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2

LNCK 2022. 10. 6. 17:04

 

[Ep2.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2                            -P1-     

 

최광 선교사의 중국에서 북한 선교 간증

※북한 선교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역에도 도움이 되는 간증입니다.

 

◑2장  찢어진 북쪽하늘

♣사역비가 떨어지다 (길림 사역)

조용한 방안에 녹음기에서 나오는 속독사의 성경 읽는 소리만 단조롭게 들린다.
그래도 요즘은 모두들 제법 알아듣는다. 

처음에는 '저게 먼 외국어인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녹음기만 바라보던 
이들이, 이제는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는 열심히 성경구절을 줍는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따라 다들 산만했다. 
무디 형제는 벌써부터 게슴츠레진 눈을 하고 열심히 딴 생각에 잠겨 있다. 

그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성경 구절 낭독을 좇아가느라 정신을 집중하는 
다른 형제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아까부터 참고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디형제가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이어 기철 형제의 머리도, 기다렸다는 듯이 끄덕거렸다. 

"딱딱!" 두 손바닥에 힘을 주어 손뼉을 쳤다. 
끄덕거리던 머리 둘이 후다닥 원위치로 돌아갔다. 

저쪽 구석에 앉아 있는 익두 형제를 보니, 꼼짝없이 앉아 있기는 잘했다. 
그러나 통독하는 걸 보니, 그도 영~ 아니다. 

녹음기에서 나오는 소리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책장을 팍팍 넘기면서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그래도 그림은 재미있는지 
성경책에 간간이 나오는 삽화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철 형제가 멍한 눈빛으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그러는 그의 행동이 몹시 내 눈에 거슬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그는, 슬며시 일어나 화장실로 가버렸다. 
화장실은 지겨우면 도망가는 대피소가 돼버렸다. 

오전 통독 시간이 끝나고 점심 휴식시간이 되자 
다들 밥을 먹기 바쁘게 침실로 들어갔다.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자다가, 오후 통독 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일어났다. 
사실 이들에게 사역장의 규칙과 일과는 너무도 힘든 것이었다. 
술과 담배를 유일한 낙으로 살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둘 다 끊으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혹한 짓이다. 

또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에게, 한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서 
하루 8 시간씩 성경책을 읽으라는 것도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반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나는 담배를 구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오직 광호 선생과 조선족 길호 형제만 
시장을 보게 했다. 

술은 몰라도, 담배는 갑자기 피울 수 없게 되면 매우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참다 못해 몇몇 형제들은 나에게 항의도 했다. 

'선생, 성경 어디에 담배 피우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습니까? 
담배 피우게 해주시오!' 

어떤 형제는 밤에 다른 형제들 몰래 내 방으로 찾아와 애걸하기도 했다. 
'선생님, 아니 선교사님, 담배 한 대만 딱 피우게 해 주시오. 정말 한이 없을 것 
같소. 안 그럼 나 이 담배 때문에 여기 더 있을 것 같지 못하오!'

어떤 형제는 (금연 때문에) 몇 번씩 사역장을 나가겠다고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 

'이들이 정말 가버리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지만 
나는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주님만 바라보며 나아갔다. 

▲사역을 시작하고서 주님께 감사한 것이 너무도 많았다. 
중국에 오면서 내가 가지고 온 돈은,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남은 4만원이 전부였다. 

신학생 신분으로 선교하러 들어오니, 후원받을 마땅한 교회나 단체가 없었다. 
아내와 4명의 자녀, 연로하신 어머니는 주님께 맡기고 왔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버렸다. 

졸업준비 위원장 구창한 전도사와 함께 총신대 김의환 총장님께 
인사 드리러 갔을 때였다. 총장님께서 물으셨다. '후원금은 확보되었습니까?' 

'아니요. 하나님만 믿고 갑니다! 비행기표 밖에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사셨던 총장님은, 이해가 안 되시는지 다시 다그쳐 물으셨다. 
'한국에 남은 가족들 생계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갑니다!' 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집에는 쌀 한 포대와 삼만원 밖에 남겨두지 못했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악한 자 라는 성경 말씀을 자네 아나?'
총장님은 오랜 미국생활의 습관으로 '올 스탠바이 선교'를 말씀하셨다. 

'총장님, 한국 선교사들은 많이들 말씀만 붙잡고 
주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 갑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너는 전대나 두 벌 옷도 가지지 말고 
오직 내가 주는 권능만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말씀을 의지하고 갑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고 내 마음속으로 '신구약 어디를 살펴보아도 
돈 5천만원, 1억 준비해서 선교지로 떠나란 말씀은 없습니다. 
오직 주의 권세, 주의 권능만 가지고 가라는 말씀을 붙잡고 갑니다!'
라고 내 마음 속으로 혼자 말씀드렸다. 

총장님은 내 말을 들으시고는, 그 자리에서 작은 기도 모임을 가진 후 
우리 가족에게 매달 20만원씩 보내주기로 약속하셨다. 

다음날 중국으로 떠나면서, 나의 가진 것 다 드리겠다고 기도 하는데 
하나님께 참으로 죄송했다. 과거에 그 많던 돈,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 

다 쓰고, 이제 하나님께 드릴 돈이 겨우 4만원밖에 없다니... 

그래서 다시 기도 하며 하나님께 고백했다. 
'하나님 제 생명도 드리겠습니다.' 

며칠이 되지 않아 사역장 사역비로 공급받은 한 달 생활비가 다 떨어져버렸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 같이 외롭고 답답한 마음에 
마지막 남은 차비만 가지고 장춘으로 박 베드로 선교사를 찾아갔다. 

'지금 사역비가 떨어졌습니다. 한 달 식사비 천오백 위안 정도만 
해결해 주실 수 없습니까?' 

하지만 선교사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나한테 돈 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선교사님도 아시다시피, 나는 가진 돈도 없고, 또 나를 포함해 누구든지 
사람 바라보지 말고,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해결 받으세요!' 

나는 터덜터덜 사역장으로 돌아와 침대에 푹 쓰러졌다. 
가뜩이나 학생들 때문에 힘든데, 따뜻한 말은 못해줄 망정 
이렇듯 매정하게 나오니.. 외롭고 서러워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 넓은 중국 땅에, 내가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주님만이 내 마음을 아실 뿐이었다. 

