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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LNCK 2022. 9. 25. 17:31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  설교 온누리교회 : 갓피플TV - YouTube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롬8:12~17            2022.10.02.

 

교회창립 기념 주일은 지난 역사 속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뒤돌아보고 
또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소중한 기념 주일입니다. 

때마침 로마서 강해 중에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 교회에 중요한 목회철학과 정체성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의 비전"입니다. 
14절의 말씀으로 표현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 입니다. 

롬8:14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 꿈 꾸시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께서 이끄심을 경험한.. 
그래서 새로운 미래를 열었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1992년 하용조 목사님께서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성령 사역'을 선포하신 때가 그러한 때입니다. 

또한 1994년 하목사님께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고 
"2천-1만"의 비전을 선포하신 때입니다. 

그때 교회 성도들이 몇 천 명이 되지 않았을 그때 
'2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5천명의 무리들이 있을 때, 오병이어를 가지고 그들을 먹인다는 선언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인도하심의 음성이, 2018년 불과 몇 년 전 
누적 선교사 파송 2,000명을 넘어서는..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선교사들이 파손되고 있습니다. 

하 목사님은 천국으로 가셨지만, 목사님이 들으신 성령의 음성은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그 음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순종함으로 (자신과 교회를) 내어 드렸을 때, 
교회를 통하여 선교사 파송의 비전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
이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 라는 것입니다. 

2003년 "사도행전적 교회"를 재생산하기 위하여 '멀티사이트 교회'로 선포되면서

 "Acts 29 비전"을 선포하신 때도, 바로 그러한 때입니다.

국내 10개 캠퍼스에, 30개 비전교회, 수백여개의 선교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금주부터 영종도에서 영종 온누리교회 예배가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 재산을 헌신하신 분에 의해서 
영종 신도시에 예배당이 세워지고 마무리 중에 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심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이런 염려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혹은 어떤 상상, 혹은 욕심을 
성령의 음성이라고 착각할 위험은 없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럼 그런 오류나 위험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습니까? 
어떤 장치가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은 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라고 하면서 
이 말씀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해석, 이성적인 판단, 혹은 전통적 해석에 근거해

그걸 '말씀 중심'이라고 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제한하고 무시한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성령님의 인도' 라고 오해하는 광신주의적인 신앙이나 
아니면 '성경 말씀 중심'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해석이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올려놓는 율법주의, 문자주의 신앙도
또한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 양극화된 모습은, 
-성령님의 임재 없는 말씀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없는 성령의 인도만을 추구 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과 성령의 완벽한 균형과 조화가 
우리 신앙과 교회의 생명력에 매우 중요합니다. 

하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한 해의 교회 표어를 '말씀과 성령'으로 세우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고, 하목사님을 통해 주어진 목회철학이자 
우리 교회 중요한 영적 생명력은 '말씀과 성령의 균형과 조화'
그 둘의 완벽한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렇게 정의 될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의 삶을 설명하시면서 
'바람'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3:8절에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지만 
바람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모두 이와 같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어로 '바람'이라는 단어와
'영'이란 단어는 한 단어 입니다. 
같은 단어가, 문맥에 따라서 '바람'으로 번역 되고, '영'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 이유는, 바람과 성령이 비슷한 특징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바람'은 영적 생명력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그리고 누구도 막아설 수 없는 역사입니다. 

근데 그 바람은 자유롭게 붑니다.
예수님은 '임의로 분다'고 하셨는데,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는 바람을 잡을 수 없습니다. 묶어둘 수도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한 이 시대에도 바람을 만들 수도 없으며 
바람이 흐름을 추적할 뿐입니다. 

때로는 예측했지만, 바람은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임의 대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인간이 다 추적할 수 없는 어떤 법칙과 근거가 있기 때문에 
바람은 움직이는 것이죠. 

