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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2장, 믿음의 조상들과 예수님

LNCK 2022. 8. 16. 12:35

◈믿음의 조상들과 예수님             히12장              여러 설교 정리

                                     

▲본문의 줄거리 

히11~13장은, 히브리서 5대 논증 중에서, 마지막 5번째 논증입니다. 

믿음의 조상들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당연히 예수님의 우월성, 뛰어나심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히11장에서는, 아벨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선진들을 쭈욱 열거하고서는

이어지는 12장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12:2 

믿음의 조상들도 우리가 본받아야 될 분들이지만, 그 보다는 예수님을 더 바라보라고 설교합니다.

 

유대교의 5번째 자랑이 뭐예요?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천사(선지자), 모세, 대제사장, 율법에 이어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히브리서는 본래 ‘믿음의 조상’을 강조한 게 아니고요,

‘믿음의 조상들’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 것입니다.

 

11:9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11장의 여러 믿음의 조상들을 보니까,

약속을 유업으로 받았어요. 그러나 약속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는 아직 못 받았죠.

 

11: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의 실체)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네, 그들은 약속한 것의 실체(그리스도)를 아직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한 것(그리스도)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11:1  *자기 소원 아님

 

     우리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구절을 인용하여,

     자기 소원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 큰 꿈을 가져라! ..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히브리서 전체 문맥을 놓고 보니까,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것입니다.

     ‘내 소원’을 바라는 게 아니라요.

 

그리고 또 경고가 나오죠.    (*12:14~29절, 5번째 경고)

유대인들이, 자기 믿음의 조상들은 그렇게 존경하고 떠받들면서도

그런 믿음의 조상들보다 훨씬 크신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받을 형벌이 얼마나 크냐,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히11~13장을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적용

▲1.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12:2
 
위 구절의 의미를, 오늘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그저 아리송 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왜냐면, 영어성경에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KJV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faith  NASB
 
이렇게 나오는데, 더 아리송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작가 author' 라는 뜻은 아닐 터이고요.
 
'믿음의 주'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퀴리오스의 '주'가 아니고,
창시자, 시작하는 자, 앞에서 인도해 가는 자, 파이오니어 라는 뜻입니다. *아르케고스 
 
'온전케 하시는 이 perfector’는, finisher(종결자)라는 뜻인데,  
둘을 합치면,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 는 뜻입니다. 
 
그러니 12:2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는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란 뜻이죠.
믿음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 pioneer 이자, 또 마치게 하시는 종결자(완성자)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11장의 여러 믿음의 조상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믿음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2
 
그리스도께서는 히11장에서 언급된  
'허다한 증인들'보다 더 앞서 pioneer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유1:5).

 

그리고 예수님이 '믿음의 종결자(온전케 하시는 자)'가 되심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하고 죽으셨죠. 십자가로 구원사역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2:2절의 '온전케 하시는 자(텔레이오테스)'과 그 어근이 같습니다. 둘 다 finish 한다는 뜻이죠.

 

앞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을 따라서 죽었으며' 라는 13절 말씀을 설명할 때,
그들은 모두 'from faith to faith 처럼,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었다' .. 라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12장에서 예수님은, 믿음의 선구자요, 믿음의 완성자(종결자)가 되시므로, 

 

그 의미는, 믿음의 조상들보다 훨씬 더 온전한 믿음으로, 성육신 하셔서 믿음의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12:2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2:2b

믿음의 종결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 즉 왕으로 즉위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다른 말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2:3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2.  신약의 새언약 성도들은,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보다

더 큰 특권도 있고, (잘못 믿으면) 책임감도 더 큽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조상들을 그 다음에 계속 말하는데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사무엘, 선지자들...
 
