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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1

LNCK 2022. 9. 29. 17:49

[Ep1.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내래죽어도좋습네다 |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1                   

※북한 선교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역에도 도움이 되는 간증입니다. 

 

◑제1장 주의 부르심 

♣너는 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 

나(최광 목사)는 어렸을 적에, 선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부르심을 받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기에 내가 감히 선교사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고 
더군다나 북한은 몇몇 정치인이나 신경 쓰는 곳이었고 
내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북한이, 내 생명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며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곳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 집은 증조부로부터 친가 4대, 외조부로부터 외가 3대째 내려오는 기독교 집안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 넉넉하고, 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사이셨기에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이러한 유복한 가정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신앙에 있어서도 청년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모태신앙이었다. 
하지만 나는, 군에 입대한 이후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나는 결혼과 함께 사업을 시작하면서 경산청년회의소에 드나들었고, 
지역의 여러 저명인사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들과 어울리며 세상에 좋다는 것은 다 해보고 
마지막엔 도박 등 방탕한 생활 속에서, 부모님께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탕진하였다. 

이런 나를 위해 어머니, 아내, 제수씨 들까지도 3일을 금식하며 기도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꿈속에서 
'다시 죄 가운데 빠져들면 (내가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무서운 음성을 듣고,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구해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부터 좋지 못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품으면, 즉각 사고가 생기는 등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철저하게 간섭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것도 가족들의 기도에 응답이라고 할까? 
1992년에 나는 36세의 늦은 나이로 대구신학교 대학과정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신학교는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이었다. 
'도대체 이 풍족한 시대에 이런 데도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곳에는 라면도 못 먹어 쩔쩔매면서도 
오직 하나님만 추구하는 경건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처음 두 달 동안은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교실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신학교에 편입한 지 몇 달이 지난 후, 아버님이 정년퇴임을 6개월 앞두고 
갑자기 위암 진단을 받으셨다. 

의사가 수술하기 위해 배를 열었으나, 이미 여러 곳에 전이되어 
수술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런 아버님을 위해 온 가족이 3일간 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고, 
나중에는 기도원으로 모셔서 온 가족이 24시간 릴레이로 기도하였다. 

이 기도에 힘입어, 아버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암환자같지 않은 환한 얼굴로 천국으로 가셨다. 
나는 갑작스러운 아버님의 소천을 접하며 
'인생은 정말 한순간'이라는 것이 새삼 깊이 다가왔다. 

이렇게 하룻밤 꿈같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신실하게,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리라.. 나는 굳게 결심하였다. 

그 후 <로마서> 수업시간에, 나야말로 죄인의 괴수중에 괴수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해 자복하며 회개하였다. 

하나님께서 죄사함과 구원의 큰 은혜를 주셔서 
하늘을 전부 얻은 것 같은 기쁨속에서, 늘 울며 신학교를 다녔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일꾼으로 까지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기만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부끄럽게도 성경을 별로 읽지 못했다. 
하지만 신학교에 입학해서, 회복의 은혜를 맛보면서 
한 달 만에 신구약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독할 수 있었다. 

가슴 뿌듯했고 기쁨이 넘쳤다. 
36년 만에 처음으로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한번 읽었으니 
그 밤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은사체험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밤 내 발걸음은, 어느 덧 대구 주암산 기도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날은 매주 화요일마다 북한선교를 위해 특별 철야기도회를 하는 날이었다. 

커다란 기대감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회에 참여했지만 
기도회가 다 끝나가도록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축도 하기 전 마지막 통성기도시간이 되자 
갑자기 혀가 꼬부라지면서 방언이 내 입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일 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방언으로 인해 큰 감격속에서 살았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꾼으로 준비되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신학교 졸업 후, 하나님께서는 나를, 서울에 있는 <말씀사관학교>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낮에는 성경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밤에는 삼각산에 올라가서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말씀사관학교>를 운영하시는 목사님과 사모님의 삶을 보면서 
나는 많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사모님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오픈하고 
자신의 생명을 쏟아부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섬기셨으며 
들것에 실려서까지 하루도 산 기도를 빠뜨리지 않는 분이셨다. 

그곳에서 얻은 또 한 가지 유익은, 말씀암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하던 터에 
함께 공부하던 김태식 집사를 통해, 말씀 1천 절을 암송하고 반복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북한선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신학대학원의 동아리 MSM 선배인 박 베드로 선교사의 소개로 
신학대학원 3학년 때, 내가 중국 길림으로 20일간의 선교를 다녀오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동아리의 해외 선교부 총책임자로 
중국 선교와 북한선교를 귀하게 감당해오던 분이셨다. 

박 선교사를 만난 것은 신학대학원 2학년 때였는데 
알고 보니 우리 아버님의 제자여서, 이를 계기로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1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대뜸 '더 이상 준비하지 말고, 빨리 선교현장으로 나가라'고 야단을 치셨다. 

그때 마침 3년 전에 박 선교사의 <성경통독 길림 사역장>에서 
3 개월간 공부한 적이 있는 주광호 선생(탈북자 출신 성도)에게서 
북한 형제들을 돌봐줄 선교사가 있으면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박 선교사는 주 선생에게 걱정 말라고 하면서 
나에게 묻지도 않고 8월 8일에 가는 것으로 약속 날짜를 잡았다. 

그리고 MSM선배 이면서, 국내 모 선교단체에서 파송받아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김 요엘 선교사에게 
사역장 center 으로 쓸 아파트를 구하게 하셨다. 

내가 그렇게 멀게만 느껴왔던 미지의 땅 북한, 
그리고 그곳 사람들과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제2장 찢어진 북쪽 하늘

♣길림 사역, 20일간의 단기선교

1998년 8월 8일, 중국 길림성에 있는 장춘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소지품은 옷가지 몇 벌, 성경 한 권, 성경1천절 암송노트, 열여덟 개로 된 빠른 통독 테이프 2세트. 

