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공감과 치유"에 대해서 여러분과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가까이, 더 강력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공감하셨습니다.
'공감'이란 말은, 오늘 우리 시대에 아주 트렌디한 말이 되었죠. '같이 느낀다' 라는 말인데, 감정, 특별히 아픔을 나눈다, 같이 느낀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sympathize 라고 하면 '조문을 한다. 동정을 한다. 내가 그 아픔을 느낀다'라는 뜻이죠.
▲예수께서 인간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가까이서 강력하게 느끼셨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증명하셨냐면 그들의 아픔을 고쳐주시고, 구원하시는 것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아픔을 느끼셨고, 강력하게 느끼셨기 때문에 불상히 여길 수가 있었고, 그들을 고쳐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남의 아픔을 느낄 줄만 알지, 고쳐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예수님은 남의 아픔을 느꼈고, 그래서 그들이 병자 라는 사실을 아셨고
얼마나 오래 병들었는지를 아셨고,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또 예수께서 인간의 영혼을 공감하셨다는 것은 당신이 베푸신 구원을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죄를 당신이 공감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의 죄를 알고 계셨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죄사함을 베푸실 수가 있었고,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대신하는 대제사장이 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이 발전해서 '원거리 (원격) 진료'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 사함을, 이론적으로, 서류상으로 우리가 검색해서 '어, 죄 사함받았네, 어 구원받았네'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사정을 보시고, 우리를 대면 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소자야, 내 죄의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우리 앞에서, 우리의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거리에서, 이론적으로, 공식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었어요.
광복절, 석탄일, 성탄절때 정부가 사면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원거리에서 사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같이 걸으시고, 그들의 아픔을 아시고, 그들의 죄를 아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그리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 결과로 그들의 몸의 병까지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예수께서 다른 방법으로도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가서 죄 사함 받았다고 전해 줘, 주님이 불쌍히 여기신다고 전해 줘!' 이렇게 누구를 시켜서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그 죄사함은 유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고 대면해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저들의 믿음을 보셨어요.
온라인 예배로는 사람의 믿음을 볼 수가 없고 사람들의 간절함을 표현할 수도 없고 그것을 잘 느낄 수도 없습니다.
대면해서 죄사함을 선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대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친히 저들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셨어요.
그리고 그 중풍병자 앞에서 '소자야 네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선포 하셨더니 죄 사함만 받은 것이 아니고, 그의 몸에 병까지 나았어요.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이러한 성격 (공감, 대면) 이 있습니다.
그때만 그런 게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요즘에는 TV에 유명인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과거의 아픔을 털어 놓고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공감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프로들이 많이 있죠.
그것이 일종의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공감 sympathy 을 하는.. 공감의 중요성과, 공감을 하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런 면이 있죠.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아픔을 공개적으로 말을 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그 아픔을 나누면서 같이 눈물을 흘리죠. 그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 프로그램에 절정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림으로써 힐링이 이루어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같이 느낀다. 공감을 한다'는데 목적을 두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친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공유해야 된다고 하죠.
1) 첫째는 비밀을 공유합니다. '이건 너와 나만 아는 것이야' 라고 할 때 가까워지지요.
2) 둘째는 서로 추억을 공유합니다. '우리가 추억을 만들자, 행복한 추억을 만들자' 합니다.
3) 세 번째는 아픔을 공유해야 된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자기 아픔을 털어놓고,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내 아픔을 알고, 함께 그 짐을 져주기를 요구합니다.
남과는 이것이 어려운 일이에요. 가족끼리는 그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왜냐면 내 아픔의 일부는 당신 책임이기 때문에 내 아픔에 대해서 당신이 알아야 되고 내가 아픈 만큼 당신이 똑같이 아프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내 아픔의 일부를 당신도 겪어야 된다.. 라고 요구하는 그런 면이 있어요.
내가 아프기 때문에, 그 사실을 당신이 알아야 되고 그 아픔의 일부가 당신 책임이고 내가 아픈 만큼, 적어도 당신이 그 아픔을 같이 느껴야 된다. 그러면 자기가 위로를 얻는다고.. 아마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본론
주님이 이 혈류병 걸린 여인의 아픔을 공감하셨어요. 공감하셨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면 이 여자가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댐으로써 부정함이 예수님에게 전달이 됐기 때문이에요.
유출병, 몸에서 출혈이 나는 병은 모세의 율법상 부정한 병이고 자기 몸에 유출병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 손을 내면 안 돼요.
