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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3:3~6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LNCK 2022. 9. 19. 17:45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  - YouTube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3:3~6      2022.09.11.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3:6

‘율법 조문’이란 말은, 세상에서 잘 쓰지 않는 말입니다.

 

이전에 개역성경에는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이렇게 개역에는 ‘의문’이라고 번역했지요.

 

그렇지만 요즘 쓰는 개정개정판에는 ‘율법 조문’이라고 두 단어처럼 번역했어요.

이것은 두 단어가 아니라 한 단어, 영어로 letter(글자, 문자)입니다.

 

그럼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는 .. 이런 뜻입니다.

즉 성경말씀에 어떤 성령의 기운이 부어지지 않으면,

그 말씀을 아는 지식 자체로는.. 별 소용이 없다는 거죠.

 

이 말씀 그대로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설교자로서 제 자신을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20세 즈음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하늘의 우주를, 하나님이 지으신 것처럼

성경이 하나님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나는 죽어있는데, 오히려 성경이 살아있는 책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어요.

저는 그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저는, 성경말씀을 놓쳐본 적이 없어요.

아무리 괴로워도, 내 괴로움이 멈출 때까지 제가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성경은 정말 그 속에서 하늘의 양식을 제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는데요, 저는 깊이 (대면하여) 기도하지 못했어요.

저는 기도가 분명히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려고 하면, 기도가 막혀 있으니까, 잘 되지 않았죠.

힘을 써서 기도해야 기도가 조금 되곤 했죠.

대신에 늘 말씀만 읽어왔어요. 아볼로처럼!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3:6

그래서 살리는 말씀, 설교가 되려면

기도를 깊이 했어야 되었는데..

 

그저 기도 없이 말씀만 똑바로 전하려고 하다보니 .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이게 제게 응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3:6

저는 이 말씀 앞에서

교우들이 제 설교로 인하여,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깨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저는 오래도록 그렇게 치우친 삶을 살아왔어요.

 

 

▲성경에 보면, 기도가 먼저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

먼저 주의 영이 임했어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예수님은 기도의 본을 보이셨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했잖아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눅11:1

 

제자들이 예수님의 설교에 놀라서,

‘우리에게 성경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한적한 곳에 가셔서

제자들과는 돌 던질 만큼 떨어져서 기도하셨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의 비결은, 기도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 속에

기도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바쁘다고 기도 없는 삶을 살지 않았어요.

그의 지위는 왕이었지만,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기도가 가르쳐지는 자녀들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솔로몬은 잠언을 썼어요.

솔로몬은 아들들에게 지혜에 대해서 잠언을 썼지요.  *말씀에 비유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책을 썼어요. 시편이 기도의 책이죠.

무엇이 먼저입니까?

 

주님은, 하나님께 기도한 다윗이

더 영향력 있는 왕이 되게 하시고, 

그의 기도도 성경에 다 기록되게 하셨어요.

 

여러분, 먼저 기도가 회복되고, 깨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왜 그러냐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저는 기도하지 못하고

저는 말씀에만 치우쳤어요.

 

제가 처음에 헌신했을 때 주님이, 저를 ‘교사’로 부르셨어요. 엡4:11

그래서 저는 바로 교회에서 ‘교사’로 지원했습니다.

 

자격은 안 되었지만, 주님이 저를 교사로 부르셨기 때문에

나중에 차츰 자격은 따라왔고, 주님은 말씀을 열어주셨어요.

 

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성경만 잘 가르치면’ 다 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성경을 중점적으로 가르쳐 왔는데,

이제는 주님이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어요. (*기도를 등한시 했던 거죠)

 

오히려 그동안 성경을 가르쳤지만, 많은 사람들은

저처럼 이 목자를 따라서, 기도하지 않았고

그리고 성경 지식 자체에만 좋아하게 되었어요.

 

여러분, 이 시간에 저를 보시면서

또한 여러분 자신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깊은) 기도가 없이는 안 돼요!

기도는 호흡이에요.

말씀은 양식이에요.

 

양식은 금식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기도(호흡)는 멈추면 큰 일 나죠.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죠.

‘쉬지 말고 성경보라’는 말씀은 없어요.

 

여러분 이 시간에, 주님께 먼저 기도하려고 모여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 소원합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고, 말씀만 가르쳤기 때문에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고후3:6

제 설교를 통해서, 살리는 영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만 하면서.. ‘죽이는.. 죽은 계시’를 전달했던 거예요.

