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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13) 히11장 여러 설교 정리
◑적용
본문 히11장부터 끝13장까지는 "믿음의 조상들과 예수님"이란 주제로
히브리서의 다섯번째 마지막 설교 논지(대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앞서 히브리서의 1~4대지까지는, '믿음에서 떠나지 말 것, 배교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면,
본문 히11장에서는 '믿음을 잘 지키고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의 좋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11:1~31절까지는 거의 매 구절마다 '믿음으로'라고 첫 단어가 시작됩니다.
*2, 10, 12, 14, 15절 등 몇 구절은 제외, 헬라어 및 개역성경이 마찬가지로.
그만큼 본 장이 '믿음 장'이란 별명이 붙여질 만큼,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통 어떤 단어가 2~3번 반복되면, 강조되었다고 보는데,
'믿음'이란 단어가 무려 30회 가량, 본문에서 반복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히11장의 또 다른 특징은, 성경에서 설교가 가장 많이 되어지는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 66권 1189장 가운데서, 어떤 본문은 설교가 거의 안 되기도 하지만, *히브리서 설교모음 click
히11장은, 어마어마하게 인기 있는 설교 본문입니다. 주옥 같은 설교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본문 히11장 외에도, 시1편, 시23편, 요3:16절 등이 똑같이 그렇지요.
너무 유명한 본문이라서 또 설교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왜냐면 시중에 주옥 같은 설교들이 많이 있는데, 그보다 내용이 뒤쳐지는 설교를 하나 더 보탠다면..
그것도 공해 유발인 셈이죠.
그렇지만 '오늘' 또 주님이 내려주시는 '매일 만나의 은혜'를 잠시 사모해 봅니다.
▲1. 히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죄송한 표현입니다마는, 애들 말로 '폼생폼사'라는 말이 있죠. 폼으로 살며 폼으로 죽는다는 말이죠.
'믿음을 따라 죽는다'는 말도.. 그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일평생 믿음을 따라서 살다가, 죽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믿음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자판기가 있어서, 커피 누르면 커피 나오고, 율무차 누르면 율무차가 나왔는데,
이 분들,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은 어디를 누르든지, 무엇을 누르든지
'믿음'이 툭툭 떨어져 나왔다는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자판기에 빗대어
우리가 잘 아는 롬1:17절에 이런 구절이 나오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역시 from faith to faith라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라는 말이죠.
의인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죽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를 탈탈 털어보면, 그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이라는 말이죠.
참고로, 히11장의 모든 믿음의 케이스는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생각의 믿음'이 아니라요.
그래서 땅에서는 나그네처럼 살다가, 특별하게 남긴 것 없이 하나님 앞에 갔지만...
땅에서는 그 유업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지만..
믿음 하나 지키고, 믿음 하나 남기고 죽었다.. 곧 세상을 떠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유언에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굉장히 중요하고,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말입니다. '나는 일평생 믿음을 지키고 살다가 이제 죽는다!'
'믿음을 지켰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말에는 (딤후4:7, 히11:13)
-나는 일평생 하나님 외에 다른 신(물질, 명예, 권력의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말이며,
-나는 평생 남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나는 생애에 가정에 충실했다는 의미이며
-나는 오래도록 (탈세, 뇌물, 횡령 등) 도적질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켰다는 뜻이며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나는 남의 소유를 존중해 주며, 남의 소유를 내 것으로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는.. 정말 명예로운 선포입니다.
사람이 이제 회갑이 지나고 칠순이 지나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 '명예로운 퇴진, 명예로운 죽음'이라고들 말합니다.
물론 사람들 앞에 명예로운 퇴진보다도, 하나님 앞에 설 때 명예롭게 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사람이 부러운 것입니다. :13
우리가 탐내고, 소원해야될 기도제목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성도는 죽어서 믿음을 남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음을 남겼다는 증거는,
그의 자녀들, 제자들, 사역들 가운데.. 믿음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뭐 발버둥 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고, 믿음의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보상입니다.
저절로 그 후계자들이 남겨지는 거죠.
△비단 죽을 때만이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도,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가장 힘이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 한분만 믿음으로 살고..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입니다.
