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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12~23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LNCK 2022. 8. 19. 11:43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 - YouTube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롬6:12~23            2022.08.28.설교녹취  

 

롬6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함께 '죄가운데 죽었던 자들'입니다. 

엡2장 표현대로 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 입니다. 
우리 실존이 '죽음'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육체적 죽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의 상태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고 
그리고 죄가운데 죽은 이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그 십자가가 나를 대신하여 구원하시는 십자가'임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이제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즉 죄에 대하여 무기력하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죄에 대하여 거부할 수 있으며, 
이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변화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믿음이, 예수님과 우리를 연합 시키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도 일어나도록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 이 변화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존 스토트는 이런 문장으로 잘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핵심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의 매 단계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것이 있다. 
이보다 더 큰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진리는 없다. 

우리가 그것을 붙잡을 때, 과거와 현재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뒤로 후퇴할 수도 없고, 그 자리에 정체할 수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전진해야 한다.' 

성육신은 우리가 믿는다고 성육신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과 승천과 재림의 모든 단계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그 사건(죽음, 부활, 승천, 재림)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죠. 

그 출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내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4가지 중요한 고백 있어야 합니다. 
1) 역사적인 고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겁니다.

2) 교리적인 고백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며 
화목케 하시는 대속의 제물이었다는 것이죠.

3) 개인적인 고백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 나의 구속을 위한 죽음이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죽음이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4) 경험적인 고백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죽음 안에 
나의 '옛사람이 함께 죽는 죽음'이 포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고, 
같은 죽음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죄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로부터 벗어났다는 거죠. 

이제는 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 아니게 되었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나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나의 선택에 따라서, 그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우리는 바로 그것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믿으며 
또한 나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줄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롬6:12~23절에서는, 바로 그렇게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된 삶의 원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씀 하는 거죠.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제 순종의 능력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즉 믿는 이들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순종의 능력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롬6:14절 '죄가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 할 것인데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아담과 함께 '죄가운데 죽었던 이'들은 율법 아래 있었던 것이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은, 은혜 아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는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살 수 없고, 
'은혜 아래 있을 때'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 수 있게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은혜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아무렇게나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은혜 아래 있기에,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에 
죄의 지배세력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허용하지 않고, 거부하고 이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을 때, 그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긴 하지만, 죄를 씻어 줄 수 없었어요. 
의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기는 합니다만, 의롭다 함을 줄 수는 없었고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의 죄를 씻어 주기도 하며 
의롭게 하며,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은혜란 '순종의 능력'입니다. 
은혜란, 우리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특별한 부르심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은혜가 가져다주는 순종의 능력>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겁니다. 
은혜의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일어난 변화를, 믿음으로 누리라... 그렇게 살 수 있으니 그렇게 살아라..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롬5: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안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 이것이 연결되는 말씀이죠.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주신다는 겁니다. 

이 선물이 뭘까요? 
'의의 선물'은 '무기'라는 뜻입니다. 전투력을 준다는 거에요.
싸울 수 있는 능력, 영적 전투력을 주신다는 겁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순종을 통해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은혜는 우리에게 의의 선물을 주신다... 

영적 전투력을 주셔서,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있게 하신다는 거예요. 
전쟁이 났는데.. 싸울 수 있는 엄청난 무기가 있는데.. 
잠궈 두고 쓰지 않는 지도자는 어리석은 사람이죠.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 전투력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능력으로 
이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는가를
세 가지 대조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불의의 무기가 의의 무기가 되었다

'무기'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롬6:12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 몸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처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우리가 죄 가운데 죽어 있을 때, 우리의 지체는 불의의 무기가 됐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쓰임 받는 무기? 사단에게 쓰임 받는 무기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무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무기로 
인간의 지체가 사용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말과, 눈과, 언어와, 행동과, 우리의 지체가 
그렇게 불의의 무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의 영향력이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자유의지가 있고, 계획하고 무엇인가를 창조해내는 능력이 있고 
연합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죠. 

다른 동식물들은, 자연적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에요. 
그래서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야생동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반역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 한 사람이, 불의의 무기가 될 때는 
엄청난 세상에 악한 영향력을 미치지 않습니까. 

세상에 비극적인 전쟁이나, 끔찍한 일들은 
사실은 불의한 인간 한 사람의 결정으로 
세상이 그렇게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요? 

