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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2장 발람과 당나귀

LNCK 2022. 9. 28. 09:44

◈발람과 당나귀            민수기22장           여러설교정리  출처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에돔과 모압과 암몬 족속들의 땅을 지나 
요단 동편에 이르렀습니다. 
그 곳에서 선제공격을 가해온 아모리(헤스본)와 바산 족속을 물리치고, 
모압 평지에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요단 강만 넘으면 요단 서편 여리고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낀 모압왕 발락과 동조자 발람의 어리석은 행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22-2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꾀를 헛되게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용하시는 모습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 대해 가지시는 목적과 
행하시는 섭리의 역사가 어떤 것인가를 엿보게 됩니다. 

본장의 <개요> 
모압왕 발락의 초청(1-6), 
선지자 발람의 거절(7-14), 
모압왕 발락의 두번째 초청(15-20), 
선지자 발람의 응함과 나귀의 책망(21-30), 
여호와 사자의 책망(31-35), 
모압왕 발락의 발람 환대(36-41)

 

 

서론

 

성경인물 중에 이름에 ‘발’자 들어간 인물치고 훌륭한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애굽에 요셉을 가두었던 시위대장 보디발, 욥의 친구 중 나아마 사람 소발,

또한 다윗이 방랑할 때에 다윗의 부하들을 위한 음식 요청을 거절하고 다윗의 무리를 폄하했다가

놀라서 죽은 마온 사람 나발 등 모두 별로 훌륭한 인물들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발’자가 들어간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발락이요, 또 하나는 발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발락은 십볼의 아들이요, 모압의 왕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 모압이라는 나라는 원래 이스라엘과 친척지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과 싸우지 말고 그들의 땅을 뺏으려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신2:9)’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싸울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을 통과하려고 할 때, 모압 사람들이 겁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자기 땅을 지나가려고 할 때에 겁을 먹고

미디안 장로들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인데,

 

1) 앞서 아모리족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에 패한 것을 보았고,

그래서 겁이 났던 거죠.  *민21:21~35

 

2)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발락은 모압 땅에 경제적인 손해가 올까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한 것입니다.

 

민22:4절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하니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발락은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의 손에 복술의 예물을 들려 강변에 있는 발람이라는 사람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민22:5)’

 

‘강 가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 주변의 브돌이라는 지역을 뜻하는데,

이곳은 메소포타미아에 속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은 메소포타미아의 선지자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아주 먼 곳인데, 왜 먼 곳에 사는 발람을 불러왔을까요?

아마 발람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창12:3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약속을 주셨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민22:6절을 보면 발락이 “(이스라엘이)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이 말을 통해 발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모르는 발람을 불러다가 저주하게 한 겁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발람을 상대하시고 그의 입술에 말씀을 주시기도 했지만,

발람은 여전히 거짓 선지자입니다.

남자 무당 박수였을 뿐만 아니라, 미친 짓을 했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벧후2:16절에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유다서 1:11절에도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거짓 선지자 발람에게도 능력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능력이 아니라 흑암의 세계에서 온 능력입니다.

만약 발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막으시고

(그의 길을) 바꾸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큰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당시 마술사의 최고봉이요, 박수 가운데는 가장 이름난 박수였습니다. *박수 : 남자무당

그런데 이 이름난 박수 무당이 누구에게 망신을 당했습니까? 바로 자기가 부려먹는 당나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대 최고의 거짓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중요한 4가지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처음 마음

 

첫째로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교훈입니다.

설교자들이 설교 가운데 많이 쓰는 말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오는 처음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두 번째 오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요,

세 번째 오는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라.’

 

모압의 장로와 미디안의 장로들이 돈을 가지고 와서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할 때,

발람은 그들에게 하루 머물 것을 청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2절의 말씀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이 말씀은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발락도 처음에는 함께 동행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모압왕 발락이 한 번 거절을 당하니까

더 큰 귀족들과 더 좋은 예물을 보내어 발람을 다시 한 번 유혹합니다.