'주님~' 나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울면서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밖이 환해져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형제들을 깨우고, 다시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금식합시다!'

오전 통독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야야 임마 좀 천천히 먹어! 먹다 죽은 귀신 붙었니?' 
'아이 형님은 자기 몫이나 다 먹고 남의 것 넘보슈!'

'이 새끼는 먹을 때만 왜 이렇게 열심이야?'
사역장에서 제일 즐거운 시간이 식사 시간이었다. 

형제들은 아무리 언잖은 일이 생겨도, 밥 먹을 때 만큼은 언제나 즐거웠다. 
'아~ 내가 이거 성경통독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 놈의 이밥 때문에 참는다이.' 
밥 먹을 때마다 무디 형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형제들의 북한 말을 재미있게 들으며 조용히 밥을 먹는 내게 
무디 형제가 불쑥 말을 걸었다. '선상님, 아니 아니 선교사님이라고 불러야지? 
선교사님, 선교사는 뭘 하는 사람이요?' 

갑자기 나는 대답이 궁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게요.. 어... '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가 내 말을 낚아챘다. 

'기왕 이렇게 사람들을 붙들어 매놓고 통독 이라는 것을 시키는 사람이요?
야 나는 통독이라는 게 왜 이캐 힘든지 모르겠슴다. 
녹음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통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는단 말이요.' 

무디 형제는 순한 눈을 잔뜩 크게 뜨고, 미안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 예~ 들리지 않아도 그냥 들으면 들릴 때가 있어요.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들어보세요!' 

'근데 선교사님은 그 미국 놈을 봤시요?'
'예 봤습니다.' 

'야~ 그놈들이 어캐 생겼습대까?
선교사님은 아오? 우리 북조선이 미국 놈들과 그 뭐야 전쟁을 한다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나라가 그 미국 놈들을 단숨에 해제낄 겁니다. 이걸 암까?' 

그는 마치 성스러운 낭독을 하듯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아까부터 속에서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으며 대답했다. 
'아 예 압니다. 압니다.' 

무디형제가 얼굴을 활짝 펴더니, 다른 형제들을 둘러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야 임마들아, 거 보라이, 내가 뭐랬냐?
선교사님도 이거 안다고 그랬지? 내 말이 맞지?' 

갑자기 형제들의 눈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정말이에요?' 하는 형제들의 눈빛들 앞에서 
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선교사님, 근데 고 미국놈 새끼들은 왜 우리 북조선을 그렇게 못살게 굽니까?
왜 자꾸 우리끼리 조용히 살게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자꾸만 경제봉쇄도 하고, 무기도 보내고 해서, 우리나라를 이케 못 살게 합네까?'
 
'거 미국 놈들이 미국에 있던 인디언들의 머리가죽을 몽땅 벗겨서 팔아가지고 
지금 저렇게 잘 산다던데 정말입니까?' 질문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질문을 들어보니, 이 형제들에게는 내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저녁통독을 마치고 기도가 끝나자, 사역장의 분위기가 활짝 밝아졌다. 
'어휴 살았다. 1분만 더 늦게 끝나면 나 죽는 줄 알았을기다.' 라며
온몸이 찢어져라 기지개를 켜던 무디 형제가 탄성을 지른다. 
다른 형제들도 일어나 졸래 졸래 침실로 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형제들에게 선포했다. 
'이제부터 삼 일 동안 금식합시다!'

내 말이 떨어지자, 순간 사역장의 분위기가 확 굳어졌다. 
나가려고 방문 손잡이를 잡았던 칼빈 형제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권능형제는 반쯤 일어나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선생님, 쌀이 떨어졌시오? 돈이 떨어진 거 아닙니까? 
정말, 진짜? 선생님..' 사방에서 질문이 터졌나왔다. 

'아이 선생님 지금 무슨 말을 합니까? 
선생님이 한번 우리 처지에서 생각해 보슈, 우리가 여기 왜 왔는지 압니까? 
어떻하면 배곯지 않고 살까 하고.. 이 먼데 까지 와서 개고생 하는데 
지금 우리 보고 밥을 먹지 말자는 겁니까? 
그것도 하루도 아니고 삼일씩이나 먹지 말라는 겁니까?' 

무디 형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주 형제도 욱 하고 한마디 했다. 
'에이 씨, 생전 들어도 못 보고, 보지도 못했던 성경이라는 책만 죽자고 읽히더니 
이제와서는 밥도 먹지 말라는 겁니까, 말이 됩니까?' 

익두 형제도 옆에서 신경질적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아이 씨~ 선생님은 한국사람 아닙니까, 한국에 전화라도 한번 해 보셔요. 
그래도 정 안 된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전화라도 한번 해볼 수 밖에... 
근데 이게 뭡니까? 전화도 안 해보고...' 

형제들의 떠들어대는 소리로 사역장이 떠나갈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나를 따라온 두 전도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힘들었다. 애초에 이해하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생각보다 반발이 심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돈 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양식을 주신다고 생각해요. 

또 내가 전도사 신분이기 때문에, 한국에 전화해도 돈을 보내줄 사람이 없어요. 
설령 돈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 해도, 나는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공급받을 거예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익두 형제가 왁왁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뭐 같네, 난 금식 안 해, 이 따위 사역장인지 뭔지 여기서 안 살아! 나 갈래!' 
그리고는 통독실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몹시 화가 나는지 밖에 나가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북한 사람들은 굶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북한에서부터 이 먼 곳까지 목숨 걸고 도망 온 것은, 오로지 굶지 않기 위해서다. 
배고픔때문에 가족과 헤어졌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잃어야 했다. 
이들의 고통은 '배고픔'이라는 한마디에 모두 들어 있다. 

이들이 사역장에 들어온 이유도, 마찬가지로 그 배고픔 때문이었다. 
그 끊기힘든 술, 담배도 용케 참으며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는 이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항의였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주님이 사역장의 상황을 
금식으로 몰아가시는데.. 난들 어쩌겠는가? 

