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5강 요일4:4, 단7:18, 왕하1:2 2022.08.31.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다"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세상은 쉬지 않고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쉬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쉬지 않습니다. 세상이 하는 말, 세상이 설득하는 말, 세상이 이루려는 일들은 쉬지 않습니다. 24/7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내내... 세상 마귀는 휴가를 가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휴가를 가고, 교회가 휴가를 가는 것은, 그건 잘못하는 것입니다. 유럽의 교회가 쇠퇴한 이유를 굳이 심오한 데서 찾을 필요 없고 목회자든, 성도든, 교회든... 여름에 한 달 씩 휴가를 가는 것입니다.
한 달씩 교회가 문을 닫고, 성도들이 한 달씩 교회를 빠지면 당연히 교회 참석이 더디고, 빠지는 게 습관이 되지요. 어떻게 신앙을 쉴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까?
세상은 쉬지 않고, 하나님도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5:17
예수님은 안식일에 쉬지 않고 병자를 고치셨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멈춰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배가 은혜롭고, 사역이 은혜로울 때 '아~ 내가 수고 했다. 내가 오늘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라고 마음이 해이해지고 '이제 내가 좀 쉬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어마어마한 일을 행하신 다음에 제자들과 쉬신 게 아니고, 산에 홀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 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일을, '내가 천국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막14:25 그때까지 예수님은 쉬지 않으신다는 얘기죠. 어린양의 혼인잔치 그 때가 될 때까지!
여러분은 아마 '내가 일평생 기도하고, 믿음으로 가족을 이끌고 뭐 이런저런 하는 일이 피곤하다, 지친다, 나는 언제 쉴 수 있겠느냐?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겠지만
여러분 이 믿음의 수고는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자전거가 계속 달려가는한 서서 갈 수 있지만, 멈추면 넘어지지요.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행할 때 믿음이 역사하지요. 안될 것 같은 게 되지요.
..........................................
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다섯 번째 강좌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단7:18
"후기 기독교 시대"라는 것은 '기독교가 한물 갔다. 전성기가 지나갔다. 달로 치면 지는 달과 같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지금 이 시대에 처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여러 번 이런 (기독교가 한물 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면,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새삼스럽지 않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이기고 믿음을 지키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영적인 전투요, 믿음의 씨름, 우리가 극복해야 될 시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쇠하든 흥하든 우리가 후기든 전성기든 간에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을 지키는데는, 그다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지금이 기독교 전성기라고 하면 그렇다면 여러분이나 저의 신앙생활이 더 쉬워 질 것 같습니다? No 전성기가 됐다고 해서 시험이 없어집니까, 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까? 믿음이 불필요 합니까, 선교와 전도를 쉬어도 됩니까? 기도를 멈춰도 됩니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어떤 시대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후기'라고 해서 예수 믿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든, 그건 그렇게 "개인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가 어릴 때 부모님이 가정사정, 즉 집에 돈이 많은지/ 적은지.. 아버지가 돈을 잘 버는지/ 못 버는지.. 집의 재정 상태가 어떤지를 자녀가 상관하지 않잖아요.
자녀는 그런 거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자기 공부만 잘 하면 되지, 그게 아니고 '아버지가 요즘 수입이 줄었대.. 집에 반찬 수가 줄었 대'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처럼
사실 지금이 전기, 후기, 전성기, 후퇴기 ..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은 우리 신앙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다만 예수님 말씀이 '너희가 천기는 분별하면서 어떻게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교회에 일어나는 일들과, 전 세계에 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시대의 표적이라고 보고 그것을 우리가 분별 함으로써, 깨어있고, 우리의 역할을 알고, 교회의 사명과 또 섬기는 이들의 역할을, 우리가 좀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를 끝장 내려 했던 역사의 시도들 제가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후기' 라는 말이, '전성기가 지나갔다. 한물갔다' 이런 뜻의 말이라면
지난 2000년을 지나는 동안에 그렇게 말한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 사례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의 갈 길과 할 일을, 반면교사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역사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빠뜨린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근래에 일어난 일들을 통하여 지금 말고 '과거의 어느 때에 기독교는 이미 한물갔다' 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1. 공산주의 혁명 1917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 중에 하나가 <공산주의 혁명>입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났습니다.
러시아는 기독교 문명이었죠.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이루려고 한 것뿐만 아니고 '후기 기독교 사회'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는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기독교 사상을 몰아내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 기독교 사회를 이루어야 그들이 바라는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이룬 다음에, 교회를 핍박하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신앙을 몰아내기 위해서 애를 썼어요.
