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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5장 바알브올에 부속된 이스라엘

LNCK 2022. 10. 1. 21:03

◈바알브올에 부속된 이스라엘           민25장           출처

 

1-5절은 우상숭배자에 대한 처단에 대해,

6-15절은 비느하스의 의분에 대해,

16-18절은 미디안에 대한 정복 명령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22장~24장까지의 주인공은 단연코 발람입니다.

22장~24장까지 발람의 이름이 51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에 가면 발람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발람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버렸을까요? 아닙니다.

 

발람은, 본문의 24,000명이 죽는 비극적인 사건에 배후입니다.

 

민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계시록2:14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음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원인이

바로 발람의 계략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를 숨기고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나게 된다는 교훈을 말해줍니다.

 

 

◑1. 발람의 변화된 전략

 

민수기 24장까지는 발람이 꽤나 훌륭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은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랴?”고 말하면서

발락의 요구와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도리어 세 번 축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민수기 24장까지는 발람의 정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발람의 마음속에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모압왕 발락에게 재물과 명예를 얻고자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주하는 일에 실패해서 약속된 사례를 받지 못하자 그 마음에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모압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전을 바꿔 직접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발락에게 사악한 계교를 일러 줍니다.

 

그 계교는 바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려서 스스로 저주받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행음과 우상숭배였습니다.

 

발람은 발락에게 “발락이여, 모압과 미디안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바알의 제사에 참여하게 하십시오”라고 제안합니다.

 

이 모압 백성들의 음행은 단순한 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음행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종교행위였습니다.

 

땅에서 남자와 여자가 음행을 하면 하늘에서 남신인 바알과 여신인 아스다롯이 자극을 받아서

운우지정을 나누게 되고, 그러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땅이 비옥하게 되고 농사가 잘 된다는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압 여인들과 미디안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른 것은

단순히 음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죄까지 범하게 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략을 통해 드디어 발람의 음모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저는 민수기 25장을 보면서 다섯 가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급속하게 죄에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매우 짧은 기간에 죄가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입니다.

짧은 기간에 24,000명이 염병으로 죽을 정도였으니까 죄가 퍼진 속도와 범위가 놀랍습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쉽게 죄악에 넘어갔다는 점입니다.

고기 냄새와 모압 여인의 미소에 그냥 넘어가버렸습니다.

 

네 번째는 이들이 비록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훈련을 받았지만

그 마음에 죄성이 매우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압과 미디안이 아주 쉬운 미끼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참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스스로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을 때, 아마 발람은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발락으로부터 얼마간의 사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25장에서 성공한 발람의 탐심은 결국 민31:8절에 가서 끝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다섯 왕을 죽일 때에 발람도 잡아 칼로 죽였더라”

 

독일 속담에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자라’는 말이 있는데,

발람은 최후에 웃지 못하고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탐심은 우리에게 잠시 잠깐의 만족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패망입니다.

발람의 죄는 민수기 25장에서는 들키지 않았지만 결국 민수기 31장에서

그 결말을 보게 되었고 요한계시록 2장에 가서 들키고 만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죄악과 심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죄악에 빠졌습니다.

죄악의 내용은 음행과 우상숭배 두 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알브올은 ‘브올에서 섬기는 바알’이라는 뜻인데, 바알신의 지역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알브올에 예속되고 음행한 이 두 가지 죄 때문에 이스라엘에 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무려 24,000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8절에서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23,000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본문 9절에서는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다고 했고

민수기에서는 전체적으로 24,000명이 죽었다고 했으니까

아마 첫날에 천명이 죽고 이튿날에 23,000명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일에 죽은 자가 23,000명이고 전체 죽은 수가 24,000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 백성의 죽은 수가 23,000명이고 교수형 당한 두령들을 합하여

24,000명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여간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첫날 1,000명이 죽었는데 다음 날 23,000명이 죽었으니

2백만명이 모두 죽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염병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주 엄중한 명령까지 내리셨습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지도자 전체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하라고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의 지도자 전체가 죄악에 빠졌을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의 죄는 백성들의 죄악을 방관하고 그들의 행위에 무관심한 것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인의 종족 중 한 족장이며”

 

지도자 살루의 아들이었던 시므리조차도 모세가 보는 앞에서 이런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과 자녀들이 잘못하면 꾸짖어서 바로 잡아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으시고

지도자 전체를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모세는 엉뚱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5절,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사사들은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사사들이 죽어야 할 사람들인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너희들 꾸짖으시니까 너희 족속 중에

바알 브올에 속한 사람들이 있으면 죽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바꾸고 나니까 어떤 결과가 오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에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징계를 내리셔서 24,000명이 죽게 된 것입니다.

