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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34장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LNCK 2022. 10. 12. 22:58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민33:50~34:29        2013.11.24

출처 https://blog.naver.com/karamos/220647344824 정리


▲도입 예화 / 미국은 지금도 저개발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별천지의 세계로 여겨지는 나라입니다.

바로 곁에 있는 멕시코에만 해도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서 
미국에 밀입국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공산국가인 쿠바에서는 자가용 비행기나 배로 탈출한다든지 
혹은 국가대표 선수로 야구 시합에 왔다가 그대로 망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우리나라 역시 옛날에는 이 미국이란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어서 꿈에도 소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United States of America'란 국호가 어떤 연유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미국(美國)' 즉 '아름다운 나라'라고 알려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배경에는 그 나라를 막연히 동경하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미국병'에 걸려 이민을 오게 된 사람들은 
그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같은 
지상의 유토피아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입국만 하고 나면 자동적으로 다 아무 걱정 없이 
잘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영주권만 얻고 나면 나머지 인생은 
그냥 놀고먹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을 두고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는 이유는 
그 나라에서는 그저 자기가 열심히 일한만큼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 
'기회균등'이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잘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미국에만 가면 다 잘될 줄로 알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바쁘게 살아야 하는 생활에 
바로 적응하지 못하고 크게 실망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사람들은 10년이 지나도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그 미국 사회가 제공해 주는 환경과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노력하여 선용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윤택하게 만드는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이 바로 그런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광야에서 정처 없는 사십 년 간의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그들은 낮에나 밤에나 오직 그 젖과 꿀이 흐른다는 기름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날만 손꼽아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 역시 그냥 발로 밟기만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든 것이 다 행복해지는 지상낙원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곳을 진정한 축복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작 그들이 그 땅을 밟고 난 후부터가 오히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 점에 대하여 각성시켜 주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이라고 *33:51
본문 말씀을 시작하신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절로 다 잘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부터가 정말 중요하다고 일깨워 주시려 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세상의 기업을 통하여 
진정 축복을 누리고자 할 때, 꼭 기억하고 지켜야 할 사실이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2013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서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상 숭배가 남아 있는 가나안 땅은 
결코 축복의 기업이 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시면서 
재삼재사 경고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민33:50~56절을 찾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 오래 전에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은 결국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바로 53절에서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냥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기만 하면 
가나안 땅이 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땅을 그들의 산업으로 삼기 위해서 결코 빠트리지 말아야 할 일, 
한 치의 틀림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야 할 선행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거민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들의 우상을 하나도 남김없이 파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전멸시킬 것을 명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저지르고 있던 우상숭배의 죄를 징벌하시기 위함이었고, 
2) 또 이스라엘로 그들의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도록 사전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나안은 분명히 기름진 땅이기는 했지만 그 곳이 진정 축복의 땅이 되기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 땅이 온갖 우상숭배의 온상이었던 거죠.

그 무엇보다도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어떤 연유에서든지 우상숭배의 잔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곳에 
축복을 내리신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먼저 그 가나안의 우상들을 깨끗이 청소하도록 명하시고 
그것이 완수되면 그 땅에 진짜 축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죠.

▲반면에 만일 이 선행조건을 먼저 지키지 않으면 
가나안은 축복의 땅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저주의 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55절에서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거민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으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로 이어지는 5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이 명령을 어기면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내리실 벌을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고 실로 엄중한 경고를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스라엘 백성은 나중에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를 
깡그리 잊어 먹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 과정을 통하여 그 땅의 거민들을 살려 두어 
자기네의 종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 그것이 더 유익하다고 여겼던 것이겠지만, 
바로 그처럼 살려 둔 가나안 원주민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꾸로 우상숭배를 배우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생활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눈에 가시와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사사 시대를 통과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로부터 반복되는 침략과 시달림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징벌이 그들에게 고스란히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우상이 있는 곳에 축복을 내리실 리가 만무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에 불과합니다.

