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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1장 불뱀과 놋뱀 사건

LNCK 2022. 9. 27. 10:55

◈불뱀과 놋뱀 사건              민21장           여러 설교 정리,  민수기 설교모음

 

 

▲본문 민21장은 유명한 '불뱀과 놋뱀 사건'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몇 가지 점에서, 모호한 느낌을 줍니다.

 

1) 왜 하필이면 '뱀이 모양'인가? 뱀은 사탄을 상징하는 형상이잖아요.

 근데, 다른 형상을 다 놔 두고, 하필 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셨냐는 거죠.

 

2) 뭐 장대 꼭대기에 매달린 뱀의 조각물을 쳐다보면 '낫는다(구원 받는다)'고요?

 이건 꼭 이방종교의 우상숭배 (토템이즘, 에니미즘) 방식 같습니다.

 이방종교 예식에 보면, 무슨 뱀이나 다른 짐승을 높이 올려 놓고, 거기에 절하고 하잖아요.

 

3) 그 의미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갖게 되는 본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짧은 답변은 이렇습니다.

 

1) 뱀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뱀의 형상이 필요했던 거죠.

놋뱀은, 내가 받아야할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고, 나무에 높이 달려있습니다.

나의 모든 저주와 형벌이 놋뱀(예수님)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3

 

이렇게 나무에 달린 것은, 저주를 받은 것을 상징하는데, 

본문의 놋뱀도, 저주 받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2) ‘바라본다’는 것은.. 힐끔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반복해서)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아마 광야에서도, 5초간 놋뱀을 바라 본 게 아니고, (몇 시간이고) 오래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고침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은, 5초 정도 바라보다가 금방 관두었을 것입니다.

 

    적용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용서 못할 죄/죄인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자기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시일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계속 바라보면 됩니다.

    성령의 역사로 자기 마음에 사죄의 확신이 올 때까지, 계속 바라보아야 합니다.

 

3) 광야에서 출애굽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서 고통 받게 되는데...

 

그 불뱀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뱀을 보내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뱀을, 하나님이 보내셨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울타리 밖에서, 우발적으로 존재하는 사건은 있을 수 없죠.

 

불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서 물게 하시고,

그 물린 자들에게 놋뱀을 바라보게 (깊이 응시하게, 믿게) 하심으로써 살려내는 게.. 구원입니다.

그것이 요3:16의 뜻이고, 성경 전체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요지는, 불뱀에 물려서 거의 죽게 하신 분(장본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왜냐하면 불뱀에 물려서, 거의 죽게 된 그들만이.. 놋뱀을 쳐다보게 되어 있으니까요!

 

멀쩡한 사람들은, 놋뱀을 쳐다볼 필요가 없죠.

오직 불뱀에 물린 자들만, 놋뱀을 쳐다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놋뱀을 쳐다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백성들을 불뱀에 물리게 섭리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는 자는, 내 인생에서 ‘나는 불뱀에 물린 자’라는 자의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불뱀에 물리지 않은 자들은,

십자가나, 그 장대에 달린 놋뱀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놋뱀이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성도,

놋뱀이 매달린 장대가 십자가니까  (모양도 십자가와 비슷, 놋뱀이 가로로 매달렸을 경우)

그 놋뱀이 되어서 매달린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는,

먼저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불뱀에게 물려야 된다’ 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만, 구원 받으니까,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원 받을 백성들을, 불뱀에 물리도록 섭리하십니다.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불뱀(죄, 마귀)에 덥썩 물린 자입니다’ 라는 자의식은

구원 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놋뱀을 쳐다보라' ... 너무 단순하지 않나요? 뭐 초등학생들도 아닌데... 

 

놋뱀을 바라보라고 하신.. 다소 엉뚱한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

이스라엘백성들이 불 뱀에 죽어가고 있을 때

모세의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켜주시기로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처방이 너무 단순합니다.