그런데 이 믿음의 사람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믿음의 선진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 저나 여러분들보다 못한(불행한) 사람들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근데 히브리서는, 
우리가 그들 믿음의 조상들보다 더 낫다(행복하다)고 했어요.
11:39~40절, 함께 읽어 보십시다.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은즉...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은 받았어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든지
아니면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다든지... 약속만 받았어요.
그래서 믿음으로 살았지만,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못 보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그 약속(그리스도)을 받아버린 것입니다. 성취된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거고.
선지자들이 그토록 연구하고 사모했던 구원을.. 우리는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나은(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다 좋은데
우리가 만약에, 약속(그리스도)을 성취 받아 놓고도, 믿음으로 살지 못 하면
거기엔 더 큰 책임과, 거기에 따른 형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다섯 번째 경고이죠.  12:14~29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사명이, 마지막 주자로서, 아주 무겁습니다.
히12:1절에, 구름과 같은 허다한 관중들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사인 볼트가 기가 막히게 달리기를 잘 해요.
근데 400미터 릴레이는 4명이 해요.
우사인 볼트가 앞에서 기가 막히게 바람처럼 달려서 1등해가지고
2번 주자에게 넘겨줬어요.

2번 주자도 얼마나 잘 달리던지 또 1등을 했어요.
3번 주자도 기가 막히게 달려 가지고 1등 했어요.
 
근데 문제는 마지막 주자인 4번(오늘날 우리)이 어떻게 하다보니깐
잘못 달려 버렸어요.
그럼 그 팀은 어떻게 됩니까? 예,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 이삭, 야곱, 기드온, 바락, 삼손,
수많은 선지자들이 아무리 믿음 생활을 잘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을 직접 받게 된, 그리스도로 받은 저와 여러분이
마지막에 믿음의 완주를 다 해야.. 앞에서 잘 달린 조상들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40절에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1:40
 
그러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은 약속한 것을 바라보기만 했지만,
우리는 받았고. 우리는 이 마지막 날에 성취되는 마지막 주자들이에요.
 
우리가 그 약속의 성취를 보아서, 더 위대한 시대에 사는 특권이 있지만,
동시에 구속사 redemptive history 전체를 놓고 볼 때
마지막 주자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이 있다는 것이죠. (특권과 책임이 동시에 있습니다. :40)

▲3. 본장 히12장의 주제는, 12:2~3절로 잡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그 때 당시에 선수들 경주자들에 형편은 어떠했는가요?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2:12 
그들은 피곤해 있었어요. 
 
“너의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12:13 
저들은 쩔뚝 쩔뚝 하고 절고 있어요. 
 
오늘의 스타디움에서 달리기 대표선수인 여러분들의 손은 피곤치 않습니까?
여러분의 무릎은 튼튼합니까, 여러분의 다리는 지금 건강합니까?

초대교회 핍박이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요,
주후 64년에, 로마에 대화재가 있었고, 그 탓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면서
기독교의 박해시대가 시작되었는데... 히브리서는 주후 65년 경에,
그래서 배도가 시작될 무렵에 쓰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피곤해 있고, 절뚝거리고 있는 거예요. 12:12~13
그리고 이런 환경적 핍박, 환난을 당할 때, 
혹시 내게 뭔가 고칠 게 없나?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징계’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 장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시함으로 고난당하는 수신자 공동체를 위로하고 있어요.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 십자가에 못 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내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 분이,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종결자(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는 것이죠!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너희들도 지금 당하는 믿음의 시험에서, 승리하고 온전케 된다는 거죠!

십자가의 시험을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묵상하고) 깊이 생각하면..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비교

옛언약 새언약
(장소)
시내산, 만질 만한 불 붙는 산
(장소)
하나님의 도성
(배석자, 증인)
흑운,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배석자, 증인)
천만 천사,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 교회,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언약물)
송아지의 피
(언약물)
예수님의 피
(언약 파기의 경고자)
모세
(경고자)
예수 그리스도
(언약식의 위엄)
땅의 진동
(언약식의 위엄)
하늘의 진동

 

 

◑절별 해석  .............................................................................................................................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증인’은 앞장에서 언급된 신앙의 선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11장)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충성을 다한 자들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증인들을 먼저 언급함으로 수신자들에게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여 경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모든...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경주자는 두 가지를 벗어버려야 한다.