'쳇, 나도 갈래요. 이 따위로는 못 살아요. 아 이거 뭐예요? 
술도 못 먹게 하지, 담배도 못 피게 하지.. 이제는 밥도 못 먹게 하니까.. 
그럼 어떻게 살아요? 나도 가요.' 무디 형제도 화를 내면서 통독실을 나가버렸다. 

 

이들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걸, 전혀 믿으려고 들지 않았다. 
권능 형제는 겁먹은 얼굴로 조용히 나에게 와서 물었다. 
'저 선생님, 삼일을 아무 것도 안 먹으면 죽진 않습니까? 살긴 삽니까?'

'권능 형제는 북한에서 살 때, 굶어 보지 못했나 보죠?' 내가 웃으며 물었다. 
'아니 썩어지게 많이 굶어 봤지만, 아무것도 못 먹으면서 연속 삼일을 
그것도 깨끗하게 굶어 본 적은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삼 일을 굶으면 죽습니다. 
감옥에서 못 먹으면 사람들이 힘들어 죽는데, 삼일 굶은 사람이 어떻게 삽니까?' 

'권능 형제마음 놓으세요. 삼일이 아니라 사십일을 굶어도 
금식기도는 사람이 죽는 법이 없어요. 금식이 끝나면 오히려 더 건강해져요.' 

이렇게 말해도 그는 영 믿지 못하겠는지, 어깨가 쳐져 조용히 방을 나갔다. 
나는 이 사람들이 줄줄이 떠나갈까봐 몹시 불안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한 사람도 떠나지 않았다. 
어제 그렇게 요란하게 화를 내던 사람들 답지 않게,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말없이 일과에 순응하며 금식을 시작했다. 

그런 형제들을 보니 내 마음이 더 아팠다. 차라리 어제처럼 소리소리 지르면서 
반항이라도 하면 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금식을 한 지 3일째 되던 날, 길림시 OO교회 책임 집사님이 
아들 친구인 강길호 형제를 만나기 위해 우리 사역장에 찾아오셨다.

금식중이던 우리는 그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식사 대신 기도모임을 가졌다. 
자연히 집사님도 함께 기도모임을 하시다가, 우리가 돈이 없어 3일째 금식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셨다. 집사님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씀하셨다. 

'세상에,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쌀이 없어서 그것도 북한선교현장에서 굶다니.. 
내 목에 숨이 남아있는 한 여러분들이 굶지 않도록 양식을 공급할 테니 
앞으로는 걱정하지들 마오!' 이렇게 약속하며 
우리가 길림에 있을 동안, 양식은 집사님께서 다 공급해 주셨다. 

'오~ 우리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들어주긴 들어주네~ 
선생님 이게 응답이라는 거 아닙니까?' 

'야 하나님이란 게 진짜 있긴 있는 모양이다야! 시간이 되니 딱 들어준다야' 

형제들은 기쁨에 겨워 껑충껑충 뛰었다. 

다른 때 같으면 우연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형제들이 
이번 일은 오로지 기도에 응답이라고 믿는 모습이 놀라웠다. 
주님께서 이번 금식기간에 하신 일이었다. 

그러나 금식이 끝난 후, 사역장에 이 구석 저 구석에 
누군가 몰래 음식을 숨겨놓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형제들의 말투를 고치다

"우리 북조선에는 이케 말하는 법이 없시여!"

▲며칠 전 강구 형제가, 광호 선생과 심하게 다투고 사역장을 떠났다. 
마음이 아팠지만 북한 사람들끼리의 문제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물으니, 갈 데도 없다고 한다. 

오늘은 기철 형제가 북한에 가족들을 데리러 가겠다고 하면서 사역장을 떠났다.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중국 어디에서 살든지, 주님을 영접하며 살면 되지만
왠지 불안해보였다. 

북한으로 떠나는 그의 앞길을 지켜 주시도록 주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나는 순박한 무디형제가 좋았다.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재미있는 이 형제를 
다른 형제들도 다 좋아했다. 그는 맹랑한 소리도 잘 했다. 

'선생님, 우리 집에 한 주일만 놀러가지 않을 라우?' 
'아니 내가 가면 북한 보위부가 잡지 않아요?'

'에이 괜찮아요. 까짓것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요.' 
그는 북한이 미국과 전쟁하면 이긴다는 말을 할 때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밥도 얻어먹지 못해 도망쳐 온 주제에 뭐 선생님까지 책임 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우!' 옆에서 듣던 칼빈 형제가 콧방귀를 끼었다. 

'야 이 쪼그만 새끼가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썩어지기 전에!  
일 없이요, 선생님. 나만 믿으시오. 그럼 다 됨다.'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그의 말을 가려서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북한 형제들은 살아온 환경이 열악하다보니, 쓰는 말도 난폭한 말 투성이였다. 
냉면을 먹고 조금 남으면 '다같이 냉면을 타도하자!'고 할 정도로 
전투적 언어가 일상화 되어 있었고 
상대를 비하하는 야비한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장차 북한 복음화를 책임져 나갈 선교사가 될 사람들인데, 이래서는 곤란했다. 
사람이 어떤 심성을 가졌느냐에 따라 하는 말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어떤 말을 쓰는가에 따라, 심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들에게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혀도 
이들이 거친 말을 버리지 않는다면, 내면의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이들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말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습관은 제2의 천성' 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말을, 하루 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범무서워 산에 못가랴.. 나는 곁에 계신 주님을 의지하면서 
이 일 또한 강하게 밀고 가기로 작정했다. 

저녁 통독이 끝나고 형제들에게 엄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부터 서로 서로 말을 고치세요!' 
모두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말할 때, (한국에서 나랑 같이 온) 두 전도사님들처럼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존댓말로 하세요. 
만약 서로 존댓말을 쓰지 않고, 옛날식으로 이야기하다가 나한테 걸리면 
식사 당번을 시킬 거예요. 

그리고 반드시 '형님' 대신, '형제님'이라고 하세요. 
그 자리에서 무디 형제에게 시범으로, 사역장에서 제일 어린 권능 형제에게 
존댓말로 한마디 하게 했다. 그러자 무디 형제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 거 선상, 우리 북조선에는 이케 말하는 법이 없시오.
어케 아들보다 좀 큰 새끼보고 '형제님'하고, 
또 아들 같은 놈이 나보고 '형제님' 함까? 이거 어케 들어줍니까? 
못함다. 못해! 이것만은 썩어져도 못함다!'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를 두고, 다른 형제들부터 차례로 호칭을 고치게 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다시 시키니, 그는 하기 싫어 발버둥을 치다가
마지못해 건성으로 했다. 