불뱀에서 물려, 몸에 독이 펴지면서 죽어가는 그들을 향해 대안으로 주신 것이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놓고는..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심정과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 놋 뱀을 쳐다보라고 하셨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1) 첫째는 놋 뱀을 쳐다보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믿음) 회복에 대한 요구입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요구를 했더라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약초를 발라라는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요구를 했으면

'믿음과 상관없이' 행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황당한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믿음)를 회복하기를 원해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도 되지 않는 놋뱀을 장대에 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 하실 때는

전폭적인 믿음 전인격적인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놋뱀에게는 무슨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 효험도 없습니다.

우리가 빨간 불일 때 차가 서고, 파란 불일 때 차가 가는 것이, 무슨 신호등에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누군가가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놋뱀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말도 되지 않은 상황을,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왜 하나님은 놋뱀을 쳐다보라는 명령을 한 것입니까?

지금 그것 밖에 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시무시한 불뱀에 물려가지고 독이 펴져 죽어가고 있는데,

'얘들아 십리 길을 가면 신비한 약초가 있는데, 그것을 가져다가 12시간 다려서 먹어라'

만약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면 ‘너 죽어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온 몸에 독이 펴져 가는데 무슨 재주로 십리를 갑니까?

그러니까 불뱀에 물려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독이 퍼져 가는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머리를 위로 돌려서 놋 뱀을 쳐다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아무 것도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내 자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시인하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이 이 사건을 기억하시면서 ‘내가 높이 달린 놋 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력으로 성별해서 거룩하고 정결하게 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적인 상식과 타당성, 합리성, 과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상식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과학적종교입니다. 
그러나 과학에 갇혀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놋뱀을 바라보라'고 하는 
하나님 말씀 앞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라니다.

▲놋뱀만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데.. 그렇게 구원 받기가 쉬운가요?

 

요3:14-15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놋뱀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 구속을 이루므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실 것을 표적하는 사건입니다. 

생활 가운데서 불평 불만하다가
불뱀에 고통을 당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면 나음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놋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1) 첫째 단계는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7절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모세를 향해 원망하며 범죄한 사실을 인정하고,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이 치료(구원)의 첫 단계입니다.

 

2) 두 번째 단계는, 중보자의 기도입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7b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에 물려 온 몸이 퉁퉁 붓고 죽게 될지도 모르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약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모세가 중보자입니다.

 

모세는 우리 중보자로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디모데전서 2: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3) 세 번째 단계는,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늘과 땅 사이에 놋뱀을 장대에 달아서 세워놓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8~9

 

힐끔 쳐다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슬쩍 쳐다보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믿음으로', 간절히 쳐다본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듯이, 신약에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권면이 곳곳에 나옵니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기'  고후3:18                        ☞<라보는 신앙> 관련 설교 모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12:2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믿음이란..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어로 그저 look, see (쳐다보다)는 뜻이 아니라,

-gaze, contemplate (응시하다, 깊이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본문 민21장 시점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지 약38년 가량 지난 시점입니다.

그들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신21:23

 

물론 불뱀에 물린 자들이, 아직 그리스도의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 '저 놋뱀은 저주 받은 거구나' 정도는 묵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놋'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계1장에 예수님의 발이 놋인데.. 강한 놋쇠 발로 짓밟는 심판주를 의미)

 

나아가 '누가 내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써, 내가 치료(구원)되는구나..' 까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며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거 깨달아라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대에 놋뱀을 매달라고 한 것이지,

그런 구원의 원리를 하나도 깨닫지도 못 한채

-무슨 부적처럼, 놋뱀만 쳐다보면 낫는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부적은 깨트려버렸죠. 느후스단 왕하18:4)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순종하면, 치료된다는.. 지금 '순종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문제해결에 대한 비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도.. 이 사건을 주신 목적이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3:14~16절에서 '놋뱀 사건'을 두고, 구원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4~15

 

그러므로 신약에 의거해서, 구약 본문을 해석하면

지금 민21장의 '놋뱀 사건'은, 하나님이 구원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이 목적이고,

 

그 '믿음을 통한 구원의 원리'를 어느 정도라도 믿고 깨달은 사람들이.. 치료(구원)을 받은 것이지, 

아무 것도 깨닫지도 못한 채, 그저 이상하거나 신기한 조각물체(놋뱀)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고