성령의 바람도, 임의대로 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복음 전파의 역사를 통해서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자연계의 바람도, 아무 목적 없이 부는 거 같지만, 자연을 섬깁니다. 
우리에게 시원함을 주는 것은 기본이고, 배들을 순항하게 하죠. 
그리고 이 바람을 통해서 꽃 속에 씨앗이 숙성되죠. 
또한 씨앗을 나르기도 하지요. 이삭을 여물게도하고 
소나무의 솔방울을 굳게 만드는 것도 바람입니다. 

또 따로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태풍도, 우리에게는 없어야 할 것 같지만 
태풍을 통해 바다가 정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다는 자연을 섬기는 통로가 됩니다. 

성령님은 바람으로 표현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자연 바람에 우리가 잘 민감해야, 바람이 우리의 삶에 유익하듯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우리가 그 성령의 바람과 함께 움직이며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지난 37년의 역사 속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바람처럼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움직여 왔습니다. 

창립 37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가 되겠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러한 마음의 헌신과 결단을 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설교를 할 때 제가 여러 번 인용한 문장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이 중요한 문장을 저는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어윈 맥매너스 가 쓴 <교회, 하나님의 운동력>이란 책에 나오는 문장인데요. 
"문화가 변화해 감에 따라, 교회가 운동이 아니라 
기관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기관은 문화를 보존하지만, 운동은 문화를 창조한다. 
사라질 문화를 보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문화의 수치스런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당신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의 모든 것이 
성령의 사역에 뿌리를 두고 생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바람과 같이 움직이며 
그가 한 때 불었던 곳을 침묵 속에 남겨두고 
지금 새롭게 움직임을 일으키는 곳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거기에 뒤쳐지지 않으려면 돛을 올려서 성령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교회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운동력입니다. 
교회가 기관이 되어 갈 때, 조직화 되고 짜임새 있는 것 같지만.. 굳어지며 
그리고 박물관처럼 역사의 문화와 함께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 목적은 문화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는 늘 새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때로 그 일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천명 선교사의 파송을, 인간적으로 판단할 때는 
누가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운동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는 
늘 성도들이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과거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교회 시제는 언제나 '과거'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이렇게 했지..' 대화의 기준이 과거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의 시제는 언제나 '미래'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어떻게 나아가야 될 것인가?' 

과거의 문화를 보존하려는 교회인가,
아니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려는 교회인가?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인가/ 아닌가를 특징 짓는 요소입니다. 

교회가 아무 일 없이 그저 안전하게, 그리고 도전 없이 조용하게 있기 원한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건 또 뭐지?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롭게 도전해온 내가 바로 저희 교회 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우리가 더 민감하게 순종에 가는 
저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한 공동체를 원합니까? 
공동묘지에 가 보십시오. 너무나 조용하고 평안합니다. 
갈등도 없이, 다툼도 없이.. 그저 조용합니다. 
공동묘지와 같은 교회가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면'  안 됩니다. 바람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교회의 3가지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훈련 공동체>입니다. 

8:12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하는 
육신에 빚진 사람이 아닙니다.

8:13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행실'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몸'은 육신을 의미하고 
여기서 '행실'은, 행동만 아니라, 사고방식, 마음의 습관, 세계관, 
판단하는 방식 등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았고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공격이 있고, 그 죄에 반응하는 옛사람의 영향력,
옛 자아의 영향력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교회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은 
이 남아있는.. 그리고 죄로 여전히 향하고 있는 
그 몸의 행실을, 성령의 능력으로 죽이도록 우리를 훈련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훈련공동체 입니다.

