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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 선교사 (열방빛 선교회) 이야기

LNCK 2022. 9. 14. 17:27

◈최광 선교사  (열방빛 선교회) 이야기                         출처

 

 

나는 어릴 적부터 선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만 된다고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 부름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북한은 내 삶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생명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며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곳이 되었다.

 

 

▲우리 집은 친가, 외가 모두 3, 4대째 기독교 집안이다.

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사이셨고, 어머님이 큰 농사를 지으셨기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그러다 보니 신앙에 있어서도 청년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모태 신앙이었다.

그리고 군에 입대한 이후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결혼과 함께 사업을 시작하면서 경산 청년회의소에 드나들었고,

거기서 지역의 여러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중에는 지역의 조폭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재벌도 있었고,

당시 최고 권력자의 친형과 교분이 두터운 대구, 경주 지역 유지도 있었으며,

지역 국회의원 출마자도 있었다.

 

나는 이들과 어울리며 세상의 좋다는 것은 다 해 보고,

마지막엔 도박과 방탕한 생활 속에서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내 인생에 가장 두려운 음성을 들었다.

“다시 그러면 가만 두지 않겠다. 다시 죄악 가운데 빠져들면 가만 두지 않겠다.”

 

온 몸이 땀에 젖어 깨어나 생각해 보니 분명히 예수님의 음성이었다. 두려웠다. 뼛속까지 두려웠다.

그 후부터 죄악의 길에서 돌아섰다.

 

어머님과 아내와 제수씨들까지 3일 동안 금식하면서 드린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나의 삶에 세밀하게 간섭하시기 시작했다.

내가 마음에 좋지 않은 생각이라도 품으면 즉각 사고가 생겼다.

 

나는 1992년 36세의 늦은 나이로 대구신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신학교는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세상과는 많이 다른 곳이었다.

도대체 이 풍족한 시대에 이런 데도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신학교에는 라면도 못 먹어 어려워하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추구하는 경건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처음 두 달 동안은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 무렵 아버님이 위암으로 천국으로 가셨다.

갑작스러운 아버님의 소천을 접하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 한 순간이라는 것이 깊이 다가왔다.

 

이렇게 하룻밤 꿈같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신실하게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리라 결심하였다.

 

그 후 강의 시간마다 은혜를 받았다.

나야말로 죄인의 괴수 중의 괴수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였다.

 

하나님께서 죄 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주셔서 하늘을 전부 얻은 것 같은 기쁨 속에서

늘 울면서 학교를 다녔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실 뿐 아니라 일꾼으로까지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기만 하였다.

 

신학교 졸업 후 하나님은 서울에 있는 말씀사관학교로 인도해 주셨다.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낮에는 성경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밤에는 삼각산에 올라가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이곳에서 말씀 1,000절을 암송하고 반복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소록도 북성교회의 남차웅 권사님을 기도의 어머니로 모셨다.

그 후부터 소록도 북성교회의 여러 성도님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남 권사님과 북성교회 성도님들의 전적인 기도 후원에 힘입어

신학교 편입과 동시에 3년간 모(母) 교회인 자인제일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사역하였고,

이후에는 대구봉산교회, 부산충무교회, 용인시온교회에서 각각 1년씩 사역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모(母) 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담임 목사님이신 허용득 목사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목사님의 33년 목회 노하우를 모두 전수받는 축복을 누렸다.

 

목사님께서는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목회자는 삶을 통해서 목회해야 하며, 성도들은 목회자를 속상하게 하기 마련이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성도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 주셨다.

 

대구봉산교회, 부산충무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에는 어려운 상황들이 닥칠 때마다

소록도 북성교회의 중보기도의 능력을 많이 체험하였다.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깊이 또 확실하게 체험하였다.

 

총신대학원 3학년 때 선교 동아리 NSM(New Spark Movement)의 선배인 박베드로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다.

박 선교사님은 이 동아리의 해외 선교 파트 총책임자로 중국 선교와 북한 선교를 훌륭하게 감당해 오시던 분이었다.

교제하다 보니 마침 우리 아버님의 제자였다. 이것을 계기로 나는 선교사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박 선교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야단을 치면서 말했다.

“언제까지 준비만 할 거예요? 더 이상 준비하지 말고 선교 현장으로 나가세요.”

