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롬9:12~14 긍휼을 얻은 야곱과 긍휼을 얻지 못한 에서

LNCK 2022. 8. 19. 10:43

긍휼을 얻은 야곱과 긍휼을 얻지 못한 에서 -  - YouTube

 

◈긍휼을 얻은 야곱과 긍휼을 얻지 못한 에서      롬9:12~14              2022.08.16.녹취

 

※'구원'을 은혜, 긍휼의 관점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 받은게 아니라, 그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편애해서 택해 주셨다는 것이지요.

처음에 약간 사변적일 수 있으나, 끝까지 잘 들어보세요./주.
    

 

엡2:4~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여기서 '그 큰 사랑'이란, 
이게 거듭난 자가 회개하여, 거듭난 자가 얻게 되는 것을 
'보통 사랑'이 아니라 '그 큰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 그것은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내 허물로 우리는 죽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온 것들이, 주님 보시기에 허물과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예요. 

골프를 아는 사람들은, 골프 채널을 보면서 재밌어 합니다.
근데 골프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왜 땡볕에 그렇게 다니나?' 전혀 이해할 수 없잖아요. 

어떤 사람은 골프에 죽어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골프에 살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허물로 죽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것은 관심이 안 가는 거예요. (마치 골프처럼)

우리의 삶이, 죄로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내가 영생에 대해 죽어 있구나..' 
그랬을 때 주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세요. 

신앙생활은, 열심히 잘 믿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돼요. 
이것이 주님의 긍휼이에요.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에, 
그 며칠 전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는데, 죽은 지 나흘인데, 주님이 무덤 문을 열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덤의 냄새에 반응 하지 않고 
주님은 나사로에게만 반응하는 거예요. 
긍휼입니다. 거기에만 반응하는 거예요. 

세상에 죄로 인하여 사형수가 되어서, 
사람들은 다 '저 자는 마땅히 사형으로 죽어야 돼!' 라고 말하지만 
그를 태어나게 한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에게, 그는 사형수가 아니라, 내가 낳은 자식인 거예요. 
세상은 다 그를 정죄해도, 어머니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5절에 '긍휼' 다음에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구원 받는 것은, 허물로 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산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는 게 은혜이에요. 

여기에 '긍휼'이란 단어가 나온  그 다음에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엡2:4~5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을 오래 하면서, 그냥 습관이 되면 안 돼요. 
우리가 정말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은 것처럼
예수의 다시사심과 함께 일으킴을 받는 것... 이게 세례 입니다. 

세례는, 오순절날 베드로가 
'회개하라, 그래서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잖아요. 

이 세례가, 그리스도의 공로, 예수의 죽으심과 다시 부활하심이 믿어지고 
이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될 때에 
죽은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렇게 됐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나야지만, 이것이 구원입니다. 


근데 우리가 이것 앞에 설 때 
우리는 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거예요. 

나사로가 죽었는데, 나사로가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됩니까? 이미 죽어 있는데요. 
주님이 나사로를 긍휼히 여기셨어요. 

그리고 나사로는 '일어나라! 너는 다시 살아나야 될 자다!'
이것이 놀라운 사랑이에요. 
이것이 큰 긍휼이죠.

◑긍휼을 받지 못한 에서

지난 한 주 동안 우리가 '긍휼'에 대한 말씀을 봤어요. 

히12장에 보면, 에서가 평생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기회를 찾았는데요. 
주님이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배고파서 팥죽을 먹게 되는데, 그 장자권을 가볍게 여겨서... 
근데 그 일을 가지고, 그는 긍휼을 얻지 못했어요. 

에서는, 주님이 에서를 변화시키려 한 적도 없고,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요?
야곱은 그의 평생에 정말 주님의 긍휼을 보게 돼요. 

아니 그러면... 야곱의 인생과 에서의 인생을 보면요,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주제가 긍휼인데요.

로마서 9장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몇 달 동안 보고 있는 거예요. 

롬9:12~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리브가가 아기를 가졌을 때, 쌍동이 인줄 알았어요. 
왜냐면 복중에서 서로 다투는 거예요. 