15절 말씀을 보니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리고 제안합니다. 17절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이에 대한 발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말로 거절하는 것 같습니다.

18절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겉으로 보면 참 신앙 좋은 대답입니다.

 

그러나 발람의 반응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발람은 19절에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겉으로는 안 간다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벌써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들어내는 말입니다.

“내가 이번 한 건만 잘 하면, 다음에는 이 짓 안 해도 되겠다”는 탐심이

발람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의 사신들을 하루 더 유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20절의 말씀처럼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찌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게 아니라 발람의 욕심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 자녀들의 간청을 조건과 함께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소극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민23: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슨 마음이든지 처음 마음을 귀중하게 여겨야겠습니다.

 

▲어떤 농부가 입만 열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이 농부는 소를 기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요번에 송아지 쌍태를 주시면 한 마리는 꼭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기도대로 이란성 송아지가 쌍태가 나왔는데

한 마리는 누런 송아지고, 다른 한 마리는 얼룩 송아지였습니다.

 

이란성 쌍태를 보자 농부의 마음에 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송아지 한 마리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누런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가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하필이면 하나님께 드릴 송아지가 죽다니.”

 

우리 성도들은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합니다. 이 농부처럼 처음 마음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처음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이 놓으신 장애물

 

발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소극적 허용을 하셨지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길에 장애물을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 발람은 모압의 귀족들이 앞에 가고, 두 명의 종들이 따르니까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거들먹거리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들고 발람의 길을 막았습니다.

 

당나귀가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밭으로 빠집니다.

밭으로 빠지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또 쫓아옵니다.

 

그러니까 더 좁은 곳으로 가고, 좁은 곳으로 가다가

자기 주인의 발을 벽에다가 비비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이 당나귀가 더는 못가겠다고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영안이 닫힌 발람의 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최고 선지자가 나귀만도 못한 영적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거역하고 명예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면, 인생에 많은 장애물이 놓이게 됩니다.

호2:6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장애물을 많이 만나는 사람은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길에는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놓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장애물을 치워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 뜻을 꺾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 책임 전가

 

발람의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세 번째 교훈은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장애물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람의 행동을 주목해 보세요. 나귀는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살리려고 길 가다가 밭으로 가고, 결국 주저앉아버렸는데,

발람은 나귀를 두 번 채찍으로 때리고, 그래도 안되니까 지팡이를 들어서 때렸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칼 든 사자를 만났고

당나귀는 오직 주인의 생명을 보호해주려고 주저앉았을 뿐인데,

이 무지한 발람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책임을 당나귀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발람이 책임전가하는 것은 바로 적반하장입니다.

발람의 태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당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당나귀가 히브리어를 하는 경이적인 일이 생겨났습니다.

 

28절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아마 발람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태연한 척 “이는 네가 나를 거역한 연고가 아니냐?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30절에서 이 나귀는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고 대답하였습니다.

 

나귀의 말이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나귀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하니까 발람이 꼼짝도 못하고

없었느니라”고 대답합니다. 옆에서 지켜본 모압의 귀족들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발람은 당나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장애물을 만날 때,

내 인생이 장애물 때문에 망했다고 책임전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책임전가하는 분위기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책임전가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요나가 불순종하니까 그 배가 풍랑을 만났던 것처럼,

신앙인들이 바로 살지 못하니까, 이 사회에 어려움이 초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 어려움이 와도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4. 겸손과 회개

 

넷째로 인생을 살다가 장애물을 만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져서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민22:31절을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발람이 이제 영안이 열려서 앞을 보니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당장 그 자리에 엎드려서 34절의 말씀처럼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장애물이 있을 때, 우리는 이처럼 몸의 자세를 낮추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장애물을 치워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 앞에 엎드린 발람의 자세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은 자세와 달랐습니다. 발람의 회개는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발람이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회개의 고백을 한 후에,

돌이켜 자신의 고향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에는 아직도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발람은 입으로만 회개하고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저주코자 하는 계획을 축복의 언어로 바꾸시어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한 발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발람이 그 입술로 이스라엘을 축복했으니 복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발람은 재물과 명예에 마음이 매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죽었습니다.

