:10, 고전 11:25).

 

새언약을 위해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는 옛 언약하에서 제거할 수 없었던 양심의 더러움까지

정결케하며 거룩하게 하는 매우 귀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10, 14절, 13:12)

배교자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피를 가볍게 여기고 사소한 것으로 이해하며

보통 사람의 죽음과 동일하게 여긴다.

 

배교자의 이러한 이해는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축복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

 

3)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성령께서 '은혜의 성령'으로 나타나는 곳은 신약성경에서 이곳 뿐이다.

`은혜의 성령'은 슥 12:10(LXX)을 암시한다.

 

만약 이것이 의도된 암시라면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은혜를 공동체에 부어주신 오순절의 성령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회중에게 부어주신 성령은(2:4, 6:4)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은혜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따라서 본절의 '은혜의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영'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영'을 가리킨다.

의도적으로 배교하는 것은 은혜를 가져다주는 성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성령을 모욕하는 죄이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막 3:29).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본절은 신 32장에서 인용된 두 가지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인용문을 통해서

배교자에 대한 심판이 공동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며,

그 심판의 엄중함을 나타낸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본문은 신 32:35의 인용이다.

신명기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시고 변호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잘 섬겼을 때 원수를 갚아주시고 구원을 이루시며

변호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직접 개입하셔서 공정한 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심판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는 하나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배교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본문은 배교자에게 반드시 심판이 임할 것임을 시사한다.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본문은 다윗 왕이 인구 조사를 한 후 심판을 받을 때 한 말의 인용이다(삼하 24:14, 대상 21:13).

다윗 왕은 사람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본절의 요점은 다윗 왕의 선택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할 경우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배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피할 수 없는 무서운

것임을 시사한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개역성경에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앞서 엄중한 경고를 한 반면 32-36절에서는 경고와는 달리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수신자들은 복음을 통해서 구원의 빛을 마음에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해를 받았다.

'싸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들레신'은 본래 운동 경기를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박해를 의미한다.

 

이 박해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하는 박해는 아니다(12:4). 수신자들은 박해를 받았으나

그것에서 좌절하지 않고 잘 인내하였으며 저자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과거에 겪었던

박해와 인내를 상기시킴으로 수신자들이 배교에 이르지않고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도록 권면하고 있다.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본문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박해에 대해 인내했던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한 표현이다.

본문은 교차 대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방'은 거짓으로 고소하여 비난하는 것을 나타내며

'환난'은 폭력을 동반한 박해를 의미한다.

또한 '구경거리'의 헬라어 '데아트리조메노이'는 `데아트론'('극장')과 연관된 것으로

공적이고 공개적인 박해를 받는 것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과거에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폭력을 당하기도 하며

공개적으로 조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본문은 고난당한 그리스도인들과 동참함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재산이 하나도 없이 감옥에 갇힌 자는 밖에 있는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굶어 죽기 쉬웠기 때문에

당연히 돌보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을 돌보는 것은 감옥에 갇힌 자와 동일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행위였다.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수신자들이 앞서 언급한 위험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즐거워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큰 상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이다(눅 6:22,23).

 

저자는 고난과 위험을 감수하며 인내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휘파르크신'(`산업')을

수신자들이 지상에서 고난당하면서 상실했던 '휘파르콘톤'('산업')과 연결시켜 비교함으로

고난과 위험을 인내한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산업이 훨씬 더 탁월함을 드러내고 있다.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하느니라

 

'담대함'은 본서에서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되었다.

1)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수 있게 되었다(4:16, 10:19).

2) 새 시대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용기있는 신앙을 나타낸다(3:6).

 

본절은 후자의 경우로 사용되었다. '담대함'은 그리스도인의 표식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비방과 재난을 당하면서도 담대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받을 상 때문이다(34절, 11:26, 눅 6:23).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시며(11:6)

그 상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온전한 구원의 축복을 가리킨다(23,25절, 9:28).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잠시 잠간 후면’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반드시 인내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잠시 잠간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사실이다.

 

`잠시 잠깐'은 사 26:20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환난과 위험의 기간이 짧음을 의미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셔서 심판과 보상을 하실 것을 암시한다.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본문은 합 2:3, 4(LXX)의 인용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위험 속에서도 인내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속히 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직면한

고난과 박해에 대해 담대하게 맞서며 인내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삯과 약속을 허락하실 것이지만

반대로 뒤로 물러나 인내하지 못하고 배교한다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저자는 본절에서 앞서 인용한 합 2:3, 4의 결론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신자들이 믿음을 가진 자임을 확인시킴으로 파멸에 이르지 않고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만약 수신자들이 직면한 고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여 배교를 한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멸망의 심판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박해와 위험을 잘 인내하고 담대하게 맞서서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에 이를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수신자들의 '믿음'을 언급함으로

다음 장에서 설명할 믿음을 예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