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는 이렇게 핍박 가운데 흩어져서 가난 속에 고통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견디라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꿀 수 없으니, 억울해도 그냥 계속 참아라.. 라는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시험을 통해 이루시는 목적이 있으므로 그 목적을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이 시험을 견뎌야 한다.. 라는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내'가 야고보서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1:12절 '시험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는 그가 인정을 받은 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다.. 생명의 면류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5:7~8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주께서 오실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땅의 열매를 참고 기다리며 이를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기까지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오래 참고 여러분의 마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주의 강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5:11절 '보십시오. 우리가 인내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과를 보았습니다. 주는 자비와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다.'
농부의 인내를 예로 들고, 또 욥의 인내를 예로 들었습니다. 농부는 그 당시에, 대부분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그 열매를 맺기 까지, 얼마나 기다리는가... 직감적으로 않았을 것이고
또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이 시대는 아직 신약 정경이 완성되지 았았기 때문에, 구약 성경만 있었던 시대죠)
욥의 인내를 예로 들어서, 그들이 처한 상황에 욥의 고난을 대입시키도록 권면한 것이죠. 욥이 가족 상실의 위험, 건강이 무너지는 위험, 또 그 이해할 수 없는 그 시험 가운데 인내로써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신 시험을 통과했듯이 욥이 당한 그 시험의 무게에 비하면, 당시 성도들의 시험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거예요.
욥은 정말 인내했어요. 그리고 그 인내로 시험을 통과 했던 것입니다.
그 욥의 인내, 그 한 단어로, 그 긴 욥기를 요약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는, 내가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1: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십시오' 에서 우리 한글 성경들은 거의 대부분,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인내를 이루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근데 원어를 직역하면, 우리가 주어가 되어서 인내를 이루고, 참고, 견딘다는 의미보다도 인내 그 자체가 주어가 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대부분은, 이러한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사역동사 let 을 써서 번역을 했지요. *let patience have her perfect work(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의 KJV)
그래서 원래 대로 번역하면 '인내가 온전히 역사하도록 하라' 입니다.
'너희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이런 내가 참고 견디는 인내의 차원이 아니라 *내가 주체 아님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 안에 인내가 시작되는 거예요.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인내지만, 인내가 찾아오는 거예요. 그 시험 자체를 통해 인내가 찾아오는데 이건 인내를 온전히 이루도록 역사하는 분이 계시는 거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내를 통해 우리를 나의 의지나 계획과 상관없이 어떤 목적을 향해 무리를 이끌고 가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여전히 '내'가 선수이고, '하나님'은 코치가 되십니다.
코치는 선수를 이끌어 가지만, 결국 경기장에서 뛰는 자는 '선수'이지, '코치'는 아닙니다.)
즉 1:4절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인내가
온전히 그 역사를 이루도록,
너희가 방해하지 말고, 거스르지 말고, 피하지 말고, 너희 자신을 내어드리고, 그 역사에 참여하도록 하라' ... 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온전히 인내를 이루라' 라는 의미보다 '인내가 온전히 역사 되도록 하라' 가 원래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우리의 힘과 능력과 의지와 결심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거지요.
우리 힘과 능력과 결심, 우리 행함 너머에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하나님의 능력과 붙드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이를 교리화 해서 '성도의 견인'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것은 참된 믿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 믿음이라면 성도가 살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 성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 영원하신 사랑, 풍성하신 사랑과
성자 예수님의 그 중보와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게 된다... 곧 구원을 이루게 된다..는 거예요.