목회자가 가장 힘이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오늘 이 말씀 전하고, 내일 광야로 쫓겨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믿음으로.. 주신 말씀 가감 없이 전할 때입니다.
교회가 가장 힘이 있을 때가 언제입니까?
교회의 경제는 '만나 경제'인 줄로 믿고, 이웃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교회의 곳간을 비울 때입니다.
저축하면 썩어서 못 쓰게 되고, 내일 쓸 것은 내일 또 만나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경제적 믿음'이죠!
성도의 사명은, 목사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은
소유의 유무에 관계 없이, 행복하게 사는 법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더라도... 여유 있고 멋있게 사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들도 가진 재산 하나 없어도, 광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제대로 된 건물도, 가진 재산도 없는 텅텅 빈 창고로 살아도
너무도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살아간 믿음의 선진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따라 죽었다” :13
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믿음을 유산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소유로 살라는 말인가?’ 하면서
적잖게 저항감을 느끼는 성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그네 삶의 핵심은, 무소유가 아니라, ‘소유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몸,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살고 있는 집... 다 길면 백년 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빌려주셔서 잠시 사용하고 간다는 나그네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욕심에서 해방되게 만들고, 믿음의 사람으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너무 '소유'에 벌벌 떨고 (있으면 있어서 떨고, 없으면 없어서 떱니다) 사는 인생은
그는 '소유에 따라 죽었으며' 라는 평판을 남길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와 대비되죠.
▲2. 일생 믿음으로 살았어도.. 약속을 성취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오실 메시아와, 그를 통해 하늘의 별, 땅의 모래
같이 후손이 많아지는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아브라함의 후손이니까, 조상의 약속을 물려받은 거죠.
그 약속의 완전한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13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끝내는 천국에서라도 다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죠!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보고'는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게는 그런 믿음이 있는가요?
나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결국은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는 믿음이 현실적으로 있나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고.. *합2:14, 계7:9~10
보좌 앞에 열방과 온 민족이 다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할 날이 이를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나요?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 8:56).
이에 비교하면, 오늘날 나의 시각은 너무 근시안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처럼, 먼 미래를 내다보는 믿음이 없습니다. 또는 있어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내 세대, 내 다음 세대밖에 내다보지 못합니다만,
믿음의 조상들은, 죽을 때까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뭐 시므온과 안나처럼,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리라는 약속을 받고서..
죽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계속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짧게' 내다 본 축에 속하고요.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뵐 지라도, 즉 '약속을 받지 못하였어도' :13
결국은 하늘의 별들같이, 땅의 모레같이..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는 것이죠.
오늘 내가 가진 약속.. 내가 받은 약속이
그 유통기한을 10년, 20년에 국한시키지 말고, (10년 20년 기다렸다가, 안 되면 포기하지 말고)
100년 이상을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대에서 혹시 '약속을 (성취) 받지 못해도' 낙심하지 않고, 길게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이었습니다!
▲3. 믿음으로.. 고향(세상)에 돌아갈 생각을 단념했습니다
15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여기서 '본향'은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가나안을 가기 위해 떠났던 지상의 고향(밧단 아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지상의 고향을, 자신들의 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 쉽게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의 여인들 중에서 신부감을 택하지 말고
자신의 고향, 즉 밧단 아람으로 가서 신부감을 구해오도록 그의 종에게 당부하면서도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창 24:6)고 하였죠.
야곱 역시 밧단 아람을 자기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창 30:25, 31:3).
아브라함은 사라를 가나안 땅에 묻었으며, 자신 역시 그 곳에서 장사되었습니다(창 23:19, 25:9-10).
이삭이나(창 35:27-29) 야곱도(창 49:29-33, 50:13) 가나안에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으로 충분히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믿음입니다. 마치 연어의 귀소본능처럼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누구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데,
믿음의 조상들은, 이 세상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고, 천국을 자기 본향으로 여겼기에,
오직 천국으로 귀소하려고 했지 ↓, 자기 육신이 태어난 곳으로 귀소하는 본능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런데 이런 ▲3항은 '현실에 기반을 둔 영성이 아니다', '너무 내세 지향적이다. 치우쳤다'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 전체가 사실은 내세, 영생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봅니다.