이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 했어요.
둘이 태중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그래서 다투어서 이긴 자가 에서 였어요. 
그래서 에서가 장자로 태어났어요. 장자권을 얻었죠. 
그렇게 태어났는데, 이제는 바꿀 수가 없죠. 이렇게 태어났어요. 결정됐어요. 

그런데 주님이 미리 말씀한 거예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

말라기서에도 이 말씀이 다시 한 번 나오죠.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말1:2~3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 이것은 세상 말로 편애하는 건데 
이건 마치 전쟁에 사내아이들이 많이 죽어서 
그 세대 사람들은 아들을 귀히 여기고 선호하게 되는 것처럼 
이것은 종족을 살려내려는 그런 본성이죠. 

그런 것처럼 전쟁 때 남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전쟁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내아이를 선호하게 되었죠. 그건 전쟁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렇다고, 딸들은 함부로 대하고 
아들을 더 사랑하면.. 그거는 편애하는 거잖아요. 
그것은 공평하지 않잖아요. 

근데 저는 그런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아니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그렇게 정해 버리시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에서가 참 안 됐다. 에서가 차별을 받았구나, 참 불쌍하다!'

여러분 성경 전체를 읽으면서, 에서 뿐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만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계속해서 제 속에 드는 판단은, 
'주님은 다윗은 그렇게 사랑하시고.. 사울 왕에게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뭔가 성경 이해의 깊이를 위해서, 그렇게도 오래 동안 고민해 봤어요.

그래서 롬9:14절이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제 마음 속에는, 에서를 보면서, 사울을 보면서 
'이거 불공평하다. 하나님의 편애다' 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런 나에게 이렇게 지적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롬9:14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자식이 다 죽었잖아요. 
그리고 사탄에게 시험을 다 당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탄의 말을 듣고, 그럼 네가 손을 대라,
그렇지만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마라! 이렇게 말씀했잖아요. 

저는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누군가가 축복을 받았을 때는 괜찮은데요, 반대로 욥처럼 
'저렇게 잘 믿는 사람이 왜 하나님이 어떻게 사탄에게 그를 쳐서 고난에 빠뜨리는 
그런 일을 허용하시지?' 

저는 이 생각이,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이 왜 그러시지?' 
'하나님이 공평하지가 않아, 하나님이 간혹 불의하실 때도 있어!'
이렇게 모든 성경의 기록 속에, 제 속에서 드는 생각이

하나님은 분명히 공평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잖아요. 
그런데도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을 읽으면서 
제 속에서는 '하나님은 불공평하시고, 불의해 보일 때도 있는' 거예요. 

바로 왕이 자기 아들도 죽었으니까 분노해서, 병거 600대를 추격하러 보냈어요. 
히브리 백성들을 다 죽여버리라는 거예요. 

왕이 추격해서 따라가라고 명령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명령대로 따라 가야지요. 
그런데 그날 바로 왕의 병거 600대가, 홍해 속에 다 수장되고 말았어요.

아니 그럼 주님은, 히브리 백성이 노예로 살았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은 거죠.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잖아요. 

아니 그러면 400년 동안 아브라함의 후손들, 
그들이 처음에는 바로 왕의 도움도 받았지만, 
나중에는 애굽의 왕조가 바뀌면서 노예가 되잖아요.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러면 주님이 
애굽 사람들은 주님이 처음부터 택하시지 않았나? (그들을 처음부터 유기하셨나?)

정말 성경에, 하나님이 (히브리 백성들을 편애하며) 말씀하신 것을 읽을 때마다
제 속에는, 만약에 우리가 애굽 사람의 입장에서 성경을 본다고 하면, (한국인은 이방인이잖아요)
하나님이 불의하게 보여요!

물론 히브리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야~ 이건 하나님의 긍휼이구나!'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보는데요. 
우리들이 에서의 입장으로 보게 되면요
'하나님이 너무 심하시다...' 

우리가 만약에 사울 왕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요. 
'사울왕은 너무 불쌍하다' 하는 생각이 들게 되죠. 
그러면서 '사울 왕에 대해서 주님은 너무 심하신 것 아닌가?'

사울이 잘못한 일이 많지만, 다윗도 잘못 헀잖아요.