그 이유는, 성경은 우리의 소망을 천국에 두는 데 비해서 공산 혁명은 이상적인 사회를, 지금 이곳에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새에 소망을 두고 천국을 바라보는 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지금 이곳에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 공산주의 사상은 기독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후에 상급을 주실 것을 믿지 않습니까.
'은밀히 보시는 주께서 갚으시리라' 그래서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상급이든, 보상이든, 영생이든.. 이 땅에서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이다..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이고, 상급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나의 기업,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찬송부르며 천국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까!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는 지금 이곳에만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내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한, 공산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종교사상, 특별히 기독교 사상을 몰아내려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70년 동안 애를 쓰고서, 그 목표를 이루는 것 같았는데 70년이 지난 후에 무엇이 무너졌느냐 하면 기독교가 무너진 게 아니고, 공산주의가 무너졌어요.
그래서 '후기 기독교 사회'가 된 게 아니고 '후기 공산주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제 다시금 교회를 열고, 다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갖게 되었죠.
그러니까 그 때 (1917) 이미 사람들은 '기독교는 한 물 갔다. 후기 기독교 사회가 도래했다' 라고 주장을 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찬송가)
▲2. 그리고 또 다른 예는 <프랑스 대혁명> 입니다. 1789
사람들은 가장 가고 싶은 나라로서 프랑스를 치고, 가장 가고 싶은 도시가 파리이고, 프랑스는 와인과 낭만과 아름다움과 멋과 이런 것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프랑스가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통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급진적으로 사회를 바꾸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혁명가들 역시 기독교를 주목하고, 배척하려고 했어요.
그들은 생각하기를, 사회 변화를 막는 세력이 교회라고 규정했어요. 성직자들을 싫어 하고, 특별히 천주교회를 싫어해서 혁명을 이룬 파리에 있는 대표적인 성당의 문을 닫고 그 성당을 그리스의 판테온 신전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교회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왕정 편에 섰기 때문에, 반혁명 세력으로 본 거죠)
그리고 어떤 시도를 했냐면, 일주일이 월 화 수 목 금 토 일, 7일 아닙니까. 그런데 프랑스 혁명가들은 '일주일 7일' 제도를 유지하는 한 사람들이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간 단위를 7일에서 10일로 늘이는 작업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선데이 라는 것을 지워버리려 했어요.
선데이가 없어지면, 주일예배와 안식일의 개념을 해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까지 생각을 했으니 이 혁명가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이었고, 얼마나 영리하게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워버리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이미 사람들은 '이제 기독교는 한물 갔다. 이제 우리는 후기 기독교 사회를 이루었다' 라고 주장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3. 그리고 또 하나 최근에 일어난, 기독교가 한물갔다고 주장한 것이 소위 <뉴에이지 운동>입니다.
'뉴에이지' 라는 말 자체가, 벌써 반기독교적인 단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뉴에이지 운동의 출처는, 힌두교를 위치에서 서양이 기독교화 되기 이전에 원시종교, 미신, 주술 신앙, 위치크래프트, 점성술... 이런 여러 가지 영성이 짬뽕이 되어서
그들이 기독교를 대적하고 기독교를 주목하여 '우리가 이제 기독교를 대신한다' 라는 의미로 New Age (새 시대) 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들이 점성술을 신봉하면서 주장하기를 별자리가 '물고기 자리'에서 '물병 자리'로 옮겨간다고 주장을 한 거예요.
우리가 별자리 라든가, 점성술을 결코 신봉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하늘에 별자리가 있는데, 오랫동안 그것이 물고기 자리였는데 그것이 물병 자리로 바뀐다는 거예요.
물고기..는 기독교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난 2년 동안의 기독교 시대였는데, 이제 별자리가 물병자리로 바뀌면 기독교 시대는 쇠한다, 지나간다, 끝났다.. 라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뉴에이지 영성이 기독교를 대신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뉴에이지(새 시대)를 주장했으니 이들은 참 맹랑한 주장을 한 거예요. '기독교가 한물 갔다. 이제는 우리 시대가 왔다!'
여러분 기독교는 언제도 '이제 우리 때가 왔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때가 왔어, 전성시대가 왔어, 이제는 그동안에 내가 준비한 것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됐어!' 이런 교만한 말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들의 시대가 와서, 사도들이 무슨 임금이 되고, 무슨 귀인이 되고, 무슨 왕이 되고, 재벌이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때를 얻은 것이 아니고, 전성기를 누린 것이 아니에요.