'현실에 기반한 영성, 현실에 뿌리내린 영성'도,
근본적으로 '내세 신앙, 영생의 토대'에 기반한 것이지요.
기차로 비유하자면, 내세 신앙, 영생의 관점이 기관차가 되어, '현실적 신앙'을 객차처럼 이끌고 가는 것이지,
'현실에 기반한 신앙'이 기관차처럼 앞서 가면서, '내세 신앙, 영원 관점'을 객차처럼 끌고 가서는 안 되겠죠.)
◑절별 해석 ......................................................................................................... 출처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는 '아래에'라는 뜻인 '휘포'와
'서게 하다', 또는 '확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래에 확립하다' 혹은 '...아래에 서다'를 뜻하는 것으로
'기초', '실체'(KJV), '확증'(NIV), '객관적 실체'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와 같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고 진지하게 나아가게 한다.
한편 '증거'의 헬라어 '엘렝코스'는 법률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으로서
'객관적인 증거' 혹은 '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임을 시사한다.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구약 시대의 신앙 위인들은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확신과 증거를 얻었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믿음으로'(피스테이)는 본 3절에서 31절에 이르기까지 헬라어 본문의 첫 단어, 또는 문장 서두에
나타나고 있다. 그만큼 본 장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거죠! 개역성경도 그렇게 서두에 배치!
이것은 옛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고 행동한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가시적인 우주를 가리킨다.
'나타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파이노메논'은 헬라어 오랜 철학적 전통에서 기인한 표현이다.
이는 저자가 당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플라톤과 필로의 우주론, 즉 태초 혼돈 상태에 있었던
가시적인 물질들을 창조자가 이데아나 원형을 사용하여 질서를 부여함으로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우주론을 배격하고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헬라적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창세기 1장을 이해하려는 시각을 막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
즉 저자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저자는 2절에서 언급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실례를
본절에서 시작하여 31절까지 나열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이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한 사실을 가리킨다(창 4:4).
즉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믿음과 의로움을 그가 드린 제물을 열납하심으로 증거하셨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본문은 창 4:10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을 암시한다.
아벨은 죽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준다.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본절은 창 5:21-14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인용이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몸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리움 받았음을 암시한다.
저자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옮기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믿음으로'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이나 유대 전승에서는 에녹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유대 전승에서 모든 세대의 회개의 표본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저자가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개종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6:1)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맛소라 본문(MT)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창 5:22,24)
70인역에서는 이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저자는 '믿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연결지어 다음 절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약 2:19).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실존적 존재를 뜻한다.
‘2)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상 주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시 43: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경고하심'의 헬라어 '크레마티스데이스'는 '신적인 의사 소통'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
혹은 '신탁'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8:5, 12:25).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계시를 액면 그대로 믿었음을 반증한다.
노아가 두려움에 못이겨 방주를 예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준비하였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저자는 본절에서 19절까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앞서 언급된 아벨과 에녹, 그리고 노아는 그 믿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구약 성경에 없어서
그들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에서 그의 믿음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장막에 거하였으니'는 완전히 정착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약속해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바를(창 12:2, 3) 성취하실 것을 굳게 믿었다.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본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타낸다.
'터'는 '기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터가 있는 성'은 9절의 '장막'(스케나이스)과 상반되는 표현이다.
장막은 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동하기 위한 임시 거처인 반면에
'터가 있는 성'은 한 곳에 고정된 영구한 집이다.
이 성은 지상에 있는 어떤 도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동치 못하며 장차 올(12:28, 13:14)
영원한 하늘 도성으로, 하나님에 의해 견고히 세워진 '시온 성'을 암시한다.
(시 48:8, 87:1-3, 5, 121:3, 사 14:32, 33:20)
한편 '경영하시고'의 헬라어 '테크니테스'는 '기술'을 뜻하는 '테크네'에서 파생된 단어로
'기술자', '설계자' 혹은 '건축가'를 뜻한다. 이를 앞서 언급된 '성'과 결부시킬 때 본절에서는
'설계자'나 '건축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으실'의 헬라어 '데미우르고스'는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데미오스'와 '일'이란 뜻의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자'의 뜻을 지닌다.
