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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27장 새 시대의 3대 소망

LNCK 2022. 10. 4. 20:35


◈새 시대의 3대 소망          민27장         2017.07.16.출처

<27장의 개요>
1~11절은 여자 상속법 제정에 대해, 
12-14절은 모세의 임종 예고,                    ☞27:12~23 모세가 가졌던 목자의 심정

15-23절은 모세의 지도권 위탁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
 
민수기 1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1차 인구조사가 기록되어 있고, 
민26장에는 제2차 인구조사가 시행되어 그 결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과 26장의 인구조사가 시행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었는데,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남자 중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가 
싸울만한 사람을 계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장의 인구조사와 26장의 인구조사는 유사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습니다
먼저 차이점은 5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첫째, 인구조사를 시행한 시기의 차이입니다. 
제1차 인구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지 둘째 해에 시행된 것이고, 
제2차 인구조사는 출애굽한지 40년이 되던 해 시행한 인구조사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1장과 26장의 인구조사에는 38년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2) 둘째, 인구조사의 대상이 차이가 있습니다. 
1장의 1차 인구조사는 광야에 나온 출애굽 1세대 백성들을 계수한 인구조사이고, 
26장의 2차 인구조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출애굽 2세대 백성들을 
계수한 것입니다.

3) 셋째, 인구조사를 실시한 장소도 서로 다릅니다. 
1차 인구조사는 시내산에서 시행했고, 
2차 인구조사는 여리고 맞은 편 요단 강가에 있는 모압 평지에서 시행했습니다. 
가나안 땅 입성 직전에 행한 인구조사 입니다. 

4) 넷째, 인구조사의 목적도 다릅니다. 
1장에서는 단순히 싸움에 나갈만한 군인을 계수해 보라는 것이었지만, 
26장에서는 전쟁에 나갈 군인의 수를 알아보기 위함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에 인구수에 따라 지파별로 땅을 분배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5) 다섯째, 인구조사의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의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었죠. 
1장에서는 인구조사에 제외된 사람이 없었던 반면, 
26장에서는 포함시켜선 안 될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구조사에 계수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들 중에는 반역을 주도했던 다단과 아비람, 족장 250명도 있고, 
유다의 아들인 에르와 오난,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계수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머릿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의 문제이기에 
이들이 제외된 명단에 포함된다는 것은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유다로부터 메시아를 보내려는 것이 계획이셨기 때문에 
에르와 오난이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자 이들을 제외할 사람들로 정하신 것입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아, 메시아의 계보를 끊으려고 했기에 이들을 죽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베레스를 통해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에르와 오난은 메시아의 계보를 끊으려 했던 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인구조사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사점도 있었습니다. 
유사점은 1장의 제1차 인구조사와 26장의 제2차 인구조사의 결과가 
거의 비슷한 수치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민1:46절에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603,550명이었더라”
레위인 22,000명을 포함하면 총 625,550명이 됩니다.

제2차 인구조사의 결과는 26:51절에 “601,730명이었더라”
레위인 23,000명을 포함하면 624,730명입니다. 

1차 인구조사와 2차 인구조사의 차이가 단지 820명밖에 나지 않습니다. 
38년의 시간차가 있었지만 인구가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민25장의 싯딤 사건 이후 24,000명이 염병으로 죽은 것을 감안하면 
제2차 인구조사는 1차 때와 비교해 봤을 때 
거의 그 수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만 출애굽 제1세대가 제2세대로 바뀐 것뿐이었습니다. 
20세 이상의 남자만 계수한 것이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면 거의 200만 명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의 정탐꾼 사건이후 40년 세월을 광야에서 낭비한 셈인데도 
인구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두 가지 분명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1) 첫째는 죄는 40년 가까이 시간낭비를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인구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은 어찌 보면 낭비된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둘째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택하신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죄는 깊고, 하나님의 은혜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26장에 제2차 인구조사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 놓인 과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성경 여호수아 시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이 순서상 신명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직전에 출애굽의 제2세대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다시 교육한 설교이기에 
이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복전쟁을 할 것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던 제1세대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라 여기까지 와서 죽게 되었노라고, 
애굽이 더 좋았다고 하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다고 한탄하며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수기 26장 이후에 전개되는 말씀들은 
1세대 사람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2세대 사람들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거나 절망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세대인 제2세대 백성들에게는 소망과 승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세대 사람들로 신세대들을 향해 걱정을 참 많이 합니다. 
대한민국이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만, 
신세대는 나라를 망치지는 않을까 심히 우려하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세대가 오히려 구세대보다 더 잘 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 교회를 향해서도 염려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기우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망을 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소망의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출애굽 1세대는 지나갔고, 신세대(2세대)가 등장했기 때문
 
구세대 백성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고, 
노예 기질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1세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광야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은 제2세대가 
가나안 땅을 앞두고 있는 것입니다.

