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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4:11~12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LNCK 2022. 8. 27. 19:42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약4:11-12              여러 설교 정리        
 

 

▲서론 / 4:11~12절의 두 절을 따로 독립시켜 단락을 구분한 이유

 

야고보서의 단락 구분은, 사실 설교자나 주석가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뚜렷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형제들아'라고 시작되는 구절을, 단락 구분의 분수령으로 보는데 대부분 동의합니다.

1:2~, 1:16~, 2:1~, 2:14~, 3:1~, 3:12~, 4:11~  5:7~, 5:12~   *4:1~은 예외 

 

본절 약4:11~12절은, 딱 두 절만 떼서 한 단락으로 설정하기에는 너무 짧습니다만

본절을 <새 단락>으로 독립시킨 이유는

 

1) 본문 4:11절이 '형제들아~'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는 야고보 사도가 주제를 전환할 때마다 사용하는 일종의 접두어 입니다.

 

그런데 4:13~ 절은 '형제들아~' 대신에 '들으라'로, 저자는 주제를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4:11~12절을, 한 단락으로 독립시켰다는 얘기죠. (단락 구분을 다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4:13절의 '들으라 (헬, 아게 눈)'는, 영어로 'go to now', '이제 간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을 하다가, 주제가 바뀜을 표시하는 말이죠.    주1)

 

2) 본문의 주제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판단'이란 주제를

직전 단락인 4:1~10절에 추가시켜도 되는데,

그렇게 하면 이 '형제 비판'이란 주제의 중요성이, 다른 강조점과 뒤섞여 희석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따로 독립된 단락으로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본문의 '판단' (크리노)은, 유명한 마7:1에는 '비판'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로 judge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1

그래서 새번역, 공동번역에는 본문 11절을, '판단' 대신에 '심판'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1절 끝에 '재판장'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크리테스'입니다.  *어근이 크리노

그러니 11절은 '크리노'하지 말라, 너희에게는 '크리테스'가 계신다... 이런 뜻이죠.

 

그래서 새번역, 공동번역은 그런 의미를 살려서 '심판하지 말라, 심판관이 계신다'로 번역한 거죠.

('판단'이란 말은 한글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판단력'이란 긍정적인 뜻도 있는데, 본문은 그런 뜻은 아니죠)

 

 

 

◑절별 해석

 

직전 단락의 약4:1~2절을 보면, 초대교회 속에 싸움과 다툼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싸움과 다툼의 자연스런 결과는..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본 단락에서 '비방과 판단'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형제들아' 이 호칭은 '간음하는 여자들'(4절),'죄인들'(8절)이라는 호칭에 이어서
다시금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서로 비방하지 말라'
피차 비방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연합된 형제들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나타냅니다.

'형제들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이 구절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치 말아야 할 엄중한 이유입니다.

11절에 세번째 나오는 '형제'의 헬라어는 '톤 아델폰 아우투(그의 형제들)'로서  

개역엔 '아우투 his'를 생략하고 번역했으나,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자기 형제' 라고 번역함으로써, '아우투 his'를 살려서 번역,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들의 신령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저 '형제'가 아니고 '자기 형제'라는 말이죠. 마치 가족처럼요!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남을 헐뜯거나 멸시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곧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자의 입장에서 서는 경우가 된다는 말이 됩니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본절에서는 율법의 입법자나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임을 밝혀서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강조했습니다.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본절은 입법자와 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위치를 확증합니다(마 25:46).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며 율법의 준수 여부에 대한 재판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실 수도, 혹은 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사람들은 단지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에(11절)
재판자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을 하는 것은 죄악이며 금해야 할 행위입니다.

 

◑적용  

 

본문 결대로 적용점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형제를 판단하면 안 되는 이유는, '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11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위 11절에 세번째 나오는 '형제(밑줄)'의 헬라어는 '톤 아델폰 아우투(그의 형제들)'로서  

개역엔 '아우투 his, 그의'를 생략하고 그저 '형제'로 번역했으나,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자기 형제' 라고 번역함으로써, '아우투 his'를 살려서 번역했습니다.

 

즉 교우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자매들의 신령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저 '형제'가 아니고 '자기 형제'라는 말이죠. 마치 가족처럼요! 

 

막3:34~35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누가 자기 가족 흉을 보고, 자기 형제, 자매, 부모를 비방하며 다니겠습니까!

제 얼굴에 침 뱉기죠.

 

이런 경우, 어느 한 쪽이 '가족'이 아니라는 얘긴데,

비방하는 사람이, 가족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큽니다.

비방 받는 사람은, 맞받아 치지 않고 자기 입을 꾹 받고 있으면, 가족이라 여기기 때문인 거죠.

 

교회 안에서 비판과 분별의 차이는 뭘까요?      

 

‘교인’은 교회와 자기가 하나 됨을 느끼는 자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교회가 잘못 되어가는 것을 보고 들어도...

자기 책임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간혹

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비판하고, 분석하고...

이런 사람은 글쎄 아직 성도, 즉 공동체의 일원은 아니라고 봅니다.