비행기 좌석에 앉고 부터 여러 가지 생각으로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전 처음 만나게 될 북한 형제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북한 사람들이면 빨갱이인데, 뭐가 빨갱이일까?
눈알이 빨개서 빨갱이일까?'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비행기는 어느새 장춘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마중 나온 형제와 함께 곧바로, 
주광호 선생과 그가 모아놓은 몇몇 북한 형제들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 길림 시로 갔다. 

장춘에서 길림으로 가는 차창 밖에는, 옥수수 밭과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마치 어릴 적 고향 풍경 같이 정겹게 느껴졌다. 

몇 시간 후, 다 낡아서 우중충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여 
동 호수를 찾아 긴장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아파트 문이 삐걱하고 열리며, 키 175 센티 정도의 어깨가 떡 벌어진 형제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장공비를 연상케 하는 눈빛 사나운 이 사람이 바로 주광호 선생이었다. 

북한 특수부대 출신으로서 북한 고위층의 비자금을 관리하다가
중국으로 도망나온 사람이라고 들었다. 

'어서 오시오, 최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광호 선생이 먼저 인사를 건넨 후, 자기 뒤에 서 있는 4명의 북한 형제들과 
조선족 감 형제를 소개해 주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먼저 거실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15평 남짓 해 보이는 아파트는, 방 3개에 조그만 부엌 겸 거실이 있었다. 
장판도 깔지 않고 천장과 벽에도 전혀 도배를 하지 않아, 집안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했다. 
(중국은 이렇게 임대를 하고, 세입자가 장판도 깔고 도배를 한다)

형제들은 하나같이 시커먼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빛에서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살기가 뿜어져 나와,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고, 몸집들도 우리의 초등학생들만 했다. 
잔뜩 움츠리고 않아 한 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안 되어 보였다.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하며 일부러 더 활달한 목소리로 내 소개를 했다. 
'한국에서 온 최광 선교사라고 해요.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그러자 주광호 형제가 자기소개를 했다. 
15명 정도는 2~3분 내로 간단히 해치울 수 있으며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20~30 명의 선교사들을 만났고 
중국 공안에 잡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때마다 말을 잘하고 연기에 능해서, 공안이 스스로 자기를 풀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여전히 경계의 눈빛으로 힐긋거리기만 할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중국에 있는 한국 사람은 무조건 안기부 요원인 줄 알았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나는 그동안 못 먹고, 쫓겨다니느라 찌들어 있는 북한 형제들에게 
자부심과 소망을 주고 싶었다. 

'자 허리를 펴봅시다. 가슴을 쫙 펴고 턱을 앞으로 약간 내밀어 봐요.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은 다른 탈북자들과 달라요. 
하나님이 부르신 이 곳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안에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무슨 소리야?'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다. 

와당탕 하고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거실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미국놈 같은 새끼, 왜 자꾸 이래?'
'야 야 너 왜 이래? 자꾸 이럴 거여?'

방상수 형제의 목소리였다. 몹시 화가 난 듯했다. 
'임마 뭐 한다고 새끼, 아무 소리나 해제끼나? 맞아 죽자고 그런 소리야?' 
이번에는 주철진 형제의 목소리였다. 

거친 말이 몇 번 더 오가더니, 이어 으악 으악 하며 악을 쓰면서 싸우는 소리로 변했다. 
놀라서 방문을 열고 나갔을 때는, 이미 엉겨붙어 거실바닥을 뒹굴고 있는 중이었다. 

으르렁거리면서 악쓰는 것이 무섭기만 했다. 
그 소리에 낮잠자던 형제들이 하나 둘 거실로 나왔다. 

진창욱 형제와 지강구 형제가 여기저기 붙들고 뜯어 말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북한 형제들이 싸우는 것을 처음 본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소시 적에 한 싸움했지만, 북한 형제들이 어찌나 사나운지 말릴 엄두조차 못 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두 시간은 족히 싸운 것 같았다. 
그때 장보러 나갔던 주광호 선생과 길호 형제가 들어왔다. 

아직도 씩씩거리며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주선생이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니들은 이렇게 하자고 여기까지 왔니? 
지금 이 시간에도 저 북조선에는 풀도 없어서 땅을 움켜쥐고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잘 먹고 편안하니 이제는 힘쓸 데가 없어서 서로 치고 받고 싸움질만 하려고 해? 
두 놈 새끼 어디 나한테 죽고 싶어?' 

주선생의 성난 음성이 몇 번 더 들리고 꾸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밖이 잠잠해졌다. 

나는 주선생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어찌 해야 됩니까? 전부 처음 듣는 소리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루도 이 형제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하나님..' 

시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30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치어 깨닫게 하나이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 

기도하다가 이어 두 시간 반쯤 말씀을 암송하고 나니, 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대학 때 3박 4일 동안 ROTC 입단 훈련을 받을 때가 생각났다. 

훈련 교관들이 훈련생들의 시계를 모조리 회수하고 
훈련 기간 내내 십 분도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뺑뺑이를 돌렸었다. 
밤이 되면 훈련생들은 말할 기운도 없어, 인사불성 쓰러져 자기에 바빴다. 

북한 형제들과 며칠을 더 지내보니, 한 두 시간 여유만 생기면 
깨고 부수고 온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었다. 

한나절 정도 자유시간만 주어져도, 전부 나가서 담배 사서 피우고 술 사마시고 들어왔다. 
이러다가는 3일도 못가서 사역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언젠가는 잡혀서 북한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굶어 죽지는 않았나 하는 염려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다 못해 폭발하면.. 
사소한 말다툼에도 언성이 높아지고 격한 몸싸움이 되곤 했던 것이다. 