'어이 권능 형제님' 그리고는 얼굴이 빨개져 다른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여태껏 뒤에서 알게 모르게 나를 많이 도와주던 광호 선생도 
이 일 만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선교사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함까? 나는 이해가 안 됨다. 
북조선 어디에도 이렇게 말하는 데는 없습니다. 이 문제만은 고려해 주십시오. 
우리가 뭐 남조선 사람들입니까?' 

어떻게 하면 광호 선생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로마 제국이 어떻게 기독교 국가가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로마가 어떻게 기독교 국가가 됐는지 아세요, 광호 선생?'
세월이 지나면서 로마가 심하게 타락했는데 특히 성적 탈락이 아주 심각했어요. 
같은 로마 사람 중에는, 귀족들이 며느리삼고 싶은 여자가 없었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순수한 여자를 찾다보니, 기독교인들이 있었는데 
기독교인은 예수 안 믿는 이방사람하고 결혼하려고 안 하잖아요. 
그래서 로마귀족들이, 기독교 여자들을 몰래 보쌈을 해와서 며느리로 삼았어요. 

이 여자들이 로마 귀족의 아이를 낳고, 기도와 신앙으로 키우다보니 
로마정부 안에 기독교인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한 거예요. 
이렇게 해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됐지,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져 된 게 아니에요.' 

그는 내 말을 귀담아 들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눈에 띄지 않는 거지만, 
작은 것부터 이렇게 충실히 변화시켜 나가면 
언젠가 저 북한 형제들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가 될 거예요. 

저들의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변화될 거고 
변화는 하루아침에 기적처럼 안 와요. 

우리 집에 애가 네 명이라서 내가 잘 아는데 
애들은 계속 귀찮게 잔소리하고, 가끔씩 매도 들고 그래야 바뀌더라고요. 
변화되고 성장하려면, 우리도 반드시 이런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생각해요.' 

내 말을 다 듣고 광호 선생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사역을 진행하니, 저도 신나고 믿음이 감다.' 

다음날부터 사역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형제들은 내앞에서 말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눈치로 서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꼭 말로 표현해야 할 때는, 내가 없는 곳으로 상대방을 데리고 가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기도 시간의 대부분을 이 문제로 보내면서 
형제들에게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꾸준히 밀고나갔다. 

다른 방에 가서 얘기하는 형제들을 데리고 나와, 내 앞에서 다시 말하게 하고 
일부러 많은 말을 시켜 경어 사용을 연습시켰다. 
그리고 예전 방식대로 말하다가 걸리면, 그 자리에서 수정 반복하게 하고 
잘못한 사람은 꼬박꼬박 식사당번을 시켰다. 

사역장에서 무디 형제가 나이가 제일 많다 보니 
그에게는 오로지 나이 어린 형제들에게 존댓말을 쓸 일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역장 안에서 기를 쓰고 나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나도 그런 무디형제를 기를 쓰고 좇아다니며 
계속해서 반복시키고.. 못하면 벌을 주었다. 

그는 쫓기다 못해 지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말했다. 
'선교사님, 난 못해요. 못해요. 안 해, 안 해!
아이고 하나님, 저 선교사님 좀 말려주십시오, 아이고~' 

나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가 소중했기 때문에 반드시 변화시켜야만 했다. 

'무디 형제, 아까 했던 말을 다시 제대로 해보세요.' 
칼빈 형제와 신나게 이야기하는 그에게, 내가 찬물을 끼얹었다. 

'못해요. 못해요. 안 해, 안 해! 아 제기랄, 이거야 살 수가 있나 원~'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그를 쫓아가서 붙잡아 왔다. 

'다시 처음부터 말해 보세요!' 
내가 끝장을 보겠다는 태도로 나오자, 보기도 싫은지
그는 곰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한 숨만 내쉬었다. 

'무디 형제! 하라면 하지 뭘 그래요?'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광호 선생의 목소리에 은근히 위협기가 섞여 있었다. 

무디 형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겨우 말했다. 
'칼빈 형..제..' 그리고는 어색해서 얼굴이 빨개지는 그에게 내가 자르듯이 말했다. 
'무디 형제는 내일 식사당번하세요!'
이렇게 해서 식사당번을 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형제들은 말 고치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했다. 
할 수 없이 새벽기도 때마다 십분씩 서로에게 'OO 형제' 라고 말하는 
연습을 시키고, 저녁에도 반복해서 연습을 시켰다. 

이렇게 한 달가량 숨 쉴 틈도 없이 밀고 나가며 
숨이 턱에 닿도록 실랑이를 벌였다. 
형제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나는 그들의 말버릇 고치는 일에 집착했다. 

그러자 형제들도 점차 존댓말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마지막에는 거친 말을 쓰는 사람을 슬금슬금 피하기까지 하였다. 


♣첫 이사와 한 가지 사건 

가끔씩 학생들과 외출을 나갈 때면, 왁자지껄 신나게 다니는 우리 일행을 
'누가 신고는 하지 않을까?' 몹시 신경이 쓰였다. 

목욕갈 때나 함께 외출할 때, 혹시라도 신분이 노출될까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녔다. 

통독 할 때도 밖에서 공안 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우리 사역장으로 오는 차가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떤 형제들은 넌지시 창문을 한번씩 내다보았다. 

다른 형제들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한동안 통독에서 정신을 빼앗기곤 하였다. 

게다가 요즘은 공안이 3개월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하는 호구조사 기간이었다. 
중국 공안들의 호구조사는 아주 철저해서, 
숨어있던 범죄자들이 이 기간에 많이 체포되었다. 