 

박 베드로 선교사님은 북한 형제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중국 길림시 지하 사역장에 북한 탈북자 주광호 선생이, 몇 명의 북한 형제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주광호 선생이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 하지만,

아직 그럴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해 그저 밥만 먹고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지금 그들에게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나에게 중국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단기 선교 과정으로 가 보기로 했다.

 

박 선교사님의 말씀을 듣고 1998년 8월 8일부터 북한 형제들이 살고 있는

중국 길림시의 낡고 허름한 아파트를 찾아갔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 떨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아파트 문이 삐걱 하고 열리더니 어깨가 떡 벌어지고 키가 큰 거인 같은 형제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눈빛은 살벌했다. 주광호 선생이었다.

 

박 선교사님에게서 이 형제에 대해서 미리 들었다.

북한 고위층의 비자금을 관리하다 중국으로 도망 나온 사람이었다.

“어서 오시오, 최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슴다.”

주광호 선생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어 5명의 북한 형제들과도 일일이 악수하고 인사를 했다.

 

북한 형제들이 살고 있는 사역장을 둘러보았다.

15평쯤 되는 좁은 집 안에는 장판도 깔려 있지 않았고, 천장과 벽에는 도배도 되어 있지 않았다.

햇빛도 들지 않아 낮인데도 저녁처럼 어두웠다. 창고 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북한 형제들은 익숙해졌는지 개의치 않고 바닥에 빙 둘러 앉아 입들을 꾹 다물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 없고 어두운 얼굴들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살기와 위압감이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주광호 선생은 사역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북한 형제들은 대부분 몸집이 작았다.

한국의 초등학교 학생들 정도였다. 얼굴과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한국에서 온 최광 선교사라고 해요.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내 소개를 했다.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4명 있다는 것과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라는 것과

북한 형제들이 보고 싶어서 단기 선교 차 이 곳에 왔다고 간단하게 소개했다.

 

그러자 광호 선생만 자기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했다.

다른 북한 형제들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탈북자들은 중국에 오는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안기부(현 국정원) 요원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 보위부도 강제 북송되어 오는 탈북자들이, 남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면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안기부 요원을 만난 것으로 간주했다.

 

탈북자들은 남한 사람을 구경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간첩이 되었고, 정치범 수용소로 가야 했다.

이 때문에 탈북자들은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낯선 북한 형제들 속에서 홀로 살아야 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불법 체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북한은 계속해서 탈북자들을 체포해서 북한으로 송환할 것을 중국 정부에 요구했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수시로 비밀경찰들을 파견했다.

 

중국의 공안들도 탈북자들을 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삶은 불안했다.

북한의 야만적인 정책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런 법적, 제도적인 장치도 없었고,

앞으로 생길 가능성도 별로 없다.

 

탈북자들도 이러한 자기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무 의미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대충 살아갔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결국 언젠가는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 북송되어 가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늘 우울했다. 거기에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굶어 죽을 것 같아 늘 죄책감과 근심 속에서 살았다.

 

북한 형제들은 자주 싸웠다. 그냥 말로 싸우지 않았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면서 온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쉽게 싸웠다. 불안과 스트레스를 싸움질로만 해결하는 것 같았다.

싸우지 않는 때가 없었다. 평소의 말투 자체도 강하고 빠른 북방 사람들의 말투인 데다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하나같이 공격적이었고 야비했다.

 

기분이 좋을 때도 늘 삐딱하게 마음을 반대로 표현하기 일쑤였고, 좋은 일을 봐도 비꼬기만 했다.

익숙하지 않은 북한 형제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성경도 가르치고 예배도 드리면서 20일간의 단기 사역 일정을 마쳤다.

 

내가 떠난다고 하자 북한 형제들은 섭섭해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내가 자기소개를 해도 무뚝뚝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라

조금 놀랐지만 기분은 좋았다.

 

매일의 삶이 전쟁 같았지만 북한 형제들이 좋았고, 북한 형제들도 내가 간다고 하니 싫어했다.

어느새 정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냥 떠나기가 미안해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꼭 다시 돌아올게요.”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 개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소 그렇게 건강하던 몸이 아파 왔다. 꼭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온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음에 기쁨과 평안도 사라지고 찬양도 할 수 없었다. 괴로운 마음을 박 베드로 선교사님께 하소연했다.