그들이 치료(구원)받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민21장에, 이런 내용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신구약을 전체로 볼 수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특권을 통해서

본문을 추적해서 해석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불뱀-놋뱀 사건'을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가르쳐주기 원하셨고,

불뱀에 물린 백성들은 '그 도리를 깨닫고 믿은 자들이' 구원(치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 하나님의 '신비한 기적'을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도 아니요, 마술쇼가 아닙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을 고치시고 살리시는 '신유 사역'을 보여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본 사건을 해석하셨듯이 '구원 사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목적대로 '믿음으로 놋뱀(저주받으신 그리스도를 예표)을 gaze, contemplate한 자들은

다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적용

▲"그리스도를 바라봄"을 통해 거듭난 찰스 스펄전

스펄전은 1850년 1월 6일 확실히 거듭남을 경험하기까지      *당시 만15세 

그는 많은 내적인 방황과 고뇌를 겪었다.

 

"나는 젊었을 때, 약 5년간의 심히 괴로운 시기, 즉 암흑기를 지낸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절실히 느끼고 있다면,

나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와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자신을 살펴볼 때, 그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패역무도한 죄인이었다.

(당시 청교도 서적 많이 탐독해서, 죄를 지적하는 내용을 많이 접했던 이유인듯)

결국 그는 그 자신을 율법 가운데로 인도해 주는 모세를 만났다.

하나님의 선한 법, 곧 십계명에 부딪히는 일이 자주 있었다.

 

십계명을 대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았을 때,

지극히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자신은 확실히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마음은 빛을 잃은 태양과 같았고,

그가 지은 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이 존재하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찾아보았지만

이렇다 할만한 해답을 받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더 답답해갔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론을 꾸며 가며, 그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선민의 특권을 가졌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했지만

그 노력은 헛수고였으며, 그 확신은 자기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는 확실히 복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너무도 답답해서

콜체스터의 모든 교회들을 찾아가 뭔가 해답을 얻기를 원했으나,

어떤 설교자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어찌하면 구원을 얻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인간 행위의 열심 만을 강조하는 내용들이었다.

설교가 끝날 때는 '좋은 말씀 잘 들었다' 하는 생각뿐이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펄전은 당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여전히 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던 스펄전에게, 전 생애를 바꾸어 놓는 순간이 다가왔다.

1850년 1월 6일, 우연히 들른 교회에서

어느 평신도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스펄전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요즈음 그 때를 가끔 생각하는데,

만일 그날 아침 그처럼 대단한 눈보라가 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까지도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아침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막혀 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잘것없는 조그만 감리교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예배당에는 20여명 채 못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며, 목사도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한 초라한 사람,

아마 양복점 직공이거나 구두 수선공처럼 보이는 이가 강단에 올라갔다.

 

그 사람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본문을 외어대는 것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준비된 원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은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간절히 바라보라, 기대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사야 45:22절이었는데,    -

    

스펄전은 그 작고 초라한 예배당에서

목사도 아닌 집사의 설교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친애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합니다. 여기에 '앙망하라'고 하였습니다.

앙망한다는 것, 즉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결코 어렵거나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기 위해서 한다리를 들거나, 손가락을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대학 같은 곳에 다니거나,

고등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린 아이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보십시오. 지금 당장 그를 바라보십시오!"

 

힘을 주어 말씀을 전하던 그 사람은, 한 순간 숨을 돌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기에 매달렸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보라, 나는 죽어 장사되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는 승천했다.

나는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있다. 나를 바라보라! 오오~ 나를 바라보라!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그 집사는, 강당 바로 밑에 앉아 있던 스펄전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펄전을 향하여 ‘청년이여! 당신은 왜 그렇게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소?’ 라고 물었다.

스펄전은 무척 당황했다. 그 설교자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힘을 주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소!".

"청년이여, 예수를 바라보시오! 지금 바라보시오!".

 

스펄전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가슴에 꽉 차 있던 구름은 걷히고, 그의 영혼에 구원의 빛이 비추었다.