이 기간은 북한 사람들에게도 공포의 기간이었다. 
만약 공안들이 우리 사역장에 갑자기 들이닥치면 
신분증도 없고, 중국말도 모르는 우리 형제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끝장이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다른 때보다 더욱 불안해 했다. 
밖에 나갔던 조선족 길호 형제가 들어오면서 
어제 우리 아파트 앞 동까지 집집마다 공안들이 돌다 갔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형제들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나는 좀 더 안전한 지역으로 빨리 이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당장 떠난다해도 집을 장만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C시 한인교회 부교역자로 계시던 박주환 선교사에게 상의 드렸더니 
첫 마디에 OK 하면서, 교회에 미션 홈이 있는데 목사님께 상의하여 
쓸 수 있게 해 보겠다고 하셨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집 문제가 해결되어 몹시 기쁘고 감사했다. 
C시로 이사를 가는 게 어떻겠냐고 아니, 형제들은 너나없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동안은 중국어를 모르는 형제들의 안전때문에 
개인적으로 절대 바깥출입을 못 하게 했었다. 
한 달 반 가까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어디론가 떠난다는 말에 
모두들 신이나서 들썩거렸다. 

이때부터 우리는 대략 3개월마다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상황이 급할 때는 이사를 결정하고, 1시간 안에 움직일 때도 있었다. 

그 때는 사용하던 일체의 가재도구는 그대로 두고 
각자의 성경책만 들고 이사를 갔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새로 집을 계약하고 
가재 도구들도 다시 장만해야 했다. 

▲박주환 선교사의 도움으로, C시로 이사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때 
위험한 사건이 사업장에 발생했다. 

양형제 라는 사람과, 그 사람의 친구 방형제 두 사람이 
광호 선생을 통해 우리 사업장에 새로 오게 되었는데 
얘기해 보니, 두 사람이 여러 사실에 대해 자꾸 거짓말을 하고 
또한 그들의 눈빛도 꼭 집어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이상할 정도로 예리했다. 

'북한에서 파견한 보위부 통로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북한사람을 잘 알 뿐 아니라, 얼핏 몇 마디만 주고 받아도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느 지방 사람인지 까지 금방 알아내는 

광호 선생이 데리고 온 형제들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꺼림직했다.

광호 선생께 나의 이런 느낌을 이야기하고 
이 두 사람을 우리 사역장에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사역장까지 데리고 온 사람을 무턱대고 떠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우리 사역장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으니, 
혹시 나쁜 마음을 먹고 신고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두 형제에게는 '사람이 너무 많아 사역장을 분리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급히 길림 사역장을 떠났다. 

(한국에서 온) 천 전도사와 조선족 길호 형제를, 두 형제와 함께 남겨두고 
나와 나머지 형제들은 각자 성경책만 들고 사역장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우리가 떠난 그날 밤, 무슨 이유인지 사역장에서 양 형제가 죽어버렸다. 
홀로 남은 방형제는 그 후, 다른 선교사를 통해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세워졌다. 

이 사건을 접하며 모든 형제들이 
우리 사역장을 지켜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크게 감사하였다. 

C시의 한인교회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있을 곳이 없어서 
다시 박 선교사에게 연락했고 
임시로 산동성 제남(지난)으로 가게 되었다. 제남으로 떠나던 날이었다. 
기차 시간까지는 아직 반나절 가량 남아있었다. 

형제들에게 그동안 길거리에 다니다가 괜히 수상하게 보이지 말고 
공원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일렀다. 

제남까지 기차로 3일 거리라, 형제들 한 사람당 30 위안씩 나눠 줬다. 
여태까지는 담배를 피울 것을 우려해 절대로 돈을 주지 않았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 무디 형제를 만났다. 
'무디 형제, 돈 잘 가지고 있죠?' 
혹시 담배를 사서 피우지 않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저기 선생님, 그 돈 1 위안도 없이요.' 
그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아니 그 돈을 벌써 다 썼단 말이에요? 어디다 썼는데요?'

'아 그거, 아까 지나가다 보니까 거지 한 명이 돈 달라고 하기에 10위안 줬어요. 
그리고 또 지나가다 보니까 총 쏘는 유희(놀이)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두방만 쏜다고 한 게, 어떻게 20 위안이 나오더라고요.' 

그는 자기도 좀 계면쩍은지 비실거렸다.
제남에 도착할 때까지 혹시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하게 되면 
나에게 전화하는데 써야 할 돈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으며 말했다. 

'무디 형제 잘했어요. 잘했어요.' 
아직은 돈을 맡기면 제대로 쓰기는 틀렸다. 
나이나 적으면 몰라도.. 저 나이에도 돈 관리는 훈련이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기차 시간이 되어 형제들을 모아 역전으로 나왔다. 
기차에 올라 모두가 즐겁고 명랑한 여행을 기대하며 각자 자리에 앉아 
기차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건으로 모두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기차에 올라 화장실로 가다가, 화장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무디 형제를 발견한 것이다. 

'뭐 하는 거예요?'
'무디,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 너는 부모님 말도 이렇게 안 들어? 
왜 이렇게 말 안 들어?' 이사하면서 여러 문제로 고달팠던 나는 
나도 모르게 벌컥 화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노골적으로 성경통독을 등한히 하는 그를  언짢아 하던 터였다. 
요즘엔 밤에 몰래 밖에 나가, 담배꽁초를 주워다가 피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가까스로 형제들 전원이 담배를 끊었는데 
다시 담배냄새를 풍기면 다른 사람들도 유혹을 받는다. 

그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기차칸으로 들어가 버렸다. 화장실을 괜히 지나쳐 싶었나 후회가 되었다. 

 

열차 자리로 돌아가 보니, 방금 전까지 서로 장난치며 즐거워하던 형제들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디 형제에게 화내는 것을, 멀리서 다 보고 들었던 것이다. 
'무디 형제, 미안해요. 내가 좀 지나쳤던 것 같아요.' 

'아 예~ 일 없이요. 아니, 일 없습니다.' 
내가 사과하자,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경어를 사용하며 
그는 어색하게 나의 사과를 받았다. 

이 넓은 세상에 한 몸 머무를 곳 없어,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는지 
씁쓰레 하는 기색도 내비쳤다. 
어떻게든 달래주려고 제남까지 가는 3일 내내 거듭 거듭 사과했지만 
그때마다 처음처럼 어색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형제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나를 향한 그들의 눈빛이 아주 싸늘하게 변하면서 
나하고는 말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통해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그들을 사랑하고 몇 개월을 동고동락 했더라도 
그들에게 나는 남조선의 이방인일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나는 남조선에서 온 괴뢰도당이었고 
무디 형제는 자기들과 같은 북한 사람이었다. 