내가 참고 견딤으로서만 이룰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그 인내를 통해 우리에게 임한다는 거죠. 그 인내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온전히 역사하도록 하라' 라는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숨어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빌1:6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성취하시길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바울이 확신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 가운데 시작하신 선한 일, 그건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그것은 우리 안에 인내를 통하여 구원을 성취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즉시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확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에는 반드시 시험이 주어지는데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그걸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인데
우리가 그 시험을 당할 때, 믿음으로 인내 속에 들어가고 하나님은 그 인내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인내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 당할 때, 우리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 인내 속에 하나님의 임재,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 인내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 인내가 온전히 역사하도록 하라! 그 인내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손길, 섭리, 능력과 은혜를 발견하면서 우리가 순종해 나갈 때 놀랍게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여정을 끝까지 견딜 수 있다는 거예요. 주1)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완벽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받았다.. 라고 말할 수 없고,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시며 우리도 그 안에 인내함을 통해서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나님(성령님)이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임에도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곳은 이 성도를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인내는, 그 하나님의 견인에 따라가는 인내입니다.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그 하나님의 견인, 거기에 우리가 함께 따라가는 거죠.
그러므로 시험이 다가올때 내 능력과 의지와 결심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견인이 그 안에 있기에, 인내와 함께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인내를) 따라갈 때 우리는 점점 점점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거죠.
◑그러므로 1장 본문에, <어떻게 인내해야 될 것인가>를 세 가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온전히 기쁘게 여기며 인내하라
2 '내 형제들이여,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십시오. 3. 여러분이 알다시피 여러분의 믿음의 연단은 인내를 이룹니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온전하고 성숙하게 돼 아무것에도 부족한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혹시 시험을 만날 때 라는 뜻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시험을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라는 뜻입니다.
시험은 필연입니다. 필수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시험을 통해 검증되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반드시 시험을 통해 검증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내 인생에 한 번도 시험이라는 게 없었어' 라고 말한다면 어쩌면 진정한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 믿기 전에 내 삶은 평탄 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부터 왜 이렇게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생기는지..' 이때는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우리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전보다는 더 불편하고 예전보다는 너 힘겨운 인생을 살지만
이제는 그 이전에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시험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은혜가 더 생겼기 때문이에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은 시험 그 자체가 주는 고통은 즐거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 것인가를 말씀하셨죠. '믿음의 연단'은 인내를 만들어내고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될 때 그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자분들은 군복무를 하신 분들은, 훈련소 생활을 다 떠올리실 겁니다. 훈련소에서는 조교들이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얼차려를 주고 사병들의 몸을 피곤하게 하잖아요.
매일 밤 점호 할 때마다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팔굽혀펴기 몇 번을 해야 되고
그러다가 수료할 때 쯤, 그게 의도적인 것임을 그때 알게 되죠. 왜요? 자기 몸이 달라졌거든요. 더 단련된 몸이 된 것을 보면서 어떻게든 신병들의 몸을 훈련 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얼차려로 몸을 힘들게 했구나... 그때 와서 깨달아요.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자원해서 훈련을 받았을 텐데요... (이렇게 말을 쉽게 하지만, 당해 보면 참 힘든 거예요)
그렇지만 결과를 내다보고 견디는 사람과, 그냥 끌려가는 사람하고는 이건 차원이 다른 거예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종'은 직분보다는 신분을 나타내는 말로서 야고보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 서신의 기록자 '야고보'는 예수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중 한 사람이었다(행 15:13, 21:18).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사역하는 동안에 '예수님을 미쳤다'고 여겼던 가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개인적으로 나타나셔서 만나주신 만남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그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대표 지도자가 되어서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공의회(행15장)와 같은 중요한 회의를 주재하였다.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흩어져 있는 열 두 시파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예루살렘 멸망(AD 70년) 이후 팔레스틴 이외의 흩어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8:1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 중후자가 타당하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형제들'은 야고보가 자주 사용하는 어투로서 본서에서 5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형제'라는 호칭의 헬라어 '아델포이'는 본래유대인들이 같은동족에게 사용하였으나(출 2:11, 신15:2) 초대 교회에서 교인들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본절에서는 야고보와 수신자 사이의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시사한다(2:1, 14, 3:1, 10, 12, 5:12, 19).