1) ‘무거운 것’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장애물은 부를 사랑하는 것, 세상적인 관심사나 자만에 빠져있는 것 
혹은 세상에 애착하는 것 등을 의미할 수 있다.

2) ‘얽매어기 쉬운 죄’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며 장애물이 될만한 모든 것을 버려야하며 
동시에 인내로서 경주해야 한다. 저자는 인내하는 가운데 경주를 한 앞선 증인이 많음을 진술함으로 
수신자들을 비롯한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어려움에 처한다 할지라도 인내하며 
경주해야 함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앞선 허다한 증인들이 결승점에 도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바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에 대해 두가지 칭호를 사용한다.

1) ‘주(아르케곤)’ 
능동태일 경우 '지배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며 
중간태일 경우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취해 선구자되심을 나타낸다.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그리스도께서는 히브리서이 수신자뿐 아니라 앞절에서 언급된 앞선 
'허다한 증인들'보다 더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셨기 때문이다(유1:5).

2) ‘온전케 하시는 이(텔레이오텐)’ 
'텔레이오텐'은 '텔레이오'('완수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완성자' 혹은 '완전자'라는의미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 그 믿음을 온전히 실행한 자임을 드러낸다.

저자는 '아르케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우선적으로 행한 자이며 
동시에 믿음을 행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자임을 시사하며 
'텔레이오텐'을 통해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완전히 성취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기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대신에'. 이 경우에 본문은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누리셨던 하늘의 지위와 복을 
버리시고 죄인들만이 당하는 형벌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음을 시사한다. 
2) '위하여'. 이 경우에 본문은 앞으로 다가올 즐거움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위해 당시 수치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던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셨음을 시사한다. 문맥상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즉위식을 나타내는 시 110:1의 인용이다(2:5-9,  8:1,2,  10:12,13). 
'앉으셨느니라'의 헬라어 '케카디켄'은 완료 사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그 수치를 참으시고이루신 승리가 영원하며 완전함을 나타낸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저자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시함으로 고난당하는 수신자 공동체를 위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내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수신자 공동체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본절은 앞절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한 비교이다. 
저자는 이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수신자들이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신 것과 같이 수신자들도 그래야 함을 시사한다. 

본 서의 수신자들은, 고난을 당할때 자신들보다 더 심한 고난을 당한 허다한 증인들과
 수치와 죽음에도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되며 
그들과 같이 인내하고 고난에 잘 대응해야 한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본문은 '아들들인 너희에게 말한 권면을 완전히 있었느냐?' 라는 의미의 수사학적 의문문이다. 
이 물음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훈련과 교육의 측면에서 부과된 고난의 바른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렸음을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게 비난하고 있다. 다음에 언급되는 인용문을 통해서 
저자는 수신자들이 인내해야만 했던 고난이 훈련의 성격을 띤 것임을 진술하고 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본문은 잠3:11, 12의 인용이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행위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는 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통해서 훈련시키심을 시사한다. 

본 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조하고 있다.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너희가 참음은'의 헬라어 '휘포메네테'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직설법으로 이해하여 개역성경 본문처럼 해석한다. 