나는 이들이 딴 생각을 하거나, 싸울 틈을 아예 주지 않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큰 방에 전부 모여, 나의 인도하에 대화하였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제멋대로 날뛰는 사나운 북한 형제들을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전략이었다. 

1998년 8월, 이렇게 나의 단기 선교는 시작됐다. 
하루 8 시간 성경통독, 두 시간 기도.. 

"똑똑똑 일어들 나세요. 일어들 나세요."  
곤하게 자던 형제들은 아무리 박수를 쳐도 꿈쩍도 않는다. 

'꼭두새벽부터 왜 이래?' 하는 눈길로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코를 골며 자는 형제도 있다. 

형제들을 일일이 깨우느라, 고요하던 새벽 정적이 순식간에 깨졌다. 
잠이 덜 깬 형제들을 큰 방에 모아놓고, 새벽예배를 드렸다. 

졸리지 않게 와글와글 소리내서 기도하라고 하면서, 한 시간 동안 새벽기도를 시켰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안전을 위해서 
또 하나님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라는 뜻에서, 형제들의 이름을 바꿔주었다. 

내 이름은 중국으로 들어오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라는 뜻의 '최 광'으로 바꾸었다.

형제들에게 내 이름에 대해 설명한 후, 아까부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방상수 형제에게 말했다. 
'상수형제, 형제의 이름은 어떻게 바꿀까요?
뭐가 좋을까? 무디, 무디 어때요?'

'무디? 무신 말이 그런 말이 있슴까, 그거는 무슨 소리입니까?' 

'19세기에 미국에 D. L. 무디 라는 부흥사가 있었어요. 
그분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한 위대한 부흥사에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아니 이보시오 남조선에서 왔다는 선교사 양반,
그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국 놈 이름이 아니오?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함네까? 
그래 이제부터 내를 미국눔 만들려고 그럽니까? 
안 됨다. 절대 안 됨다.' 

'무디가 어때서 그래요? 무디는 미국사람 중에서도 아주 아주 특별한 사람이에요. 
나는 상수 형제가 무디 같은 대부흥사가 되기를 바래요!'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립네까?
어디 미 제국주의 침략자 이름을 사람에게 갖다 막 붙이려고 그럽니까? 
절대 안 됩니다.' 

무디 목사님이 아주 위대한 분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좋다면, 당신이나 가지시오!' 

나는 안 된다고 계속 고집부리는 상수 형제를 내버려 두고 
진창옥 형제에게 말했다. 
'창옥 형제는 보니까 공부하는 거 좋아하게 보여요. 
앞으로 열심히 하면 칼빈같은 위대한 신학자도 될 수 있겠는데.. 성경공부 열심히 해보세요!'

그러자 창옥 형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철진 형제는 성이 주씨라,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함 자를 따서 주기철로 지어주었다. 
이름 바꾸는 일이 끝나자, 주광호 선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엄숙히 선포했다. 

'우리는 여기에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오. 술과 담배는 금지합니다. 
이제부터 술과 담배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주선생은 이어 형제들에게서 담배를 회수하고 
담배를 살 수 있는 돈도 모조리 빼앗아 버렸다. 

사역장의 규칙을 세우고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갔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일과는 내가 짜놓은 대로 진행하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새벽기도 
-아침을 먹고 7시 반부터 12 시까지,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네 시간 오전 통독 
-오후 3 시까지 점심식사와 낮잠

-오후 3 시부터 4 시까지 한 시간 기도 
-오후 4 시부터 저녁 7 시 반까지 3 시간 통독 
-저녁을 먹고 8반부터 9시 반까지 한 시간 통독 

그동안 허허 웃으며 사람 좋아 보이던 선교사라는 양반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자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남조선 선생,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왜 이리 못살게 구는 겝니까?' 

하지만 나는 들은 척도않고 계속 통독 테이프를 틀어놓았다. 
이 테이프는 8 시간만에 신약성경을 한번 다 들을 수 있도록 
빠르게 녹음된 속독 성경테이프였다. 

정한 일과 대로라면 하루에 신약성경 일독을 마칠 수 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자, 하루 일과가 끝날 즈음 형제들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말할 기력조차 없는지, 저녁 통독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통독 첫날은 조용히 지나갔다. 

처음으로 아무도 싸우지 않은 날이었다. 
'야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주광호 선생은 이렇게 군대식으로 일과를 밀고 나가는 나를 굉장히 좋아했다. 
지금까지 학생들을 이끌면서 통솔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고 
이렇게 하고 싶어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형제들은 이구동성으로 항의했다. 
무디 형제는 북한에서 군대생활 할 때보다 훨씬 더 힘들다고 불만이었다. 

'북조선에서 군대 생활할 때는, 썩어질 정도로 힘들고 배도 고팠지만 
그래도 담배는 피우게 했단 말이요. 안 그래요?

근데 이젠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중국에서 
이 도깨비같은 책만 하루 종일 읽게 하고, 담배도 못 피게 하고 술도 못 먹게 하니 
사람이 살 갓이요, 응?'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던 기철 형제도 발칵 성을 냈다. 
'선생님, 이거이 뭡니까? 지금 우리가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왜 담배도 못 피게 하고, 술도 못 먹게 합니까? 
왜 밖에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까? 
이거 이거 지금 우리를 살리자는 겁니까, 죽이자는 겁니까?
이거야 원 삐쳐 내겠습니까?' 

기철 형제는 통독 시간에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엎드려서 성경책을 노려보다가, 몸을 뒤로 잔뜩 젖히고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나의 박수 경고를 받고는, 마지못해 바로 앉아 
심드렁한 눈길로 성경책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삐딱하게 앉아 보기도 하고 
아예 일어나서 떡 버티고 서기도 하고 
못 본 척 하고 통독하고 있는 나를 한참씩 노려보기도 했다. 

