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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6:1~21 구별된 삶

LNCK 2022. 9. 10. 03:25

◈구별된 삶    민6장 1~21       12.30.2015.출처

 

◑이스라엘을 비추어주는 거울, 나실인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나실인에 대한 율법 규정이 여기 (민6장에 갑자기)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나실인으로 많이 헌신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여기 나실인의 규정을 성령님께서 쓰게 하신 것일까요? 

 

이 규정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을 읽고 사람들이 나도 나실인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일정 기간을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의 규정을 여기 두신 것은, 이제 광야 39년의 여정을 출발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실패를 비추는 거울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영구히 구별된 존재였습니다(출 19:6).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무능을 드러냈고, 하나님의 거룩의 기준에 미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이점에서 나실인은 이스라엘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 중에 있는 나실인의 존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보아야 했습니다. 

 

사무엘은 평생 바쳐진 나실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철저하게 실패했던 삼손은 사무엘과는 반대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순종을 보여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본성(죄성)을 비추는 거울

나실인은 이스라엘이 누구이며 얼마나 그 정체성에 합당하게 사는가를 

부정적으로 비추어주는 거울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깊은 죄성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나실인은 서원한 기간 동안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에 자신의 삶을 맡겨야 했습니다. 

 

머리를 가꾸지 않고 자르지 않는 것은 자신이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하는 표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주도권, 통제권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서원한 기간 동안에 포도에서 나는 모든 것을 멀리함으로써 

인생에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들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의 모든 통제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삶의 소소한 즐거움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의 삶의 모든 통제권을 

하나님께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과연 그럴 의향이 있기는 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세상의 기쁨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도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시면 

금방이라도 불평과 죽는다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과연 우리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대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오라고 하신 말씀을, 알고는 있는 것입니까?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성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 자신의 즐거움을 내려놓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할망정, 자신이 원하는 삶,

그리고 그 즐거움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 이민교회에서 들은 말입니다. 어느 안수집사님의 아들이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말을 듣자,

사람들이 그분에게 “자식 농사 헛 지었군요”라고 했다는 일화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고 사는 목적, 목표,

그리고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믿음의 힘으로 더 누리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삶이 존재합니까?

자기 부인이 어디에 있으며 십자가 짐을 어디에 있습니까?

 

나실인의 존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이기적 죄성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습니다.

나실인은 그들만의 특별한 헌신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마땅히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 삶을

보여주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참되고 완전한 나실인, 예수 그리스도

이점에서 성육신하신 주님은 이 땅에서 참되고 온전한 나실인이셨습니다. 

그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서원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리를 자르지 않으셨는가? 그런 기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와 포도에서 난 것을 일체 금하셨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얻으셨을 뿐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시체를 만지지 않고 보지도 않으셨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시체를 만지셨고 그렇게 해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말하자면, 나실인에게 주어진 금지규정을 문자적으로 지키심으로써가 아니라 

그 완전한 의미를 아셨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하나님 아버지께 통제권을 드리신 삶을 사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자’의 말씀을 하셨고, ‘나를 보내신 자’가 하라는 것을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 되셨습니다(요 4:34).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죽으시기까지 순종으로 자신의 삶을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히 12:2). 

그렇게 완전한 순종에 당신을 제물로 드려 피를 흘리심으로 

다른 제물을 필요로 하는 나실인이 아니라, 완전한 나실인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구별된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두움 후에 햇빛 오고(21): 현대의 나실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 누구도, 그리스도와 믿음을 위하여 순교를 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너무나 많이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와 순종과 섬김과 봉사와 헌신은 잠시 잠깐, 

일정한 기간 동안에 드려지는 것이지만, 그 후에는 우리는 포도주를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드리는 수고는, 그 앞에 그리고 영원히 주어질 영원한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는 영광 중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것이고

그 영원한 영광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누릴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수고가 무슨 공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나실인의 규례가 단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의무조항이 아니라,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로운 헌신의 내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점점 더 많이 알게 하시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는 현대의 나실인이 되어 교회가 누구인지,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무섭게 우리를 죽이는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는 구별된 삶으로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 주여! 그런 은혜를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