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고 후기 기독교 사회인 서구에는 교회 출석률이 적은 것에 대하여 우리가 엉뚱한 비약을 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즉 '우리는 잘 믿는데, 너희들은 왜 못 믿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가 없고, '우리는 이렇게 잘 되는데, 당신들은 왜 안 되는 것입니까?'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우리에게 한번 맡겨 봐요, 우리가 제대로 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건 마치 자녀와 갈등을 빚는 어느 부모에게 '내 자식은 내 말을 잘 듣는데, 당신 자식은 왜 그 모양이냐? 내게 5년 만 맡겨봐라, 내가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모욕이요, 무례한 말이 될 것입니다. 설령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해결해야 될 부분이지 누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만일 남의 가족사에 끼어들어 대신 해결해 주려고 한다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가 없을 뿐더러, 더 복잡하게 꼬여버릴 것입니다.
▲물론 숫자는 중요합니다. 숫자가 얼마나 중요하냐면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고, 또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3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심지어 모세오경에 "민수기" 라는 책까지 있을 정도니까 숫자가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는, 숫자 자체가 설득력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이렇게 숫자에 대해서 여쭤 봤습니다. '많습니까/ 적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4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시지 않고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로 판단할 수 없고, 숫자로 승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보다 다른 중요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잘 믿는데, 우리들은 (교회가) 잘 되는데 왜 (유럽교회) 당신들에게는 잘 안 됩니까?' 라는 말이
'우리는 예수님을 잘 따르는데, 왜 당신들은 못 따르느냐?' 라는 그런 언급은, 아예 그 자체로 말을 꺼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다 어려워요. 눅13:24 누구에게는 쉽고, 누구에게는 어려운 게 아니에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라'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다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십자가의 길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에요.
이것은 '거품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가능성임 '멋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많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뭔지 모르고.. 십자가 지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멋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넓은 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에 거품을 형성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적다고 대답을 하신 거예요. 눅13:24
왜냐면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구원을 얻고 싶어도, 못 얻는 사람들이 많다' 는 뜻이죠.
그렇다면 구원을 얻는 자가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한때 기독교가 문명을 이루고, 기독교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신앙의 시대가 존재한 적이 있었다, Christendom이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의 이 말씀과, 그럼 반대되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후기 기독교 시대가 된 지금이 비정상이 아니고 (정상이고) 모든 사람이 믿는 것처럼 보였던 그때(크리샌덤 시대)가 더 비정상이었을 수 있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모두에게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나라의 모든 사람이 믿는 것 같은 그런 기독교왕국 Christendom 시대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인간의 그 많은 죄성을 고려할 때 모든 백성이 약속이나 한듯 기독교 신앙을 믿었다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1) 왕이 '우리나라는 기독교국가다' 라고 선포했기 때문에 마치 푸틴이 '우리는 전쟁한다'고 해서, 국민들이 할 수 없이 따르는 것처럼 임금이 '우리는 기독교 국가다!' 라고 선포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진실로 믿든/ 안 믿든..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시늉을 했을 것입니다.
2) 혹은 과거에 기독교 왕국 Christendom이 되었던 이유는 (↔ 후기 기독교) 사람들이 진정 거듭나든지 / 거듭나지 않든지 문화와 전통을 기준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기독교 나라에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그냥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3) 혹은 한 때 기독교에 입문을 했으나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많지만 '길가, 돌밭, 가시밭' 등의 신자가 자연스레 생겨나는 거지요.
자기 의지로 기독교 신앙을 처음에는 받아들였지만, 그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지요.
그런데 자기는 '길가, 돌밭, 가시밭' 신자이면서도, 즉 열매를 맺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한 때 기독교왕국 (대표적으로 중세시대) 이 있었다면, 이 세 가지 중에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숫자' 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거죠. 숫자가 중요해요. 당연히 중요하죠. 그래서 목사가 제일 신경 쓰는 것이 숫자죠. 숫자를 무시한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그러나 숫자는 사람을 미혹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전쟁에 나갈 군사를 모집할 때, 숫자를 신뢰하지 않았지요. 그 중에 거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거품을 떨쳐 버리려고 애쓰지 않았습니까.