그러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노라니, 정신병원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사역장에 새로운 형제들이 왔다. 
8월 13일 주광호 선생이 을안에 가서 
칼빈 형제가 소개한 두 형제를 데려왔다. 

칼빈형제가 사역장에 들어오기 전에 돌공장에서 일했던 동료로서 
북한에서 전문대 까지 나온 형제들이었다. 

최권능, 김익두 목사님에 대해 말해주며 
김권능, 허익두 라고 이름을 고쳐주었다. 

권능형제는 가족들이 모두 탈북하여, 연변의 깊은 산속에서 숨어 지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늘 자기만 이런 사역장에 와서 잘 먹고 잘 산다고..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미안해했다. 

그런 그에게 가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더니 
도무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8월 22일엔 다리를 심하게 저는 민상국 형제를 어디서 데려왔다. 
이 형제는 길선주 목사님의 함 자를 따서 민선주라 하였다. 

며칠 후 하진복 전도사가 우리 사역장을 방문했다. 
하전도사는 내 동생의 친구면서 신학대학원 후배로서 
중국 문서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서 당시 대구에서 기독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북한 형제들은 자기들을 만나러 온 한국 사람을, 사뭇 경계하면서도 매우 반가워했다. 
하 전도사는 방문기념으로 형제들 외식을 시켜주고 소풍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꼼짝없이 갇혀 난생처음 하는 속독 통독에 지쳐있던 형제들은 
소풍이라는 소리에 환호성을 지르며, 집안을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다음 날 우리는 통화시 집안 고구려 유적지로 갔다. 
공원에 들어서자 형제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떠들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무디 형제와 기철 형제가 몹시 좋아했다. 
무디 형제는 체조 선수처럼 몇 번이나 연속 공중회전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한번 사격경기 해봅시다요.' 
신이 난 무디 형제가 하전도사에게 불쑥 말했다. 

하전도사도 사격이라면 자신이 있었기에 흔쾌히 승낙하고 
열심히 쏘아 10발 중 8발을 명중시켰다. 

하지만 무디형제와 기철 형제는 조준도 하지 않고, 
그것도 한 손으로 마구 쏘아댔는데도 10 발 모두 명중이었다. 
놀라서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하전도사의 등 뒤로, 무디 형제가 우쭐대며 말했다. 

'남조선 아~들은 군대 복무를 삼년밖에 안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10년이나 합니다. 
남조선 아~들과 맞붙으면 간단히 해제길 수 있습니다. 하하' 

무디 형제의 말에 그는 그만 아연실색 하였다. 

북한 형제들과의 첫 만남에서 큰 감동을 받은 하전도사는 
이후 3년간 15차례 이상 사역장을 방문하며 
사역장에 필요한 모든 성경책과 신앙서적을 공급해주었다. 

♣북한의 상황과 기독교 탄압

탈북자들의 탈북 시기는 대부분 1997년부터 이다. 
그때가 북한의 식량사정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1997~98 년 두 해 동안 2백만명 가량의 북한 주민이 굶어죽었다. 

평양에서는 하루에 30~40 명이, 함흥에서는 매일 2~3백 명이 굶어죽었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의 탈북자가 발생하였다. 

그들은 중국으로 넘어와 주로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의 동북삼성 지역에서 
중국 공항과 북한 보위부 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고 있었다. 

이들의 탈북이유는 거의 비슷했다. 
눈앞에서 부모, 자식이 굶어죽고 
더 이상 풀도 뜯어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굶어죽을 바에는 중국에라도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탈북을 시도한 것이었다. 
잡히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죽게 되지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밥이라도 실컷 먹다 죽어야겠다는 일념에, 탈북했다고 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풀로라도 허기를 달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면 
탈북할 마음 같은 것은 애초에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사상에 철저하게 세뇌되어 
감히 조국과 인민과 당과 장군님과 수령님을 배반하고 탈북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어떻게 1년에 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 데도 정권이 유지되는지 모르겠다. 
형제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 하나는, 모두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막힌 사연의 연속이었다. 

나는 '허약'이라는 병에 대해 이들에게 처음으로 들었다. 
우리에게는 허약이라는 말조차 낯설지만, 이들은 모두가 허약을 신물 나게 경험한 사람들이다. 

허약은 1 2 3 도로 그 증상이 나누어진다고 한다. 
사람이 오랫동안 영양부족 상태로 있게 되면,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항문이 열려버린다. 

이때 항문이 열린 정도를 가지고 허약 단계를 나누는데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면 허약 1도 
2, 3 개가 들어갈 정도면 허약 2도라고 판단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항문이 열리게 되면 허약 3도가 된다. 
이때는 아무리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도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개 2~3일을 가지 못해 죽는다고 한다. 

형제들은, 그런 말을 듣고 놀라는 내가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권능 형제는 소나무 껍질과 풀을 뜯어 먹다가 
나중에 풀도 없어 벼 뿌리까지 삶아 먹었고 
탈북 직전에는 너무 배가 고파서 계절이 지난 쑥을 뜯어 먹다가
독이 올라서 얼굴이 퉁퉁 부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먹지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선생님들은 굶어서 힘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어서 
학교 수업이 엉망이란다. 

선주 형제는 엄마가 산파 일을 했었는데, 엄마가 출산을 도와주고 나면,
잘라낸 산모의 태를 집으로 가져와 삶아 주어서 자주 먹었다고 했다. 

강구 형제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옥수수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기차가 너무 노후해서 자주 고장이 나고 
고장이 아니더라도 연료가 없어 가다가 서기가 일쑤라고 했다.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를 가는데 일주일씩 걸리고 
어떤 때는 보름이 걸려도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단다. 

