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경건 (야고보서 1:19-27)│2022.02.20 - YouTube
◈참된 경건 약1:19~27 2022.02.20.녹취, 정리
※정리하는 과정에서, 원본과 약간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해가 까다로운 본문을 해석하는 하나의 틀로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해석할 때 참조해 보세요.
역사적으로 야고보서에 대하여 가졌던 오해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의를 드러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서신에 보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중에 일부분이라도 야고보서에 나타났다면 그런 오해가 없었을텐데
그런 면이 나타나지 않는다 라고 해서,
야고보서를 인간의 의를 강조하는 책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 오해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장 19~27절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음으로써 일어난 오해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또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성도들이
이제 핍박 속에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주어진 서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는, 이미 이 신앙의 기초(즉 이신득의 같은), 위에 있었고
그런 공감대 위에서, 이제 현실에서 시험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권면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신득의를 설명할 필요가 없죠, 그 후의 경건한 삶에 대해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시험을 어떻게 이기고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권면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경건'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과 27절에 보면 '경건' 이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사용하여 강조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경건을 religion 으로 주로 번역했는데,
이는 우리 말로 '종교'로 번역하면 안 되고, '신앙'이라는 단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원문 헬라어의 의미로는, 하나님을 경외함, 두려워함, 하나님을 예배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스레이케이아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경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한자어로 경건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며, 또한 자신을 살펴 흠이 없게 한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경건'이라는 한자어로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본문의 마지막 절인 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을 말씀하기까지
19~26일까지 줄곧 강조하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를 연결하면,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약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실천하는 경건'에 대하여
야고보는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올바른 응답을 함으로써
실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올바로 응답하여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전 인격을 통하여 삶으로 나타나는 것 .. 이것이 경건인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라고 할 때,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을 의미하는가요?
본문에서 영어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거듭나게 하는 말씀
18절에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낳았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두 개의 중요한 통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그 거룩하신, 흠이 없는 그 보혈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하시며,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처리되며, 우리 옛사람이 함께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거듭난 것, 우리의 새로운 출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 라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 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말씀이 19절부터 이어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는데, 이제 그 말씀을 우리가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2. 새언약의 말씀
그런데 그 말씀은, 또 21절에 "마음에 심어진 말씀 Implanted Word"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21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심겨진 말씀,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겨졌다는 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말씀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외부에서 우리 가운데 들어온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심겨진 말씀'이 있다는 거죠.
이것은 예레미야서에 예언된 "새 언약의 성취"를 염두에 둔 표현이죠.
렘31:33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겔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두 구절은 대표적인 새 언약의 말씀입니다.
새언약이란, 과거에 모세를 통해 주신 옛언약인 율법 앞에
철저히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 실패의 증거가, 성전의 파괴와 나라의 멸망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이 새언약을 주셨습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를 통해서요.
바로 위에서, 새언약의 대표적인 두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이제 말씀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해 주신다는 거예요.
과거에 모세를 통해 주신 그 율법은, 돌판에 새겨지고, 사람들에게 들려졌는데,
사람들이 그 언약(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율법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즉 내면적으로 언약을 지키지 못했고, 외적 행위로 지키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의 패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소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마음에 기록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누가 하십니까? 성령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내 성령을 너희 안에 두어서, 너희로 하여금
그 심겨진 말씀을 행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겔36:27
야고보가 이 서신을 통하여 "마음에 심겨진 말씀"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21
야고보 사도를 비롯하여, 그 편지를 읽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새언약의 성취를 이미 경험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죠.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에
자신들 안에 일어난 어떤 변화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졌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이후에,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는 거예요. :21
'우리 마음에 심겨진 말씀이 있지 않느냐'
성령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고백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다.
▲3. 셋째로, 이 말씀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받으라'
receive the word implanted, which is able to save your souls NASB
이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
이 진리의 말씀을 심어 주시며,
또한 그 말씀이 계속해서 그들의 마음 속에 존재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때까지 그들을 인도하고 지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 이 말씀의 능력, 이 말씀의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았으며, 또 구원받을 것을.. 어떻게 우리가 확신할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 자신의 선한 행위를 근거한다면,
내가 선한 행위를 할 때는 구원 받은 거 같고,
선한 행실이 없을 때, 때로 유혹과 시험에 쓰러질 때는
우리가 구원 못 받는다고 생각 하지 않겠어요?
선한 행실이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내 구원의 확신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이 우리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 주는 거예요.
왜냐면 그 말씀이 우리를 계속해서 회개하게 하시며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에요.
때로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갈등하는 성도님들이 계시죠.
이 세상에 유혹과 시험에 빠져서 '나 같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구원 못 받은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예 그런 갈등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 마음 속에 기록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갈등이 있고
그 말씀 앞에 내가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 그것을 깨닫는 자체가,
그런 회개가 일어난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인 거예요.
▲4. 또한 이 말씀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25 *the perfect law of liberty
여기서 갑자기 '율법'이란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편이기 때문입니다.
앞서는 말씀, 말씀, 헬라어로 로고스 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것은 헬라인들에게 더 익숙한 표현이죠.