짧은 시간에 북한 형제들과 아주 친해졌다고 자만했던 것이.. 나는 부끄러웠다. 
저들과 하나가 되기에는 분단 50년의 장벽이 너무도 높다는 것이 세삼 느껴졌다. 

 

'우리가 다같이 잡혀도, 선생님은 고작 추방이지만 
우리는 잡혀가서 개죽음 당한 단 말이에요.' 이것이 나와 그들의 차이였다. 
절대로 서로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자기를 보호해줄 나라가 망해서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나의 혈기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다. 
그 날 무디 형제에게 계속 용서를 빌었지만,
사역장의 분위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 C시로 이사간 후,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3일간 금식하며 
철저하게 주님 앞에 회개하였다. 
그제야 사역장의 분위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10월 초순 일주일 쯤 지나, 박 선교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우리는 C시로 갔다. 
이때 주광호 선생은 우리와 같이 가지 않고 
심양의 북한자매 사역장에 있는 애인을 찾아 심양으로 떠났다.


♣'이 커피 한 통 다 먹어도 됩니까?' 

우와~ 형제들의 함성이 터졌다. 
바닷가 옆 30층짜리 빌딩에 22층에 위치한 C시 한인교회 미션홈은
우리 형제들에게는 대궐 같은 곳이었다. 

이렇게 멋진 집에서 살아 보기는 모두들 처음이었다. 
앞 베란다 쪽으로는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집안에 가구들은 모두 최고급 품들이었다. 

형제들은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방 저방 구경 다니고 
소파에서 튕겨 앉아보며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와 우와~' 익두 형제와 선주 형제는 베란다에서 바다를 향해 
연신 소리소리 질러 됐다. 
이럴 땐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았다. 

나도 덩달아 즐거워하며 방을 두루 정리하였다. 
이렇게 멋진데서 사역하게 되다니 나도 신이 났다. 
'주여 고맙습니다' 를 연발하며 방정리를 끝내고 나와 보니 
식사 당번은 칼빈 형제가 밥을 다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박 선교사가 형제들에게 커피 한 잔씩 타 주었다. 

그러자 자기 앞에 놓여진 커피잔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권능 형제가 
커피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박 선교사님, 이 커피 한 통 다 먹어도 됩니까?' 

그는 한 손에 커피 잔을 들고, 600g 짜리 큰 커피 통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박선교사는 눈이 휘둥그레져 권능 형제에게 말했다. 
'이거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많이 먹으면 맛 없는데, 
먹을 수가 있겠어요?' 

권능 형제는 커피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감격어린 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 일 없습니다. 맛있습니다. 북조선에서 살 때는 
영화에서 미국 놈들만 먹어 보는 음식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압니까? 저 이거 다 먹어도 일 없습니까?' 

북한 형제들은 '괜찮다'는 의미를, '일 없다' 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걸 알리 없는 박 선교사는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였다. 
'일 있어요. 일! 이걸 다 먹어 버리면..' 

박 선교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급해진 권능 형제가 말을 받았다. 
'이거 비싸요? 그래도 한 번 한 좀 풀어 봅시다.' 

'아 그게 아니고, 이거 한꺼번에 다 먹으면 큰일 나요. 몸에 해로워요.' 
아무리 말려도 기어이 커피 한 통을 다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인지 
권능 형제는 커피 통을 틀어쥐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박 선교사는, 권능 형제와 다른 형제들에게 
커피는 한꺼번에 먹는 음식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 일 이후 박 선교사는, 남북한의 차이가 좀 실감이 나는지 
나를 보고 그저 허허 웃으면서 
'이래 가지고 어떻게 우리민족이 하나 된단 말인가?'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 가지고 저러는가 싶었다. 
북한 형제들에게 많이 동화되었는지, 나 역시 커피 한 통 다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는 C시 한인교회 미션 홈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도 상류층이 사는 최고급 아파트 인지라 
드나들 때마다 모든 사람을 체크 할 정도로 경비가 철저했다. 

집은 좋은데 한번 밖에 나갔다 오려면, 길림에 있을 때보다
형제들이 더 마음을 옥죄곤했다. 
좋은 집이긴 했지만 우리가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사역하기에 알맞은 우리 사역장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만한 돈이 없었다. 
이런 우리 사정을 아는 박선교사에게 다시 소개를 받아 15일만에 이삿짐을 꾸려
다시 제남으로 떠났다. 

나와 같이 한국에서 들어왔던 김전도사에게, 형제들을 돌볼 것을 부탁하여 모두 
제남으로 보내고, 나는 앞으로의 사역비 마련을 위해 부랴부랴 한국으로 떠났다. 


♣제남(지난) 사역 

한국에 오니, 아내가 신학대학원 동기들이 모아준 헌금이라고 하면서 
150만 원을 건네주었다. 

전에 8월 말에 단기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올 때 
북한 형제들이 구창한 전도사(졸업준비 위원장) 앞으로 쓴 편지를 가지고 왔었다. 

'최광 선교사가 여기서 자기를 때문에 수고를 많이 하느라 졸업을 못 하고 있으니, 

3개월을 더 다니지 않고도 졸업할 수 있게 선처해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때 구전도사님이 익두, 권능, 칼빈 등의 이름으로 쓰여진 편지들을 신기해하며 
학교 게시판에다 붙여서 여러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셨고 
개강예배 시간에 탈북자 선교를 위한 헌금을 모아서 아내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돈으로는, 중국에 들어가는 여비와 
사역장으로 사용할 집을 마련하고 몇 달간 생활할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공급해주시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들 안전 문제 때문에, 여기저기 상세히 보고하고 다닐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3일을 금식하고 김의환 총장님을 만나 
북한 형제들이 총장님께 쓴 편지를 전해 드렸다. 

총장님은 '앞으로 자기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많은 후원을 해 달라'는 
북한 형제들의 편지를 다 읽으시고, 지갑에서 선뜻 100만 원을 꺼내 주셨다. 