주광호 선생 얘기로는, 북한의 장례식에는 직파와 비닐하우스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97~98년에 굶어 죽는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대부분은 장례식을 치른다는 것이, 가마니도 하나 덮지 않고 
구덩이를 파서 바로 시체를 묻어버리고, 때로는 수십 구의 시체를 
한 구덩이 묻어 버리기도 하는데, 이렇게 치르는 장례식을 '직파'라 한다고 했다. 

당 간부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관을 만들고 수의를 입혀서 장례식 다운 장례식을 치르는데 
이러한 장례식을 '비닐하우스 장례식' 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기철 형제는 자기 마을에 사람이 죽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매장 하러 갔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묘지에는 뼈만 묻고, 살을 가져와 먹다가 
당국에 발견되어 총살당했다는 이야기와 

자기 친척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인육을 파 가지 못하도록 
이틀 동안 지켰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였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탈북 당시에 처절했던 상황이 조금씩 이해되었다. 

놀라운 것은 북한 사람들은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김일성이나 김정일, 당에 대해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체제가 잘못되어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도 없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 
그들은 부모나 처자식이 굶어 죽으면 
'그저 내가 못나서 그렇게 되었다' 라고만 생각한다. 

임산부가 굶어서 죽어 갈 때, 옆에서 간호사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줌마이, 아줌마이의 이 고통을 장군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말하면 
임산부는 숨을 헐떡이며 '장군님, 더 충성하지 못하고 먼저 죽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며 죽는다고 한다. 

참으로 무서운 저주였다. 그 수많은 북한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노예화 할 수 있다는 것이 
솔직히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들을 이런 무서운 저주를 몰아넣은 북한의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인간중심 사상이다. 

하지만 인민대중은,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만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다고 하여 
김일성 김정일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명분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의 가치판단과 행동규범의 척도가 된다. 

이러한 김일성 유일 지도 체제와 유일 사상체계로 인해 
북한에서는 그 어떤 종교도 허용되지 않는다. 

♣북한의 기독교 탄압

북한에서는 어릴 때부터 '미제국주의 침략자, 미제국주의 침략자의 앞잡이 남조선 괴뢰도당'
또한 '약소국 침입을 위한 침략의 도구인 기독교는 반드시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고 세뇌시킨다. 

그래서 이미 6.25 전쟁 전에 북한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비밀리에 깨끗이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상태였다. 

이러한 정권의 독재 속에서 50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 사람들은 평생 '예수'라는 말조차 들어 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또한 주광호 선생이 들려준 북한의 반기독교 교육실태는 
북한사람들을 더더욱 기독교와 멀어지게 했다. 

북한 정치인들은 외국으로 나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교회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 
'외국에 가면 십자가가 걸린 교회를 볼 것이다. 그 근처에 가까이 가면 안 된다. 
교회 지하실에는 사람을 가두고, 사람의 포를 떠서 사람고기를 밖에 내다 팔기 때문에 
교회 건물만 보면 빨리 도망가야 한다' 

또한 북한의 인민학교에 반기독교 교육 실정은 더 더욱 심각하다. 
'평양에 언더우드 선교사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과수원을 경영했다. 
과수원 울타리 밖에 떨어진 썩은 사과를 9살짜리 어린애가 주워 먹자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 어린애를 붙잡아다가 청강수(염산)로 이마에 도적이라고 새겼다. 
선교사들은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고,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앞잡이 들이다'

사정이 이러니 북한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머저리 나 미친 사람으로 본다. 
그래서 탈북자가 두만강을 넘어와 처음으로 선교사를 만나거나 예수라는 말을 들으면 
후다닥 도망가기 바쁘다. 

성경을 보면, 가래 침을 캭 뱉었고 
십자가가 있는 교회 건물이나 교회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중국 공안이나 북한 보위부 특무들에게 쫓겨서 갈 데가 없어진 탈북자들을 
조선족 교회에서 받아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또 몇 푼의 돈이라도 여비로 줘어주자, 이들은 교회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교회가 사람을 잡아 먹는 곳도 아니고, 
교회 사람들이 청강수(염산)로 이마에 '도적'이라고 새기는 무리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성경 말씀을 접하다가, 은혜를 받게 되면 
그 동안 북한에서 완전히 속아서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이런 얘기들을 듣고서, 나(최광 목사)는 마음이 답답해져서 밖으로 나갔다. 
새 한 마리가 하늘을 가르며 유유히 날고 있었다. 

'내가 오늘 이렇게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내가 차고 오늘 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저들에게 그 땅이 되어 주리라! 
저들이 나를 차고 날아오르게 하리라!'  

나는 숙연해지는 마음으로 아득히 멀어져가는 새를 바라보았다. 


♣다시 만난 북한 형제들 

나는 20일 동안에 단기선교를 마치고,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형제들과 헤어지면서 '이제 나가서 3개월만 더 공부하면 졸업인데 
기도해 보고 하나님께서 다시 여기로 보내시면, 꼭 돌아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정이 깊이 들었다. 
헤어질 때 흘렸던 이별의 눈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북한이나 조선족 동포들은, 순수해서 헤어지거나 만날 때 눈물을 잘 흘린다.
요즘은 점점 이게 사라지고 있는 실정/주) 

한국으로 돌아오며 개강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에 그렇게 건강하던 몸이, 이유 없이 여기 저기가 아팠다.

몸만 아니라 마음에 기쁨도, 감사도, 찬양도 사라졌다. 
영육 간에 너무나 곤고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괴로워서 박 베드로 선교사와 상의하니,
'1년만 휴학하고 북한선교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참 어처구니 없었지만, 그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여 
나는 중국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였다. 

그런데 세상에! 티켓을 예약 하자마자 
마음에서부터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터져 나오며 
아프던 몸도 거뜬하게 나아 버리지 않는가! 