 

무려 24,000명이 죽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문에 모여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얼마나 많은 장례가 치러졌겠습니까?

또한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지 않으면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6절을 보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울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서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왔습니다.

 

모세와 모든 백성들이 울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하는 판국에

심판의 원흉이었던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오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이 사람이 바로 지도자 살루의 아들이었던 시므리였습니다.

이 시므리가 고스비라고 하는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장막으로 들어갔는데

모든 형제들이 다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으니 이 얼마나 부패한 집안입니까?

 

 

◑3. 비느하스의 열심

 

이같은 상황을 목도하자 분연히 일어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비느하스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와 다른 인물입니다.

 

비느하스는 창을 들고 시므리를 쫓아가서 한 창에 두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제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을 가지고 질투하여 나의 진노를 풀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비느하스의 질투와 열심을 보고 이스라엘을 건지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느하스 한 사람의 열심이 결국은 망하는 국가를 살려냈습니다.

11절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죄악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는데

최고로 열심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열심이 있었습니다.

고후11:2절에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했습니다.

 

비느하스도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멸망에서 건져내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열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13절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오늘날 세상에서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열심의 대상이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단사상이나 사회주의를 위해서 열심히 삽니다.

 

우리는 그런 열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런 열심은 잘못된 열심입니다.

비느하스의 열심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하나님을 위한 열심입니다.

 

비느하스는 바알 숭배에 대항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예배를 바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또한 음행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법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의 우유부단에 대항해서

진리에 대한 단호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비느하스의 열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4:18절에서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언제나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열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상급으로 갚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열심에 대해서 두 가지 유익을 주셨습니다.

첫째로는 이스라엘을 국가적 진멸의 위기에서 건짐 받게 하셨습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한다면 누구나 걱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면, 하나님은 위기에서 건져주십니다.

 

우리가 국가의 위기를 보면 늘 정치가나 지도자들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근본 잘못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도 백성들의 죄와 죄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의 상황에 직면할 때, 다른 사람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열심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사회적인 죄악을 방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열심을 품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비느하스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 복은 바로 비느하스의 후손으로부터 대대로 제사장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열심으로 집안이 대대로 축복을 받게 되었는데,

비느하스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평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평화의 언약(Covenant of Peace)이라고 명하시며

비느하스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결 론

 

 

 

발람은 배후에서 도모한 자기의 악한 궤계가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아마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발람의 궤계처럼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마치 망하게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때로는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고 죄에 빠져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발람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유다서 1장 11절에 보면 발람의 길을

‘어그러진 길’이라고 평했습니다.

 

발람은 어그러진 길을 통해 결정적인 오류(error)를 범했는데

하나님이 백성이 망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조금 징계를 받고 다시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부패시킨 발람은

31:8절에 가서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때로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고 죄악에 빠져서 징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결코 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심있는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서 하나님의 교회를 정화하고,

다시 하나님의 교회가 확장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되다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영원한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마치 비느하스가 열심을 가졌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는 평화의 사신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을 우리에게도 선포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여러분,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열심을 내시되 우리의 열심은 한계가 있으니

하나님의 열심을 내 영혼에 부어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민25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내 열심을 너희 마음에 품어라. 비느하스의 열심을 품어라.