한 사람이 불의한 무기가 될 때, 얼마나 이 세상에 악한 영향력이 주어집니까?
사단은 한 두 사람만 불의의 무기로 부려도, 세상에 엄청만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정반대로 이 세상에 의의 무기가 될 수 있으니
역사적으로 일어난 부흥의 역사, 거룩한 역사도 
수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두 사람이 의의 무기로 드려질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수많은 부흥이 일어났고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불의의 무기로 우리 자신을 내어 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자신을 내어드릴 때...

요한 웨슬리는 '만약 100명의 의인이 이 땅에 있다면, 
세계가 뒤집어지는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Give me a hundred men who fear nothing but sin, and desire nothing but God, 
and I will shake the world. I care not a straw whether they be clergymen or laymen; 
and such alone will overthrow the kingdom of Satan 
and build up the Kingdom of God on earth."

"제게 백 명만 주십시오. 죄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 원하는 백명만 나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세계를 흔들어 놓겠습니다. 
그들이 목사이던지 평신도이던지 나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런 사람들은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세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어떤 욕심이 다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죠. 
거룩한 사람들에게도 욕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따르지 않을 뿐입니다.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남겼죠. 
'잊지 마라, 거룩한 사람들 역시 육체 안에는 사악한 욕심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불의의 무기가 아닌, 의의 무기로 자신을 드리므로 
그 욕심을 따르지 않을 뿐입니다. 

이제 이것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됐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거죠. 

하나님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나를 구속 하셨으니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으니 
이제 의이 무기로 나를 드립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2. 두 번째 변화는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종'이라는 단어를 써서, 이 변화를 설명합니다. 

롬6:16 '여러분이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든지 순종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돼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돼 의에 이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
18 죄에서 해방돼 의의 종이 됐습니다.'

첫 번째는 '무기' 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의 어떤 강력한 영향력이, 이젠 불의의 도구에서 의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종'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인간의 실존은 절대로 자유자가 아니라, 의존적 존재라는 걸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종으로, 만물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대리자, 곧 종으로 세우신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종 됨을 거절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한 것이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주인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죄의 본질은 뭡니까?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바꾼 것입니다. 주인을 몰라 보는 겁니다. 

세상에는 선하고 착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죠. 
그 사람 보고 '당신도 죄인이요' 라고 말하기가 좀 미안하게 여겨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도 죄인인 까닭은 뭡니까?
주인을 인정하지 않을 때, 주인을 몰라볼 때, 주인을 바꿀 때 
그것을 성경은 죄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착하고 선하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인 이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세상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종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기가 주인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에 죽은 자'가 되어 
이제는 나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이 하나님의 종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 준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애굽으로부터 구출함을 받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역사입니다. 

단지 애굽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것만은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서의 삶이 성경에 더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의 종된 상태로부터 건짐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구원이죠. 

그런데 그 사이에 어떤 땅이 있습니까? 광야가 있죠. 
애굽에서 바로 가나안으로 가지 못하고, 광야를 거쳤던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겁니다. 

죄의 종 된 상태에서 건짐을 받으면 
하나님의 종으로 바로 살아가야 되는데 
그렇지 못 하니까.. 광야가 있는 겁니다. 

그 광야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죄의 종된 습관, 사고방식.. 그런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벗겨내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메마른 땅을 걸어가지만, 
만나로 먹이시고,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 갈 때, 
놀랍게도 광야는 약속의 땅처럼 변합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종류의 광야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상황 속에서 때로는 경제적 위기로 인한 광야, 
육체의 질병이라는 광야, 가정의 문제로 인한 광야... 

많은 광야들이 있는데, 그 광야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드리는 순간 
놀랍게도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거죠. 

하나님이 광야를 허락하신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이제 죄의 종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종'이라는 그런 인간의 실존은 변화 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죄의 종으로 살 것인가? 
의의 종, 하나님의 종으로 살 것인가? 의 문제이지 
종이라는, 그 의존적 존재라는 것, 결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죠.

▲3. 세 번째 변화는, '열매' 라는 단어로 설명하죠. 
죄의 열매에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겁니다. 