숫자를 늘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줄임으로써 그 중에 정말로 헌신된 사람이 누군지 알려고 했던 것처럼
진짜 성도를 우리가 보기 원한다면, 무엇이 진짜 신앙 임을 증명해 주겠느냐? 즉 진짜 신앙, 알곡 제자, 참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있다는 증거를 우리가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느냐? ..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그저 '숫자'만으로 승부하려고 할수록 진짜 제자를 보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죠.
△수년 전에 영국 BBC 취재진이 '영국의 교회가 왜 이렇게 몰락했느냐?' 하는 프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현재 이렇게 교회 출석률이 낮은데, 다른 나라는 어떠냐를 알기 위해서 대한민국을 찾아왔어요.
대한민국에 와서 한국의 어느 큰 교회의 예배 실황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다큐멘터리에 포함을 시켰는데
제가 그 방송을 보면서 느낀 것은 그 진행자의 얼굴이 무표정 하더라는 거예요.
대한민국에 와서 어느 큰 교회 예배 실황을 취재하면서 그 얼굴에 별로 감동 받은 그런 증거가 없고, 무표정한 것을 보고서
'저 사람이 정말 뭔가 해답을 얻기 위해서 왔는가? 그래서 영국은 교회 출석률이 낮은데 한국에 이렇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고, 취재까지 하기는 했는데
그러면 그의 얼굴에 별로 감동을 받은 그런 흔적이 없는 것을 보니 오히려 인파속에서 허탈감을 느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어요.
숫자가 많은 곳에 가면, 하나님의 진짜 교회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시는 증거를 만약 보지 못했다면 오히려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취재진이 믿음이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여러분, 유럽의 교회들이 다 텅텅 빈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유럽의 대도시에도 큰 교회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 큰 교회는, 대부분 다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교회, 나이지리아, 가나.. 이런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모이고 교회가 부흥을 하고 뜨거운지 몰라요.
그런데 문제는, 유럽 현지인들이 그것을 보고, 별로 감동을 받는 것 같지 않다.. 라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들이 다니는 교회는 텅 비어 있는데, 저 아프리칸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는 부흥을 할까? 비결이 뭘까? 거기에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지 내가 가서 봐야 되겠다!' 라는 생각보다는
개가 멍하니 지붕 위의 닭을 쳐다보듯이, 그들의 북적거리는 교회에 별로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람들이 열심히 많이 모이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충분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후기 기독교 시대의 한 가지 사회상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에요.
◑1. (그러므로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 속의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강력한 영적인 지도자와, 그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필요하냐? 이 후기 기독교시대에 충분한 (신앙의) 의미 전달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이 뭐 천국의 윤리와 실천과 많은 것들을 가르치셨지만
그 보다도 더 먼저 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것들을 가르쳐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에서 방송해 주신 게 아니에요)
이것은 <강력한 영적인 리더십의 존재>와 <강력한 권세 있는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배제된 상황에서는, 기독교 전통도 별 소용이 없고 기독교 문화도 소용이 없고, 많이 모인다는 숫자 자체도 큰 설득력이 없고...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강력한 영적인 리더십의 존재와, 그의 권세 있는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어디서 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했어요.
듣기 위해서는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전하기 위해서는 누가 보내져야 (나타나야) 되는데
그것을 배제하고는, 전통이든 문화든 숫자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진실함을, 신앙의 진정성을.. 이 후기기독교 사회에서 증명할 수 없어요.
-그래서 강력한 영적인 리더십 -그리고 권세 있는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만약에 한국에 와서 취재를 했던 BBC 방송국 기자들이 물론 외모 만을 취재한 것이죠. 그 정도 취재로 그 속에 있는 믿음의 진실성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는 어떤 화려한 외모 자체로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올림픽 경기장이 세워졌을 때가 수십년 전이죠. *1988년 직전 당시에 여러 교회들이 제일 탐을 냈던 것이, 올림픽 옥외/실내 경기장에 사람들을 모아서 집회를 하면 사람들이 그 자체로 놀라고 감동을 받겠지...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체조경기장이든, 스타디움이든 .. 거기서 여러 번 집회가 열렸습니다. 또 지방의 스타디움에서도 여러 차례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런 집회, 저런 집회...