열심은 내가 기뻐하고 축복하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뜨겁게 임하여서

비느하스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적용1. 비느하스, 예수님의 예표 출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압 왕 발락이 3번에 걸쳐

어떻게 해서든지 무당 발람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망하게 만들려고 했던 계략을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막으시고

오히려 그 3번을 모두 발락의 의도와는 반대로,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25:1절 대로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싯딤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모압 왕 발락의 또다른 계략에 넘어가 모압 여자들과 음행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서 민25:2절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사귀는 모압 여자들이

비를 내리게 해서 풍년이 되게 하기 위하여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의 신전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남녀가 어울려 문란한 성관계를 맺는 의식에 초청하자

거기에 응하여, 우상숭배 및 음행에 참여하는 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민25:3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어 (속하게) 버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죄악된 우리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싸우사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대적 사단의 궤계를 막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데,

정작 우리는 대적 사단이 쳐 놓은 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서

멸망의 길을 자초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물거품이 되어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의 음행에 빠져

바알브올을 섬기는 제사 의식에 참여하는 죄를 짓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쾌락의 추구이고, 또다른 하나는 풍년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 두 가지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의 길로 유혹하는 아주 강력한 덫입니다.

 

-재미있고 즐겁고 신나는 인생을 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열망과 그에 대한 추구,

-그리고 성공하고 번영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열망과 그에 대한 추구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의 길로 달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참으로 통탄할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열망과 추구를 자극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위장하여 정당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적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와와 아담에게 그러했듯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것이죠.

이스라엘도 바로 그런 죄의 유혹에 넘어갔고,

범죄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민25:3절 대로 하나님께서는 모압 여자들과 음행에 빠져 바알브올을 섬겨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어 (속하게 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는 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민25:4,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떠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죄값을 치러야만, 진노가 그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태양을 향해 매다는 것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밝은 대낮에 처형하라는 것입니다.

 

죄값을 해결하고 대적 사단까지 파해야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해도, 같은 동족인데 어찌 죽이는 것이 쉽겠는가요?

 

그런데 이때 민25:6-8절에, 한 사람, 시므온 지파의 한 족장인 시므리가

모세와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미디안의 한 여인,

미디안의 한 족장인 수르의 딸 고스비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음행을 했고,

 

이를 본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일어나서 손에 창을 들고

그들을 따라 장막에 들어가서 두 사람의 배를 꿰뚫어서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이스라엘 가운데 (전)염병이 그쳤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민25:11대로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공의로 범죄한 동족을 죽임으로써

하나님 대신 죄값을 갚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 본다면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공의로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들을

단호히 응징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염병을 그치게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결코 잘못된 이해는 아닙니다. 하지만 충분한 이해는 아닙니다.

 

민25:12-13절에서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와 그 후손을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평화의 언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히5장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예수님, 오직 예수님만이 평화의 왕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행동을 심판으로 보기보다는

속죄로 보셨다는 점입니다.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13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요!

 

결국 쉽게 죽일 수 없는 동족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의 죄값을 갚은 비느하스의 행동은

쉽게 내놓을 수 없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어 놓음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으로써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값을 갚으신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예표하는 그림자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온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가운데서 동족인 죄인 시므리와

그를 죄의 길로 유혹한 고스비를 한 번에 꿰뚫어 죽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보아 알 수 있도록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를 죄의 길로 유혹한 사단 마귀를, 한 번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죄값을 갚으심과 동시에 사단 마귀를 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우리에게 진노하실 수밖에 없고,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진노를 자신에게 쏟아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속죄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셨고,

평화의 언약을 맺을 수 있게 중보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모든 죄는 속죄되었고,

우리가 받을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그쳤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의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적 사단 마귀는 완전히 멸하여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의 허락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은

죄로 인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하여 성숙시키시는 훈련의 도구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을 불평하며 원망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 잘 견디어 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숙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훈련 목적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 단락 출처

 

 

◑적용2. 바알브올에 부속될까봐 조심해야

 

하나님께서는 그 비느하스를 가리켜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자',

'나를 위하여 질투한 자'라고 아예 별명까지 붙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똑같이 질투할 줄 아는 신자'란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자기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자기도 미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것을 두고 똑같이 질투할 줄 아는 신자라면

정말 하나님과 '호불호'가 같고 '한 편'인 것이 분명하며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공감대'가 완전히 일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중에 민수기 31장 16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금 이 본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은

브올 출신의 이방 선지자 발람이 계획했던 일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의 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발람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커녕

오히려 축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발람은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만드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교묘한 계책을 꾸며서 이스라엘을 패망시키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브올의 바알신',

