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4:13~ 절은 '형제들아~' 대신에 '들으라'로, 저자는 주제를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4:11~12절을, 한 단락으로 독립시켰다는 얘기죠. (단락 구분을 다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4:13절의 '들으라 (헬, 아게 눈)'는, 영어로 'go to now', '이제 간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을 하다가, 주제가 바뀜을 표시하는 말이죠. 주1)
2) 본문의 주제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판단'이란 주제를
직전 단락인 4:1~10절에 추가시켜도 되는데,
그렇게 하면 이 '형제 비판'이란 주제의 중요성이, 다른 강조점과 뒤섞여 희석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따로 독립된 단락으로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본문의 '판단' (크리노)은, 유명한 마7:1에는 '비판'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로 judge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1
그래서 새번역, 공동번역에는 본문 11절을, '판단' 대신에 '심판'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1절 끝에 '재판장'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크리테스'입니다. *어근이 크리노
그러니 11절은 '크리노'하지 말라, 너희에게는 '크리테스'가 계신다... 이런 뜻이죠.
그래서 새번역, 공동번역은 그런 의미를 살려서 '심판하지 말라, 심판관이 계신다'로 번역한 거죠.
('판단'이란 말은 한글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판단력'이란 긍정적인 뜻도 있는데, 본문은 그런 뜻은 아니죠)
◑절별 해석
직전 단락의 약4:1~2절을 보면, 초대교회 속에 싸움과 다툼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싸움과 다툼의 자연스런 결과는..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본 단락에서 '비방과 판단'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형제들아' 이 호칭은 '간음하는 여자들'(4절),'죄인들'(8절)이라는 호칭에 이어서 다시금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서로 비방하지 말라' 피차 비방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연합된 형제들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나타냅니다.
'형제들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이 구절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치 말아야 할 엄중한 이유입니다.
11절에 세번째 나오는 '형제'의 헬라어는 '톤 아델폰 아우투(그의 형제들)'로서
개역엔 '아우투 his'를 생략하고 번역했으나,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자기 형제' 라고 번역함으로써, '아우투 his'를 살려서 번역,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들의 신령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저 '형제'가 아니고 '자기 형제'라는 말이죠. 마치 가족처럼요!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남을 헐뜯거나 멸시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곧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자의 입장에서 서는 경우가 된다는 말이 됩니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본절에서는 율법의 입법자나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임을 밝혀서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강조했습니다.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본절은 입법자와 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위치를 확증합니다(마 25:46).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며 율법의 준수 여부에 대한 재판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실 수도, 혹은 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사람들은 단지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에(11절) 재판자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을 하는 것은 죄악이며 금해야 할 행위입니다.
◑적용
본문 결대로 적용점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형제를 판단하면 안 되는 이유는, '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11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위 11절에 세번째 나오는 '형제(밑줄)'의 헬라어는 '톤 아델폰 아우투(그의 형제들)'로서
개역엔 '아우투 his, 그의'를 생략하고 그저 '형제'로 번역했으나,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자기 형제' 라고 번역함으로써, '아우투 his'를 살려서 번역했습니다.
즉 교우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자매들의 신령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저 '형제'가 아니고 '자기 형제'라는 말이죠. 마치 가족처럼요!
막3:34~35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누가 자기 가족 흉을 보고, 자기 형제, 자매, 부모를 비방하며 다니겠습니까!
제 얼굴에 침 뱉기죠.
이런 경우, 어느 한 쪽이 '가족'이 아니라는 얘긴데,
비방하는 사람이, 가족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큽니다.
비방 받는 사람은, 맞받아 치지 않고 자기 입을 꾹 받고 있으면, 가족이라 여기기 때문인 거죠.
교회 안에서 비판과 분별의 차이는 뭘까요?
‘교인’은 교회와 자기가 하나 됨을 느끼는 자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교회가 잘못 되어가는 것을 보고 들어도...
자기 책임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간혹
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비판하고, 분석하고...
이런 사람은 글쎄 아직 성도, 즉 공동체의 일원은 아니라고 봅니다.
진정한 성도는,
교회가 잘하건 못하건
그게 전부 자기 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기 집안 일은, 대부분 모두가 자기 일로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잘 못하면.. 아들도 같이 피해를 당하게 되고
자식이 잘 못해도.. 그것이 부모에게 다 흉이 되고, 허물이 됩니다.
서로가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교회 부끄러움=내 부끄러움으로 느끼는 사람은... 교인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이게 문제야..’ 하면서
그 문제를 자기와 전혀 별개의 문제로 취급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교인’ 아닙니다.
여러분 ‘비판’과 ‘분별’의 차이를 아시는가요?
비판은 ... <나는 당신과 달라!> 이런 기반에서 생각하는 것은 ‘비판’이고,
분별은 ... <당신의 잘못은 내 잘못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분별’입니다.
부부가 한 몸 된 것은
아내의 잘못은 남편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의 잘못은 아내가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은 진정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끼리도 보면
남편이 뭐가 문제라는데... 자기와 전혀 별개로 취급하는 사람이 있고,
아내가 뭐가 문제라는데... 자기와 동떨어진 문제로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미숙해서 서로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 성경의 원리대로 부부가 아닌 것입니다.
▲2. 비방과 판단은..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앉는 중대한 죄입니다.
11b절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위 밑줄 그은 부분이 퍼뜩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자는, 왜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느 자료를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형제를 비방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레19:16 등)
그런데 누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면, 그것을 금지한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요,
그건 자기가 율법 위에 군림하는 태도 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인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사람이 교통법규를 대놓고 지키지 않거나, 세금을 대놓고 조세 회피를 하면,
그것은 그런 법규를 제정한 사법체제를 무시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 위에 초법적 존재로 군림하게 되는 거죠.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도) 물론 그걸 의도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극단적인 예인지 모르나 여러분, 재판정을 잠시 상상해 보십시다.
재판을 받아야 되는 피고가, 재판장처럼 스스로 판결을 내려서 되겠습니까?
인간 법정에서도 그런 일은 용납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법정에서 그게 용납되겠습니까?
그래서 '누가 범죄한 것보다, 범죄한 자를 판단하는 그 사람은 더 큰 죄인이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똑같은 죄인이 재판장 행세를 하는 것은, 더 큰 죄인이 되는 이유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어지는 12절에서, 이 중대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3.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12절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문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너무 높아져 버린 것입니다.
형제를 판단함은, 궁극적으로 그것은 스스로 재판장이신 하나님처럼 자신을 높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형제들을 깎아내리려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도전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사람의 판단이 공의롭지 못한 것은, 다들 자기 손익에 따라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싸우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다들
교회를 위하며, 진리를 수호한다며 싸웁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그 속을 한거풀 벗겨보면 '자기 속에 싸우는 정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약4:1.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싸우거나, 남을 비방하는 것은 "자기 (교회) 손익 계산" 때문입니다.
자기 손익이 걸려 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남을 비방하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판단, 비방이 나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중립적으로 정의롭게 판단하기가 사실 어렵고,
뭔가 자기 손익에 따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 판단'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비판과 판단이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95%이상이며,
그 근거에는 '내 이익 (내 체면, 내 명예, 내 장래)'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존재이며, 설령 그런 정의로운 판단을 내린다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