2) 혹자는 명령법으로 이해하여 '너희는 징계를 참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명령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본문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임을 말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진정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징계를 하신다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아들로 인정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슬퍼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의 아들됨의 증거임을 깨달아 기뻐해야 한다.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저자는 본절에서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를 통해서 징계가 아들됨의 증거임을 반증한다. 
'사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도이'는 노예나 첩의 아들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로 
모든 사생아를 의미한다. 
또한 '참아들이 아니니라'의 헬라어 '우크 휘오이'는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그는 서자이며 사생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할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도 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징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상속자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영의 아버지'는 '육체의 아버지'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늘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인 분 
즉 하나님을 가리킨다.
저자는 최고의 권위를 소유하신 영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틀 대조함으로 
자녀들이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당연히 복종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살려'의 헬라어 '제소멘'은 생명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신30:11-20) 
종말론적 구원을 즐기는 것과 연결된다(10:38, 39).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지라도 
좌절하여 배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담대히 나아가 복종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소유하여야만 한다.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본절은 '호이 멘 가르 - 호 데'('저희는 ...오직 하나님은')라는 단어의 대비를 통해 
육신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의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저자는 '프로스 토 파론'('당시에는')과 '휘스테론'('후에')을 대비 시켜서 
하나님의 징계가 그 당시에는 어려움과 슬픔을 가져다 주지만 
궁극적으로 놀라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의의 평강한 열매'는 평강과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의미한다. 
'평강과 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선물로서 
미래에 소유하게 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흔적이다.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저자는 본문에서 사 35:3을 인용하여 고난으로 인해 소진(消盡)된 상태에 있는 수신자들에게 
강하고 담대해질 것을 권면하고 있다. 

'피곤한 손'은 '불구가 된 손'으로 무용(無用)하여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철저하게 소진되고 좌절한 사람을 나탄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우고'의 헬라어 '아노르도사테'는 '강하게 하다'라는 의미로(NIV) 
고난으로 인해 좌절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서 담대해질 것을 나타내는 권면이다.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하라’ 
본문은 잠 4:26의 인용이다. '곧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다스'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가운데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윤리적인 것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도달하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에 의해서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곧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편 '어그러지지'의 헬라어 '에크트라페'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곧은 길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을 의미하여 '배교'를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탈구(脫臼)하다'라는 의미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만약 전자의 경우 처럼 배교를 의미한다면 
'배교는 더이상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는 말(10:26)과 
'고침을 받게하라'는 명령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시련과 위험 속에서 좌절하고 소진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여 신앙의 최종적인 목표인 종말론적 구원만을 향하여 매진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좆으라'의 헬라어 '디오케테'는 단순히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긴박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노력을 강조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진술한다.

1) ‘화평함’ 
2) ‘거룩함’ (하기아스몬)’
'하기아스몬'은 거룩해진 상태를 가리키기보다는 거룩해져 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이러한 화평과 거룩함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화평과 거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에게 성취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마 5:9).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를 돌아보아’ '돌아보아'의 헬라어 '에피스코푼테스'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적으로 지켜 보고 감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적인 목회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서로를 돌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3:12,13, 10:24,25). 저자는 그 과정에서 조심해야할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은혜에 대한 거절, 불신앙, 혹은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해서 
복음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은혜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을 시사한다.

2) ‘쓴 뿌리가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본문은 신 29:12(LXX)의 내용을 반영한다.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3)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를 예로 들어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경고한다. 

성적 부도덕을 행하는 '음행하는 자'(포르노스)와 나란히 '에서'를 언급한 것은
수신자의 공동체 내에 '음행하는 자'와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망령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벨로스'는 '거룩하지 못한' 혹은 '세속적인'이란 의미로 
영적인 면보다는 현세적인 것에 더 치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 현세적인 것을 위해서 하늘의 참 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내던져 버리는 자의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에서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장자에게 주시고자 했던 축복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배교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본문은 앞절에서 망령된 자의 예로 제시된 에서에 대한 설명이다. 
'축복'은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서 받고자 했던 하나님의 실제적인 복을 의미한다. 
또한 '기업'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의 소유를 가리키나 
본서 내에서는 아들됨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만유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2,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아들의 지위를 얻는 자로(2:10)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을 자들이다(6:12,17,18, 9:15)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당하신 것이다. 

에서의 눈물은 축복을 도로 찾기 위한 눈물이었지 
장자 명분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생각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가 눈물을 흘리며 간구했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에서가 눈물로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장자권에 대한 재고(再考)의 기회를 
얻어내지 못한것은 배교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고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된다(6:7,8).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본문에는 '시내 산'이라고 나타나지 않지만 시내 산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현현하실 때 나타났던 징조에 대해 본문은 일곱 가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 흑운, 흑암, 폭풍, 나팔 소리, 말하는 소리-로 제시하고 있다. 