'너희가 여러 기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는 신자들이 박해를 파해 흩어진 자들이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최대 관심사인 시험에 대해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마 6:13) 일단 시험을 맞게 되면 잠시 근심하게 될지라도 그것이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기쁘게 여겨야 한다(벧전1:6).
한편 '만나거든'의 헬라어 '페리페세테' 는 문자적으로 '한 가운데 떨어지다'의 의미인데 본문에서는 사건에 직면한 현실을 나타낸다(눅 10:30).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험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련에 대한 야고보의 표현은 바울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바울은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4)고 하여 '인내'( 휘포모넨)를 원인적인 위치에 둔다.
그러나 야고보는 '인내'가 시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로 보고 있다. 이런 상이한 표현은 강조점의 차이 때문이다. 바울은 시련의 과정을 중요시 한 반면, 야고보는 고난 자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온진히'에 해당하는 혤라어 '텔레이온'은 '끝'올 의미하는 '텔로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온전하여 져야 함을 시사한다(마 5:48).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의 '온전하고'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인내를 갖춤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타밈'('흠이 없는')으로 인간 생활이나 재물에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창 6:9).
한편 '구비하여'의 헬라어 '홀로클레로이는 '전체'를 의미하는 '홀로스'와 '할당'을 의미하는 '클레로스'의 합성어이다. 이는 신체의 각 부분이 모두 건전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행 3:16)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부분에서 갖춰야 할것들을 시사한다.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지상의 생활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마음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너희 중에 누구든 지혜가 부족하거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항상 불완전하여 온전한 인내를 이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은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쉬우며 환난 가운데서 기뻐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시련을 온전히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필요함을 진술한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에게 결코 인색하지 않고 풍성히 주시는 분이다. 본절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너무 빈번히 기도하여 번거롭게 한다고 해도 결코 책망하지 않는 분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도에 항상 관대하게 응답하심을 뜻한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디아크리노메스'는 '디아'('사이에')와 '크리노'('분리시키다')의 합성어로서 어떤 문제에 대해 양쪽에서 저울질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말은 심리적으로 두 마음을 품은 분리된 상태 즉 마음 속에서 의심하는 것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행 10:20).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디프쉬코스)은 본서에만 나오는 말이다(4:8). '디프쉬코스'는 신약성경 이전에 전혀 사용된 문헌이 없고 신약성경 이후의 교부시대에 자주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아마 야고보가 만들어 낸 단어일 것으로 추측된다(Gibson).
이 말은 '정함이 없는'(아카타스타토스)과 평행을 이루는 말로서 두 가지의 방법이나 생각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마음이 항상 불안정하여 변하기 쉬우므로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자들이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 되어있다. 이 '데'는 9-11절의 내용이 2-5절의 시험과 연결된 것임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12절에서 다시 '시험'에 대해 언급되기 때문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낮은'에 해당하는 '호 타페이노스'가 신분적인 것인지 아니면 물질적 또는 육체적인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으나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가리켰으며(시 72:4, 잠 30:14)
10절의 '부한 형제'(호 플루시오스) 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본절의 '호 타페이노스'는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비천에 처한 자들이 자랑해야할 것은 '높음'이라 했다. 여기서 '높음'이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피조물의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승귀를 나타낸다(요15:15, 계 3:21).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비천한 자리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인내함으로 보다 더 영예로운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 지니' '낮은 형제'와 마찬가지로 부자들도 취해야 할 마음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절의 '부한 자'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물질적으로 부요하거나 어려움을 당해보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부자인 형제들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영적인 교만함까지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부한 형제들은 지상에서 소유한 부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일시적인 것임을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빌 2:8) 낮은 자와 동일시하며 부를 자랑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한다.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본절은 부한 형제들이 낮아짐을 자랑해야 할 이유이다. 아무리 부요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부요함을 영원히 누리지는 못한다. 마치 꽃이 시드는 것처럼 부(富)뿐만 아니라 생명도 곧 시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시 102:11, 사 40:6,7, 고전 7:31, 벧전 1:24).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야고보는 사 40:7을 인용하여 부한 자의 부를 덧없는 풀의 꽃에 비유하여 부한 형제들이 낮아져야 함을 권면한다. '해가 돋고 뜨거은 바람이 불어'는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뜨거운 바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소니' 란 말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 오는 '시로코' 라는 뜨거운 남동풍으로 이 바람이 불어 오면 곧장 채소 따위의 식물이 말라죽곤 하였다(욥 1:19, 눅 12:55).