 

맞는 내용을 가르쳤지만,

이것은 제 ‘자기 의’가 될 수도 있었죠.

 

‘내가 맞는 계시를 전한다, 맞는 내용을 설교한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게 역시 맞아!’ 할 때까지 성경을 또 살피고, 또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맞는 성경지식’이었지, ‘죽은 지식’이었지

‘살리는 영’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리는 영’입니다.

 

▲과거에 어떤 분은 교회를 떠나가시면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울 왕은 기름부음이 폐해 졌는데 (끊어졌는데),

10년이 넘게 그는 모든 전쟁을 이겼습니다.

그것은 기름부음이 폐해 졌는데, 그가 왕으로서 주님이 그 책임을 행할 수 있도록

10년이 넘도록 전쟁에 이기게 하셨어요.’

 

저는 지금 정말 두렵습니다.

제가 죄를 고백만 했을 뿐이지, 온전히 회개하지 못하므로

제가 기름부음이 폐해진 사울 왕처럼

 

제가 목사직을 지금 행하고 있지만, 기름부음이 없이

그저 죽은 설교, 문자만 설교할까봐 정말 두렵습니다.

 

여러분, 제 설교로 인하여, 머릿속에 성경지식을 이해한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 자신을 살펴서, 주앞에 깨어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이렇게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라고 했어요. 고후3:3

 

과연 제가 여기서 설교하면서

제 설교를 듣는 주의 백성들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의 편지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펴보게 됩니다.

 

이어서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고후3:3b

 

여러분,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으로만 쓰여져야지만

우리 마음 판에 그 말씀이 새겨지게 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이것을 주님께 긍휼을 구하며

이 일을 이루려면, 주의 영으로만 가능하잖아요.

 

여러분은 저처럼 성경지식에만 능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이 부족한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체의 마음의 판에 쓴 것이라’ 고후3:3c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최근에 주님이 저희 교회에 “자기 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분명해요.

 

제가 찾아낸 것도 아니고, 주님이 저희들을 이끌어 주셨어요.

사건들을 통해서도 나타내시며, 많은 교우들이 그것(자기 의)을 보게 되어서 감사해요.

 

저는 죄로 인하여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나머지는 전부가 ‘자기 의’였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 의’는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있는 거예요.

이게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 누가 주인인가?  https://blog.daum.net/rfcdrfcd/15980278
☞하나님의 의 와 ‘자기 의’http://blog.daum.net/rfcdrfcd/15972274

 

여러분, 이 시간에 예수님 앞에서

누가 주인인지가 살펴져 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어요.

저분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인줄 믿었어요.

 

12제자가 이것을 의심하거나 시험한 적이 없었어요.

그 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봐도 ‘저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아!’

그 분의 설교를 들어도 ‘저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야!’ 이걸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3년 동안 기적을 경험하고, 말씀을 경험했는데요..

3년이 지났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 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은 3년 동안,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틀린 적이 없습니다.

풍랑 치는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풍랑을 명령했을 때도 바다가 잠잠해 졌습니다.

그들은 놀랬죠.

3년 동안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헛되이 땅에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오늘 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이제껏 틀린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날,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와 함께 감옥에 갈 것도 준비되어 있어요.

우리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했어요.

 

여러분, 이것은 믿음이죠.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하는데

이건 굳센 믿음 같아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믿음의 배경은

예수님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자기 의’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말씀을 배우고, 기적을 경험해도

그들에게 기적으로도 ‘자기 의’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도 제자들의 ‘자기 의’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잖아요.

‘나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새벽 닭이 두 번 울기까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죠.

새벽 닭이 두 번 울 동안, 자기 입에서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이것은 확률상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어버렸잖아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어요.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 우리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다 알지만...)

 

(그런데 베드로는, 그때까지 아직 진정 회개하는 삶을 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여전히 자기 의로 충만했잖아요. 자기는 예수님을 절대 부인하지 않을 거라면서..)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 말씀을 그렇게 지근거리에써 따라다니며 많이 배우고도

또 열심도 있었잖아요.

 

그렇게 하고도 결국 예수님을 배반해 버리는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 인간의 부패함과 타락함과 절망을 보게 되는 거죠...