즉 자기 고향의 우상신에게 빠져 들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의 그런 계책은 부분적으로 잘 맞아 떨어졌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게 되는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망에 이르게 했던 미혹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한 자'라고 불린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똑같은 것을 두고 똑같이 질투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바알 브올의 죄'에 넘어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기꺼이 앞장서서 순종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할 줄 아는 청년'이라면

자동적으로 이길 수 있는 미혹이 무엇이며 또한

동시에 자기도 절로 좋아하게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청년들은 '불신자와의 교제'에 휩쓸리지 말고

'교회중심으로 성도와 교통'하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웃하고 잘 사귀며 친하게 지내는 일이 어떻게 잘못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 단순하고 순수해 보이는 교제 속에

신자가 죄악으로 끌려 들어가는 유혹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앞 장들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지금 이스라엘이 모압 변경 부근 싯딤에 진을 치고

가나안 진군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어간이었는데,

이스라엘이나 모압이나 피차 서로 전쟁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연히 이스라엘과 모압의 평민들 사이는 서로 지나가다가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얼굴도 좀 익어지는 관계가 되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물론 그것만 해도 이미 간음죄를 저지른 것이 되었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상 숭배에까지 이르게 된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사건의 발단은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에 지금 큰 잔치가 있는데 놀러 오시지요."하고 초대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정말 귀가 솔깃해질 만한 일이었습니다.

평생 광야생활만 하면서 본 것이라고는 모래사막이요 먹은 것이라고는 만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와 기름진 먹거리가 풍성한 기회가 찾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평소에 얼굴도 알고 지내는 가까운 이웃 민족이 그처럼 좋은 자리에 정중히

초대해 주는데 그런 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오히려 큰 실례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초청을 받고 잔치에 참석했을 때부터

그들은 이미 암초의 바다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왜냐면 그 잔치는 보통 잔치가 아니라

그 모압의 바알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잔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젯밥을 "먹고" 난 후에 뒤이어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게" 된 것은 이미 정해진 식탁의 코스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의 대표적인 우상이었던 바알은 토지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알을 섬기던 이방 민족들은 그런 소위 '생산과 풍요의 신'을

즐겁게 해 준다는 구실로

그 우상 앞에서 온갖 음란한 짓을 제사라는 미명 아래 버젓이 저질렀습니다.

 

문자 그대로 먹고 마시고 벌거벗고 제멋대로 노는 것이

그런 우상을 섬기는 제사순서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난잡하게 노는 잔치란 것을 생전 처음 보는 일이었으므로

일단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음란한 분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식간에 압도해 버렸고

그 결과 그들 역시 함께 흥청망청 '뛰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발람이 획책했던 계교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간단히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두고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되고 말았다고 표현했습니다.

'부속되다'라는 말은 '결합하다, 딸려 붙다, 멍에에 걸리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점잖게 번역해서 '부속되다'이지 사실은 바알이라는 우상에게 완전히 빠져 들어가

'코를 꿰이게 된'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그 일에 앞장 선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처단하라고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잔치 자리에 초대받아 갔던 일이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사교적인 자리 같지만 실상은 이처럼

신자의 신앙을 위협하는 자리들이 오늘도 우리 주위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술 한 잔 나누어야 서로 말이 잘 통한다."라는 것은

소위 거래처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면 당장 그 상사의 눈밖에

나게 되어 있는 것이 직장생활하고 있는 우리 청년들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왜 그런 초대에 꼭 응해야 하고

그런 자리에서 스스로 맞장구를 쳐 주어야만 합니까?

 

"술 먹고 정신 몽롱할 때나 말이 통하고

맑은 정신 아래에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그런 사람과는 거래할 수 없다."라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상사가 권하는 술잔은 거절하더라도 평소에는

'주님을 대하듯이 육신의 상전을 정성껏 모시면'

오히려 회식 자리에서만 상사에게 아양을 떨고 기분 맞춰 주려 하는 불신 동료들보다

훨씬 더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의 형제자매들 쪽에 가까이 있지 않고

그처럼 그저 바알의 잔칫상의 초청에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바알브올에게 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회 부흥회를 하는 주말에도 불신 친구들과 영화관에 가는 것이 더 재미있는 사람,