이처럼 부자의 입는 옷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오는 안락은 쉽게 시들어 버린다. 그러기에 부한자는 일시적인 부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아져야 한다.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쇠잔하다'의 헬라어 '마란데세타이'는 '불을 끄다'라는 의미를 지닌 '마라이노'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부와 영화가 영원하지 않으며 사라지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의 때에 부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 있던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행한 일로 인하여 심판을 받고역시 그것들과 함께 사라질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을 해석할때 '부와 함께'를 포함하여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험'에 해당하는 혤라어 '페이라스몬은 2절에서 사용된 '페이라스모이스'('시험')와 동일한 것으로 믿음의 연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본절이 2-13절과 연결된 것임을 나타낸다.
한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표현은 유대의 지혜서와 묵시 문학적인 표현 방법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시 1:1, 32:1, 잠 8:32,34, 사56:2) 예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축복을 말하였다(마 5:3-11). 따라서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법에 익숙하였음을 밝혀 주고 있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본절은 '호티'로 시작하며 시험을 참는 자에 대한 결과를 설명하는 목적절이다.
'인정하심을 받은'의 헬라어 '도키모스'는 3절에서 사용된 것처럼 '금이나 은을 제련하여 귀금속이나 동전으로서 자격을 얻는 것'과 같은 인정함을 의미한다(롬 5: 4). 이것은 시험의 과정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에게 순수함이 인정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스테파논)은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면류관으로 (고전 9:25, 딤후 4:8) 시험과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 지는 '생명의 면류관'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본절의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조메노스'는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유혹'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죄악의 기질과 욕심에 미혹되어 발생하는 것으로(14절)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본절은 사람이 유혹을 받는 근원을 설명하고 있다. '시험'(temptation)이 사람을 연단시키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 섭리라고 합리화 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이다.
'미혹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아조메노스'는 원래 사냥이나 고기잡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 '미끼로 고기를 꿰어 내다', '올가미로 사냥하다'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마치물고기가 자기앞에 놓인 낚시 바늘에 물려 이리 저리로 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한편 '욕심'의 헬라어 '에피뒤미아스'는 악한 뜻에 대한 열망이다(롬 7:17-23, 갈 5:16-21, 엡 2:3, 살전 4:5).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행동으로 유발되지 않은 상태 즉 내적 상태로 머물러 있을때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야고보는 인간이 욕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죄가 싹이트고 결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강조하고 있다.
'잉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라부사'는 문자적으로 '함께 붙잡다'라는 의미이나 여자의 임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눅 1:24).
여기서는 죄의 단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욕심' 그 자체가 바로 죄이다. 혹자는 욕심을 자연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죄란 욕심에게 굴복당하는 시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욕심이 순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욕심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필연적으로 죄를 유발하고 그 마음의 상태가 습관으로 굳어 져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창 3:19, 롬 5:12).
'낳다'에 해당하는 두 단어 '틱테이'와 '아포퀴에이'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을 의미하나 전자는 문학적인 표현이고 후자는 의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상적으로나 비정상적으로나 출산하는 것 모두를 뜻하나 본문에서는 비정상적인 출산 즉 유산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적 사망을 잉태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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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설명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은 3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그 중 1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 그들은 끝까지 은혜의 상태에서 확실하게 보존되어 영원히 구원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