어느 누구도, 예수께서도 이 땅에 오셨을 때 임금으로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섬기려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신앙이 부흥을 하든, 교회가 부흥을 하든
그것과는 상관 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묵묵히 섬기고, 겸손하게 섬기고,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께 드리고 멸시 천대 십자가를 우리가 받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 뿐이지
어느 누구도 '이제 전성 시대가 왔고, 해가 뜰 날이 왔고, 빛을 볼 날이 왔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할 자격이 없어요. 그 정신을 잃어버렸을 때가, 교회가 타락했을 때입니다.
◑밟힐 수록, 더욱 되살아나는 기독교 신앙
예수님을 죽였지만, 기독교 신앙은 더욱 되살아 났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혁명이든, 프랑스 대혁명이든, 뉴에이지 운동이든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가장 도발적인 시도는, 예수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애초에 반기독교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면 (기독교가) 끝날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이 끝나지 않고 오히려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승리하셨고, 교회는 더 부흥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지 않습니까? 이들이 교회를 핍박하면 후기 기독교가 될 줄로 알았는데, 뭐 믿음을 핍박하면 사람들이 떠날 줄 알았던 것 이상으로
예수님은 죽이면 끝날 줄로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죽이면 '포스트 크라이스트 시대'가 되겠거니 생각하고, 예수님만 없어지면 이제 끝날 것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죽였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수 없는, 기독교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어느 시대든, 교회와 신앙이 이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원칙을 우리는 좇아 갑니다. 성경 말씀에 찾아봅시다.
이사야서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예언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그 수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교회가 핍박을 받고 도전을 받을 때, 무력해 보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기도 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맞서 싸울 수 있는 수단이 없어요.
무슨 뉴에이지가 기독교를 도전한다고 우리가 무슨 뭐 그들 앞에 나아가서 시위를 하겠습니까? 무슨 뭐 신문에 광고를 내서, 그들의 실수를 폭로하는 기사를 내겠습니까? 무슨 뭐 우리가 정치적으로 법을 바꿔서 뉴에이지를 금지하는 방법을 도모하겠습니까, 무슨 미신을 몰아내는 그런 캠페인을 버려서, 사람들이 미신을 좇지 않고 교회로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면,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한 없이 무력해 보여요.
핍박을 당할 때, 혁명을 당하든.. 이럴 때 교회가 무력해 보이고,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보여요. 우리가 무슨 정치적인 힘으로 우리를 보호하겠습니까? 무슨 유명한 어떤 목사님처럼, 광화문에서 집회를 하고, 교회 권익을 대변하고 주장을 하고, 목소리를 크게 내고, 뭐 교회 권리를 주장을 해서 교회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무력해 보이죠. 쓸 수 있는 카드가 별로 없어 보여요.
그러나 그 면에 있어서는 예수님도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당신을 잡아갈 때,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베드로가 칼을 꺼냈을 때 예수님이 만류하셨죠. '칼을 네 집에 도로 꽂으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12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음을 알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그냥 참으라고 했어요. 무력으로 대항하지 않았어요. 어떤 세상적 방법으로 대항하지 않았어요.
그냥 끌려가는 대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요. 그것처럼 무력한 게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걸리는 것이 되지 않았습니까. 시험 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었다... 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능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습니다.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그 진리로 승부하고, 그 진리를 보전하고 이 믿음이 살아남는 것 뿐만이 아니고 부흥할 수 있는 그 길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뿐이에요. 다른 방법을 의존할 수 없어요. 국가의 힘을 의지할 수 없어요.
▲국가가 교회를 지켜주지 못 합니다 과거 국가의 힘을 의지해서 교회를 보전하려는 노력을 안 했겠습니까? 많이 했지요. 수백년 동안 그렇게 했지요. 국가가 교회를 지켜 주었어요. 국가의 힘으로 교회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교회가 원하면, 국가가 전쟁도 나가서 싸웠어요. 그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과 종교 전쟁 아닙니까?
그러나 그 결과로 예수님의 진리를 보전했습니까? 아니에요. 정반대로 그 때가 제일 실수했을 때입니다.