나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시며 
너무 귀한 일을 하고 있다고 크게 격려해주셨다. 

한국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너무 힘들게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없는 동안 과일을 먹어 보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선교헌금으로 들어오는 돈은 100% 사역장에, 
가정 생활비로 후원되는 헌금은 100% 가정에 쓴다는 기준으로 사역했기 때문에 
가정에는 김의환 총장님으로부터 후원되는 20만원 외에는 아무 대책이 없었다. 
하지만 가정을 돌볼 겨를도 없이, 소록도 북성교회 남권사님만 잠깐 뵙고 
10일 만에 서둘러 제남으로 돌아왔다. 

사역장에서 김전도사가 섬기고 있었지만, 내가 장시간 비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사람의 다리가 그렇게 무거울 수 있음을.. 살면서 처음 경험했다. 

주님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비행기에서, 중국 기차에서.. 내내 울었다. 

'아빠가 중국에서 하나님 일 많이 하고 빨리 오도록' 
날마다 기도하며 울다 잠이 든다는 4살짜리 막내 딸아이 생각에 또 눈물이 났다. 

 

제남에 도착해보니, 사역장은 우리가 있기에 여러모로 불편했다. 
차 선교사가 본인의 살림집을 내 주다 보니 집이 좁아서 
방 한 칸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통독도 진행하고 있었다. 

잘 때도 겨우겨우 비집고 칼 잠을 자야 했다. 
그리고 낡은 아파트라, 우리가 하는 통독, 기도, 찬송 소리가 
옆집이 아니라 온 아파트를 진동시킬 정도로 크게 들렸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 형제들도 힘들었는지, 분위기가 많이 산만해 있었다. 
김전도사에게 그동안 몇 독 했느냐고 물으니 
'신약 2독 밖에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외 나머지 기간은 이렇게 통독하는 것이 좋지 않아 보여 
큐티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고 했다. 

예정 대로라면 10일간 신약 8독은 했어야했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던 일과에서 풀려서인지 
형제들은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영적으로 매우 힘든 것 같아 나는 속이 상했다. 
북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사상교육에
세뇌당하면서 살아 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싫든 좋든 이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도망온 후, 그 동안 북한에서 완전히 속아 살아 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러하고, 
저것은 저러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피해왔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만 읽히고, 나머지 문제는 오직 기도로 해결해 왔다. 
처음부터 주입식 교육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이들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여유시간을 많이 주는 김전도사 일과 운영방식을, 모두들 좋아했다. 
내 허락 없이 외출 같은 건 감히 꿈도 못 꾸다가 
내가 없는 동안 자기들 마음대로 밖에 나가 당구까지 쳤다고 했다. 

김전도사는 10일 동안 일과 진행은 엄두도 못 내고 
내가 올 때까지 형제들을 붙들어 두는데만 온 힘을 쏟았다고 했다. 

다시 원래대로 일과를 진행하면서, 나는 5일 작정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흐트러진 사역장 분위기 회복과,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5일 금식이 끝난 날, 권능 형제가 담담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선생님, 배 많이 고팠지 않았습니까?' 
'아니 난 괜찮은데?' 나는 웃으며 농담하듯 말했다. 

권능 형제도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선생님, 이렇게 열흘을 쫄쫄 굶어도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함 생각해보시오. 
그게 북한입니다.' 

지금까지 북한 실정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감이 잘 오지 않다가 
오늘 저녁에 확실히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제들이 하는 말이 '그 정도의 감은, 절반 정도도 안 된다'고 했다. 
추운 겨울, 4~5세 아이들이 눈 쌓인 거리에서 헤매다가 역전에서 죽어가면서도 
울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한 구석도 의지할 데가 없으니, 울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고스란히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불평 한마디 없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변한다고 한다. *1995~1999년 경 

그런데 북한 실정은, 먹을 것이 없는 것 뿐이 아니란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갔고, 나라는 온통 아수라장 인데 
김정일의 구역질 나는 자기 자랑을 진실로 믿으며 
그를 하나님처럼 받들고 살아야 하는 그 고통.. 
또한 배고픔에 버금가는 고통이란다. 

이야기를 듣는데 안타까웠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북한의 영적 상태는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사역장에 새로운 형제들이 왔다. 
권능 형제와 익두 형제가, 두 달 전에 내게 부탁했던 친구들을 
광호 선생이 수소문해서 데려온 것이다. 
이들에게는 유기풍, 박요한 이라 이름 지어 주었다. 

기풍 형제는 북한에서 10년 군복무 기간 내내 금강산댐 건설만 했던 형제였다. 
금강산 댐은 100% 군인을 동원해 건설했다고 한다. 

금강산의 좁은 골짜기에, 근 10만의 군인들이 밀집해 사니 
밤이 되면 그 골짜기는, 산 새도 날기 무서워하는 
무시무시한 강도 골짜기로 변한다고 한다.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니, 낮에는 군인이지만 
밤에는 팬티 하나까지 말끔히 벗겨가는 강도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10년 동안 강도 짓만 하다가 탈북 해서인지 
가늘고 위로 치켜진 그의 눈에는 살기가 진하게 흘렀다. 

요한 형제는, 익두 형제 고향 선배로, 1993년부터 같은 직장을 다닌 동료였다. 
그는 다음 날부터 형제들과 나에게, 자기는 몇 년 동안 중국무술을 배웠다고 
겁을 주며 다녔다. 

새로 들어온 두 형제를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거친 형제들에게 
시달리다보니, 이번 만은 좀 순하고 착한 형제들이 오기를 바랬던 것이다. 

기풍 형제와 요한 형제에게는 갑자기 적응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술 담배를 끊어야 하고, 사용하던 언어도 확 바꾸어 한국식 경어를 사용해야하고 
난생 처음보는 성경을 하루 종일 녹음기로 들어야 하고 
기도하는 것도 하루 2시간 이상씩 해야 했다. 

외출도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정도다. 
돌공장에서 바윗덩이가 깨는 일만 하던 두 형제에게는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부터가 고문이었다. 