(교회에 이런 사람이 많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베드로는 통곡했어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예수를 부인했구나’ 하고 통곡했어요.

 

‘내가 주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호언장담에 그치고 말았죠.

베드로가 그 때 도망가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서도

그의 행실은...

 

예수님이 고문당하고 있는, 묶여 있는, 고난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버리고

울고 나왔어요.

 

찬송가 중에 ‘울어도 못하네’가 정말입니다.

울어도.. 눈물을 많이 흘려도.. 그게 진정한 회개가 아닐 수 있어요.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고후3:3

 

이 편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썼는데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 쓰여진 것은.. 죽이는 거예요. (생명이 없어요)

 

예를 들면, 요8장에,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까지도 알고 있는 유명한 말씀이 나오죠.

거기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교인들, 바리새인들이 그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 왔어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혔습니다. 그를 예수님 앞으로 끌어왔어요.

 

그 여자를 끌어오고 있었을 때, 그들의 마음판에 쓰여져 있었던 게 뭡니까?

놀랍게도 그들의 마음판에 쓰여진 말씀은, 모세를 통하여 기록된 그 말씀이었어요.

 

무엇입니까? 신명기서에 보면

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은, 공동체에 악을 제하기 위해서 돌로 쳐죽이라고 했거든요.

 

여러분, 지금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앞에서

그들의 마음판에 이미 새겨진 말씀은, 진리였지요.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었죠. ‘돌로 치라!’

 

이 여자는 이제, 예수님의 입에서 어떻게 대답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현장에서 형 집행을 당하는 거예요. 즉시 돌에 맞아 죽는 거였죠.

사람들은 아마 돌을 손에 움켜쥐고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난 1년 동안, 죄사함의 감격도 있었지만

    죄값, 죄의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어서 정말 개인적으로 감사해요.

 

    주님이 제게, 이 죄의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교회를 통해서, 주님이 보게 하셨어요. (아마 일부 교인들이 떠나는 사건을 의미한 듯)

    그 일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낮아지게 하셨는데,

    또한 주님이 저를 정결케 해주시기를 바라는 거예요.

 

여러분, 죄는 너무너무 그 결과가 아픈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는 죽기 전에, 죄로 구원받지는 못하고

돌에 맞아 죽는 죄의 대가, 죄의 결과만을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의 법에는,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 너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뭐라고 말하겠느냐?’

 

그때 예수님이 갑자기 땅바닥에다 뭐를 썼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썼는지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사람들은 다 모세를 통하여 쓴 말씀을 알아요. ‘돌로 쳐라!’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쓰시고는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돌로 치라는 것은, 율법이요, 의문 letter (글자)입니다.

이 의문(글자)는 사람을 살리는 진리는 아닙니다. 그냥 맞는 말입니다.

 

우리 가정에서의 열매도 똑같습니다.

예수를 어렸을 때부터 믿었던 제 막내동생에게

제가 성경을 열심히 가르쳤어요. 7살 차이인데요.

 

그래서 제 동생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많이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더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면, 제게 이렇게 말하고는 형제의 관계가 멀어져 버렸어요.

‘형은 율법주의야!’

 

과거에 저보고 ‘율법주의자’라고 했어요.

당시 저는 영적 소경이라서, 동생의 말을 아주 오래 동안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에, 기적적으로 다시 깨어나서

그런지 최근 2~3년 사이에, 이제야

‘내가 율법주의자였구나!’ 그 막내동생의 말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어요.

 

그 사이에 저는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길렀는데요.

아들이 똑같이 제게 말하는 거예요.

제가 율법주의자 라는 거예요. (말은 맞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었다는 뜻이죠)

 

이것이 제가 돌이켜야 될 제 자신의 지금 숙제입니다.

뭐냐면, 돌판에 쓴 것은 죽이는 거예요. (우리가 들고 있는 성경이 죽일 수 있어요)

 

우리가 살리는 것은, 우리 마음 판에, 주의 영으로 새겨진 말씀만이 우리를 살려요.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답을 미리 알면 안 돼요.

그런데 우리는 그 결과를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 여인이 살아났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 이 본문을 읽을 때 별로 감동이 없어요. 결과를 모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지만 여러분, 순간적인 차이이지만,

그 여자는,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조금 아까 말한 대로 ‘나는 돌에 맞아 죽는구나!’ 생각했겠죠.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라고 말씀하시자

그 말을 들은 여인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모세가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게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니까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한 말씀이니까...