그런데 여러분 저도 집회에 참석을 해 봤지만 그런 경기장에 수 만명이 모였다는 그 사실 자체로 감동이 되는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힘들기만 한 면도 있었죠. 노인들은 힘든 관중석 계단을 올라가야 되고, 마이크 소리는 막 울리고... 그 큰 경기장을 예수 믿는 사람으로 가득 채웠다는 사실 자체가 처음에는 매우 감동적이었을지 모르나.. 두 세 번 하면 별로 감동이 안 돼요.
아마 (주최측)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모일 수만 있다면 그 자체가 어떤 메시지 전달이 되리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인데...
여러분 숫자로 말한다면, 요즘은 이단이 체육관, 운동장 집회를 더 자주 합니다. 이단이 모이는 거 보면 일사불란 하고, 뭐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를 보겠습니까? 그게 아니죠. 그게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라고 한 것처럼 선지자적 리더십과 선지자적 메시지 prophetic message가
후기 기독교 사회 상황에서 꼭 필요합니다.
유럽 교회가 결여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 장면을 여러분 보셨습니까?
1시간 했는데 얼마나 예행 연습을 철저하게 했는지 그 경건한 장례식이 하나의 쇼처럼, 아주 일사불란하게 아주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진행이 되었고
그 장례식을 보고 받는 인상은 '멋지다. 멋지네!' 그런데 감동이 없었어요. 그 운집한 인파, 그 세련된 진행 자체만으로는.. 감동이 될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전통에 아주 충실했습니다. 멋과 품위도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여한 것은, 기독교(성공회)식 장례식이었지만,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영적인 파워를 결여한 것이죠.
◑2.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고난을 경험하고 믿음이 정금처럼 된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에요.
그냥 뭐 많이 모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무엇으로 그 사람이 '좁은 문'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느냐?
-고난을 경험해 본 사람 -고난을 경험하고 그 믿음이 정금처럼 된 신자
고난을 통과하는 중에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느냐?' 하고 시험에 들어서 떠나가는 사람들,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금같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금은 아주 순수한 99.9% 순도의 금이라는 뜻입니다.
금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뜨거운 불 속에 넣어서 불순물을 제거하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고난인데 그런데 문제는, 고난을 통과했을 때, 정금처럼 되는 사람이 있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여기에서 숫자로 우리가 승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숫자가 많은 것 같은데.. 불을 통과하게 하면.. 숫자가 줄어들어요.
이 고난이 '좁은문'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지를 못해요. 들어가지를 못해요.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진짜 믿음을 보려고 할 때는, 고난을 통과하고 믿음을 지킨 사람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어떤 고난을 내가 당해야, 내 믿음이 정금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도 남처럼 무슨 사업에 부도가 나고, 무슨 죽을 병에 걸리고... 그래야 내가 정금이 되는 겁니까?
정금이 되려다가 오히려 절단나고 죽을까봐 염려됩니다. 정금 되려다가 굶어 죽는 것 아닙니까? 병들어 죽으면 정금도 소용 없지 않습니까?
고난이라는 것은, 어떤 상대적인 것이 아니에요. 꼭 사업에 망하고, 중병에 걸린 사람만 고난을 당하는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것이 상처가 되고, 친구가 적고, 그래서 받는 그 고난은 어른이 부도가 나고, 무슨 중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강도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거 같죠.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학교에서 자기가 친구가 없고 외톨이가 되는 것은 마치 세상이 끝나는 것과 같은 아픔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 그 고난의 성격이 다르지만, 다 고난이 있다는 겁니다. 어린아이에게도 말 못할 고난이 있고, 여자든 남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지위가 높든 낮든... 고난의 내용은 각자 다르지만,
자기 자신이 '내가 정말로 무너질 것 같고, 내게 인생의 끝인 것 같은' 그런 엄청난 고난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성한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고난이 없으려니..' 이렇게 생각할 수 없고, 또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고 고난을 많이 받았겠거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고난을 당했습니까? 베드로는 우리가 아는 바로는, 생계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던 사람이에요.