두 형제가 사역장에 들어와 견디지 못해 난리 법석을 칠 때 
이제 좀 익숙해진 권능, 익두 형제는 
'너희는 우리가 두 달 기도해서 들어온 놈들이니 잘해 보라'고 큰소리쳤다. 

칼빈, 선주 형제는 늦게 사역장에 들어온 신입생 두 형제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을 가르쳐 주느라 여념이 없다. 


♣ "어머니 저는 갈 수가 없어요!"

요즘은 형제들의 술 담배 문제에 몹시 신경이 쓰인다. 
사역장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고 생각해서 
식사 당번이 직접 나가서 반찬을 사 오게 한 그때부터 
무디 형제에게서 담배 냄새가 났다. 

반찬 값에서 조금씩 떼어, 담배를 사서 피우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를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디 형제, 요즘 담배 피우죠?'
순간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지난번 기차에서의 일 이후, 다시는 담배 피우지 않기로 철석같이 맹세한 그였다. 
'예 예~ 그거 꽁초를 조금씩 주워 피우다가 그만 그렇게 됐지요.' 
'무디 형제, 공부 그만하고 떠나세요!'

조용하지만 단호한 나의 말에,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자기 딴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것 때문에 사역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나는 술 담배 문제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앞으로 북한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첫 관문 같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그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무디 형제를 정말 사랑하지만, 담배를 못 끊으면
구제 사역을 하시는 다른 선교사에게 보내려 했다. 

하지만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고, 다시는 반찬 값에서 돈을 떼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였다. 

▲오후에 광호 선생이 길림에서 최철호, 조선족 전요셉 형제를 데리고 왔다. 
우리가 제남으로 떠나면서 길호 형제와 헤어진 후 
우리 사업장에는 통역을 담당할 조선족이 없었다. 

우리는 중국말을 할 줄 모르기에, 사역장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매우 위험했다. 
그동안 조선족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를 도와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 형편을 알고 광호선생이 일부러 멀리까지 가서 사람을 찾아 데려온 것이다. 
전요셉 형제는 아버지가 조선족교회 책임집사 이어서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그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 과정에서 무슨 상처를 받았는지, 그는 선교사가 집에 온다고 하면 
기다렸다가 쫓아냈다고 한다. 

속이 상한 그의 아버지가 광호 선생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하자 
광호 선생이 '제남에 있는 우리 사역장에 한 달 동안 여행 삼아 갔다가 
마음에 안 들면 돌아가도 좋다'고 하고, 그를 데려온 것이다. 

광호 선생은 요셉 형제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요셉 형제 일은 주님께 맡기기로 했다. 

최철호 형제는 나이가 40세 가량이었지만, 벌써 이마가 많이 벗겨져 있었다. 
그 역시 광호 선생처럼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철호형제는 잔뜩 폼을 잡고 자기 소개를 했다. 
'한국에서 온 선생, 나는 보통 사람들 하고 다르오.
군대 있을 때 특수부대에서 복무했고, 평양에 있는 대학에도 다녔소.

북조선에서 일반 사람은, 죽을 때까지 평양 시에는 문턱도 못 가 보는 사람이 
많다는 거 아시오?' 

나는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여기 사역장에 들어 오면, 이름부터 바꿔야 합니다. 
철호 형제는 뭐라고 바꾸면 좋을까요?'

'이름은 왜 바꾸오?'
'여기서는 서로 본명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러오? 거 잘 됐군! 그러면 선생은 내 이름이 뭐라고 하면 좋겠소?' 
'여기 있는 모든 형제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이름으로 바꿨어요. 
철호 형제도 그렇게 바꾸는 게 어때요?' 

내가 묻자 그는 배를 내밀며 목청을 돋구어 말했다. 
'이왕 이름을 달 바에야, 성경에서 제일 높은 사람 거로 하나 해 주시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라는 분이 나와요. 
그분도 철호 형제처럼 키도 작고, 머리도 좋고, 공부도 아주 많이 한 사람이에요. 
철호 형제와 비슷한 점이 많아요.' 

사도 바울처럼 머리가 벗겨졌다는 말을 하면, 기분 나빠 할 것 같아서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걸로 합시다. 뭐' 
자기를 알아준다고 생각했는지 은근히 좋아했다. 
이렇게 최철호 형제는 최바울이 되었다. 

'여기서는 이 책으로 공부해요. 이제부터 이 책을 보세요.'  
내가 성경 한 권을 내밀자, 그는 성경책을 받아들고, 대뜸 두께부터 가늠해봤다. 

 

'한국 선생, 나는 공부 많이 해 본 사람이요. 
이정도 책은 아마 한(1) 주일이면 뗄 것 같소'

'예? 일주일요?' 나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고 보라는 듯이 성경을 들고 의기양양 밖으로 나갔다. 


▲며칠 후 아내에게서, 어머니가 온몸이 마비되고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듯 
당장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으로 떠나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침대 앉아 천장만 올려다 보았다. 
'지금까지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한 불효 자식 입니다. 어머니, 어머니..' 
눈물이 주르륵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니~' 나는 침대에 엎드려 하염 없이 울었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박차고 공항으로 달려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비행기 값도 없었고, 또 사역 현장은 그렇게 기분 따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있을 수도 없는 안타까운 처지에 그저 울기만 했다. 

'주님, 저 갈 수 없어요. 모든 여건을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형제를 모두 자기 어머니가 위독한 것처럼 울면서 기도해 주었다. 

나는 목놓아 울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주님! 
어머니, 어머니~ 저는 뵈러 갈 수 없어요. 죄송해요. 어머니! 

주님, 어머니를 부르시더라도, 제가 한 번만 가서 만나 뵙게 허락해 주세요. 
제가 한 번만 더 뵌 후에 데려가 주세요!'

며칠 동안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틈만 나면 집에 전화하면서 조용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연세도 많으신데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만하면 
지금까지 효도는 커녕, 모질게도 가슴 아프게 했던 일들만 떠올랐다. 

설령 주님이 데려가신다 해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기 일처럼 울면서 기도해 주는 형제들이 고마웠다. 

며칠후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건강도 회복시켜 주셨다. 할렐루야! 

나는 이때 또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기도하면 주님은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선교 현장에서의 이 경험은, 나를 한차원 더 성숙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