주일 오후에 청년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오랜 만에 동창들을 만나

놀이동산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사람은

이미 마귀의 유혹에 '코가 꿰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미 영적으로는 '바알신' 앞에서 '모압 사람'들과 같이 '뛰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할 줄 아는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별로 나쁠 것 없어 보이는 사회적인 교제,

보통 사람들이 의례껏 함께 하는 불신자의 회중

- 사단은 오늘도 바로 그런 자리를 통하여 여러분들을

'바알브올에게 부속'시키려 하고 있음을 깨닫고

더욱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신앙의 선남선녀들 사이의 교제를 즐거워할 줄 아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 청년들은 '부도덕한 이성관계'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순결한 결혼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 정말 사람 사는 곳에서

가장 흔하고도 당연하기만 해 보이는 이것도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의 길로 넘어가는 문지방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오늘 본문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6~13절을 보십시오.

 

어떤 종류의 간음도 죄라고 여기지 않는 불신자들은 흔히

"사랑하는 것도 죄냐?"라고들 말합니다.

 

아마 여기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온 이스라엘 어떤 남자 역시

그런 배짱이었던 모양입니다.

 

미디안인은 아라비아 광야 쪽에 거주하던 유목민이었는데

아마 이 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모압 지경으로 이동해 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불신 민족이고 우상 숭배자들이었음에 분명한 백성에게 속한 여인을

그 이스라엘 남자가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지금 그러지 않아도 온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브올 사건으로 인하여

난리가 났을 때였습니다.

지금 막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해당 범죄자들이 처형을 당했습니다.

 

또 회중 가운데 염병이 돌아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이고,

그 때문에 백성들은 "회막 문에서 울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 사람은 버젓하게 이방 여인을 아예 진중에까지 데리고 와서

"형제"들 앞에서 보란 듯이 자기 장막으로 함께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익숙해지면 그 죄에 대한 자기 합리화 역시 더욱 당당해지게 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죄를 짓게 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방 여인과의 불신 결혼, 결혼 전의 부도덕한 관계,

혹은 일부다처의 죄였을지도 모를 그런 악한 일을

그 이스라엘 남자는 마치 '사랑하는 것도 죄냐?'라는 식으로

백주에 온 백성이 보고 있는 가운데 저질렀던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을 어쩌겠나?‘

라는 심정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말 한마디도 못하고

멍청하니 있을 때에 오직 한 사람만 즉각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엘르아살의 아들, 제사장 아론의 손자뻘 되는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일어나 그 장막에 들어가서 그 남녀를 다짜고짜 찔러 죽였던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너무 심하게 행동했다고 혹시 생각되는 분이 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에나 오늘날의 현대인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의 그와 같은 행동을 가리켜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한" 행위라고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그 비느하스가

그대로 대신 발휘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더 이상 죄짓지 않도록 막았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징벌 역시 거기서 끝나게 했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바로 그런 거룩한 질투심을 발한 비느하스와 그의 후손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의 언약 또한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불신결혼을 두고서도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뭘요?"라고

아주 당당하게 대꾸합니다.

 

혼전관계를 가지면서도 "나중에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어때요?"라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소리들이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부모들까지도 "요즘 애들 저희들끼리 좋아서 하는 것을 어쩌겠습니까?"하는 말로

자기 자식을 변명해 주는 것이

마치 자식을 잘 이해해 주는 길인 양 여기는 것이 이 시대의 조류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죄가 될 수 없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다 아름답게만 보이고,

그런 관계에서 야기될 수 있는 죄악을 경고하는 목사들은

아예 시대에 뒤떨어지는 속 좁은 사람으로 보이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무서운 질투를 유발하는 짓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 어떤 '진한 스킨십'도 해서는 안 되며

특히 이 '강서성전 1만 평' 구역 안에서는 손끝 하나도 닿아서는 안 되지만,

이 규칙을 지키면서, 제발 우리 임마누엘 청년들끼리 자주 만나고

많이 사귀고 더 알콩달콩하고 성숙하게 성경적인 연애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서는 마치 베드로전서 4:8절의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씀을

완전히 거꾸로 곡해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란 미명 아래 온갖 음행의 죄를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도덕하고 불신앙적인 사랑은 오직 '바알브올 앞에서의 음란한 제사'에

자기 몸과 마음이 함께 빠져 들어가 결국 신앙에 대하여서까지

완전히 파선하게 될 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간음의 죄에 빠지지 말고

'혼전의 순결'과 '결혼 후의 정조'를 지킴으로써

진정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모든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청년들은 '사회적인 성공'에 집착하지 말고

'영적으로 성별된 신앙생활'을 추구해야 합니다.