'아니, 다윗 왕은 살인죄와 간음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그는 즉시로 '너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렇게 말씀할 수가 있지?' 

여러분 지금 성경의 어떤 사건들 속에서 
지금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겁니다. 

저희가 지금 바라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주님을 바라고 회개한다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가 구할 것은 긍휼 밖에 없어요. 

그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한다는 거예요.

롬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지금 이 말은 뭐냐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편지하기를 
모세가 시내산에서 자신이 들은 음성을 기록한 거예요. 

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주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어떻겠습니까?
모세는 애굽에서 사람을 죽였어요. 그래서 광야로 도망 나왔잖아요. 

그런데도 주님은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주셨어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만나주셨어요. 

아니 모세는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모세의 이름 뜻은 '건짐을 받았다'는 뜻이에요. 

왜 엄마 요게벳은, 그 아기 이름을 모세라고 말했지요?
그 어머니가 보니까, 이 아기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아이인 거예요. 
그게 그 아기가 남다른 점이었죠. 

그 다른 엄마들은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왕이 두려워서, 다 강에 던져 죽게 했잖아요. 

그런데 모세의 엄마는 '얘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애는 우리가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살려야 돼!' 

아니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바로 왕이 사내아이는 다 죽임을 당하게 했는데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긍휼을 입었잖아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요, 
우리들도 긍휼을 입어서, 구원 받게 된 거예요.


이게 존 번연이 깨닫게 된 거예요. 
<천로역정>에 보면, 

왜냐면 존 번연은 얼마나 구원을 좌절 했냐면 
자기는 뼛속까지 타락한 죄인이라는 거에요.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면 존 번연은, 자기 속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반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는 하나님을 미워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자기 속에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 아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좌절한 것입니다. 
'나는 이 상태로는 구원받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낙심한 나머지, 길을 가다가 쓰러져요. 
그런데 그가 깨닫게 된 것은, 
주님이 자기를 예정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정이란 단어도, 
저는 너무 너무 오랫동안 '그건 불의하다'라고 생각했어요.

뭐 하나님이 미리 다 정해 놓으셨다고?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는 말씀은, 받아들여 졌지만 
'예정하셨다'는 말은, 저는 정말 오래 동안 안 받아들여 졌어요. 

제가 삶의 모든 자랑할 만한 자격이 없어진 이유부터
예정을 평생에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칼빈의 말이라고 해서 제 속에 안 들어왔는데 
'아 이게 칼빈이 한 말이 아니라, 에베소서에 사도 바울이 말한 거구나! 
이건 베드로전서에 사도 베드로도 리렇게 말했구나!' 

이게 베드로서에 기록된 말씀, 바울을 통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오면서 
이것(예정)이 제 속에 처음으로 빛이 비쳐지고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16절에는 로마 교인들에게 해설하는 거예요.

"모세가 들은 말씀인데 
하나님은 내가 그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라.. 라고 모세가 들은 것처럼" 

사도바울이 해설을 하는 거죠.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고 원했다고 거듭나는 것도 아니고, 기도응답이 되는 게 아니에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만 되느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노력할 만한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제 죽었다'

풍랑 치는 바다에서 애써 노를 젓다가도 
큰 쓰나미가 오는 것을 보면, 
노력을 하다가 멈추게 됩니다. 

왜냐면 뭔가 노력을 한다는 것은 
'해 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너무 큰 쓰나미가 오면은 
다 손을 놓게 됩니다. 
왜냐면 노력을 해도 안 되니까요.. 
'이젠 죽었구나!' 하는 거죠.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냐면, 전적 타락했어요.

이럴 때 우리가 게으른 게 아니에요. 
이게 겸손이에요.

'이게 안 되는구나!' 
평생 노력을 해도 우리는 안 되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하고 나서, 
이제 앞으로는 좀 잘 해 보려고 하다가도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나는 불가능 하다' 이럴 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기도는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럴 때만 주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새 생명을 주신다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 새벽에 나온 주의 백성들에게 
주님, 지금 삶속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 앞에서 
주님, 살아계신 주님의 성품을 따라, 주의 긍휼을 얻게 하소서. 
이 아침에 기도할 때, 주님의 긍휼의 눈동자에.. 제가 발견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