그는 진실로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격에 넘쳐 구주의 귀하신 보혈과

단순하고도 명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송하고 싶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 왔던 죄의 무거운 짐이

바로 나의 어깨 위에서 영원히 굴러 떨어져 버렸을 때,

그는 죤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와 같은 환희에 도취되었다.

 

"이제야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말씀 안에 비밀을, 넓은 대지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주님!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이 해결 됐었군요. 나의 그 무거웠던 죄가 모두 다!"

 

스펄전은 거듭남의 체험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뉘우침의 포도주 통에서 짜낸 포도주는 실로 값진 것입니다.

회개의 광산에서 채굴한 금이야말로 정금인 것입니다.

깊은 고통의 동굴에서 발견된 그러한 진주들이야 말로 참으로 찬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고 자기의 목에 오랏줄이 묶여 있었던 자는

죄사함을 받고서 구세주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져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될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릴 사람인 것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많은 책을 써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작가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인 C. S. 루이스 교수,

그가 한 번은 옥스퍼드 대학 채플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 후에 걸어나오는데, 한 젊은이가 묻습니다.
‘교수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고통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때 루이스 교소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은 교만하고 오만한 존재가 인간인데
고통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

고통은 말이야, 잘 듣게,
바로 귀 먹은 사람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확성기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고통속에서 역경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지!’

 

기도하지 않고 “바라보니” 모든 것이 불만투성이

어떤 신학교 교수님이 어느 날 학교 식당에 들어갔다가
그 식당 아주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래요.

“교수님, 신학생 중에서, 교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다가
결국은 학교까지 그만 두고 자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신학의 길을 포기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다양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소명의 길을 포기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불만투성이인 것이지요.

교회에 대한 불만, 사회에 대한 불만,
심지어 자기가 몸 담고 있는 신학교와, 교수님과, 동료 신학생들에 대한 불만,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 더 읽으실 분 .......................................

 

<민21장의 개요>

1~3절, 호르마 에서의 승리

4~9절, <불뱀과 놋뱀 사건>

10~20절, 호르산에서 비스가까지의 행진    

21~32절, 아모리족 (헤스본 왕) 시혼 정복 

33~35절, 바산 왕 옥 정복

 

민21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민수기를 '불평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민수기엔 총13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9번 불평이 나옵니다.

본문 민21장에 나오는 불평이 9번째 불평입니다.

이제 21장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불평과 원망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민수기는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천로역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기본구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방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어도 어떤 분들은 승리와 기쁨과 능력을 체험하는 반면,

어떤 분들은 그렇지 못하고 간신히 천국에 가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수기는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이 걸어가고 있는 영적인 행로요, 영적인 천로역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민수기는 15~20장으로 간략하게, 광야 38년의 방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민수기는 광야생활의 처음 1~2년과 (1~14장)

    마지막 1~2년 사건을 주로 기록하고 있는 거죠.  (21~36장)

 

백성들은  '식물과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근거 없는 불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만나를 주시고, 물이 없을 때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식물과 물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근거 없는 불평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두 가지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소리도 들으시고, 불평의 소리도 들으십니다.

믿음의 소리에는 승리로 응답하시지만, 불평의 소리에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응답하십니다.

 

따라서 근거 없는 불평을 발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불뱀이라는 채찍을 내리셨습니다.

뱀에 '불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불과 같은 맹렬한 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뱀에 물리면 불과 같이 펄펄 끓는 고열이 나기 때문입니다.
-뱀의 피부가 불 같이 벌건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뱀이 사람을 물면 불처럼 열이 나서 결국 죽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도 불뱀이 있습니까? 질병의 불뱀, 사업실패의 불뱀, 정신 혼돈의 불뱀,

자녀들이 말썽 부리는 불뱀. 이러한 갖가지 형태의 불뱀들은 결국 불평과 원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민수기도 이 불평과 원망의 문제를 아홉 번이나 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 21장에서 아홉 번째 불평이 깨끗이 끝나버렸듯이

여러분의 모든 불평도 오늘부로 다 끝내시고

여러분 앞에는 오직 승리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그 병에서 낫게 한 놋뱀을 가나안 땅에 가지고 들어가 보관했습니다. 
후대들은 놋뱀 자체가 낫게 한 줄 알고 그 놋뱀에 분향하며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왕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그 놋뱀을 부수었습니다 (왕하18:4).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대상도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출20:3-5).