그 분은 대뜸 “1년 정도 휴학을 하고 북한 선교를 하는 것이 어때요?”

 

아프고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너무 심했다.

그런데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반응이었다.

나도 모르게 “예!” 하고 대답했고, 곧장 중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내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비행기 표를 사자마자 아프던 몸도 곤고하던 마음도 거짓말처럼 나았고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부터 북한 선교하는 거야.”

내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나의 북한 선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시 중국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단기 선교가 아니라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선교사의 길이었다.

가방에는 옷 몇 벌과 성경 한 권, 말씀 1,000절 암송 노트, 성경 통독 테이프 2세트가 담겨 있었다.

 

돈은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남은 4만 원이 전부였다. 하나님께 죄송했다.

과거에 그 많던 돈을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 다 쓰고,

이제 하나님께 드릴 돈이 겨우 4만 원밖에 없다니 너무 죄송스러웠다. 울면서 하나님께 고백했다.

“하나님, 이제는 제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갑자기 선교 현장으로 들어오다 보니 후원받을 교회도 단체도 없었다.

아내와 4명의 자녀들, 연로하신 어머니는 주님께 맡기고 왔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총신대학교 김의환 총장님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다. 총장님께서 내게 물어보셨다.

 

“후원금은 확보되었습니까?”

“아니요, 하나님만 믿고 갑니다. 지금 비행기 티켓 살 돈밖에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다년간 사신 총장님은 이해가 안 되시는지 다시 물으셨다.

“가족들 생계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갑니다.”

 

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집에는 쌀 한 포와 3만 원밖에 남겨두지 못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악한 자라는 성경 말씀을 자네 아나?”

“총장님, 한국 선교사들은 말씀만 붙잡고 주님이 한다는 믿음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너는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오직 내가 주는 권능만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말씀을 의지하고 갑니다.”

 

내 말을 들으시던 총장님은 사무실 비서와 재단 이사장님 비서와 함께

그 자리에서 작은 기도 모임을 가진 후, 우리 가족들에게 매달 20만 원씩 보내 주기로 약속하셨다.

1999년 김의환 총장님이 중국 사역장을 방문하셨을 때 함께 찍은 사진

 

나는 주광호 선생과 북한 형제들이 살고 있는 길림시의 지하 사역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북한 형제들은 반가워했다. 오랫동안 사귀어 왔던 친구들을 만나는 것같이 친근하고 편안했다.

“오! 최 선교사님 안녕하슈! 잘 왔소 최 선상. 할렐루야 최 선생!”

 

북한 형제들은 나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대면서 좋아했다. 특히 방무디 형제가 좋아했다.

나는 다시 돌아오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듣던 무디 형제가 갑자기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아! 그거 말임다. 우리가 선교사님 다시 오게 해 달라구 기도라는 거를 했다 아임까.

아 근데 거, 기도라는 게 응답이 되긴 되네 응? 와! 그거 진짜 신기하다야.”

 

북한 형제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자기들의 기도로 돌아오게 된 내가 신기하다고 자꾸만 나를 바라보고 만져 보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예상 밖의 환대가 반갑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에 대한 북한 형제들의 관심은 조금 유별났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탈북자들 역시 떠나가는 사람에 대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미련도 기대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돌아오게 해 달라고, 별로 믿지도 의지하지도 않는 하나님께 기도까지 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나는 즐거웠다. 다시 돌아오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렸다.

하루 종일 웃고 떠들면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지냈다. 주님이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진정되자 북한 형제들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전도사일 뿐이고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어요.

선교사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돈도 없는데, 왜 나를 다시 오라고 기도했나요?”

 

무디 형제가 대꾸했다.

“우린 선생이 좋슴다. 우리까 같이 살아주니까·...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처럼 돈이 없잽니까?

그러니까 우리까 똑같이 먹고 똑같이 한 자리에서 자니까 그래서 좋슴다. 믿을 수가 있잽니까!”

 

“돈도 없는 나를 데려다가 뭘 하려고 그래요?”

 

주기철 형제가 끼어들었다.

“아 최 선생님 우릴 좀 보십쇼. 우리가 지금 돈이 있어서 삼까?

우리처럼 살문 됨다. 걱정 맙소! 돈이야 또 이렇게 저렇게 생기는 거 아임까!”