고기를 못 잡았더라도, 하룻밤 못 잡은 것 뿐이지 일평생 고기를 못 잡고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도 있고, 장모도 있고 .. 그러니 아내도 있었다는 얘기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던 베드로에게,
무슨 그렇게 큰 고난이 있었겠습니까? .. 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자기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그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실패의 경험이었어요. 그건, 자기에게는,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은 시련이었어요.
그걸 통과한 후에, 예수님이 다시 베드로를 부르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그야말로 정금처럼 변화되는 그런 경험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뭐 내가 남처럼, 무슨 그런 똑같은 고난을 당해야만 정금이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자기가 겪는 아픔이 있고, 그게 남이 보기에 '뭐 저런 걸 가지고..'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남을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불을 통과하기 전에는 우리 신앙에 불순물이 많아요.
자존심, 이기심, 교만, 자랑... 이런 것들이 섞여있습니다.
주님이 그 사실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에요.
젊은이들이 신앙 생활을 할 때 젊은이에게 순전한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이유는
아직 젊기 때문에, 인생이 신나고.. 뭐 여러가지 재미난 일들이 많죠. 그런 젊은이들에게 정금같은 신앙을 가지라고 요구하기가 어려워요.
만약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진 젊은이가 있다면 성장과정에서 남다른 시련을 겪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2학년 학생이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Through many dangers toils and grace, I have already come~' 뭐 이런 찬송을 만약 부른다면 이상한 거죠.
'너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런 찬송을 부르느냐?' 왜냐면 아직 그런 찬송을 절실한 마음으로 부르지 못 하는 어른들도 많거든요.
그러나 주님이 이제 정금처럼 만드시려고 고난을 통해서 그의 불순물을 제거해 나가시는 거죠.
여러분 이런 고난을 맛보고, 정금 같은 믿음을 지켜낸 성도들이 (후기 기독교 시대에) 필요하고, 그것을 볼 때 사람들이 그의 신앙을 신뢰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에게서 진짜 믿음을 본다'고 생각하는 거죠.
숫자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지 않아요. 사람들이 우르르 모이는 걸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죠. '저 사람들은 신앙을 유행으로 생각하나?'
마치 무슨 스타들이 잠실 운동장에 뜨면 사람들이 우르르 거기로 모여드는 것처럼 (잠시간은) 그렇게 교회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도 있겠죠.
그러나 신앙이 결코 쉬운 게 아닌 '좁은 길'인데, '넓은 길'이 아닌데, 그런 '넓은 길 신앙, 반짝 유행 같은 신앙'은.. 곧 자연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금같은 신앙, 고난을 겪고 나서도 믿음을 지킨 사람을 볼 때 '저 성도는 진짜다. 저건 진짜 신앙이다!' 이 포스토 모더니즘 사회에 필요한 것은, 그걸 우리가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3. (이 모스트 모더니즘 사회의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세 번째로 이제 비슷한 맥락인데 하나님이 증명해 주시는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시는 진실함! integrity 내가 스스로 증명하는게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사람들이 나를 안 알아줄까?' '우리가 이렇게 뜨거운데, 왜 사람들이 못 알아 줄까?' '내가 이렇게 은사가 있는데, 왜 사람들이 나를 안 알아줄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진실함으로 승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함은 우리가 증명 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에 우리가 증명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신앙에 아직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남에게 보이려고 하다가, 자기 진실함을 잃어버립니다. 서두르다가 진실함을 잃어버립니다. 서두르면 안 돼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잖아요. 참 배짱이 큰 나라 였죠. 그 섬나라가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이런 나라들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어요.
그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뭐냐면 '우리 일본이 이렇게 강대국이 됐는데, 왜 안 알아 주느냐?' 하는 거였어요. '우리는 청나라와 싸워서 이기고, 러시아와 싸워서 이기고 강대국이 됐는데 왜 안 알야 주느냐? 그럼 알아 주게 해야 되겠다' 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거죠.