그런데 '말씀'으로 일관하다가 25절에서 갑자기 '율법 (노모스)'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유대인들을 배려한, 유대문화에 익숙한 이들을 배려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모세에 갇혀 있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그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의 의미이죠. 요8:32
우리를 낳으신 진리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고
그 말씀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며
또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생활하는 것은, 우리를 얽매거나 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자유케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구속 받기 싫어서, 얽매이기 싫어서 라고 하죠. 착각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삶만이 진정한 자유의 삶이에요.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이란 형태로 주셨지만
이제 (신약시대에는, 새언약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성령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기록해 주신 거예요.
그러므로 그 기록된 말씀을 따라 행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게 자유의 삶이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케 되는 삶인 것입니다. 마5:4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비유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비유가 바로 '씨앗과 땅의 비유'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씨앗은 말씀을 의미하고, 땅은 우리의 마음을 의미 하죠.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 또 4가지 밭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 비유 등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비유가
바로 이 <말씀의 씨앗과 영혼의 밭의 비유>이죠.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겨졌고
이 말씀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며
또한 우리를 자유케 하는데..
◑말씀의 열매로 나타나는 "경건한 삶"
이제 말씀이 우리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야고보는 우리 신체기관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우리 귀를 통해서 말씀에 대한 경청을 강조합니다.
19절 '사람마다 듣기는 빨리하고'
이것은 인간 관계 속에서 어떤 경청의 자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영적인 귀, 경청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빨리 듣는다..는 귀가 얇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말이 들려 오든지 빨리 반응하는 그런 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빨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육적인 귀로는 분명히 듣는데
영적인 귀로 필터링을 해 버려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 귀에 지시를 해요. '다 듣지 마라, 그러면 힘들다'
'네가 말씀을 다 들어 버리면, 내 양심이 힘드니까, 적절히 들어!' 라는 지시를 내리죠.
그래서 육체의 귀로는 분명히 들었지만, 영적인 귀로는 막아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며' 라는 이 말씀은,
아무런 저항없이 말씀을 들으라는 거예요. 깊이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말씀을 순수하게 귀 기울여 들으라는 것입니다.
▲2. 입
19절 '말하기는 천천히 하며'
26절 '만일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자기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경건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하기를 천천히 하라'는 것은, 말의 속도를 느리게 하라는 뜻이 아니죠.
이것은 매우 적절한 말, 절제된 말, 적합한 말,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단어 수를 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이 살아 있는 사람의 언어는,
다른 사람을 살리고,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새롭게 하는 그런 언어가 나오는 거예요.
거짓이 없습니다. 왜곡된 말이 없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트위스트(비트는) 하는 그런 말이 없어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언어가 되는 것이죠.
혀를 제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영혼,
마음에 기록된 말씀에 지배되는 혀가 될 때만
우리의 혀는 제어될 수가 있는 거예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언어 생활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침이 없는 영혼은,
그 언어를 가지고 자기 이익을 도모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합니다. 다른 사람을 헐뜯습니다.
이야기를 전할 때 가감하며 전합니다.
말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일으키며
결국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려고 합니다.
경건하지 못한 삶이죠.
▲3. 셋째로, 눈이라는 기관을 통해 깨달은 말씀을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22~24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말씀을 영혼의 거울로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더러움을 닦기 위해서, 거울을 보고 우리 외모를 교정합니다.
근데 거울을 자기 눈으로 보고, 더러움을 발견하고도
바로 뒤돌아서서 잊어버리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요?
그것은 마치, 말씀을 우리가 눈으로 읽고 깨달음을 얻지만
고치지 않는다면
거울을 보고 금방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거울을 보긴 봤는데 왜 잊어버릴까요?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귀로는 들었는데 왜 듣지 못할까요?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혀로써 왜 적합하지 않은 말이 튀어 나올까요?
본심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혀가 전달하는 그 언어 이면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는 것이죠.
결국에 이 모든 문제가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와, 눈과, 입이.. 왜 왜곡된 그러한 상태로 존재할까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언어가 왜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그런 말을 할까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에 '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1
우리 마음에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 있을 때
우리의 귀와 눈과 입은,
그 기능을 합당하게 발휘하지 못합니다. 따로 따로 노는 겁니다.
귀는 귀대로, 눈은 눈대로, 입은 입대로
그렇게 다 분열된 인격이 되는 겁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말을 해도 합당하지 않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마음에 넘치는 악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거예요.
똑같은 상황과 정보를 보고도, 사람들은 각자 다르게 결론을 내리죠.
가나안을 정탐 했던 12명의 정탐꾼들처럼요.
그러므로 사람들은 '선택적 지각'을 하는 겁니다.
TV나 뉴스에서 어떤 사건을 평가할 때,
동일한 사건을 놓고도, 각자 다르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더러움과 넘치는 악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지각이 다 파괴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 힘으로 가능합니까? 불가능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는 도구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시는 거예요.
그 십자가의 사건은, 과거의 십자가만이 아니라
오늘 내가 악을 벗어버릴 수 있는 도구로 주신 거예요.
내 안에 넘치는 악과 더러움이 발견 됐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고, 선포하시고, 간주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가 그 넘치는 악을 벗어버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받는 겁니다. 마음으로!
왜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왜 눈으로 봐도 깨닫지 못하고
왜 입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말을 하게 됩니까?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말씀을 받아들일 때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랬어요. :21
말씀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뜻합니다.
▲4. (손과 발로, 몸으로)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통로가 되어 그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또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삶입니다.
프로테스탄트 라는 의미가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 필요한 거예요.
타락한 세상 문화와 세력에 대하여 우리는 프로테스탄트가 되어야 돼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