 

이렇게 6명의 북한 탈북자들과 1명의 중국 조선족 형제와 함께 북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인 주광호 선생, 촌뜨기 같은 방무디 형제, 싸움쟁이 주기철 형제,

멋 부리기 좋아하는 진칼빈 형제, 다리를 심하게 절며 걷지 못하는 민선주 형제,

축구를 좋아하는 지간구 형제, 조선족 강길호 형제들이다.

 

↑ 처음 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함께했던 1기생 북한 형제들이다.

윗줄 왼쪽부터 진칼빈, 최바울, 박요한, 김권능, 민선주, 방무디, 허익두

아랫줄 유기풍, 최광 선교사, 전관화, 김순교 전도사

 

사역을 시작하면서 많이 힘들 것이라 짐작했다. 각오도 단단히 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었다. 정말 힘들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지고 가는 사명 때문에, 한국의 가족들과 아이들이 고생하는 것을 볼 때였다.

 

가끔씩 사역비 문제 때문에 한국에 잠깐씩 왔다가 돌아가면서 집에 들러 보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힘겹게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없는 동안 과일을 전혀 먹어 보지 못했다.

나는 선교 헌금으로 들어오는 돈은 100% 사역장에서 사용하고,

가정 생활비로 후원되는 헌금만 가정에서 사용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사역했다.

 

가정에는 김의환 총장님으로부터 후원되는 20만 원이 전부였다.

매번 집에 들렀지만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집을 떠나야 했다.

사람의 다리가 그렇게 무겁다는 것을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주님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비행기 안에서도 중국의 열차 안에서도 울면서 갔다.

아빠가 중국에서 하나님 일 많이 하고 빨리 올 수 있도록 날마다 기도하며 울다가 잠이 든다는

4살짜리 막내 딸 생각을 하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당신  (한국의 아내에게서 온 편지)

당신이 선교사라는 것과 우리 가족이 선교사 가족이란 게 너무 감사해요.

남이 하지 못할(?) 일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부족한 저에게 당신과 네 아이를 허락하시고 NSM과 사택, 그리고 기도하게 하시니 정말 감사해요.

잘 지내고 계시죠? 늘 냉장고에 붙여 둔 백두산 기도회 사진을 보면서

아이들이랑 ‘이 시간도 북녘으로’ 찬송을 부르며,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이들이 대견스럽게 아빠를 위해 기도하며 모든 일에 불평 없이 잘 생활해서 참으로 감사해요.

 

NSM 사무실 정오기도회, 목요중보기도회 때마다 당신을 위해 특별기도 해 주시는 사모님,

양봉이 전도사님도 감사하구요.

이승수 전도사님 사모님이 얼마나 신경 써 주시는지

아이들 빵과 사탕, 햄, 참기름, 포도, 북어… 말할 수 없이 감사해요.

 

NSM 사모님도 아이들과 저를 위해 특별히 신경 써 주시고,

또 양 전도사님도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감사할 일밖에 없답니다.

 

저는 하나님 일 열심히 하시는 당신 덕분에, 덤으로 하나님 사랑을 받는 것 같아요.

이곳은 아직 추운 날씨가 아니지만 그곳은 추울 텐데 내의도 변변치 않고 어떻게 지내세요?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 하루 종일 네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저녁이면 그립고 그러다가

기현이, 명현이가 아빠 보고 싶다고 떼쓰면 같이 울어 버린답니다.

할머니 전화 받고 나면 울고, 아빠 보고 싶다고 울고 우리 다 울보 되었어요.

 

매일 달력을 바라보며 당신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어머님 생신 때도 못 가 뵙고 죄송스러웠는데 추석에는 어떻게 가나 걱정했는데

NSM 사모님네 식구랑, 우리 식구랑, 이승수 전도사님 차 타고 주일 예배 마치고 내려갔다가

화요일 저녁에 오려고 해요.

 

당신이 없는 추석은 쓸쓸하겠지만 하나님 일 하는 당신을 위해 가족들이 모두 기도하겠어요.

소록도 어머님은 백내장 수술 받으시고 회복 단계이신데, 아직 눈에 핏발이 서서 성경 읽기가 힘들대요.

그래도 수술 결과가 아주 좋다고 그러셔요.