신세대는 소망이 있는 세대입니다. 레위 지파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구세대도 약 60만 명이었고, 신세대도 그와 숫자가 비슷했습니다. 

전1:4절에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세대는 지나가게 되어 있지만, 땅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지나가고 싶지 않아도 세대는 다 지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1세대 사람들에 대해 
많은 근심을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95:10~11절에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하나님은 40년을 근심하셨습니다. 1세대 사람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1세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근심시켰던 세대였습니다.

그러면 왜 구세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히3:12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불신앙의 마음, 악한 마음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결국 마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도 마음으로 믿는 것이고 
믿지 않는 것도 마음으로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세대 사람들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들에게 가나안 땅의 안식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 이런 문제에 관해서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았던 구세대가 
반드시 신세대보다 앞서나갔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의 문제는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믿음이 없을 수 있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아도 악심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멸치 않으셨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역사 속에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주변 강대국들인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 
얼마든지 국권을 빼앗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마 지금 한국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국권이 다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한민국을 소멸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나라를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22~23절에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구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죽었어도 
신세대에 그에 못지않은 인구수를 유지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제2세대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신세대들은, 
자라면서 특별히 재밌는 놀잇거리가 있거나 
흥미로운 일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컴퓨터 게임이 있었겠습니까? 오락실이 있었겠습니까? 
스포츠가 있었겠습니까? 그저 어려서부터 광야에서 뛰어 놀며 
혹시나 원수들이 쳐들어오면 그들과 전쟁을 하며 험악한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앞으로 도래할 신세대를 사랑하셔서 주신 
하나님의 훈련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세대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사람들이고 
인구수에 따라서 가나안 땅을 적절히 분배해서 갖게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막강한 군대가 되어 신세대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세대로 인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가 어둡고 여러 격랑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자라나는 신세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세대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 
신세대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믿지 않는 악심을 물려줘서는 결코 안 됩니다. 신세대를 믿어줘야 합니다. 
새로운 세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버릇이 없고 어른 공경할 줄도 모른다며 
타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작정 그렇게 말하지 말고 신세대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믿음의 다음세대가 될 수 있도록 키워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복된 신세대가 될 수 있도록 믿음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국가가 번영하는 시대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대한민국에도 믿음의 신세대를 일으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이들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정신, 창의성을 갖고 있었죠 (슬로브핫의 딸들)
 
2번째 인구조사의 목적 중 하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취할 땅을 
미리 분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각 지파와 종족과 가문을 따라 분배하되, 지역은 제비뽑기로 결정했죠. 26:52-56

그런데 가나안 땅 분배에서, 므낫세 지파에 속한 슬로브핫 가정은 빠졌습니다. 
슬로브핫은 요셉의 7대손으로서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광야에서 죽었고, 그에게는 딸만 5명이 있었습니다. 
슬로브핫은 광야에서 죽어서 인구조사에서 빠졌기 때문에 
슬로브핫 딸들은 재산을 분배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세대는 구세대와 사고방식이 달랐습니다. 
민26:33절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라 
그 딸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슬로브핫이라는 사람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본문 민27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토지 상속법에는 딸에게 줄 토지가 없었습니다. 
모두 아들에게 상속하도록 되어 있었고, 
장자는 차자에 비해 두 배의 땅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장남에게는 두 배의 땅을 상속하게 했을까요? 
오늘날 대한민국 민법에는 장남이나 차남이나 딸이나 모두 똑같이 
한 배씩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장남에게 두 배의 유산을 물려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장남이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두 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법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21:17절에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자는 기력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두 배를 준 것입니다. 
아버지가 장자를 낳고 나도 이제 자식이 생겼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두 배를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민26장에서 가나안 땅을 분배할 것을 고려해 인구조사를 할 때도 
딸들을 계수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땅을 분할할 때 딸들에게 돌아갈 땅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므낫세 지파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구세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이들은 모세, 엘르아살과 족장들과 온 회중을 모아놓고 
토지 상속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아버지 슬로브핫은 이미 광야에서 죽었고 고라의 반역에도 가담하지 않았었는데, 
우리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땅을 상속받지 못한다면 
아버지의 이름과 땅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우리 아버지는 땅을 분배받을 자격이 있는데,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가 땅을 상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역시 신세대의 생각이 합리적이고 신선합니다. 
이것은 구세대의 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슬로브핫의 딸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법을 제정해 달라고 과감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의 문제제기가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들의 요구가 합당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할 때 합리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작정 아무렇게나 기도한다고 다 들어주시는 불합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합리적인 분이시고, 기도에 합리적으로 응답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한 문제를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판단하시고 
새로운 토지 상속법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보호하려는 가정적인 이유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하나님은 사회 전체가 개선되는 새로운 법을 제정해 주신 것입니다.