이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성을 건축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손수 지으신 하늘나라의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믿음의 인내를 할 수 있었음을 시시한다.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비록 사라가 잉태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하고 웃었다 할지라도(창 18:9ff.)
사라가 끝까지 의심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사라는 곧 아브라함의 믿음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라가 아브라함과 한 마음으로 믿음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둘 사이에 부부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며 이삭도 잉태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늙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으나
약속하신 하나님의 미쁘심 곧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이삭을 출산할 수 있었다.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보고'는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 땅에서 고향을 찾았다면 자신들이 태어난 지상의 고향으로 충분히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본향은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고
믿음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고향을 찾고자 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다.
'사모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레곤타이'는 '...을 향해 뻗치다', '열렬히 갈망하다'라는 의미로
그들이 간절히 하늘나라를 갈망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 15, 16)
이라고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장막'(9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가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
이는 그에게 이겨내기 어려운 혹독한 믿음의 시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많은 자손을 허락해 주신다는 약속의 성취 여부가
이삭의 생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애정 문제를 제외하고라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 커다른 모순이 생기게 됨에 따라
아브라함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을 제거하는 일은
아브라함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할 문제였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독생자를 하나님께 드렸다.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본절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자와 다름없는 자신의 몸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인 이삭을 낳을 수 있었다(11, 12절).
아브라함의 이러한 경험은 자신의 아들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으며
그 확신으로 인해 자신의 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이 다시 살 것을 믿지 못하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정작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을 때(창 22:10) 그에게 있어서 이삭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Bruce). 그러나 그 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었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으며(창 26:2-5)
이삭은 장차 이루어질 이 약속받은 축복을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해 주었다(창 27:27-29, 39, 40).
이 때 합법적인 축복의 상속자는 맏형인 에서였으나 야곱이 속임수로 그 축복을 가로챘으며
에서는 그 나머지 축복을 받아야 했다(창 27:39, 40).
저자는 이러한 부당성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이삭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두 아들에게 축복하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삭의 이러한 행위는 믿음의 본질,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절)라는 것에 대한 실증적인 예(例)에 해당한다.
한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실이 비합법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이삭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축복을 무효화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3)고 야곱을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창 25:23).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창 50:24, 25의 내용에 대한 인용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과 그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다.
(출 13:19, 수 24:32)
이러한 사실은 요셉의 믿음을 잘 예증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시사한다.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죄악의 낙'은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도 그대로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크나큰 죄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저자는 본문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었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사 63:9에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전 10:4에서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면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25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으로서(13:8) 시대를 초월하여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께 하셨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시안'은 10:35절에서의 '상'과 동일한 용어로서
'보상'을 뜻한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기꺼이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 상은 바로의 궁전에 있는 온갖 보화들보다도 더욱 고귀한 것으로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이었다.
저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사실을 알고(13:13)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Bruce)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도록 권면한다.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모세는 애굽을 두 번 떠났었다.
첫번째는 자기 동족을 박해하는 애굽 사람을 살해한 일로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피한 일이며(출 2:11-15),
두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킬 때였다.
본절의 '애굽을 떠나'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 중 전자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모세가 유월절을 정하여 피 뿌리는 의식을 하게 한 사건인 출애굽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사건은 출애굽 전에 되어진 일로서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일을 가리킨다.
본절의 해석의 문제점으로 모세가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할 때에는 두려워 하였다는 것이다(출 2:14, 15).
그러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한 동기는 애굽인을 죽여서 생겨난 바로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출 2:14).
왜냐하면 출애굽기나 다른 성경에서 모세의 도망과 두려움을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세가 비록 노예 폭동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라도, 그냥 도주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안 되었다는 인식과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본문은 저자가 특별히 다니엘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인 듯하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다가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신체적으로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거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단 6:17-22). 다니엘 이외에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를 물리친 일이 있었으며(삼상 17:34-37), 브나야도 사자를 죽였었다(대상 11:22).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이것은 다니엘과 함께 바벧론에 포로로 끌려온 세 명의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가리키는 것이다(단 1:7).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한 자들로는 구약 시대의 몇몇 선지자들을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야'는 이세벨에게서 도망하였으며(왕상 19:2),
'엘리사'는 이세벨의 아들인 여호람에게서 구원받았고(왕하 6:31 ff.),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을 피하여 숨었다(렘 36:19,26).