 

여보. 당신이 웃는 모습이 너무 보고 싶고 "미연아 사랑한다." 하는 당신 목소리도 너무 듣고 싶어요.

저도 당신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우리 서로 기도하며 열심히 사명 다할 때 하나님 영광 받으시겠죠?

당신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워요.

여보 파이팅! 또 소식 전할 때까지 잘 지내세요.   9월 30일 아내가  

 

아내가 보고 싶고 아이들이 보고 싶어 집에 전화를 걸었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그러는지 아내는 집에 아무 일 없고, 아이들도 다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목소리를 듣고 나니 아내가 더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태어난 지 몇 개월밖에 안 된 아들을 고향에 두고 온 요한 선생,

6살짜리 귀여운 딸아이를 두고 온 것 때문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빈 방에서 눈물 뚝뚝 떨구며 자주 우는 무디 선생,

밭고랑에 쓰러진 어머니를 두고 눈물의 강을 건너야 했던 바울 선생,

이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북한 형제들을 보면서 비록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도 늘 감사하면서 지내왔고,

이들 앞에서 가족들 보고 싶은 내색을 하기가 미안해서 잘 참아 왔지만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이들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기도하려고 침대에 엎드리자마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는 미연이를 지켜 주시며,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사 은혜 주시며 평강 주십시오.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에서 앞으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 되게 해 주세요. 주님.”

 

“주님… 주님… 사랑한다 미연아! 보고 싶다 미연아! 미연아…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당신만 사랑합니다. 주님, 보고 싶습니다. 저의 가족들이 보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없는 동안 지켜 주세요. 주님… 미연아… 영니야… 정니야… 기현아… 명현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 없이 울면서 아내와 아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처음 사역을 시작해서 1년 동안 나는 참 많이 울었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되어 울었고, 보고 싶어 울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외로워서 울었고 힘들어서 울었다.

돈이 없어서 울었고, 북한 형제들이 말을 듣지 않아 울었다.

 

북한 형제들이 죄 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으로 기뻐할 때 감격해서 크게 울었다.

칼빈 선생과 선주 선생을 위해 기도하면서 안타까움에 울었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치유해 주셨을 때 감사해서 또 울었다. 얼핏 생각해도 300번은 더 넘게 울었던 것 같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정말 그랬다.

울면서 1년간 함께했던 1기생 북한 형제들은 모두 다 주님을 영접했다.

 

북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스스로 깨달았다.

모두가 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되어 북한 형제들을 모집하였고

그렇게 2기 사역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사역을 시작한 기풍 선생은 8명의 북한 형제들을 모집하였다.

익두 선생은 5명의 북한 형제들로 사역을 시작했다.

선주 선생은 9명의 북한 형제들로 사역을 시작했다.

권능 선생도 9명의 북한 형제들로 사역을 시작했다.

총 31명의 북한 형제들로 2기 사역을 시작했다.

 

이들 중에서 또 다시 많은 북한 출신 북한 선교사들이 세워질 것이다.

사역이 확장되니 한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한국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신학교도 그만하겠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 선교 하다가 바로 천국 가겠습니다.”

 

이렇게 북한 출신 북한 선교사들에 의한 북한 선교가 시작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감사 또 감사하였고, 역사와 민족, 그리고 한국 교회 앞에서

이들에 대한 책임에 어깨가 무거웠다.

 

사역이 확장이 되고 많은 학생들을 혼자 관리하는 것이 힘들었다.

거기에다 가족들을 더 이상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아 1999년 7월 말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왔다.

 

아내는 두려워했다. 오지 않으려고 금식 기도까지 하면서 주님께 애원했지만 결국 끌려오다시피 왔다.

그러나 익두 선생의 사역장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나서는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때부터 함께 사역을 감당해 오고 있다.

 

권사님이신 어머니, 중학교에 갓 입학한 첫째, 초등학생인 둘째,

그리고 일곱 살 다섯 살인 셋째 넷째까지 모두 여섯 식구가 아무 대책도 없이 배를 타고 중국으로 왔다.

 

가족들은 선주 선생 사역장과 익두 선생 사역장들을 거치면서 북한 형제들을 만났다.

며칠 동안 열차를 타고 사천성 성도시로 갔다. 성도 역에 도착했지만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없었다.