‘만약 땅을 상속할 아들이 없거든 딸에게 주고, 딸도 없거든 형제들에게 주고, 
형제도 없거든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주고, 
아버지의 형제들도 없거든 가장 가까운 친족들에게 땅을 상속하라’는 
새로운 친족 토지 상속법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도 않았고, 
난공불락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이미 내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죠.

가나안 땅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아직 요단강도 건너지 않았지만 
추호도 의심의 여지없이 굳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구세대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올라가서 취하라고 해도 
이들은 올라가서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믿지 못해서 그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줘도 먹지 못한 사람들이 1세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세대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새로운 정신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기보다 
합리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신세대들의 사고가 이렇게 신선하고 창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36장에 보면 슬로브핫의 딸들이 속해 있는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또 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딸들이 땅을 상속 받은 것까지는 좋은데, 딸들이 다른 지파와 결혼을 하면 
결과적으로 므낫세 지파의 땅이 줄어들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제기도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시고 
또 다시 법을 개정해 주셨습니다. 

민36:6절에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같은 지파 안에서 결혼을 하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느냐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세대가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환경을 마련해 줘야 합니다. 

우리가 신세대를 신뢰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 
새로운 사고를 통해 소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절대로 신세대에게 악심을 전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세대에게 좋은 조언을 많이 해 주고 용기를 주고 
믿음 안에서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법의 합리성이 떨어지면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신세대가 새로운 정신을 갖게 되면 교회도 소망이 있고, 국가도 소망이 있게 됩니다.

 
◑3.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죄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렀습니다.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불평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가리키라고 말씀하셨는데, 
두 번이나 반석을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모세는 비록 이 땅의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늘의 가나안 땅에는 들어갔습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마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본 베드로는 깜짝 놀라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자고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모세는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세와 여호수아의 리더십이 충돌해서 티격태격했을 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죽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옳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민27:16~17절에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비난하고 돌로 쳐 죽이려 했던 회중들을 
징계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자의 마음을 가진 자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도록, 
좋은 지도자를 세워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참된 목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들을 인도할 지도자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예비하셨습니다. 

물론 모세와 여호수아는 같은 지도자라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사람, 책의 사람이고, 
여호수아는 칼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계시를 받아서 책을 저술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야 했기에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났습니다. 
하나님께 물으면 음성으로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받아 적어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대면해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민27:21절에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 
엘르아살에게는 판결흉패라는 에봇 옷 속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여호수아에게 일러주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가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대하실 때 이렇게 차이를 두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미 주셔야 할 계시들을 다 주셨기 때문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따로 계시를 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모세와 차이를 두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율법에 대한 계시를 더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수아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1: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직접 물을 것이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책을 부지런히 읽고 그대로 순종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없는 내용은 엘르아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이미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있으므로, 
이 말씀을 늘 가까이에 두고 읽어서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며 살면 됩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만날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더 이상 주지 않으십니다. 
‘규범적 계시’는 이미 다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책의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는 칼의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새로운 지도자를 맞아 소망이 있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과거 구세대는 모두 죽었지만, 신약시대 최고의 지도자가 계십니다. 
다윗의 뿌리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의 지도자이십니다.

겔34:23절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다윗이 죽은 지 400년 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종 다윗을 세워 한 목자가 되게 하리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문자 그대로 다윗 왕이 아니라 
다윗의 뿌리에서 나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도자요, 대목자장이십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며 교회를 돌보는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새로운 세대가 양성되고,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목자를 맞을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반드시 소망이 넘치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 기도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적용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상반된 응답”    -이 단락 출처-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는 은혜스럽게 허락
오늘 본문에는 2가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첫 번째는 슬로브핫 딸들의 탄원이야기입니다(1-11절). 
아버지의 유산 상속에 대한 탄원입니다. 
딸들인 자신들에게도 아버지 기업을 상속해달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엄격한 가부장 부족 문화권 시대에서는 파격적인 제안이고, 요청이었습니다. 
당시로는 분명 무리한 요구가 맞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딸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딸들의 탄원에 넉넉히 응답해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7

▲모세에게는 매정하게 거절
이처럼 첫 번째가 넉넉한 은혜의 상속 이야기(1-11절)였다면, 
두 번째 이야기는 좀 섭섭한 지도자의 승계 이야기(12-2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12~13

다시 말해 “모세야, 너는 여기까지이다. 네 죽음이 멀지 않았으니, 
네 자리를 여호수아에게 승계하거라.” 