 

민31:8절에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발람은 결국 명예와 재물을 누리지 못하고 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만약 발람의 회개가 겸손하고 진실했더라면 발람은 자신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고,

생명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탐심을 따라서 살다가 결국 망하는 인생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적용 

 

▲1. 발람을 통해 본 샤머니즘을 주의하자                                        출처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다가오자 겁이 났다.

이스라엘이 아모리를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나라도 아모리처럼 이스라엘에게 정복을 당하지 않을까 심히 두려웠던 발락은

궁리 끝에 나름대로 묘책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발람이라는 매우 신통한 주술사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었다.

발람이 매우 신통력이 있어서 그가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가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만 하면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아 멸망하고

자기 나라는 무사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발락의 행동은 흔히 신통하다고 말하는 중재자(무당, 박수)를 동원하여

신을 움직여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종교 행위로서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샤머니즘은 인간의 뿌리 깊고 보편적인 “기복주의”적 죄성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죄다.

 

샤머니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참된 복,

즉 영적인 하늘의 신령한 복이 아닌

거짓된 복, 즉 육적인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샤머니즘은 하나님께 올리는 정성이라는 것을 빙자하여

결국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것으로

하나님 위에 높아지려고 했던 사단의 죄성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워주신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다른 중보자를 찾는 죄까지 짓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도 샤머니즘적인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를 복이나 저주를 전달하는 중재자로 여기는 것,

그래서 치유나 문제 해결이나 예언 등을 받기 위해서

소위 은사가 많다고 소문난, 즉 신통하다고 소문난 목회자를 찾아다니는 것,

세상의 복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헌금이나 봉사 등 하나님께 정성을 더 바치는 것 등은

전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죄들인 것이다.

 

심지어는 (본문의 발람처럼) 교회에서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가들이 환영을 받고

마치 큰 은사를 받은 자로 숭상 받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발락의 이름은 ‘공허한 자’, ‘파괴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름의 첫 번째 뜻처럼 발락과 같은 샤머니즘은 참으로 공허한 것일 뿐이다.

 

사실 발락과 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발락은 많은 돈으로 발람을 유혹했고,

발람도 그 돈에 욕심이 나서 발락의 요청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결코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가 없었고

도리어 축복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샤머니즘적인 행위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발람이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소문이 파다했던 것처럼

샤머니즘도 사단의 속임수에 의하여 부분적으로는 마치 신통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믿음에서 우리를 샛길로 빠지게 하려는 사단의 궤계이며 덫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신통한 것처럼 보이는 그것 때문에

샤머니즘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신통 하냐 안 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일이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난 죄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신통 하냐/ 안 하냐를 중시하다 보면, 사단이 쳐 놓은 덫에 빠지게 될 뿐이다.

 

또한 그 이름의 두 번째 뜻처럼 발람과 같은 샤머니즘은

올바른 신앙을 파괴하고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발락이 노리고 바랐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저주 가운데 빠지게 하여 멸망시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샤머니즘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면

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단은 늘 우리가 죄악의 샛길로 빠지길 원하고 올바른 믿음에서 떨어지게 되길 원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샤머니즘의 죄를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퍼뜨려 놓았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샤머니즘의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신통해 보여도 그렇게만 하면 정말 잘 될 것 같아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들어서는 안 된다.

 

발람처럼 하나님을 빙자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큰 죄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역사, 능력, 기적, 은사 등등의 이름으로 포장된 샤머니즘이 판치며 올바른 신앙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는 참담한 현실을 그대로 묵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2. 징조를 빨리 알아차리자             출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길에는 늘 파란 불만 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길가의 신호등이 늘 파란 불이 아니라 빨간 불, 노란 불이 켜지는 것 같이 
우리 인생길의 신호등도 늘 파란 불이 아니라 
때로는 빨간 불이, 때로는 노란 불이 켜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신호를 빨리 알아차려야 힙니다.