조선족 원초 형제와 함께 마중 나온 권능 선생이 말했다.

“선생님, 사모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제 재깍 가서 집을 구해 놓구 올 검다.”

 

자신 있게 말하고 떠난 권능 선생과 원초 형제는 집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지

3일 후에 집을 구해서 돌아왔다. 그동안 가족들은 역전 한구석에 짐들을 잔뜩 쌓아 놓고 지냈다.

노숙자들 같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나도 눈물이 많이 났다.

권능 선생이 구한 집은 한 달 월세가 800元 되는 15평 규모의 깨끗한 아파트였다.

↗ 중국에 들어온 가족들과 2000년 서안 흥경공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둘째 정니, 어머니, 맏이 영니, 아내, 아들 기현, 막내 명현)

 

짐을 풀고 어머니는 아내와 조선족 아주머니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갔다 오셨다.

어머님은 중국이 너무너무 좋다고 하셨다. 시장에 갔더니 한 상자에 30마리가 들어 있는 싱싱한 갈치가

우리 돈으로 15,000원 정도밖에 하지 않고, 소꼬리 1개 1,500원, 소뼈도 한 근에 겨우 150원,

쌀 1kg에 200원, 사과 한 상자가 2,000원밖에 하지 않더라고 하셨다.

이제 아이들에게 과일을 마음껏 사 먹일 수 있겠다고 너무 좋아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물가가 참으로 싼 나라였다.

 

1998년 처음 북한 선교를 시작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 선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의 강권하심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열매와 성과들을 맛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2001년까지 4년 동안 350여 명의 북한 형제들에게 성경 통독 사역을 진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250여 명의 탈북자들이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중에서 70여 명의 탈북자들에게는 강도 높은 북한 선교사 훈련을 진행, 북한 선교사로 양육하여

그들 스스로 북한 선교 사역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중에서 6명의 순교자들이 배출되었고, 일부 북한 선교사들은 현재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5명의 북한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입국하여 신학 과정을 이수하고

북한 선교 영역에서 영적 지도자들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2001년에 60여 명의 북한 형제들과 함께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북한 형제들은 북한으로 북송되었고 나는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중국에 있던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입국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향한 사역의 필요를 느끼고 2002년 10월 13일 안산에서 열방빛교회를 개척하였다.

 

집에서 예배드리는 열방빛교회의 형편을 아시게 된 대구동도교회 정정란 권사님의 후원으로

2003년 4월 11일에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으로 교회를 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3년 5월 25일 열방빛선교회를 세웠다.

이 선교회를 통해 탈북자 출신 신학생들을 후원하고

중국에서 훈련받던 북한 형제들을 목회자로 양성하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계속해서 중국으로 재탈북 해 오는 우리 선생들과 학생들을 남한으로 구출하는 사역을 진행하였고,

중국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북한 지하교회에 물질을 공급하는 사역을 진행하였다.

서울 시흥동으로 이전하면서 드렸던 열방빛교회 설립 예배 사진

 

2008년 4월 중국 입국 금지 기간이 해소되고 중국 비자가 발급되었다.

중국으로 재입국하면서 제2차 북한 선교를 시작하였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다시 중국에서 탈북자 성경통독 사역을 하였다.

10여 명의 북한 자매들과 청년들에게 통독 사역을 진행하였고

이 사역을 통해 훈련된 북한 형제들과 자매들을 한국으로 인도하였다.

 

중국에서 2차 북한 탈북자 사역을 시작하면서 이 사역에 온전히 헌신하고자

한국에 있는 열방빛교회를 정리하였다.

그러나 2010년 말 서인철 형제를 남한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북한 탈북자 사역을 남한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음성을 받았다.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2011년 8월 7일 구로구 온수동에 있는 사택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황금종교회’를 설립하였다.

 

교회 이름이 조금 이상한지 왜 황금종이냐고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물었다.

주님은 나에게 꿈으로 분명한 비전을 주셨다. 주님은 이 교회를 통해

세계 수많은 지역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비전을 주셨다.

 

그렇게 세워지는 교회는 나의 꿈속에서 천국에서 울리는 황금종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너무 아름답고 황홀한 꿈이었고 비전이었다. 이 비전을 받고 교회 이름을 황금종이라고 지었다.