여러분, 이 때 모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본문은 모세가 그저 덤덤하게 하나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죠. 

하지만 실은 모세는 몹시 탄식합니다. 몸부림을 합니다. 
신3:23-27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는 주님의 크심과 권능을 주님의 종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신이 주님께서 권능으로 하신 것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요단 저쪽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들 때문에 나에게 진노하셔서, 
나의 간구를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
너는 이 요단 강을 건너가지 못할 것이니....'(신3:23-27 새번역)

“하나님,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이라도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던 저 약속의 땅을 제 발로 밟게 해주십시오. 
단 한 번만이라도...제발...” 그렇게 모세는 절박합니다. 

간절히 부르짖으며 탄식하지만,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안 돼. 여기까지야. 더 이상 말하지 말아라.”

슬로브핫 딸들의 조금은 과한, 무리한 그 탄원에는 응답하신 그 은혜의 하나님은 
모세의 탄원에는 섭섭하리만큼 냉정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모세의 탄원이 그렇게 무리한 탄원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찌 보면 충분히 들어줄만한 요청인데도 말입니다. 
40년을 하나님만을 좇아 한 길만 걸어온 모세인데도 말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죠.

우리 신앙의 섭섭함과 실망, 부대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때는 큰 은혜와 긍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때로는 그토록 묵묵부답이실까? 
왜 때로는 그토록 매정하다 느낄 만큼 나의 절실한 사정에 외면하시는 것일까? 

우리는 그토록 애타게 매달려보지만 
때로는 야속한 하나님으로 느껴져 실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이건 왜일까? 
왜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십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이 두 성품을 만나갑니다. 

응답하시는 분도 내 하나님이고, 묵묵부답처럼 느껴지는 분도 내 하나님입니다! 
내 정성과 열심히 커서 응답을 받아낸 것도 아니고, 
내 정성이 부족하고 내 죄가 커서 응답을 받지 못함도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다 이해 못합니다. 
응답과 역사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고 하나님의 몫일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출애굽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인도하셨듯이 말입니다. 

민수기 말씀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출애굽은 나 하나님, 내가 이끈다.’ 아닙니까?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가 우리의 열심과 조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눈물겨운 노력과 수고로 
하나님을 설득할 수도, 조정할 수 도 없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목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탄식하는 대로 다 받아내는 것에 있지 않다는 거죠. 
단지 하나님의 이끄심과 허락하심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우리 수준에서는 이해가 안 되고, 섭섭할 때가 있지만, 
때로는 실망스러워 낙심하고 밤잠을 설치고 가슴을 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죽기까지 우리에게 은혜를 나타내셨던,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내게 살라고 허락하신 이 상황을, 
내게 살라고 허락하신 이 오늘의 현실을 
기꺼이 내 몫의 걸음을 걸어내며 살아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보다 더 위대한 신앙은 없습니다. 
분명, 기필코, 삼 일 만에 다시 살리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뒤따라가며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신앙입니다(막10:34).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들을 십자가에 달기까지 하신, 
아니 피범벅이 되신 십자가의 그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큰 응답과 사랑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분명 전부를 다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십자가 죽음 말고, 
그것 말고 더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더 해줘야만, 우리는 성에 찰 수 있겠습니까? 더 무엇을..?

기도/ 하나님,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우리이지만
실은 실망과 체념에 젖어 있곤 하는 우리입니다.
죽도록 열심히 살아도 별 볼일 없는 삶을 겨우 유지할 때가 많은 못난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인생을 붙잡고, 함께 걸어주시는,
기필코 삼 일 만에 다시 살리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내게 살라고 허락하신 오늘과 이 현실을 기꺼이 살아내는 우리 되게 해주옵소서.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그 은혜 하나면 얼마든지 넉넉히 살아낼 수 있음을,
그 십자가 복음의 은혜가 실로 그만큼 엄청난 은혜요, 사랑이요, 위로요, 용기요, 
소망임을 기억하는 하루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