교회의 모든 양육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훈련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목표는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 체육관과 같습니다. 
우리가 몸을, 육체를 강건하게 하고, 건강을 지키고 강화시키기 위해서 
체육관에 가서 우리의 근육을 단련시키듯이 

우리의 타락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우리는 영적 체육관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절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다' 그랬고,
디모데에게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그랬습니다. 딤전4:7

이 훈련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초로 하여 
우리에게 거룩한 습관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어떤 위기에 닥칠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도움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실상을 하나님이 돕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에 행실이, 하나님의 도움을 스스로 가로막고 있는 적이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려고 노력했던 흐름들이 있었죠. 
1) 첫 번째는 수도원과 같이 세상과 분리되고 단절하여 
세상을 보지 않고 교제를 끊음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종교개혁 이죠.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수도원에서 
가장 철저한 신앙 생활을 했지만, 몸의 행실을 죽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의롭다 함을 주시는 그 은혜로 
믿음으로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받는다'는 로마서의 말씀들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 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2) 또 다른 잘못된 부류는 율법주의죠.
여러 가지 고행이나 규칙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곧 경건한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경건이란 기쁨이 없는 것이라고 오해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종교생활을, 신앙 생활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죄를 죽인다' 라는 말을, 청교도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죄 죽이기 Mortification"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이 Mortification (죄 죽이기) 단어를 킹제임스성경에서 사용함으로써 
많은 청교도들이 사용하게 되었죠. 

'죄 죽이기'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으로 
죄로 향했던 우리의 마음의 동기까지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가 싫어지고 미워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동기로부터! 
그것을 무엇이 가능하게 합니까?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라는 말만 들어도 
'내가 다 아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은 내가 많이 들었고, 다 아는 건데..' 이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단어를 익숙하게 안다 그래서 정말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안에서 성령의 임재가 느껴져야만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것처럼 
수십년간 신앙생활을 했기에, 
그것은 기초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그 외에 다른 거 없습니까? 하면서 자꾸 다른 거 찾다가 
이단 사이비에 빠지는 거예요. 

여러분, 다른 거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외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전해지고 
복음을 묵상하고, 복음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새로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이 복음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 뿐 입니다. 

▲온누리교회가 강조했던 모든 양육체계, 큐티, 일대일, 예수제자학교 등
여러 과정들이 있죠. 

우리가 개인적으로 큐티를 하지만, 그 큐티를 또 나눔방에서 나누잖아요. 
이것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함께 죽이는 노력을 하는 거예요. 

나눔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몸의 행실이 죽어졌는지.. 
어떻게 말씀 안에 임한 성령님이 나를 치료 하셨는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일대일 제자양육도, 누군가를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과정이에요. 

예수제자학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몸의 행실을 죽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의 모든 양육체계에, 여러분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이 훈련 공동체의 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아버지와 친밀함을 누리는 가족 공동체> 입니다. 

8:14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8:15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이르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영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8:16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종이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아바'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바는 아빠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자녀들의 축복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친밀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유신론자 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적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는 친밀한 관계속에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아바'라 부를 수 있는 친밀함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친밀함은 혼자 누리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에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에 항상 갈등이 있거나 
혹은 친밀한 친구 형성을, 우정을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 대부분은 
가족 공동체 안에서 친밀함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식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살면서 
기쁜 감정, 슬픈 감정, 그리고 다른 사람을 공감하는 태도 
자기가 잘못 했을 때 인정하는 것,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어려서부터 자라나면서, 가족안에서 친밀함을 경험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강의로 배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 안에서, 그 친밀함을 형성하는 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 생활에서 그게 다 드러나는 겁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 친밀함은 
영적인 가족 공동체, 곧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배워가는 겁니다. 
지식으로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교제하는 성도님들의 삶을 보면서 
그리고 나를 가족으로 받아주며, 함께 형제자매로 받아들여 주며 

나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기도해 주며 
한 가족 안에서 누리는 영적 친밀함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친밀함을 경험하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혼자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혼자서 절대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결혼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겁니다. 

'나 혼자 예수님을 믿으면 돼지.. 함께 교제하는 거는 피곤해' 
그래서 나 혼자 누구보다도 열심히 믿고, 성경지식을 마스터하고 
신학적 지식, 역사지식도 많아요. 
그런 건 '하나님에 관하여' 정보를 많이 가지는 거예요. 

그런데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친밀함은 없을 수 있어요. 
그 친밀함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때로는 아픈 일, 때로는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있지만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거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친밀한 영적 공동체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배워갈 수 있어요. 