이렇게 나는 중국에 있는 북한 형제들에게 돌아갔다. 
신학대학원 동기이자 이종 매제인 김규성 전도사와 
MSM 선교회 선배인 천도종 전도사도 함께 갔다. 

김전도사는 1년간 동역했고, 천 전도사는 당분간 우리 사역장에 머물며 북한선교를 준비하기로 했다. 

장춘 공항에 내리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사역장으로 가는 동안, 동행한 두 전도사는 
처음 만나는 북한 형제들 때문에 매우 긴장했지만 
나는 마치 고향으로 가는 듯이 마음이 편안했다. 

사역장에 도착해서 그들을 보자, 가족을 만난듯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오~ 최 선생님 안녕하슈?  안녕하세요. 최 선교사님! 할렐루야 최 선생님!' 
하나같이 얼굴이 시커먼 형제들이, 우르르 문 앞에 몰려나왔다. 

가지각색으로 인사하며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나도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하기 바빴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역시 우리는 한 형제요, 한 민족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무디 형제가 갑자기 흥분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아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 돌아오게 해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오?
주광호 선생은 선생님 다시 들어오게 달라고 거 뭐야 3일 씩이나 밥도 안 먹고 기도 했다니까! 
야 근데 거 기도라는 게 신기하다야, 아 그게 우리가 기도라는 거 하니까 
글쎄 이 선생님이 한국에서부터 뿅 하고 비행기 타고 여기로 끌려오지 않는가?' 

북한 사람들 특유의 억양으로 무디 형제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형제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 되었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돌아온 내가 신기한듯 자꾸만 나를 바라보고 만져보고 야단들이다. 

나는 예상 밖의 환대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근데 선교사님, 이 사람들은 누굽니까?' 

주기철이 형제가 나와 함께 온 두 전도사를 보고 물었다. 
두 전도사에 대해 소개하자, 선수 형제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야 남조선 사람들은 이렇게 다 키가 크니까 좋겠다야' 
'인마 남조선은 우리 나라보다 남쪽이 아니고 뭐야? 
거긴 공기가 따뜻해서 풀이고 사람이고 다 길다' 
이렇게 칼빈 형제가 아는 척 하면서 덩달아 악수를 건넸다. 

다른 형제들도 두 전도사와 반갑게 악수를 했다. 
나에 대한 이들의 관심이, 너무도 이례적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대체로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늘 쫓기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개념이 없고,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 했다'는 건 
주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나는 기뻐하는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이들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도 형제들 못지않게 즐거웠고, 이 형제들을 위해 나를 택해 주신 주님께 감사했다.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자 내가 웃으면서 물었다.
'나는 지금 전도사고,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로 인정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물질적 능력도 없는데, 왜 나를 다시 오라고 기도했죠?'

무디 형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우린 선생님이 좋습니다. 우리와 항상 같이 살아 주니깐 말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처럼 돈이 없다니까, 
그러니까 우리와 똑같이 먹고 똑같이 한 자리에서 자니까 그래서 좋습니다.
믿을 수가 있잖습니까!' 

'나는 돈도 없는데 나를 데려다가 뭘 하려고 그래요?'
옆에 앉아 있던 기철 형제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아 이거 우리 좀 보시오. 우리가 지금 돈이 있어서 삽니까? 
이렇게 우리처럼 살면 됨다. 걱정 맙소 
돈이야 또 이캐저캐 생기는 거 아임니까?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거 걱정하면 안 돼지, 일 없어요. 하나도 일 없어요!'

형제들은 말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남의 나라에 와서 숨어 살다 보니 
사람을 몹시 그리워했다. 

저녁을 먹고 모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예배 시간 내내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 
주님께서 나 같은 인간도 쓰시려고 여기 보내셨다고 생각하니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주광호 선생이 설교를 들으며, 묵묵히 앉아있는 형제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촌뜨기 방무디, 싸움쟁이 주기철, 축구 선수 지강구 
조선족 강길호, 다리 저는 민선주 그리고 진 칼빈, 김권능, 허익두

하나같이 정에 겨운 형제들이었다. 

이틀 후 다시 사역을 시작하자, 여러 가지 어려움도 같이 시작되었다. 

김 전도사가 일주일 금식기도를 작정하였다. 
그러자 천 전도사도 금식기도에 동참하겠다고 하였다. 

'아니 선교사님, 1주일이나 쫄쫄 굶고서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강구 형제가 나에게 와서 물었다. 

내가 강구 형제와 다른 형제들에게, 금식기도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만
형제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형제들은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는지 감시하기로 작정하고 두 전도사를 지켜보았다. 
금식 기도가 끝나자,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수 형제가 중얼거렸다. 
'야 진짜 안 죽는다야. 사람 맞아? 둘 다 귀신 같다야' 

♣하나님, 북한선교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지금까지 한국에서 너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아무것도 누리지 않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만족합니다. 
제 남은 생명 북조선 복음화를 위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때론 풍성하고 귀하게, 때론 고통과 어둠속에서 저를 훈련시킨 이유가 
이곳에 보내기 위해서 였군요.' 

20일 간의 단기 선교가 끝날 무렵, 내 입에서 이러한 고백이 흘러 나왔었다. 
1년을 작정하고 다시 중국에 들어가면서 
나는 앞으로의 사역 방향을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북한선교를 감당해야, 가장 기뻐하시는지 하나님께 계속 여쭈었다. 
그런 중에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북한선교의 다양한 모습과 
조선족 교회의 실태를 보고 들으면서 
또 함께 있는 북한 형제들과의 대화 속에서, 사역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1998년 당시 중국에는 북한선교를 위해 사역하는 한국 선교사들이 많았다. 
선교사들은 의료선교로부터 시작해서 
북한에 양식 보내는 일, 성경 보내는 일, 탈북자에게 안전한 거처와 양식 공급해 주는 일, 
직장 알선 등 여러 귀한 일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할 부분은 어떤 것이냐고?' 하나님께 계속 여쭈었다. 