 

진정한 성도는, 

교회가 잘하건 못하건

그게 전부 자기 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기 집안 일은, 대부분 모두가 자기 일로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잘 못하면.. 아들도 같이 피해를 당하게 되고

자식이 잘 못해도.. 그것이 부모에게 다 흉이 되고, 허물이 됩니다.

서로가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교회 부끄러움=내 부끄러움으로 느끼는 사람은... 교인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이게 문제야..’ 하면서

그 문제를 자기와 전혀 별개의 문제로 취급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교인’ 아닙니다.

 

여러분 ‘비판’과 ‘분별’의 차이를 아시는가요?

비판은 ... <나는 당신과 달라!> 이런 기반에서 생각하는 것은 ‘비판’이고, 

분별은 ... <당신의 잘못은 내 잘못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분별’입니다.

 

부부가 한 몸 된 것은

아내의 잘못은 남편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의 잘못은 아내가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은 진정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끼리도 보면

남편이 뭐가 문제라는데... 자기와 전혀 별개로 취급하는 사람이 있고,

아내가 뭐가 문제라는데... 자기와 동떨어진 문제로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미숙해서 서로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 성경의 원리대로 부부가 아닌 것입니다.

 

 

▲2. 비방과 판단은..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앉는 중대한 죄입니다. 

 

11b절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위 밑줄 그은 부분이 퍼뜩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는, 왜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느 자료를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형제를 비방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레19:16 등)

 

그런데 누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면, 그것을 금지한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요,

그건 자기가 율법 위에 군림하는 태도 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인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사람이 교통법규를 대놓고 지키지 않거나, 세금을 대놓고 조세 회피를 하면,

그것은 그런 법규를 제정한 사법체제를 무시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 위에 초법적 존재로 군림하게 되는 거죠.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도) 물론 그걸 의도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극단적인 예인지 모르나 여러분, 재판정을 잠시 상상해 보십시다.

재판을 받아야 되는 피고가, 재판장처럼 스스로 판결을 내려서 되겠습니까?

인간 법정에서도 그런 일은 용납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법정에서 그게 용납되겠습니까?

 

그래서 '누가 범죄한 것보다, 범죄한 자를 판단하는 그 사람은 더 큰 죄인이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똑같은 죄인이 재판장 행세를 하는 것은, 더 큰 죄인이 되는 이유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어지는 12절에서, 이 중대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3.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12절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문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너무 높아져 버린 것입니다.

형제를 판단함은, 궁극적으로 그것은 스스로 재판장이신 하나님처럼 자신을 높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형제들을 깎아내리려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도전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사람의 판단이 공의롭지 못한 것은, 다들 자기 손익에 따라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싸우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다들

교회를 위하며, 진리를 수호한다며 싸웁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그 속을 한거풀 벗겨보면 '자기 속에 싸우는 정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약4:1.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싸우거나, 남을 비방하는 것은 "자기 (교회) 손익 계산" 때문입니다.

자기 손익이 걸려 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남을 비방하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판단, 비방이 나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중립적으로 정의롭게 판단하기가 사실 어렵고,

뭔가 자기 손익에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 판단'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비판과 판단이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95%이상이며,

그 근거에는 '내 이익 (내 체면, 내 명예, 내 장래)'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존재이며, 설령 그런 정의로운 판단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입법자도 재판관도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교회의 정식 치리 기관이 하는 판단은 제외)

 

사실 같은 사람을 놓고도, 판단이 극명하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은,

각자가 모두 자기 손익을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이면.. 후하게 판단합니다.

 

반대로 그가 나의 위신을 깎는다든지, 내 그룹이 아니면.. 그를 심하게 비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십인십색'처럼 의견이 나뉘는 것입니다.

 

요즘 뉴스에 댓글 다는 문화가 있는데, 다들 자기 손익을 계산해서

댓글을 다는 것을 봅니다. 자기랑 관계 없는 일이면 비판할 이유도 아예 없습니다.

 

▲판단의 권위를 '교회'에 맡기십시오.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이 쉽게 판단하기 쉬운 분야                           출처

                              
씨 에스 루이스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졸개 악마가 큰 일이 났다고 법석을 떨었습니다.

스크루테이프(마귀 대장)가 그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큰 일 났습니다. 원수의 졸개(그리스도인) 하나가 진리 한 조각을 발견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스크루테이프는 빙그레 웃으며 "진리의 조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전부로 아는 것보다 안전한 경우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단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일부를 깨닫고 그것을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보다

사단에게 더 유리한 상황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합니다. 사단도 얼마든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이미 그런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은 진리의 조각을 전부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긴 하지만 정욕을 부채질하여 결과적으로 죄의 노예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불행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스크루테이프가 말한 진리의 조각을 붙들고 기뻐하는

