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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5:7~11 (주의 강림까지) 오래 참으라

LNCK 2022. 8. 31. 09:23

 

◈(주의 강림까지) 오래 참으라        약5:7~11      야고보서 설교모음       <인내, 오래참음> 모음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부자들의 죄악을 지적하는 단락에서  '들으라' 라는 엄한 명령조와는 대조적으로  *5:1, 4:13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사랑이 어린 어투로 다시 돌아옵니다.

 

본서 서두에서 야고보 사도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4

 

이렇게 '인내로 온전(성숙, 완전)해 지는 신앙에 대해 본서의 서두에서 강조했는데, 

본서가 끝나가는 시점에, 마치 중요 주제를 다시 반복하듯, 다시 '인내'를 권면합니다.

   

야고보는 온전(성숙)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오래참음(=인내)에 대해

아래와 같은 논지로 설명합니다.         (*온전은 야고보서의 주제입니다. 1:4, 2:22, 3:2)

 

-농부에게서 오래참음을 배우라  5:7~8

-서로 원망하지 말라                   5:9

-욥을 통해 인내를 배우라           5:10~11

  

▲1. 농부에게서 오래참음(인내)를 배우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5:7

 

옛날처럼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짓는 농부들은,

농사의 소출과 추수를 전적으로 하늘에 의존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안 오면... 농사는 망치는 것이었죠. 

비바람, 눈, 우박 등 기상이변이 나면... 농사는 헛수고였죠.

농부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내가 다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의존 안 하고) 

거기서 늘 싸움과 분쟁이 생깁니다.

 

-돈도 내가 다 통제하고 싶어 하고

-자녀도 내가 통제해야 합니다.

-내 시간도 내가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힘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오래 참음’은, 내가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 손아래 있는 것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왜 초조하고 불안한가요?

왜 다른 것을 불필요하게 가지려고 노력하는가요?   

그 이유는, 모든 공급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가 자꾸 (하나님처럼)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야고보는, 상인에게 주는 권면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4:13, 15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죠.

가만히 있었으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가 그 시간을 통제하고 싶었죠. 빨리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축복권은 받았지만.. 쫓겨나서 고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이 20년 후에 다시 가나안에 돌아올 때 배운 것은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했을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 하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에도,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도,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렸습니다. 오래 참았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2.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래야 심판 받지 않는다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하다'는,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부모, 배우자를 원망하다' 하는 말과, 뜻이 다릅니다. 

헬라어 '스테나조'는 현재 (진행) 명령형으로

'신음하다' 또는 '탄식하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단어가 쓰인 다른 구절을 보면

'막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스테나조 sigh)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롬8:23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스테나조 groan)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고후5: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스테나조 groan)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하노라'

 

히13:17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 (스테나조 grief)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래서 본문에 '서로 원망하지 말라'는 말은,

예를 들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아서, 밭에 작물이 다 말라죽었습니다.

그러면 농사를 지었던 부부가 서로를 쳐다보며,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는 거죠.

 

지금 야고보서 수신자인 흩어진 유대인들이 '여러가지 환난'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습니다.  *1:2 

거기에 더하여, 부자들은 그들을 출교시키고, 정죄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5:6

 

그런 힘겨운 상황이..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래 지속된다 하더라도,

성도들끼리 서로를 쳐다보면서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9b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신다'는 말은, 심판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8절의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는 권면과도 연결됩니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 힘든 현실을 탄식, 신음, 슬퍼 말아야

심판대 앞에서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본 단락의 문맥은 '인내하라'입니다.

9절은, 인내의 질 quality 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욕하고, 원망하고, 악다구니 해대며 인내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고,

성도들끼리 서로를 쳐다보며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심판주께서 문밖에 서 계시니라' 

 

    이게 무슨 얘기냐면, 등산이나 트랙킹을 하다보면 초행길에 10킬로씩 걷다보면 지칩니다.

    '괜히 등산 왔다.. 뭐 꼭 이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려고 그러나?' 별의별 sigh, groan, grief가 다 생기죠.

 

    그런데 갑자기 힘이 바짝 날 때가 있습니다.

    <정상까지 1Km> 이런 이정표를 볼 때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구나, 조금만 더 견디면 끝나는구나!'

 

    그런데 모든 산에, 모든 트랙킹 코스에.. 이정표가 다 잘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덜 알려진 곳,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에는.. 이정표가 전혀 없습니다.

 

    그때는 등산이나 트랙킹이 엄청 힘듭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니까요...

 

    사막에서 물이 떨어져서 힘든 걸음을 걷더라도 

    5킬로 앞에 샘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걷는 걸음과

    그런 희망이 전혀 없이 걷는 걸음을...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신다'  :9b  심판의 순간이 임박해 있다는 것이죠.

    인내하며 신앙 여정을 마귀와 싸우며 나아가는 성도에게는, 이것이 큰 희망입니다. 

    심판주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해 주실 것이고, '부자(5:6)'와 성도 사이에 판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심판'의 때는, 사실 주의 재림 때를 가리킵니다.

'뭐? 주의 재림 때까지 인내하라고요? 그거 너무 까마득히 먼 장래 일 같은데,

심판주가 문 밖에 (임박해) 서 계신다는 말과.. 좀 다르지 않는가요?'