 

간음의 죄를 담대하게 짓다가 한 자리에서 함께 죽었던 그 두 남녀를 두고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은 또 한 가지 의미 있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4~18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그 죽은 두 남녀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했다는 사실입니다.

 

남자는, 우리나라 말 번역에 조금 애매하게 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의 한 "족장"의 아들이었고,

그 여자는 미디안 종족의 한 "두령"의 딸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로 볼 때 양자가 다, 속된 표현을 빌자면,

'뼈대 있는 가문'에 속한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부모들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 두 사람의 관계를 피차 묵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서로가 사회적으로 유력한 가문을 사돈으로 맞게 되어서 잘 되었다고

속으로는 좋아하고들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불신자인 여자 집안 쪽에서야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의 한 종족의 족장까지 되는 사람이

아버지로서 그 정도밖에 생각 못했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남녀는 사회적 지위는 비슷한 수준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영적인 지위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미디안 족속의 차이는 문자 그대로

'극에서 극'이요 '물과 기름'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이 점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미디안인들을 박해하며 그들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미디안이란 그 무엇보다도 "브올의 일"

즉 우상 숭배에 빠져들도록 유혹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미디안이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계속 싸워서 무찔러야 할 상대이지

무슨 사회적 조건이 좋고 출세길이 환히 보인다고 해서

사돈을 맺고 어쩌고 할 관계는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상류사회 출신이고

자기 아들의 세상적 성공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해서 통혼을 한 것은

결국 "너희를 유혹하는" 손길에 제 발로 끌려 들어간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경책하신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오로지 '사회적 성공 지향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자녀일수록

사람을 대하고 이성친구를 사귈 때, 아니 교회의 성도들을 만날 때조차

은연중에 상대방의 사회적 배경을 먼저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같은 교회의 청년회에 있어도

바깥 사회에서의 수준이 자기와 비슷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면

자기 마음속으로는 그 형제자매와 아예 담을 쌓아 놓고 삽니다.

 

이 사람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이 사람의 회사에서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등등

소위 '사회적 스팩'이라는 것을

'같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거룩한 신자'라는 사실보다

항상 더 앞세워 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작 결혼이 닥치게 되면

더욱 그 문제에 대하여 예민해질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청년회 담당 교역자 앞에서 말할 때야

"그저 신앙 좋은 사람만 만나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면서도,

막상 당하게 되면 상대방의 인물, 출신 학교, 직장, 집안 배경은 두말할 것도 없고

예단비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문제까지,

그야말로 불신자 뺨칠 정도로 꼼꼼히 따져 보게 될 것이 뻔한 일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을 살면서

신앙생활의 원수인 '미디안'을 이기기는커녕

항상 도로 '유혹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처럼 미디안 족속을 질투할 줄 아는' 청년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공병'에 걸려서 안절부절 못하는 실업자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늘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신앙인'이 되기를 부단히 힘써야 합니다.

 

우리 청년들은 '출세지향'에 자기 생명 전부를 배팅해 버리는 인생 노름꾼이 아니라,

'경건생활'로써 불신사회와 자신을 성별하는 가운데

'예수 목적'으로써 그 어떤 불신 청년들보다 더 큰 '땅의 기업'을

축복으로 받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 하면서도 '사회적인 잣대'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적인 성공'에만 집착하다가

결국 '미디안 두령의 딸'과 짝하는 배교에 빠지지 않도록,

매사에 신앙생활에 최우선을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격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충만히 입는 경건생활에서

날마다 진보하며 성숙하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몇 년 전에 '있을 때 잘해'라는 제목의 아침 드라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드라마는 전혀 보지 않지만 워낙 유명해진 드라마의

대사들은 절로 듣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 '있을 때 잘해'에서도 나왔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남편 김윤석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아내인 하히라에게 들통이 나게 됩니다.

