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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21~25 위력적인 믿음의 기도

LNCK 2022. 8. 24. 07:14

위력적인 믿음의 기도(막 11:21-25)  21.8.29 - YouTube

 

◈위력적인 믿음의 기도          막11:21~25         2021.08.29.출처

 

※'저 산을 명하여 바다로 던지우는' 말씀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탄생과

그 이후로 일어날 복음의 세계적 전파 사건과 연결해서 해석합니다...

 

오늘 본문 역시 무화과나무 사건에 대한 메시지의 연장선입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자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베드로가 그 장면을 보고 놀라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주는 의미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언뜻 보면 연결이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에 놀랐는데 왜 갑자기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실까요?

문맥상 끊기는 듯합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주를 받아 나무가 말랐다는 것은 성전의 무너짐과 이스라엘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사건은 이스라엘의 실패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실패처럼 보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스라엘은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의 깊은 의미는 겉으로는 이스라엘의 실패,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실패로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본문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의 비유는 일종의 예언적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산을 들어 바다로 던져지라는 비유는 주로 불가능을 이야기할 때 사용됩니다.

 

이 구절은 “믿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신념일 수 있습니다.

 

물론 믿음은 중요합니다.

본문 23절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대상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지금의 상황이면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보면 왠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삶은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의심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언제나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적다”는 책망을 자주 받았습니다.

 

이제 곧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지상의 사역을 마무리하셔야 합니다.

제자들과 더 이상 육신적으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며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앞으로 절망할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십니다. 그토록 추종하고 따라다녔는데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인간적인 기대가 사라지고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사건 앞에서도 믿음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고 눈으로 보는 성전이 사라져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일을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성전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새로운 공동체가 일어납니다.

    120명이 모여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일으키십니다.

    로마에 의해 성전이 완전히 훼파되고 예루살렘은 함락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온 세계 열방에 하나님의 성전을 일으키시고

    기도하는 집을 세우셨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더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잘 보아야 합니다. 역사는 인간이 엮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이 엮어가십니다.

 

별별 일이 다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과 목적을 조금도 오차 없이 이루십니다.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교회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된 기관, 조직이 없습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속 교회를 넘어뜨리기 위한 수없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대단하게 일어났던 것들도 어느 순간에 다 사라졌습니다. 국가도, 제국들도 다 무너집니다.

그런데 신약의 교회는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혼란 속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에도 신실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안에서도 살아있는 성전 된 공동체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망할 것 같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없어질 것 같은데 안 없어집니다.

 

유럽에 가면 교회들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러면 다 끝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곳곳에 신실한 교회들이 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하면 던져질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적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초점은 우리 편에서의 강한 결단과 의지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였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접붙임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척했습니다.

믿는 것과 믿는 척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척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믿는 척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보통 뒷부분에 줄을 긋고 감동하지만, 초점은 앞에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믿음이란 거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결속, 연합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믿음입니다.

함께하다 보니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의 결과입니다.

 

열매는 접붙여진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믿음은 온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합니다.

 

접붙여 있는 것은 일시적인 연합이 아닙니다. 가지는 나무에 계속 붙어있어야 합니다.

붙였다 떨어졌다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붙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마른 막대기 하나를 통해 애굽의 바로를 무릎 꿇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상황에 변화를 구하지 말고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상황은 언제나 변화무쌍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과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대조적입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만 마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거대한 성전을 바다에 빠뜨려 버리게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난 상황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제를 기도로 옮기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주술행위 같은 게 아닙니다. 기도는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게 합니다.

 

마가는 이미 앞서 자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열매 맺는 삶에는 기도가 따라야 합니다. 삶의 열매들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과 기도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기적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상황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런데 기도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지만, 믿음의 기도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본문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믿음의 기도를 용서로 연결시킵니다.

왜 갑자기 용서의 주제를 가지고 오셨을까요?

용서의 메시지가 뜬금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을 뒤집어엎으시고 성전이 허물어지는 것을 선포하시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들이 불어났습니다.