 

근데 하나님의 아들도 똑같구나.

하나님의 아들도 나를 돌로 치라고 말하는구나..’

(여인 역시 글자로 된 말씀을 알고 있었을 터이니까요. 아직은)

 

여러분, 그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은

그때 이미 마음에 죽었어요.

‘나는 오늘, 내가 지은 죄로 돌에 맞아 죽는 날이구나!’

 

 

놀랍게도 아무도 그녀를 돌로 치지 않았어요.

그리고 노인으로부터 나이 작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양심에 가책을 받았어요.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모세의 말과 달랐어요.

모세의 말은, 돌판에 기록됐어요.

 

근데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사단에게 심판을 받은 줄로 알았는데,

오히려 부활로 심판을 이기신 예수님,

 

그 분은 ‘돌로 치라’는 이 말씀을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던 그들 마음 판에 새겨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말씀들이

율법처럼, 돌판에 글자로 새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마음 판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놀랍게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무뎌진 양심의 마음판도 쪼개내시고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 속에 이 마음판에 새겨버렸어요.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새겨졌어요.

여러분, 이 순간에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오래동안 알아도

저처럼, 맞는 말, 틀리지 않는 성경지식, 죽이는 지식에서

깨달아지고 돌이켜지게 되시기 바랍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힙니다. 고후3:6

우리는 ‘맞는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아요.

 

우리는 이렇게 곧잘 말하죠. ‘내 말이 맞지?’ (내 성경 해석이 맞지?)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맞는 지식이, 죽은 지식일 거예요.

살리지 못합니다. 살리는 것은 오직 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날 영으로 전해졌어요.

사람을 살리는 영이었어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돌에 맞아 죽어야 될 그 여인을 그 날 살려냈어요.

 

게다가 범죄한 죄에서 몸만 살려준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여러분, 그녀는 정죄당해야 마땅한 자인데

놀랍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라’ .. 이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위 말씀과 관련해서 오늘은 제가 수년 동안 평소에 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질문인

'십자가 우편 강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잠시 묵상해 보았습니다. 눅23:43

 

뭐 영어자료도 두 세 편 찾아서 읽어보고 했는데도, 해석이 썩 내키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제 친구 중에도 젊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던 분이

지금은 수 십 년째 '방학'을 하고 계신데 

그 분이 알고 있어서 가끔 하는 말씀이 

'우편 강도가 죽기 바로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지 않았느냐?

그가 낙원에 갔지, 지옥에 갔다고 했느냐?' 하면서, 자기는 죽기 전에 예수님께 돌아와서 

구원 받고 낙원 천국에 가겠다고 ..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고, 그래서 안심하는 것 같아요.

 

예수님 말씀이 틀리지 않으므로.. 뭐 맞는 말씀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구원 받기가 이렇게 쉬우면..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도 일치가 되면 좋은데..

다른 곳에는, 또 구원 받기가 쉽지 않고 어렵다고 나오거든요..

 

여기서 한 가지 오해는 '구원은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자기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아주 큰 오해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세요.

미련한 다섯 처녀가 구원 받고 싶어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셨죠. 마25:12

 

그 다섯 처녀가 구원 받기 싫어서 못 받은게 아니잖아요. 문을 세게 두드릴 정도로 열망했습니다.

내가 받고 싶어도, 주님이 안 주시면 못 받는 것입니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고, 다 입학시켜 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물론 내가 원해야 하지만, 입학허가서가 주어져야 입학이 가능합니다.

 

제 친구 가운데, '나는 죽기 전에 우편 강도처럼 그제야 주님께 돌아와서 천국 가겠다'고 말하는 자는,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언제든지 하버드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과 같죠.

턱도 없는 생각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우편강도는.. 입학허가서를 받았어요.

그는 (회개도 하고) 신앙의 진정성이 주님께 용케도 받아들여 졌나봐요.

 

그러나 '나는 죽기 전에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때 정말 신앙의 진정성을 갖게 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지식적으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인정할 수 있어도, 

(우편 강도처럼 회개도 하고) 진정성 있는 신앙을 그때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우편 강도처럼, 그게 그때 그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 아무리 천국 문을 두드려도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응답을 받기가 99배로 쉬울 것입니다.

1%의 가능성은 열어두어야죠.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