 

하히라는 남편에게 당장 이혼을 요구하는데,

김윤석은 이혼만은 못해 주겠다고 하면서 하히라를 보고

'아내와 엄마와 며느리의 자리'를 지키라고 하면서 대판 싸움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하리라가 "이제 그런 아내니 엄마니 하는 것은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어.

별것 아닌 기집애하고 불륜에 빠진 남편에게는 눈꼽만치도 미련도 없고

애착도 안 가져."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김윤석은 그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모든 아내들의

속을 뒤집어 놓은 유명한 대사를 내뱉습니다.

 

"불륜, 불륜 하지 마.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저급하게 불륜이니 외도니 하면서 내 사랑을 모독하고 격하시키지 말란 말이야.“

라고 한 것입니다.

 

하히라가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윤석은 자신의 불륜을 사랑이라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모독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남편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듣게 된 하히라와 그녀와 똑같은 입장으로 감정이입된 상태에서

그 드라마를 보고 있던 대한민국의 모든 여자들은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분통 터지고 억장 무너질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너는 오직 네 하나님만을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나는 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질투하는 신이다.‘

라고 천명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의 '사교적인 교제'를 두고 '배교'라고 모욕하지 마세요.

우리끼리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뿐인데

'불륜'이니 '간음'이니 하는 저급한 말로 격하시키지 마세요.

 

제 딴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사회에서 성공'하자고 열심히 애를 쓰고 있는데

그런 것을 보고 '미디안의 딸의 유혹에 빠지는 죄악'이라고 함부로 정죄하지 마세요.“

라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이 뒤집어지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들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세상과 짝'하는 음행을 버젓이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내 사랑을 불륜이라고 매도하지 말라.'고, '이런 일을 두고

하나님이 나한테 질투해서는 안 된다.'고 되려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정말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신성모독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은 질투심으로 질투하는 신자'라면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좋아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진정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할 줄 아는 비느하스'들이라면

영적 기호와 성향과 호불호가 하나님과 똑같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질투할 줄 아는 신앙인'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처럼 '당신의 질투심을 가지고 세상의 불의와 정욕과 배교를 멀리하며

정죄할 줄 아는 신자'를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로 지금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는 신자'야말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그야말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교의 모임들, 그저 달콤하게만 여겨지는 사랑이라는 말,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성공에 대한 욕구 – 아무리 보아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아니 당연한 일인 것처럼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심'을 공감하고 있는 신자에게는 바로 그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그것들을 하나님과 똑같이 미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의 영혼과 생명을 죄악으로 유혹하고 있는

'바알브올에 부속된 것'들에 대하여 민감한 경각심을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과 똑같은 질투심을 가지고 악을 미워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함으로써 선에 속하는' 청년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 단락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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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볼 문제 : 모압과 미디안의 관계

 

고스비 사건 직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디안을 정복하라고 명했습니다.

그것은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압과 연합하여 바알브올 사건을 주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범죄하게 했고

고스비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미디안은 이스라엘 백성을 범죄케 하고 죽게 한 족속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진노케 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가 단절되게 한 족속입니다.

 

이 명령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 때 그들 가운데 함께 있던 발람도 죽임을 당합니다 (31:1-54).

 

하나님이 미디안을 공격하여 정복하라고 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범죄로부터 지키기 위함입니다.

언약 백성 백성을 사랑하는 의지의 발로입니다.

 

이는 이방 족속에 대한 공의를 실현 시키시는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백성을 괴롭힌 만큼 괴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을 괴롭게 자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한편 바알브올 사건을 일으킨 모압 족속에 대해서는 정복 명령이 없습니다.

모압 족속에게 긍휼을 베푼 것은 본문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하나님이 에돔 족속에 대하심과 같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네아 행진하여 에돔 족속의 땅 왕의 대로 로 행할려고 할 때

에돔 왕이 그 길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에돔과 싸우지 말고 돌아가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에돔이 형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압 족속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롯이 소돔성에서 멸망하게 되었을 때도 아브라함이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하여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모압 족속이 정복 당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기뻐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여 모압 족속에게 긍휼을 베푼 것 같습니다 (창19:29,37, 신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