 

오늘날 예수님의 구원을 부정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세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함 받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은 이처럼 기본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갖가지 불평, 낙심, 원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그런 성도님들도 오직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예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여! 제가 실패했습니다. 예수여! 저의 죄로 말미암아 이런 불뱀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지금 불뱀에 물려 실망하고 낙심하여 마음이 상했습니다.

제가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오니 나를 고쳐주옵소서.”

 

예수님은 칭의구원의 주님이시며, 또한 믿는 자의 치료와 회복을 위한 성화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구원받지 못한 분들은 구원을 받고,

치료를 받지 못한 분들은 치료를 받고, 문제가 있는 분들은 해결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해결함을 받아서 이제부터는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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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하나님은 모세의 중재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불뱀'(a fiery serpent, KJV)과 동일한 모형 뱀을 만들어 
깃발을 단 긴 장대 위에 매달게 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뱀의 파괴성을 앗아 가시고, 대신 은혜로우신 생명의 메시지(복음)를 널리 주심을 상징한다. 즉 이것은 죄의 권세를 무찌르고 영광을얻으신 하나님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출 17:15, 사 5:26, 11:10, 12).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장면은 죽음(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시기 위해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늘과 땅으로부터 버림받아 허공에 높이 들리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생생히 예표한다(요 3:14, 15, 갈 3:13, 골 2:15).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은 불뱀의 치명적인 독성(毒性)을 제거하는 유일한 치료법으로써 
그들을 쓰러뜨린 불뱀 형상을 보게 하셨다. 
이는 '치료하시는 여호와'(출 15:26)의 능력의 부족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1)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허물을 다시 한 번 똑똑히 자각하게 하고 
2)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에 절대 순종할때,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다는 순종의 도틀 가르치며 
3) 또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생명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장대에 높이들린 자'(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길밖에 없음을 가르치는 
구원의 원리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요 14:6, 행 4:12).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놋뱀을 만들어-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놋쇠(bronze)로 불뱀을 만들었다. 

그런데 모세가 불뱀을 '놋'으로 만든 이유에 대하여 학자들은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으로 이 놋뱀이 불로 상징되는 심판과 
그 심판의 고통을 견디어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를 상징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 놋뱀은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계속 보존되었으며(히스기야 왕때까지), 
심지어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숭배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왕하 18:4). 

따라서 히스기야 왕은 종교 개혁 실시 때 이 놋뱀을 부셔 버리고, 
그것을 '느후스단'(놋조각)이라 했던 것이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 그 자체에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놋뱀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성숙한 여호와 신앙의 선민이 되어야 했다.

루터는 곧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장대 위에 달아, 그것을 쳐다본 자가 치료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놋뱀(구리뱀)을 만든 사실- 놋뱀의 실제 모양은 불뱀이로되 독(毒)이 없다. 
이것은 실제 사람의 형상이시되(빌 2:7),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롬 8:3, 고후 5:21, 히 4:15,벧전 2:22-24). 

2) 놋뱀을 장대위에 높이 매단 사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일차적으로) 
죄에 거하는 모든 악(사단)의 세력에 대한 공개적인 처형이며, 
영적으로는(구속사적으로는), 그리하여 이제 사단의 권세가 모두 처형된 승리의 그 자리에 
우뚝 솟아계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모습이 만 백성에게 현시된 그 사실을 상징한다(요 3:14, 골2:14, 15). 

3) 놋뱀을 쳐다보아야 산 사실- 이것은 일찍이 뱀(사단)의 머리를 쳐부술 자로 계시된 
여인의 후손(차 3:15), 곧 인자(人子)되신 그리스도를 전적 의뢰하여야만 
모든 뱀의 독성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대진리를 상징한다.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구원의 기쁨이 전달되었다(요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