이 일곱 가지 징조는 두려움을 주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모호하게하는 현상이다. 
즉 불 붙는 산과 흑암, 흑운 등과 같은 가시적인 현상은 하나님을 계시하기보다는 
도리어 모호하게 하여 하나님의 임재만을 느끼게 하였으며, 
폭풍과 나팔소리 그리고 말하는 소리와 같은 가청적인 현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큰 소리로 두려움만을 유발시켰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그 간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기로 결정하신다(출 19:16-19, 20:18-21,  신 5:23-28)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금지된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에게도 해당되었다(출 19:12,13).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무시한 것에 대한 심판은 신속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것은 옛 언약하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시사한다.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보이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판타조메논'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현현하실 때 
나타났던 외적이고 가시적이며 가청적인 현상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본절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만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도 두려워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그러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는 본문이 앞서 언급된 시내 산 사건과(18-21절) 
대조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시내 산 사건이 물질적이고 외적이며 가시적이고 가칭적인 반면에 
본문의 시온 산 사건은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것이다. 

한편 '너희가 이른 곳은'의 헬라어 '프로셀렐뤼다테'는 완료 시상으로 새 언약의 중재자인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초월적인 축복을 현재 수신자 공동체가 이미 공유하고 있으며 
계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저자는 옛 언약즉 시내 산에서 나타난 징조에 대해서 일곱 가지로 진술한 바와 같이 
본문에서 새 언약의 초월적인 축복에 대해서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일곱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본문에 나타난 세 가지 호칭은 동의어이며 하나를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이다.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할 나라임과 동시에(13:14) 
이미 소유하고 있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이다(28절, Lane, Bruce).

‘천만 천사...총회’
개역에는 '총회'(assenbly, NIV)가 '장자들의...교회'와 연결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으로 볼 때 '천만 천사'와 연결되는 것이훨씬 더 자연스럽다.

'총회'의 헬라어 '파네귀레이'는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이는 '즐거운 집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앞서 언급된 옛언약하의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포에 떠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천만 천사와 연합하여 
축복의 장소인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 앞에 나아가게 된다.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장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창조사역 때에 제일 처음으로 창조된 천사장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2) 혹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구속받은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첫 열매이며 
상속자로서 비록 지상에서 생활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
(사 4:3,  단 12:1,  눅 10:20,  롬 8:6,29,  빌4:3,  약1:18,  계 3:5,  13:8,  17:8,  20:12)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이것은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한 표현으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시사한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경히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배교자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10:26-29)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거룩해지고 깨끗하여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교제로 함께 하심을 시사한다.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온전케 된'에 해당하는 혤라어 '테텔레이오메논'은 완료시상으로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전혀 부족한 것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10:14). 

한편 '의인의 영들'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그리스도 이전에 참믿음을 소유하였다가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2) 혹자는 그리스도 이후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3) 혹자는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에 상관없이 죽은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Lane).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11:10, 13-16,  13:14).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옛 언약과 새 언약하에 있는 믿는 자들이 온전하여졌다(10:14,  11:40).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본문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피와 죄없이 죽은 아벨의 피의 대조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의 우월성과 새 언약의 효능성을 시사한다. 

'중보'의 헬라어 '메시테'는 본서에서 항상 새 언약과 연결되어 사용되며(8:6,  9:15,  렘31:31-34)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21절)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해 흘리신 피에 의해서 옛 언약이 할 수 없었던 
양심의 정결함을 입게 되었고, 영원한 구원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하늘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존전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9:11-14). 

한편 '아벨의 피'는 창 4:10-12에서 언급된 아벨의 죽음을 가리킨다.
죄 없이 가인에 의해 살해를 당한 아벨은 흘린 피로 하나님께 신원하였으며 
그 피는 저주와 연결되었다(창4:11,12). 
아벨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께서도 죄없이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과 은혜를 가져다 주었으며, 모든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원한 구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말하신 자'의 헬라어 '톤 랄룬타'는 24절의 '랄룬티'('말하는')와 연결되는 것으로 
본문에서 '땅에서 경고하신 자'와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로 나타난다. 
이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나타낸다. 