지식은 우리에게 친밀함 intimacy 을 가져다 주지 않아요. 
정보를 줄 뿐이에요. 


◑3.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선교공동체의 모습입니다. 

8:17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분과 더불어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 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입니다. 
유일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참 아들이시오, 
우리는 양자로 받아들여졌죠. 
(어떤 의미로 예수님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훌륭한 기업을 이끌어가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그 자녀가 기업을 이어받는 상속자가 되는 거죠. 

그것은 자녀가, 부모의 기업을 물려 받음으로써 얻는 혜택만 아니라
이제는 책임을 지는 것이죠. 

'상속자'라는 것은, 부모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일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그동안 선교 공동체로 성장해왔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단순한 지역 교회 로서만 아니라 
많은 선교단체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사역해 왔습니다. 

선교 학자들은 이런 것을, Modality 와 Sodality 로 설명합니다.
모달리티(전통교회)와 소달리티(선교단체)가 함께 융합된 교회가 흔치 않습니다.

또 모든 교회가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렇게 융합 된다면, 이것은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누리 교회가 설립한 '두란노해외선교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두란노 해외선교회가 창립된 배경은 
온누리 교회에 초창기 한 장로님의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최선수 장로님이십니다. 

최장로님은 치과의사로서 20년간 강남에서 병원을 잘 운영하셨던 분입니다. 
강남에 좋은 저택과 경기도 광주의 4만평의 농장을 가지고 계셨던 분입니다. 
최장로님은 50세가 넘으면 주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서원을 하셨는데 
55세에 중국 연길에 노블공항 병원을 후원하던 중에 
직접 중국에 가서 선교해야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국내에 있는 모든 재산을 다 정리하고
중국 북경 인근에 8천평의 농장을 매입하고 
농장을 경영하는 비즈니스 선교사가 됩니다.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떠나실 때, 주변에 가족들이 성도님들이 만류했습니다.
그때 장로님이 주변 분들에게 하신 말씀을 제가 전해 들었어요. 

 

'생선이 있으면 생선의 끝부분을 드릴 건가, 가장 좋은 부분을 드릴 건가? 
나는 하나님께 인생을 드리되, 
생선으로 비유하자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드리지 않고
가장 중요한 중심 부분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헌신을 하시며 떠나셨습니다. 
온누리교회 역사의 초창기 영성은 
바로 이렇게 초기에 헌신한 장로님들에 의해서 형성되어졌습니다. 

그렇게 북경 농장이 잘 안정되게 운영되다가 후배 장로님께 물려 주시고 나서 
이제 토론토로 가셔서, 

캐나다인 선교사로서,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사역 하셨던 182분 선교사님들의 
모든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알리는 그런 일들을 하고 계시며

지금도 연길을 오고 가며 많은 탈북민들을 돕는 선교사역을 지금도 하고 계세요. 
2011년도에 그 사역을 개관했습니다. 

최장로님은 <선교는 나에게 축복이었다>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애 후반부를 선교에 헌신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가장 신나고 기쁜 일이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게된 축복, 
그리고 지경을 넓혀 주신 많은 축복..' 그것을 고백하셨습니다. 

이 최선수 장로님이 두란노해외선교회의 파송 1호 선교사님 이셨습니다. 
이 분이 선교지로 가시면서, 그냥 보낼 수 없으니 중보기도모임을 만들었고, 
그리고 많은 선교사님들이 뒤따라간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많은 선교사님들이 천
최선수 선교사님 같은 분의 헌신을 뒤따라 간 것이지요.

중략

교회 생활이 오래될수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받는 것이 
신앙 생활을 오래 한 겁니다. 

전통과 옛습관과 자신의 고집이 강해지는 것이 
신앙 생활 오래된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교회는 다 '기관'이 되어버리고 '기계'가 되어버려서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맙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모든 성도들이 
오래된 성도일수록, 이렇게 더욱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1)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훈련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2)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나누는 가족 공동체 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가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