 

물론 주님의 재림은, 어쩌면 먼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종말'이고요, 

우리는 언제 죽을 지 모릅니다. 이 나의 죽음, '소종말'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항상 코 앞에 있습니다. 

정말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신다'는 말씀은 사실이요, 아멘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으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이렇게 막연하게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본문 5:9절은, 심판의 내용 quality 에 대해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다가, 심판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심판자가 문밖에 (임박하게) 서 계시기 때문' 입니다! 

 

   △적용 : 원망과 한숨가 탄식의 상황에서도 승리한 데이빗 링 (추천)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욥1:22

 

그래서 야고보는, 욥을 우리 본으로 삼으라고 하는데요...

 

 

▲3. 욥을 통해... 오래 참는 것을 배우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5:11

 

'욥의 인내'는 길게 설명 안 해도,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주신 결말'을, 우리는 보통 자녀를 새로 얻고, 재산이 두 배가 된 것으로 해석하는데,

좀 다른 관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래에 나옵니다. 

 

욥기에서 가장 길게 기록된 것은, 재산이 망하고, 자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세 친구들이 욥과 변론한 것입니다.  (2~31장)

가장 길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자녀/재산의 상실보다 

어쩌면 그것이 욥에게 더 큰 괴로움을 주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변론한 욥의 대화도 보면,

중간 중간에 욥이 약간 흔들리는 장면도 나옵니다.

죽고 싶다고 한 것이라든지...

하나님께 항변하는 모습이라든지...

 

그러나 결국 욥은 오래 참음으로 이겼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 후대로 지금까지 지난 4천년 동안, 오래 참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들 말로 ‘쿨’한 것이었죠.

 

어떤 상황이 닥쳐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이 있을 거야’ 하며 태도가 쿨했습니다.

 

욥을 통해서 배우는 '오래 참음'이란,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마구 나를 흔들어도

 

극심한 삶의 환경 속에서만 내가 견고한 것이 아니라,

매정한 사람들 속에서도 내가 꿋꿋하고 견고한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막 자기를 흔들어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욥의 오래참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중에 어떻게 하셨는지 결말을 보라’고 했는데, 5:11

실제로 욥기서의 결말을 한 번 성경을 찾아보면, 

 

'주께서 못 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제 제가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제가 깨달았습니다' 욥42:2

 

주님의 섭리 가운데서 꼬여진 일은

내가 개입해서, 그 속에 들어가서 풀어 헤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일만 더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놓으려고 한 자가 바로 저(욥)입니다. 42:3

깨닫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함부로 말했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이제까지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42:5

 

욥은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결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욥의 인내를 보고 배워야 하고, 또 그의 결말에서 배워야 할 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자기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내 고집을 거두어들이고

내 자아를 더 이상 고집세우지 않고

띠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42:6                   

 

*딤전1:16 오래 참음 https://blog.daum.net/rfcdrfcd/13188442

   

*갈5:22  오래 참음  https://blog.daum.net/rfcdrfcd/15402698

 

 

◑절별 해석 .......................................................................................................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부자들의 죄악을 지적하는 단락에서 '들으라'(5:1, 4:13)는 명령조와는 대조적으로

사랑이 어린 어투로 다시 돌아옵니다.

 

야고보는 4:1~5:6 까지의 ‘단호한 책망’ 단락을 마치고,                 ☞단호한 책망이란?

다시금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랑의 권면을 재개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이른비'는 10월에서 11월에 오는 비를 가리키며

'늦은 비'는 4월에서 5월간에 오는 추수 직전의 비를 말합니다.

 

농부가 생명과도 같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주시리라는 약속을 굳게 믿어

기대하고 인내하는 것처럼, 불의한 자들의 압제와 핍박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며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빌4:13).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본문은 의로운 자들이 인내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사상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심되는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롬 13:11, 고전 15:52, 살전 4:15, 요일 2:18 등)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열매 즉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때이며(7절)

동시에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의 때입니다.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하다'의 헬라어 '스테나제테'는 현재 (진행) 명령형으로

'신음하다'(롬8:23, 고후5:2,4) 또는 '탄식하다'는 의미이니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라'(마 7:1)는 의미이다.

 

이는 원망을 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정죄를 받아

함께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강조입니다.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서 서 계시니라'

8절의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는 권면을 보충하는 경고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경고를 통해 심판의 임박성을 강조하여 수신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웁니다(마 24:33, 막 13:29, 계 3:20).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는 이미 심판하실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문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주의 이름으로 말한'은

예언자들이 주를 대신하여 주의 권위로 예언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는

역사적 상황을 해석하여 그 의미를 백성들에게 전달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박해를 받았죠.

 

고난과 박해속에서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온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과 '인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본이 됩니다(요13:15, 히4:11).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본문은 마5:11의 산상수훈을 반영한 것으로 1:12의 반복입니다.

야고보는 인내의 분명한 결과인 축복을 언급함으로

인내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단12:12, 마5:10).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고난에서든지 인내하는 자를 온전히 이해하셔서

함께 하시는 것은 물론, 예비된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