그래서 결국은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을 했죠. 이게 일본 군부 지도자들의 경솔함, 또 국민의 프라이드, 즉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 그것이 국가로 하여금 멸망의 길로 찾아가게 만들었죠.
우리 한국 기독교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됩니다. 우리가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선교하려는 것이
'한국이 이만큼 교회가 성장하고 열심히 믿는데, 왜 우릴 안 알아주는 거야? 우리가 나가서 우리 실력을 한 번 보여 주겠어!' 라고 만약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실함으로 승부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그걸 우리가 경계해야 됩니다. 그런 동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귀신같이 그것(허세)을 알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케이팝으로 알려지고, 반도체로 알려지고, 핸드폰으로 알려지고 그러더니 이제 신앙(숫자, 물량)으로 알려지려고 하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오만하게 생각할 수 있죠.)
'케이팝, K-드라마로 승부하더니, 이제는 신앙도 알려 주려고 하는 모양이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을 (일본처럼) 알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고, 뜨겁고 열심히 믿는데 왜 세계 사람들이 몰라 줄까?' .. 라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죠. (태평양 전쟁 때 일본처럼 망할 수 있죠)
우리의 참된 신앙을 세계에 주님이 알려 주셔야 됩니다. 주님이 알려 주십니다. 이건 괜찮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알고 찾아 온 게 아니잖아요. '베드로가 이런 사람이래.. 베드로에게 이런 능력이 있대.. 베드로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이 낫는대...' 그걸 알고 고넬료가 찾아온 게 아니죠.
고넬료가 어떻게 베드로에게 도와 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지시하신 거죠. 그래서 베드로가 로마인에게 알려진 거죠.
'어디를 가면 누구 집에 이런 사람이 묵고 있는데, 그를 모셔다가 생명의 말씀을 들어라!'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베드로의 영적 권위를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추천하신 사람이에요.
그게 없이, 베드로가 인지도가 높아져서, 이름이 알려져서 그게 입소문을 타고 고넬료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요즘 베드로가 인기라던데, 우리도 한번 그를 초청해서 들어볼까?' 한 게 아니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소위 말하는 거품이에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알려지게 하십니다.
고넬료가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을.. 뭘 보고 베드로를 신뢰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실제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찾아가서 말씀을 증거했더니 듣는 중에 성령이 내려와서 사람들이 예언하고, 방언을 말했습니다.
만약에 그냥 누구의 명성만 듣고 초청했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에서 그렇게 해서 강사를 초청하면, 사람들이 당황할 일들이 종종 생깁니다.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거든요.
여러분, 영적인 일은 무슨 선 보는 것처럼 대충 그 사람의 배경을 알고, '맞겠지? 무난할 거야'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을 맡기는 일이기 때문에 대충 맞춰 가지고, 대충 무난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영혼을 맡기는 일인데, 엉뚱하고 이상한 사람이 왔을 때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고 하십니까?
사람들이 조심조심 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고, 정상이고 당연한 거지요. 사람들이 그냥 겉으로 판단하지 않고,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되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이 우리 신앙의 진실함을 증명해 주셔야 돼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거예요.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됩니다. 좁은 문!
그러면 하나님이 나중에 때가 되면, 그 진실성을 증명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다같이 손을 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도, 저희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 하여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했는데
이 시대의 거품에 우리가 포함되지 않게 하시고 진실하고 참된.. 고난을 통과하여 정금같이 된 자가 되게 하소서
이 말세에 주님이 저희의 진실함을 증명해 주시고 세상 가운데 확인해 주시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옳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증명할 수 없으니 나의 의로움을 어찌 내가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의롭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니 주님이 의롭다 하시면 내가 의롭게 되고 주님이 나를 부정하다 하시면 내가 부정하오니...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줄을 믿사온즉,
'그는 내가 내 목적을 위하여 내가 택한 그릇이라' 이렇게 주님이 증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기를 구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명성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능력을 스스로 증명함으로써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증명해 주심으로써, 사람의 신뢰를 얻게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맡기셨으니 이것이 유행에 의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실력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