왜냐면 손을 대면, 그 사람도 그 더러워지기 때문에 그가 앉은 자리도 더럽고, 만진 것도 더럽고 유출이 있는 동안, 열흘 동안은 아무도 만지면 안 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여자가 유출병이 있는데,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몰래 손을 댔어요. 그 말은, 모세의 율법상, 그 더러움이 예수님에게 전달이 된 거죠.
예수님이 일순간 그 여자의 더러움을 안으셨어요. 품으셨어요. 공감대가 이루어진 것이죠.
그런데 그 결과로, 예수님이 이 여인처럼 부정해지신 게 아니고 도리어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전달이 돼서 이 여인이 깨끗함을 얻었어요.
이것이 주님이 공감하시고 치유하시는 방법이에요. 이 여인이 손을 됨으로, 예수님도 같이 더러워진 게 아니고
예수님께 손을 댐으로, 도리어 능력이 예수님으로부터 전달이 돼서 이 여자가 깨끗함을 얻었어요.
공감을 함으로써 아픈 사람이 둘로 늘어난 게 아니고 공감을 하므로써 건강한 사람이 두 명이 됐어요.
이것이 주님이 공감하시고, 치유하시는 방법이에요.
만약에 공감만 하고 치유를 하지 않는다면 아픈 사람들만 많아지는 것이고 더러운 사람만이 많아지게 되겠죠. 괴로운 사람만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공감은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공감은 아픔만 늘어나요.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요. 공감할수록 같이 아파져요.
그러나 예수님이 있는 공감은 아픈 사람이 늘어나는 게 아니고, 건강한 사람이 늘어납니다. 건강을 나누는 거예요.
아픔을 나누는 것 같은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이 돼서 건강한 사람이 늘어나는 거에요.
그게 건강한 인간 관계요, 건강한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게 건강한 공감이에요.
만약에 건강하지 않으면, 공감할수록 아픈 사람이 늘어나요. 염려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납니다.
내 아픔을 남에게 말해서, 당신도 그 아픔을 같이 (짐처럼) 져주기를 바라고 만약에 거기에서 예수님의 다이내믹이 없다면, 아픈 사람만 많아지게 되죠. 번민만 늘어나게 되죠.
예수님이 없는 공감을, 우리가 고집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여자가 깨끗함을 얻은 후에 '나를 따라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짐을 수시로 아뢰고 주님이 그 짐을 수시로 져주시기를 바라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고 돌려 보냈어요. 왜 보냅니까?
인간의 치유는, 누구를 내가 항상 의존해서 기대고, 내 아픔을 그 사람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내 아픈 것을 하소연하므로 치유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질병이 더 늘어나죠. 더 지속되지요.
그래서 주님이 병자를 고치실 때 보면.. 다 돌려보냈어요. '집으로 가라, 친족에게 돌아가라, 평안히 가라!' 이렇게 주님이 보내셨어요. 의도적이었어요. 주님의 방법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지만, 그때부터는 우리가 더 이상 의존적이 되지 않고 나를 치유해준 사람을 의존하지 않고
내가 그동안에 기대된 것을 의존하지 않고 내가 이제 일어나 내 힘으로 내 갈 길을 가고 내가 할 일을 하고, 내 삶에 책임을 지고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따라오게 하시지 않고 가게 하셨어요.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픔을 공유하는, 공감하는 공동체' 라는 명목으로 계속적인 의존을 은근히 장려한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고) 어느 누구도, 그 어느 누구도 남의 아픔을 무기한 같이 (그 짐을) 지어줄 수 없어요. 가족도 그걸 못해요.
가족 중에 신체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을 때는 당연히 돕지만 그게 아니고 심정적인 아픔을, 가족들이 같이 계속 져주기를 요구한다면 아마 도망가려고 할 거예요.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가 없고, 그건 건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픔을 나눈다고 해서, 그것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죠. '불행을 나누면 줄어들고, 행복은 나누면 늘어난다'
그렇지 않아요. 불행을 나눈다고 그것이 줄어들지 않아요. 아픔을 나눈다고 줄어들어요? (예수가 빠지면) 아픈 사람만 많아지죠.
내가 저 사람을 고쳐줄 수 없고, 위로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공감을 한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개입하실 때는, 주님이 개입하실 때는 아픈 사람이 둘이 되는 게 아니고, 건강한 사람이 둘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