 

그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흔드니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벌떼처럼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재촉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주님은 불법적 재판에 넘겨져 십자가에 매달리셔야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님은 용서의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백성 됨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적인 가치는 용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용서를 강조하십니다.

 

주님은 폭력적인 세상 속에 전혀 다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세상은 투쟁적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보복의 원리가 기본입니다. 원수를 갚고 또 되갚습니다.

용서를 놓치면 그 순간 진흙탕 싸움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보여 주신 본을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특징은 ‘용서’입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십자가는 인류에게 용서를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가르쳐주신 사건입니다.

 

용서는 가볍게 다룰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없는 곳은 금방 전쟁터로 변합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모든 비극과 불행 한가운데는 보복이 있습니다.

용서는 기도와 깊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계속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이기적으로 기울게 됩니다.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나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기도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을 악으로 대하면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자기를 학대하고 죽이려 했고, 인신매매까지 한 형제들에게 원한을 품고 살았다면

총리가 된 다음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계속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쓰임 받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용서일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본성적으로 보복이 쉽습니다.

 

왜 사람들이 무협지를 많이 읽습니까? 원수를 갚는 장면들 속에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기도와 용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기도하는 사람은 곧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내 죄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었음을 먼저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은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온전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가 막혀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복음의 한 가운데는 용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안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한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용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용서하심 때문에 내가 존재합니다.

 

용서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산상수훈에서도 분명합니다.

마5장 23-24절에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제사보다 화해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나올 때마다 관계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화목을 우선적으로 하지 않으면 그냥 종교적 활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이율배반적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용서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베드로는 일곱 번 이야기하면 크게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주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를 횟수의 문제가 아닌 성품의 문제로 다루셨습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곳곳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분쟁지역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용서가 없는 곳은 어쩔 수 없이 폭력적입니다.

비극적인 사건 모두가 쌓인 분노를 해결하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면 자기 증오가 자살로 가고,

남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는 살인이 됩니다. 모두 용서의 문제입니다.

 

용서를 알지 못하면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빠진 인생은 공허합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용서가 커져갈수록 사랑도 커져갑니다.

 

용서를 통해 원수 간에 화해가 일어나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용서가 없는 곳은 틀림없이 지옥이 됩니다.

 

주님은 병자를 낫게 하실 때도 먼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십니다.

병 낫는 것보다 용서가 더 먼저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이 나아도 죄 용서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치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용서의 문제는 믿음생활, 기도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기도의 영은 용서의 영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영이 막혀버립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기도가 헷갈립니다.

기도가 왠지 계속 막힙니다. 결국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적대적인 세상에서 삽니다. 분노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자로 살기 참 어렵습니다.

 

요즘은 ‘코로나 레드’라고 말을 합니다. 분노가 쉽게 폭발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갈수록 좁아집니다. 특별히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경이 예민해져 자칫 관계가 쉽게 꼬입니다.

모든 일에 일일이 맞대응하면 하루도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늘 보아오는 불행한 일들은 용서의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 결과들입니다.

 

용서의 문제는 매우 예민하고 까다롭습니다. 잘못 다루면 더 악화될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신자는 부드러워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모함을 당하거나 맞아도 그냥 당하는 쪽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누가 밀면 밀리는 게 십자가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진흙탕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이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자기가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내 힘을 더 길러서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 인생은 계속 꼬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와 멀어지면 안 됩니다. 십자가로부터 멀어지면 답이 없는 길, 미궁으로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십자가로 더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내 삶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내 삶의 중심의 원리는 십자가입니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삶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은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제 십자가를 앞두고 그 길을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샬롬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필요한 사람들은 화평케하는 자들입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으십시오.

 

겉으로는 실패하는 것 같지만 그 길을 걷는 자에게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시는 가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길이요, 믿음으로 기도하는 일이요,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상황을 보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무엇보다 용서를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쓰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