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강림까지) 오래 참으라 약5:7~11 야고보서 설교모음 <인내, 오래참음> 모음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부자들의 죄악을 지적하는 단락에서 '들으라' 라는 엄한 명령조와는 대조적으로 *5:1, 4:13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사랑이 어린 어투로 다시 돌아옵니다.
본서 서두에서 야고보 사도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4
이렇게 '인내로 온전(성숙, 완전)해 지는 신앙에 대해 본서의 서두에서 강조했는데,
본서가 끝나가는 시점에, 마치 중요 주제를 다시 반복하듯, 다시 '인내'를 권면합니다.
야고보는 온전(성숙)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오래참음(=인내)에 대해
아래와 같은 논지로 설명합니다. (*온전은 야고보서의 주제입니다. 1:4, 2:22, 3:2)
-농부에게서 오래참음을 배우라 5:7~8
-서로 원망하지 말라 5:9
-욥을 통해 인내를 배우라 5:10~11
▲1. 농부에게서 오래참음(인내)를 배우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5:7
옛날처럼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짓는 농부들은,
농사의 소출과 추수를 전적으로 하늘에 의존했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안 오면... 농사는 망치는 것이었죠.
비바람, 눈, 우박 등 기상이변이 나면... 농사는 헛수고였죠.
농부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내가 다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의존 안 하고)
거기서 늘 싸움과 분쟁이 생깁니다.
-돈도 내가 다 통제하고 싶어 하고
-자녀도 내가 통제해야 합니다.
-내 시간도 내가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힘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오래 참음’은, 내가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 손아래 있는 것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왜 초조하고 불안한가요?
왜 다른 것을 불필요하게 가지려고 노력하는가요?
그 이유는, 모든 공급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자기가 자꾸 (하나님처럼)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야고보는, 상인에게 주는 권면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4:13, 15
야곱이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았죠.
가만히 있었으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가 그 시간을 통제하고 싶었죠. 빨리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축복권은 받았지만.. 쫓겨나서 고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이 20년 후에 다시 가나안에 돌아올 때 배운 것은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고 했을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 하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에도,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도,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기다렸습니다. 오래 참았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2.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래야 심판 받지 않는다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하다'는,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부모, 배우자를 원망하다' 하는 말과, 뜻이 다릅니다.
헬라어 '스테나조'는 현재 (진행) 명령형으로
'신음하다' 또는 '탄식하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단어가 쓰인 다른 구절을 보면
'막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스테나조 sigh)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롬8:23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스테나조 groan)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고후5: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스테나조 groan)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하노라'
히13:17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 (스테나조 grief)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래서 본문에 '서로 원망하지 말라'는 말은,
예를 들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아서, 밭에 작물이 다 말라죽었습니다.
그러면 농사를 지었던 부부가 서로를 쳐다보며,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는 거죠.
지금 야고보서 수신자인 흩어진 유대인들이 '여러가지 환난'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습니다. *1:2
거기에 더하여, 부자들은 그들을 출교시키고, 정죄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5:6
그런 힘겨운 상황이..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래 지속된다 하더라도,
성도들끼리 서로를 쳐다보면서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9b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신다'는 말은, 심판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8절의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는 권면과도 연결됩니다.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 힘든 현실을 탄식, 신음, 슬퍼 말아야
심판대 앞에서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본 단락의 문맥은 '인내하라'입니다.
9절은, 인내의 질 quality 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욕하고, 원망하고, 악다구니 해대며 인내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고,
성도들끼리 서로를 쳐다보며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심판주께서 문밖에 서 계시니라'
이게 무슨 얘기냐면, 등산이나 트랙킹을 하다보면 초행길에 10킬로씩 걷다보면 지칩니다.
'괜히 등산 왔다.. 뭐 꼭 이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려고 그러나?' 별의별 sigh, groan, grief가 다 생기죠.
그런데 갑자기 힘이 바짝 날 때가 있습니다.
<정상까지 1Km> 이런 이정표를 볼 때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구나, 조금만 더 견디면 끝나는구나!'
그런데 모든 산에, 모든 트랙킹 코스에.. 이정표가 다 잘 되어있지는 않습니다.
덜 알려진 곳,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에는.. 이정표가 전혀 없습니다.
그때는 등산이나 트랙킹이 엄청 힘듭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니까요...
사막에서 물이 떨어져서 힘든 걸음을 걷더라도
5킬로 앞에 샘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걷는 걸음과
그런 희망이 전혀 없이 걷는 걸음을...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신다' :9b 심판의 순간이 임박해 있다는 것이죠.
인내하며 신앙 여정을 마귀와 싸우며 나아가는 성도에게는, 이것이 큰 희망입니다.
심판주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해 주실 것이고, '부자(5:6)'와 성도 사이에 판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심판'의 때는, 사실 주의 재림 때를 가리킵니다.
'뭐? 주의 재림 때까지 인내하라고요? 그거 너무 까마득히 먼 장래 일 같은데,
심판주가 문 밖에 (임박해) 서 계신다는 말과.. 좀 다르지 않는가요?'
물론 주님의 재림은, 어쩌면 먼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종말'이고요,
우리는 언제 죽을 지 모릅니다. 이 나의 죽음, '소종말'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항상 코 앞에 있습니다.
정말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신다'는 말씀은 사실이요, 아멘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으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이렇게 막연하게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본문 5:9절은, 심판의 내용 quality 에 대해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다가, 심판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한 숨 쉬고 sigh, 신음하며 groan, 슬퍼 grief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심판자가 문밖에 (임박하게) 서 계시기 때문' 입니다!
△적용 : 원망과 한숨가 탄식의 상황에서도 승리한 데이빗 링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