조선족 교회에도 몇 번 방문해서 예배드리며, 중국 조선족 교회 상황을 알게 되었다.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이면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다 보니 
중국 정부에서는 단 10명만 모여도, 예배당을 세우겠다고 하면 쉽게 허용 해 주었다. 
예배당이 지어지면 외국에서 달러로 헌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북 3성 일대에, 이곳 저곳에 예배당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러면 그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누가 설교자로 강단에 살 것인가? 

조선족 교회에는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목사가 없으니 
집사들 중에서 '책임 집사'를 뽑아, 예배 때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이끌어가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사상으로만 교육을 받다보니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읽은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설교 대신에, 한국의 문서 선교단체에서 보내주는 설교집을 
그냥 펼쳐서 읽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말씀과 무관한 자기들의 간증으로 설교 시간을 끝내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단에서 가져다준 잘못된 책을, 아주 좋은 책이라 여기며 
그것으로 설교한 교회도 있었다. 

교회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죽어있던 영혼들이 살아나게 하는 곳이다. 

예배당은 많이 세워졌는데,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사람이 없는 조선족 교회 상황을 보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만약 북한이 열린다면, 북한의 개방 모델은 오직 중국 뿐이다.
중국 정부에서 달러를 벌기 위해 예배당은 마음껏 짓게 하면서도 
설교는 중국인만 할 수 있게 제한한다. 

외국인이 설교하다 발각되면 체포하거나, 과중한 벌금을 부과하고 추방시킨다. 
그런데 중국인 중에는 생명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국의 현실이 이러한데, 북한이 개방되어 교회가 세워진다면 
과연 누가 말씀을 선포할 것인가? 

저들이 말하는 남조선 괴뢰도당들이? 
아니면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북한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북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굶는 이유가 첫째는 미제국주의 침략자 때문이고 
둘째는 미제국주의 침략자의 앞잡이 남조선 괴뢰도당 때문이라고 교육받아 왔다. 

그러니 이들이, 미제국주의 침략자인 미국 사람을 설교 시키겠는가? 
미제국주의 앞잡이 남조선 괴뢰도당인 한국 사람을 설교 시키겠는가? 
오직 북한 사람이라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오직 북한출신 선교사 양육에만 전념하겠다'고 
하나님께 고백하였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듣기로, 나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시간을 정해 놓고 방문하여 
예배 인도 후 양식을 공급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자기들을 빌미로 한국에서 선교비를 많이 받아서 
자기 들에게는 조금밖에 주지 않는 듯해서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과장된 헛소문이 그렇게 돈 것)

그 말을 들으며, 모교회 허용득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렸다. 
목사님은 전도사로서 사역의 길을 들어서는 내게
'설교는 20% 나머지 80% 는 삶'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한국에서의 목회도 그렇지만, 이곳 북한선교 현장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공개되지 않을래야 안 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나의 목회는 100% 삶 일수 밖에 없다. 
나는 나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다. 

'모든 생활과 모든 사역을 함께 하는 북한 형제들에게 100% 오픈한다'
이것은 내가 그들과 함께 한 20일간의 동고동락의 결실이다. 

어쩌면 보잘 것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때 새로운 원칙으로 이후에 수많은 북한 형제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었다.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수확이었다. 

♣북한 특수부대 출신 주광호 선생 
주선생이 반찬거리를 사러 나갔다 왔다.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오늘도 시장을 보고 남은 돈을 돌려주려는 기색이 없다. 

기분이 상할까봐 그를 내 방으로 조용히 불러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광호 선생, 광호 선생은 이미 여러 명의 선교사들을 접해 봐서 
북한사역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나는 잘 몰라요. 
하지만 그 선교사들과 똑같이 나를 대하면, 같이 일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하는 구제사역이 아니라 
한 곳에 눌러앉아,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이들을 사명자로 키워내는 사역을 하려 하기 때문이에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광호 선생이 돈계산이 정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말을 
다른 선교사에게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물론 내가 광호 선생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많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이 정리되지 않고 바로 잡히지 않으면, 나와 함께 일할 수 없어요. 
그러니 생각을 잘 정리해 주세요.' 

며칠 동안 기분 나쁜 걸 참았다가 말을 해서 그런지, 일종의 선언이 되어 버렸다. 
그는 얼굴이 일그러진채 입을 열었다. 

'선교사님은 북한선교가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까? 
일전에 북경에서 사역하던 한국 선교사 한 명은 
북조선 아이들한테 몽둥이로 얻어맞고 순교했고 
연길의 연변과학기술대학 직원은 북조선 특무에게 독침 맞아 순교했습니다. 
이런 거 다 알기나 합니까?' 

그는 눈을 치켜 뜨며 불끈쥔 주먹을 내 코앞에서 흔들어댔다. 
그의 눈은 '내가 누군데.. 너는 풋내기 선교사인 주제에 말이 그리 많냐?'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숱한 선교사들이 매 맞고 쫓겨다니는 걸 알고나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흥분할수록 나는 오히려 단단해졌다. 

하나님께서 때론 평탄하고 형통한 삶을, 때론 험악한 삶을 골고루 경험하게 하시고 
거친 이리가 순한 양처럼 변했다고 주위 사람들이 생각될 만큼 
나를 훈련시켜서 이곳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광호 선생, 나는 이미 7년전 신학을 시작하면서, 내 남은 생명 하나님께 드린 몸입니다. 
내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오히려 할렐루야 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거 없습니다.' 