또한 '다윗'도 사울 왕의 칼날을 무사히 피하여 도망하였다(삼상 18:11). 저자는 이러한 예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심을 강조한다(시 18:2).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된 실례는 구약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 제일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으로서(삿 6:31 ff.)
300명의 군사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위엄을 이룩하였다.
삼손(삿 16:28-31)이나 하스기야 왕(왕하 20장, 사 38장)은 연약한 중에 있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강하게 회복되었다. 에스더 역시 연약한 여자였으나
믿음으로 강하게 되어 자기 동족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이것은 구약성경의 사르밧 과부(왕상 17:17-24)와 수넴 여인(왕하 4:18-37)의 경우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는 나인성 과부(눅 7:11-14),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요 11장),
도르가(행 9:36, 41)를 가리킨다.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본절 상반절에서 여인들은 자신의 자녀나 관계된 자들을 부활로 되돌려 받았었다.
그 부활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그들의 아들들은 다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문의 '더 좋은 부활'에서 '더 좋은'의 헬라어 '크레이트토노스'는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더 좋은 부활'은 본절 상반절의 '부활' 즉 일시적인 부활과는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게 되는 종말론적 부활을 가리킨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1) 혹자는 마카비 전쟁 당시 시리아의 침략군들이 신앙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예레미야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레미야는 한때 바스훌에 의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였으며(렘 20:2)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으며(렘 29:7ff.), 구덩이속의 진흙에 던져지기도 하였다(렘 38:6).
본절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저자는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희롱을 당하였음을 강조한다.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돌로 치는 것과’ 돌로 치는 행위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처형법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애굽의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을때 예레미야가 그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쳤다.
(Tertullian, Scorpion Antidote 8, Jerome, Against Jovinian 2.37).
또한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라고 탄식하셨다(마 23:37). 예수께서 탄식하신 내용은 여호와의 전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예언자 스가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대하 24:21, 눅 11:51).
‘톱으로 켜는 것과’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다른 믿음의 사람들은 '칼날을 피하기도'하였지만 (34절)
또 다른 이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엘리야는 이세벧로부터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다른 예언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왕상 19:10).
또한 여호야김이 집권할 당시 예언자 우리야가 칼에 죽임을 당했으며(렘 26:23),
신약 시대 사도 야고보도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행 12:2).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라는 것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가리켜 한 말로 볼 수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며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한' 사람들을 본 받으라고 촉구하였다(Clement 1서 17:1).
클레멘트는 거기서 그들이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에스겔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별히 엘리야는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복장이었던 (슥 13:4) 털옷을 입고 다녔으며(왕하 1:8)
신약 시대의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었다(막 1:6). 이러한 복장은 특수한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언자들의 검소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는 말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자의 삶을 요약하고
있는 말로 볼 수 있다(왕상 17:2-16, 19:1-19, 왕하 1:3-16, 8:1, 2).
또한 이것은 특별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도망하여 산이나 광야에서 짐승처럼
생활하였던 것을 상기시킨다.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세상이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는 의미이다(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NIV).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핍박과 환난이 문제시 될 수 없었으며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가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본절은 시 106:4(LXX)을 인용한 것으로
박해가 있을 때 광야나 산 혹은 굴 속으로 피신하는 일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왕상 18:4, 13, 19:1-4, 9).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이 땅에서
안락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보상은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된다.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을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들이'라는 말은 32-33절에서 언급된 인물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장에서 언급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다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를 받은 자들이었다(2, 5절).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 말은 33절의 '약속을 받기도 하며'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약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팡겔리안'('그 약속')으로 단수로 표현된 반면에
33절의 '약속'은 '에팡겔리온'('약속들')으로 복수이다.
따라서 33절의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하신 특정한 약속들로서
그러한 약속들은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었다.
그러나 본절의 '그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영원한 기업의 약속'(9:15)으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구현을 가리킨다.
저자가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사람들은 다...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이다(13절).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교훈하는 실제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었다.
'더 좋은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이트톤 티'는 부정 대명사로서 더 좋은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온전케 되는
구원을 시사한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다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인물들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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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글히11장,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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