국가가 교회를 지켜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국가의 힘을 의존하면 안 돼요. 그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가,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국가는 국가 대로 얻을 것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그래서 교회는 국가를 이용하고 국가도 교회를 이용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교회도 타락하고, 국가도 타락하고... 국가가 고백하는 믿음도 순전하지 않고 (*기독교 국가인 경우) 교회가 실천하는 믿음도 순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국가를 의지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당신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헤롯을 의지하지 않았던 것처럼.. 로마총독을 의지하지 않았죠. 나라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나라는 신앙을 핍박했지요. 헤롯도 세례요한을 죽였고, 빌라도도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았지요.
국가는 의지할 대상이 아니에요. 우리가 국민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세금도 내고, 병역의 의무도 하면서 국가의 도움이 되는 걸 받을 수 있지만 신앙 만큼은... 좀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국가 지도자가 되면,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됩니까? 천만의 말씀이에요.
'기독교 국가' 라는 것은, 그 개념 자체를 가지는 것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어떻게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됩니까? 기독교 국가 라는 그 의미가 뭡니까?
기독교 국가 라는 게, 그 국민이 전부 다 거룩하게 변했다는 얘기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기독교 국가' 라는 말을 쓸 수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는 있겠지요. 제도적으로 신앙을 장려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제도적으로 장려한다고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을 것 같습니까? 미션스쿨을 다니는 애들이, 학교가 채플 참석을 강요한다고 믿음을 갖게 될 것 같습니까?
오히려 반발하고, 국가에 소송을 했지 않습니까? '그건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이러면서...
신앙은 은혜를 통해 거듭남으로 되는 것이지요. 신앙을 강요해서 갖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강요해서 가질 수 있다면 율법주의나 가능하겠지요. 강요해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은혜나 성령이 필요없겠지요.
교회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강요만 하면 돼죠. 교회 안 가는 사람은 벌 주면 돼요.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되면, 위선적 신앙만 낳을 뿐이죠.
교회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 말씀, 은혜 밖에 없어요. 이것 이외에, 무슨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뭐 상류층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반기독교적 과거 역사를 통해 교회가 배운 점
지난 수 백년 동안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미 '후기 기독교 사회'가 됐다고 주장을 했던 사건들을 우리가 생각을 해 보면서, 그것을 통해서 교회가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이런 점을 생각할 필요는 있지요.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왜 공산주의자들은 유독 기독교를 그렇게 싫어하고, 교회를 싫어하고, 기독교 신앙을 몰아내려고 했을까요?
왜 프랑스 혁명가들도 교회를 그렇게 지목하고, 싫어하고, 기독교적인 생각을 사회에서 몰아내려고 했을까요?
왜 뉴에이지 운동은, 그 많은 종교들 중에 유달리 기독교를 주목해서 '이제 기독교의 시대는 끝나고 우리의 시대가 되었다' 라고 주장을 했을까요?
당연히 그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건 너무 단순한 대답입니다.
이 모든 지난 역사를 통해 교회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과거 경험을 통해, 교회가 배운 것이 사실 많이 있지요.
뭐 그 중에 몇 가지 중요한 것만 말씀을 드리면
▲1. 공산주의는 현재 이 땅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는데 기독교가 천국에 소망을 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사람들이 천국을 바라보는 한, 이 땅에서의 진정한 사회적 변화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왜 사람들이 이 땅에서 변화를 추구하다가 기독교에 실망하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을까.. 를 생각하면
'아~ 그 동안에 우리가 너무 치우쳐서 가르친 것이 있었구나' '그 지금 현재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소홀히 한 면이 있었구나' *현재적 천국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교회가 하나님을 너무 멀리 (천국에만) 계신 하나님으로 가르친 것이 아닌가.. 천국을 너무 애매한 것으로 가르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당장 이 땅에서 위로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천국 갈 때까지 기다려라' 라고만 가르쳤다면 아마 우리도 반발하지 않았을까?
우리도 '그건 너무 오래 기다리고, 너무 막연하고.. 나는 지금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데,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라고 하는 군요.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교회를 떠나 공산주의자가 되면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에,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라는 유혹을 받을 수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이후에 사람들의 그 실망한 마음을 다시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 것이,
결국은 지금 현재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여기 지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전부 다를 경험하는 건 아니에요. 그 천국을 부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고, 맛을 보는 것에 불과해요.
그럼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멀리 막연히 알 수 없는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지금 현재에 맛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예로, 병자가 낫는다든지,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다든지...