그러자 그의 검붉은 얼굴에 솟아있던 핏줄이 꿈틀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생각 잘 해 보세요. 나는 형제들과 통독 할 테니 
나중에 정리된 생각을 말해 주세요.' 

그를 내 방에 두고 밖으로 나와 통독실로 들어갔다. 
녹음기 소리만 단조롭게 들리던 통독실이, 내가 들어가자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성경책에 코를 박고 달게 잠을 자던 어느 형제는 
후다닥 일어나 시치미 뚝 떼고 열심히 성경책을 보는 척 했다. 

비스듬히 누워 비몽사몽 하던 한 형제는 
멍하니 반쯤 감은 눈 그대로 부스럭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다른 형제들도 팔베게 하고 자다가 일어난 모양인지 
온 얼굴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모른 척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저 뒤쪽에 벌렁 드러누워 자고 있던 무디 형제는 아예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배짱 좋게 드르렁 드르렁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무디 형제 일어나세요!' 나도 놀랄 정도로 갑자기 큰 소리가 나와 버렸다. 

무디 형제가 드르렁 거리던 소리를 순간 멈칫하며, 
일어나 앉아 성경책을 심드렁하게  들여다 보았다. 

"쾅!" 그때 내 방 문이 세차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호 선생이 홧김에 어디로 나가는 모양이다. 

나는 몹시 불안했다. 처음으로 북한 사람과 부딪혀서 그런지 
여러 생각이 머리속에서 스쳤다.

'혹시 홧김에 공안에 가서 신고하면 어쩌나?' 
'어디로 멀리 영 떠나가 버리는 건 아닌가?'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마구 패다가 공안에 붙잡히지 않을까?' 등등 
걱정스런 생각에 녹음기 성경테이프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나절 가량 밖에 나가 있던 광호 선생이 다시 들어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들어오던 길로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 들어가자, 그는 자기 앞만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선교사님 하고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그는 몸을 앞으로 약간 수그리고 생각에 잠기더니.. 흠흠 헛기침을 했다. 

북한사람들은 이상하게 작은 것을 등한히 여겼다. 
돈도 잔돈 같은 건 일일이 계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잔 돈까지 정확하게 계산하면 째째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광호 선생이 반찬거리를 사고 남은 돈을 내게 주지 않은 것도 
그런 의미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선교사님, 선교사님은 압니까?'
한동안 말이 없던 광호 선생이 다시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의 어투에는 푸근함이 은근히 깃들어 있었다.

'북조선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배고픔이 뭔지 압니까? 
내가 군에서 제대해서 집으로 가면서, 제일 먼저 본 게 어떤 건지 압니까? 
기차역에 검둥인지 흙더미인지 모를 어린 아이들이 한데 흙더미처럼 모여 자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먹을 것을 찾아 사방으로 헤매고 다니고 
그러다가 맥이 진하면, 길에서, 기차칸에서 그대로 쓰러져 죽어버리고 

여인들은 식량 구하러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집에서 아이들 다 굶겨 죽이고
남편 찾으러 정처 없이 나가 버리고 

군인들은 혼자 사는 노인들 집으로 대낮에 쳐들어가 식량을 약탈해서는
술과 담배로 바꿔 버리고 

힘센 청년들은 길거리에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해 보이는 사람 있으면 
무조건 강탈하고, 노인들은 길가에 버려지고 
여관에서 매일 굶어서 또 얼어 죽은 몇 십 명의 아이들은 
죽은 개처럼 트럭에 실려 땅구덩이에 묻혀 버리고 

어떤 애는 눈 뻔히 뜨고 엄마가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미쳐 버려 안전부로 달려들어가 행패를 부리다가 얻어터지고 허리가 부러져 
결국 며칠 못 가 죽어버리고

개새끼 같은 당간부들 하고 안전원 새끼들은 
공공연하게 국가 물자를 훔쳐서는 배 두드리면서 살고 
그러면서도 강냉이 몇 이삭 훔친 사람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총살해 버리고..' 

여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탈북을 했지만 
여자들은 돈 몇 푼에 사람 같지도 않은 중국 농사꾼 놈들에게 팔려다니고 
남자들은 1년 내내 죽도록 일해도, 돈 달라고 말했다고 죽을 지경으로 얻어맞고 
공안에 쫓겨 도망다녀야 되고 

엄마하고 딸이 같이 기차 타고 가다가, 눈앞에서 딸이 신분증 조사에 걸려서 
경찰에 끌려가 다시 북송 되는 데도,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멀뚱이 보기만 해야 되고... 
에이 망할 뭐 같네..'

그는 말을 끊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돼먹지 않은 선교사들은 웃는 얼굴로 불쌍한 북한사람들을 이용만 해 먹고 
그래도 매달릴 데는 선교사들 아니면 어디도 없지..  
에이.. 난 그래서 선교사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압니까?' 

그는 코를 훌쩍거리고는 더 말할 생각이 없는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근데 내가 선교사님 하는 거 가만히 보니까 
다른 선교사 하고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돈이나 몇 푼 주고 '니들끼리 알아서 살아라' 하고 
자기는 우리도 잘 모르는 좋은 아파트에서 살던데 (*극소수)

선교사님은 우리와 같이 살고, 같이 똑같은 음식을 먹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가 잘할 겁니다. 앞으로 두고 보시오!' 

그는 이 말까지 힘들게 하고,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살면서 처음 듣는 얘기들 뿐이었다. 

나는 그냥 얼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주님 이곳이 땅 끝입니까? 땅 끝까지 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 하겠습니다.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보듬을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주십시오!' 

부엌에서는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가 들리고 
학생들의 방에서는 이야기 판이 벌어졌는지..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다. 

광호 선생은 오늘부터 달라졌다. 
모든 일에 협조적이 되었고, 내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 알아서 도와주었다.

 

P2에 계속 (1주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