바로 그 상황 속에 빠져 있기에, 안일한 삶 속에 빠져 죽음을 향한 거대한 흐름에 편승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조각을 전부로 아는 것의 치명적인 위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치명적인 위험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치열한 진리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오늘날 몇 가지 교리를 신봉하는 함량미달의 진리의 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평생토록 진리와 씨름하고 치열한 삶으로 채워가야 할 이 세상에서의 삶을 

그저 진리의 조각 몇 개를 붙들고 희희낙락하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모순된 삶이며, 불합리한 신앙행태인가를 인식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죄의 법에 노예가 되어 살면서도,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좋아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단이 빙그레 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의 조각들'의 예
   
1) 영접: 가장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단어는 영접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분명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지적 동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나 목회자가 하도 간청하기에, 선심 써서 예수 믿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자기 심령에 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며, 

그 변화는 마치 천지창조와 같이, 자기 어둠 속에 진리의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창1:3

 

그 결과, 돈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이제 영접한 후로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사랑과 섬김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의 본질이며,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영접'을 두고서, 서로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습니다. 

 

2) 이신칭의: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해야 할 교리로 '이신 칭의'입니다. 

이 교리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언제나 양방향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주도권만 강조되고 인간의 반응이 전혀 무시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도권은 분명 강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와 똑같이 인간의 반응 (response, 믿음의 결과, 믿음의 행위) 역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행위는 그러므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사랑의 요소입니다.
'이신칭의'를 놓고도, 서로 판단, 비판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되, 비방이나 판단은 조심해야 됩니다. 

 

3) 견인: 세 번째로 견인입니다. 견인이란 한 번 정해진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칼빈의 5대 강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하신 능력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상 

견인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언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은 언제든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떠났다가도 되돌아 올 수 있습니다. 

 

인간이 깨달아 돌아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살을 택한 유다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 되돌아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되, 비방이나 판단은 조심해야 됩니다. 사랑으로 말하고, 내 감정이 섞인 표현은 '비판'이 됩니다.   

 

4) 다원주의: 예수 이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을(행4:12)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말씀이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내야(방어해야) 할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리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그 말은 진리는 지켜야(방어)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 진리는 인간이 지킨다고(방어) 지켜지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진리를 지켜야 한다면 그것을 지키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진리를 수호하되, 선을 넘어서 싸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수호하시니까요)

 

진리는 그분의 말씀이며 따라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책임과 능력 역시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열심히 서로 사랑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2천 년 전에 오셨던 그분을 사랑으로 하나 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도한 논증은 필요 없습니다)
   
이 외에도,  긍정의 힘, 목적이 이끄는 삶, '믿음으로 자동 성화까지 되었다는 성화론' 등 

극단적 칼빈주의, 극단적 알미니안 주의 (칼빈주의가 맞지만, 알미니안 주의의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만약 알미니안 주의의 토대를 무시하고 칼빈주의만 주장하면 '하이퍼 칼비니즘'이 되고 맙니다)

수많은 진리의 조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두루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진리를 수호하되, 선을 넘어서 싸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실은, 사람들은 선을 넘어서 싸우기 쉽습니다.

 

판단하는 자들
  
진리의 조각들을 전부로 인식하는 것이 치명적인 위험인 또 다른 이유는 

진리의 조각을 전부로 신봉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초신자'라는 딱지도 떼기 전에 

의심하고 판단하는 것부터 배웁니다. 

물론 그것도 진리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집니다. 

어쨌든 기독교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벌써 이단인지 아닌지를 헤아립니다.
   
가톨릭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부터 배웁니다. 

(아마 가톨릭에게 개신교가 너무 많이 핍박당했던 16~18세기의 악몽의 잔재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나 봅니다) 

 

가톨릭 역시 개신교 신자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우습게 여기고 

그저 '형제'정도로만 여기고, 여전히 한 수 아래로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작은 교회를 애당초 무시하거나 판단하는 문화부터 배우는 것 같습니다.

 

바른 것을 추구하거나 본질을 향해 가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신자들을 보고,

한쪽에서는 빨갱이니 좌파니 종북이니 하는 딱지를 붙이고,

반대쪽에서는 수구 꼴통 이라는 딱지를.. 너무 쉽게 붙입니다.
 
무엇보다 부족한 진리의 잣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것이 치명적인 것은 

진리의 본질이어야 할 사랑을 붕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를 보면 형제애를 가지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무시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그래서 희한한 것은, 교회의 최대의 경쟁자가, 이웃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협력자이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미성숙한 판단"(본문 약4:11~12절의 주제)에 의해

기독교는 사랑이 없는 종교가 되고

하나님 나라가 마치 또 하나의 세상 나라처럼 되어서, 점점 더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떠난 진리, 진리의 조각이 되어버린 종교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비판 관련글 모음  https://blog.daum.net/rfcdrfcd/15978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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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헬라어 '아게눈'은 문자적으로 'go to now' 이지만   *현제, 능동, 명령, 2인칭 단수

의역하면 '지금 들으라'는 의미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지금 곧 주의해야 함을 나타낸다.

여기서 '아게'는 명령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부사적으로 사용되어

수신자들에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한다(5:1, 삿19:6).   *주석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