이런 면을 통해, 천국이라는 것이 막연히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지금 경험할 수 있다, 믿음은 지금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런 현세적 신앙이, 공산주의 사상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 엄청난 공로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현실에 도와 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말은, 이전에는 교회들이 거기(현세주의)에 대해서 너무 태만했다는 거죠. 교회들이 지금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 지금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태만하게 여기고 소홀히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후기 기독교 시대에 선교 전략은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천국도 가르치지만 그러나 부분적으로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는 천국의 능력,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도의 능력을 당연히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제 프랑스 대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교회가 가진 자의 편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시민혁명가들이 교회를 그렇게 싫어했던 이유는 그 당시에 프랑스의 가톨릭교회가, 귀족들과 왕족 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교회가, 가진 자들의 친구, 가진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리고 가진 자들이 그들의 세력을 누리는데, 교회가 사상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 프랑스의 가톨릭교회가 과연 얼마만큼 가진 자의 편이 됐는지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뭐 확실하게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다는 사실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늘 예수님의 정신을 기억을 할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또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지요. 여러분,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도 보면 예수님이 당연히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시고 반대로 부자는 이미 땅에서 위로를 받았기 때문에, 나중에 받을 위로가 없다... ====
이렇게 예수님 가르침의 기본적인 사상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결코 세상에 힘 있는 자, 가진 자들의 친구가 되려 하지 않고 늘 가난한 사람, 힘든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떠나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늘 깨어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보전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우리가 늘 가난한 자들에 대해 열려 있고, 환영하고, 또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지... 그게 아니고 우리끼리의 클럽, 우리끼리의 모임으로 만들려는 시험을 끊임없이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 세 번째로 뉴에이지 운동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어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기독교 문명권에 살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버리고 뉴에이지에 심취했느냐?
왜 그들이 점성술이든, 주술이든, 힌두교든.. 이런 것에 매력을 느끼느냐?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될 필요가 있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지식적, 이론적으로만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얘기죠.
교회가 주는 것은 늘 교훈, 무슨 도덕적인 가르침... 바르게 살아라.. 뭐 이런 것만 가르치려고 했지
정말로 예수님처럼, 엘리야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일을 소홀히 여겼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셨는데, 은사를 사장시켜버리고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구약에 아하시야 왕이 떨어져서 부상을 입었을 때 '내가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누구한테 가서 물어 봤습니까? 이방 신에게 가서 물어 봤습니다. 왕하1:2
엘리야가 그것을 지적했어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이방신에게 가서 물어보느냐? 그에게 전달하라. 그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 하고 죽으리라!'
마찬가지죠. 기독교를 경험한 서구 기독교인들이 뉴에이지에 가서 물어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던 거죠. 사람들의 영적인 요구는 그치지를 않는데 교회가 사람의 영적인 요구를 채워 주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 가서 물어보고, 자기 미래에 대해서 물어보고, 자기 운명을 물어보고... 이렇게 영적인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이죠.
이건 그 뉴에이지가 우리가 대적해야될 그릇된 영이고, 적그리스도의 세력이지만 그럼에도 목자가 양을 지키지 않으면, 이리가 와서 그들을 낚아채가고, 삯꾼이 와서 그들을 이용만 하는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증거해 주지 못 하면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 가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사람을 찾아가서 점을 보고, 미래를 물어보고...
여러분, 아하시야 왕이 중상을 당하고 '내가 살지 죽을 지를 이방 신에게 물어봤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물어보면 답을 얻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가 지은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던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타락한 영혼이 가게 되는 멸망의 길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순간에 하나님이 찾아지지 못하니까 엉뚱한 데로 찾아가는 거죠.
사울 왕도 그렇게 했죠. 사울 왕이 하나님과 멀어지고 나니까 전쟁에서 이길지, 질지... 하나님이 답을 해 주지 않으니까 결국은 박수무당에게 찾아가서 물어 본 것처럼
여러분 교회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그 능력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는 사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신보다 더 크시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에게 인도를 구하게 해야 됩니다.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다시 말하면 신앙은 어떤 취미생활이 아니고, 어떤 무슨 도덕이 아니고 신앙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힘이 된다는 사실을..
내 경험을 통해 검증한 신앙의 능력을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말씀드린 이런 모든 일이 또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결국은 믿는 사람들이 깨어 있어야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늘 신실하게 따라 가야 되고 주님이 분부하신 것처럼 권능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면 행1:8
후기 기독교 사회든, 뭐 21세기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뭐 세상에 그 어떤 일이 발생해도, 신앙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찬송가) 할렐루야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