 

 

첫 예배를 드릴 때 순교자 정용철 선생님의 아들 정봉철 형제,

2차 중국 탈북자 사역 때 가르쳤던 황성철, 이광철 형제,

그리고 광철 형제 친구 주철명 형제, 1차 사역 때 서안에서 3기생으로 훈련받았던 최효선 형제가 함께했다.

 

처음 몇몇 북한 청년들과 시작한 사택 교회에 북한 청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5개월이 지나자 50명의 북한 청년들이 모여 왔다.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인원이 불어났다.

결국 서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좁은 사택이 주일날만 되면 북한 청년들로 인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아래는 사택에서 시작한 황금종교회 예배 사진이다.

시작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집안을 가득 채웠다. 

주님은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예배 처소를 마련해 주셨다.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3가 163번지 지하 1층 50평 공간을 허락해 주셨다.

이 장소는 강명순 집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무료로 대여해 주셨다.

수천 만 원이 드는 리모델링 비용은 남서울교회 여전도회에서 바자회를 해서 마련해 주셨다.

가난한 북한 청년들에게 멋진 교회 건물이 생겼다. 정말 주님의 은혜였다.

 

새로운 성전이 마련되자 북한 청년들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넓다고 생각했던 곳도 이사 온 지 한두 달 만에 다시 가득 차 버렸다.

 

지금 나는 남한에 입국한 북한 청년들을 황금종교회를 통해 주님께로 인도하고,

준비된 북한 청년들에게 열방빛선교회를 통해 신학 과정을 이수하게 하여 북한 선교사로 양육하고 있다.

 

동시에 북한 지하 교회 지원 사역도 병행하고 있다.

이 사역은 자세히 공개할 수 없기에 양해를 부탁드린다.

 

↗ 2013년 3월 31일 부활주일 예배 후 황금종교회 성도들이 다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은 사람을 준비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더욱 더 그러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크고 귀한 사역일수록 사람부터 준비하신다.

 

북한 복음화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북한을 복음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건물도 아니다.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흥분하는 군중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비록 적은 수이지만

준비된 당신의 종들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북한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북한을 영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일꾼들을 키우는 것이다.

 

다년간의 선교 경험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북한 사람이다.

탈북자 한 사람을 변화시켜 북한 선교사로 키우는 것은, 정말 크고도 실제적인 북한 선교이다.

 

이름 없고 가난한 한 사람의 탈북자에게 탄탄한 성경적 기초와 깊은 신학적인 안목을 키워 주고,

삶 속에서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과 돈과 인내와 정성, 그리고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북한 출신 선교사 한 사람은

남한의 선교사 수백 명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이 일을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일을 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키우면 그들이 북한으로 가서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나의 이 믿음과 확신은 책을 읽고 지식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다.

십 년 이상의 북한 선교 사역 속에서, 정말 많은 고통과 탈북자들의 순교와 헌신과 희생 속에서 얻은 신념이다.

 

나는 이 일에 나의 삶을 걸었고 생명을 바칠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선교사들이 탈북자들을 남한으로 데리고 오다가 생명을 잃기도 하고

중국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평범한 탈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증거이다.

 

나는 북한 형제들에게 가장 시급한 사명은 북한의 복음화이지만

더 나아가서 북한을 넘어 세계를 감당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조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북한 사람들에게는 그럴 만한 저력이 충분하다.

 

단순하면서도 사납고 공격적인 북방 사람들의 기질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아름답고 폭발적인 에너지가 되는 것을 자주 경험했다.

분명히 이 힘과 에너지는 북한이라는 조그마한 나라 안에만 갇혀 있지 않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북한 형제들과 함께 북한의 복음화와 더 나아가 전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 오고 있다.

 

나는 북한 선교에 대해서 비전을 품은 많은 주의 일꾼들과 동역하고 싶다.

많은 주의 일꾼들과 함께 비전과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고자 한다.

그렇게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남은 이슬람의 견고한 진을 뚫고 나가는 주의 강력한 일꾼들을 키우는 데도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이고 이것이 나의 비전이고 기도 제목이다.

 

오라! 주의 청년들이여!

가자! 북한으로!

그리고 세계로!

 

최광 제자들

김권, 허익두, 최바울, 민선주, 유기풍, 주광호

진칼빈, 박요한, 방무디, 전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