한편 '땅에서'와 '하늘로 좇아'는 26절의 '그 때'와 '이제'의 대조와 동일한 비교로 
전자는 옛 언약을 가리키며 후자는 새 언약을 가리킨다. 

옛 언약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고 순종하기를 거절하여 
심판을 당하였다(3:16-19). 새 언약보다도 열등한 옛 언약을 거절한 것도 심판을 피할 수 없었건만 
옛 언약보다 훨씬 월등한 새 언약의 메시지를(2:1-4)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율법을 거부할 때보다 더 엄중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행위이다.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저자는 본문에서 세 가지 시제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1)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그 때'는 과거의 시내 산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18-21절의 내용을 시사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현현하실 때 땅이 진동하였으며(출 19:18,  삿 5:4,5,  시 68:8,  
77:18,  114:4,7) 그 위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2) ‘이제는 약속하여’ 
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시내 산 사건에서 나타난 땅의 진동보다 더 큰 진동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약속하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형식으로 말씀하신 실체들(4:1,  9:15)을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3)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본문은 학 2:6의 인용으로 앞서 과거에 일어난 사실인 시내 산 사건과 대조를 이루어 
과거의 시내 산 사건은 땅만 진동하였으나 미래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진동할 것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땅'과 '하늘'은 시내 산에서의 계시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새 언약에 대한 상징이며
'진동'은 미래에 벌어질 세상의 변형 또는 긍극적인 파멸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주적 대변혁을 나타낸다. 

또한 본문은 새 언약의 공동체에게 임할 심판을 나타내어 
하늘로부터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은 땅으로 부터의 경고를 무시한 자와 마찬가지로 
심판 당함을 강조한다(25절). 

새 언약의 계시를 거부한 자들은 최후의 파멸의 날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산에서 주어진 계시를 무시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심판하실 것이다.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이 또한 한번이라 하심은’ 
본문은 앞절의 '땅'과 '하늘'의 대비와는 달리 '진동치 아니할 것'과 '진동할 것'을 대비하여 
하나님께서 시내 산의 현현을 통해 땅을 진동하시고도 
다시 한번 미래에 하늘과 땅을 진동하시는 이유를 나타낸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새 언약에 신실한 자들은 미래에 영원히 진동하지 않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함과 같이(28절) 
영원한 구원을 즐길 것이며 심판하시는 이인 하나님의 불변성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23절).

2)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세후의 날에 심판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변동될 것 즉 창조물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진동할 것'과 '진동치 아니하는 것'의 차이를 
'창조물'과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 유무에서 찾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은 진동할 것이며 제거될 것이다. 
그들은 새 언약의 축복을(22-24절) 빼앗길 뿐만 아니라 저주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25절).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진동치 못할 나라'
시 95:9-11 (LXX)에서 기원한 것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자주 시편을 인용하여 논증하고 있으며, 
'진동치 못할 나라'라는 것은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실체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한편 '은혜를 받자'의 헬라어 '에코멘 카린'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감사하자'로 해석한다. 
2) 혹자는 '은혜를 붙잡자'로 해석한다.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카린'은 감사보다는 은혜를 의미하며, 
또한 뒤에 언급되는 '이로 말미암아'(디 헤스)로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저자는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동치 아니할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자초하는 배교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를 범하지말고 
오직 은혜를 굳게 붙들 것을 권면한다.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경건함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종말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늘 인식하는 가운데(29절)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붙잡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속에서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섬겨야 한다.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한 것, 
즉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이유임을 나타낸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본문은 신 4:24의 인용이다.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6:8,  10:27). 
본문은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새 언약의 효력을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배교자들과 
비그리스도인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엄격함과 완전함을 암시한다. 

그러기에 새 언약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간과하지 말고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