6:20~22절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의에 대해 자유스러웠습니다.
21 그러나 여러분은 그때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그런 일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이는 그것들의 마지막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22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열매' 라는 단어로 이 변화를 설명합니다. 
'열매'라는 것은 시간이 포함된 단어죠.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피를 토하고 갑자기 죽지 않았어요. 
9백세 넘게 살아 있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맺은 열매는 무엇입니까? 죽음, 사망이었습니다. 
실제 이 '죽음'이라는 열매가, 우리는 늘 우리의 삶에 언젠가 거두게 될 열매입니다.
죄가 거두게 될 분명한 열매가 사망인 거죠.

여러분 '죄'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사망'이라는 실재가 존재 합니다. 
그렇다면 '의'라는 실체가 존재하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실재도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장례식장에 가서야, 혹은 가까운 가족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이 죽음의 실재를 잠시 경험하고.. 또 지나가면 잊어버립니다. 

가까운 분의 장례를 치르고도, 장례식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또 죽음의 실재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란 열매는, 죄가운데 있는 이들이 반드시 경험할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러한 열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영생'이라는 열매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영생'이라고 하면, 막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생명은 막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숨을 쉬고 살아 있기 때문에, 생명은 현실이지, 막연하지 않다고 여기는데요, 

'그럼 당신의 생명을 좀 보여 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우리의 심장이 뛰고, 뇌가 사고하고, 호흡하는 모든 것은 
생명의 증상일 뿐이지, 이거 자체가 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코를 통해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코는 계속 호흡하는 것이고, 심장은 뛰는 것이고, 눈을 뜨고 보는 것이죠. 

모든 지체가 생명의 현상을 말할 뿐이지, 
우리가 핀셋으로 끄집어 내어 '이게 생명입니다' 라고 누구에게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그저 '나는 살아있다' 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생명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영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영생이요!' 라고 보여 줄 순 없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열매를 맺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열매가 아니라, '생명'의 열매, 
또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그러한 열매를 맺는 삶이 나타난다는 거죠.

'이것이 영생이요' 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거죠.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거룩함이요, 의로움이요, 그리고 이 땅에 다른 영혼을 살리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며 살 것인가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며 살 것인가요?
어떤 열매가 우리의 삶에 맺어지고 있는가요? 

육체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면 
작은 씨앗 안에 생명이 있으면 
씨앗은 썩어져도 새로운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썩어질 육체의 영원한 생명이 그 속에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부활의 열매를 맺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인간의 존재는 무기가 될 수 있는데, 
불의의 무기이거나, 의의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의존적 존재입니다. 
종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 것인가?

-인간은 열매를 맺는 존재입니다. 
죄와 죽음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인가, 거룩한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것인가?

이제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돼요. 

그렇다면 그건 율법적인 명령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은혜의 명령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기초로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에, 은혜의 명령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으니 
이제 당신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으십시오' .. 가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신 죽음 안에서 
당신의 옛사람도 이미 함께 죽었으니 
(이제부터는)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사십시오!' 입니다. 

다른 말이죠. 은혜의 명령입니다. 

과거에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죄가운데 죽은'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으니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의의 무기가 되고, 의의 종이 되고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결론은 6:23절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결론이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 결론이 영생입니다. 

죽음은 우리 스스로 획득한 겁니다.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인과응보를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영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요,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 수 있게 되었죠.

이제 '은혜 아래'있는 우리에게 명령이 주어지는데
'은혜의 명령'입니다. 

즉 '이제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위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으로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이 죄를 이길 수 있는 순종의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순종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엄청난 '의의 무기'들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땅에서 풍성한 삶,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우리 자신의 드리며 
그리고 쓰임 받는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순종의 능력을 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의의 무기로,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맺는 삶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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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공장을 바꿔야지, 생산품을 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혈액은 크게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으로 나뉜다.
어느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끝내 목숨을 잃게 된다.

보존치료 방법으로 수혈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방편으로,
나중에는 수혈을 받아도 더 이상 수치가 올라가지 않고
몸에는 철분이 많이 쌓여 다른 장기손상이 오게 된다.

결국 혈액암(백혈병)을 고칠 수 있는 근본적 치료방법은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을 만들어 내는
조혈모세포 이식을 통한 완치가 근본적인 방법인 것이다.

즉, 피를 만들어 내는 공장(조혈모세포)의 치료 없이
생산품을 아무리 뜯어고치고 개선하려 해도
계속해서 불량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죄를 짓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죄 공장’으로 태어났기에

그 죄를 해결할 방법은
결단과, 노력과, 수고와, 헌신이 아니라
‘죄 공장’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부활과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케 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생활은
죄의 증상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인식하며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포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