의사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 몸도 갑자기 큰병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큰병이 생기기까지 우리 몸에 조그만 이상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 얼른 알아차리고 대처해야 합니다. 
무슨 병이든 불치의 병인 암이라 할지라도 초기에 알아서 치료를 하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의 초기 증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무시하다가 
진짜로 큰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손댈 수 없는 안타까운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큰 병을 앓는 분들 중에 "그때 알아차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했으면 되었을 것을,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긴 가야 되는데 시간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렇게 되었다." 
라고 크게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듯이 인생이 늘 편안하고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날씨처럼 더위와 추위가 있고 장마와 가뭄이 있습니다. 태풍과 지진이 있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엄청난 일들이 당황스러운 일들이 우리의 삶에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가만히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갑자기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여러 가지 징조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셨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일이 닥칠 것이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가 그것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징조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인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기도로 늘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희미하고 조그만 징조를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괜히 그런 징조가 나타난 것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조그마한 징조이지만 엄청난 태풍과도 같은 일이 일어날 엄청난 씨가 
그 속에 담겨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구약 민수기 22장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 번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항상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제 인생의 소중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발람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모압이라는 나라로 가는데 
발람 선지자가 타고 가던 나귀가 갑자기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깜짝 놀란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때려서 나귀가 다시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귀가 벽에 몸을 부벼서 발람 선지가의 다리가 벽에 긁히게 되었습니다. 

발람 선지자는 나귀에게 채찍질을 합니다. 이번에는 나귀가 길에 털썩 주저앉아서 
길을 가지 않습니다. 화가 난 발람 선지자가 자기가 들고 있는 지팡이로 나귀를 때립니다.

왜 나귀가 가던 길을 가지 않고 밭으로 갔습니까? 왜 털썩 주저앉았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나귀는 길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길을 막고 서있는데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계속 해서 앞으로 가면 하나님의 사자의 칼에 죽을 것이 뻔한데,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나귀는 밭으로 들어갈 수밖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비참한 것은 일개 짐승인 나귀도 보았던 하나님의 징조를 
발람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발람은 당대의 선지자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징조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의 징조, 하나님의 신호가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람에게서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징조를 보지 못하고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의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귀가 밭으로 들어갈 때 채찍으로 때리지 말고 
이것이 무슨 뜻인지 어떤 신호인지 깊이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했습니다. 

왜 길을 잘 가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가, 이것이 무슨 신호인지 무슨 징조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행하게도 발람은 그 신호를 무시하고 
징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리가 긁히고 두 번 세 번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결국 죽고 말았죠. 하나님이 보내신 징조를 무시한 결과였죠. 민31:8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내라는 나귀가, 자녀라는 나귀가, 사업이라는 나귀가, 건강이라는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잘 가던 길을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순조롭던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부부간에 자식에게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에 돈을 쓰고, 생각지도 않았던 손해를 보고 
내 인생길을 가로막는 복잡한 일이 일어나고 
내 인생길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보통 때는 없던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무엇인가 일어날 징조입니다. 

발람 선지자의 나귀가 그냥 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러 했듯이 
우리 인생길의 모든 징조들은 절대로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날 징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잘 가던 여러분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면 긴장해야 합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 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집중적으로 여러 날 기도하면서, 자신이 가는 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신앙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길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신호일수 있습니다. 
우리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징조일 수 있습니다. 

이유가 있는 시련입니다. 이유가 있으니까 우리의 나귀가 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귀가 밭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과거에 우리가 한 일에 대한 결과일 수 있고 
우리의 미래를 예시하는 징조일 수 있습니다. 후략

 

▲3. 성도들은 축복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업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저주의 말이 나오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를 향해서도 축복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하면 그 사람이 복을 받음과 동시에 나도 축복했으니까 복을 받고,

만약 그 사람이 복을 받지 못할 것 같으면 그 복이 반사되어서

내가 두 배의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은 이처럼 수지맞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미운 사람, 싫은 사람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축복의 사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축복의 언어를 베푸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