제아무리 성도이고, 제아무리 고생 끝에 얻은 축복의 기업이라 해도 
만일 그곳에 우상숭배의 잔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그 곳에 복을 내려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상도 남겨 놓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으려 하는 
이상한 계산을 자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우상들이란 가나안 사람들이 자기 딴에 복을 받으려고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습니다.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논밭 어귀에다 세웠고, 
집안에 액운을 막아 준다고 해서 드라빔 같은 우상을 선반에 모셔 두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우상의 덕도 보고 하나님 덕도 함께 보면 
더 복 받기 좋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계산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이 하는 것들도 그대로 따라서 하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도움도 받으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라고 
자기 딴에는 똑똑하게 계산을 하고 있으면 정말이지 큰코다치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고 
질투까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인이 하는 사업이라 하더라도 만일 그 사람이 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축복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아무리 온 가족이 믿는 가정이라 하더라도 
만일 교회보다도 자기 집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곳에 
평안과 기쁨의 복을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보다는 
학점을 더 귀히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그 학업을 형통하게 해 주실 마음이 어떻게 생기시겠습니까?

하나님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조금만 있어도, 
아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나란히 의지하는 우상의 모양만 남아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개인과 가정과 기업을 축복해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 가시가 눈을 찌르듯이 아프고 시도 때도 없이 
옆구리를 쿡쿡 쑤셔대는 시험들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날 좀 축복해 주시지 않나?'라고 반문하며 의심하기 전에 
자신의 생활 속에 혹 '우상의 잔재'가 있지 않는지 
이것부터 다시 한 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모습으로든지 '가나안 거민의 우상숭배'가 남아 있는 곳은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서 산다고 해도 
결코 축복의 기업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우상’을 정의하기를
‘새벽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누워서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그게 축복의 땅이 되지 않지요!

「꽃들의 희망」에 나오는 우화 (펀 글)

땅에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늘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나는 이 먼지 속에 늘 코를 쳐 박고, 모든 더러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평생 살아야 하다니...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가?

걸어 다니는 짐승들을 보니 부러웠고,
뛰어다니는 짐승을 보면 흠모의 대상이었고,
더욱이 하늘을 훨훨 나는 짐승들을 보면.. 몹시 부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애벌레들이 어디를 향해 큰 행렬을 지어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당신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가는가?”
“매우 중요한 데로 가고 있다네!”

그 애벌레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애벌레 떼의 행렬을 앞질러 좇아가보았다.
그랬더니 애벌레들이 한 우람한 나무를 타고 줄지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애벌레들에게 물어보았다.
“저 위에 뭐가 있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이 있데!”

애벌레들은 한 발짝이라도 먼저 가기 위해, 서로 남을 밀치고 아귀다툼하였다.
그 애벌레는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자기도 남을 밀치고 당기고 싸웠다.

그 노력의 결과인지, 이제 자기도 나무에 올라가는 대열에 겨우 서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애벌레들과 한참 올라가는데, 내려오는 행렬을 만나게 되었다.

“저 위에 뭐가 있더냐?”
“가 봐야 아무 것도 없다네!”

그러자 동료 애벌레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자기는 구경할 것 다 구경하고, 가질 것 다 가지고,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서, 말로는 아무 것도 없다고 그래!”

그 애벌레는 동료들과 함께 계속 위로 꼭대기까지 애를 쓰고 올라갔다.
정말 꼭대기 정상까지 가 보니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빈 하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허탈하게 내려오는 길에
용을 쓰며 올라오는 여러 애벌레들의 행렬과 자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저 위에 뭐가 있더냐?” 그들이 물었다.
“위에 올라가봐야 헛수고다. 아무 것도 없다던데, 사실이더라” 그가 대답해 주었다.

그래도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 둥치를 기어 올라오는 애벌레들은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 애벌레는 절망적인 자기 인생을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나뭇가지에 자기 몸을 누이고 고착시켰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기 내면을 깊숙이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자기 몸에 고치(캡슐, cocoon)가 덮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속에서 더 깊은 묵상을 하며, 그 모든 시간을 인내하며 견뎠다.
그랬더니 그 못생긴 애벌레가 변해서, 어느 날 찬란한 호랑나비가 되었다.

그 호랑나비는 이곳저곳 꽃들을 돌아다니면서
꽃들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애쓰고 수고해서 계속 위로 올라간다. 계속 소유를 쌓는다.
그런데 올라가 본 사람은, ‘위에 가면 아무 것도 없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밑에서 아귀다툼하며 올라오는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저는 가져 봤으니 하는 소리야!’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우화이다.


◑2. 받은 축복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사명을 위해 사용할 때
가나안 땅은 더욱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3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장차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의 경계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민34:1~12절을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여기서 "너희 땅의 사방 경계가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들어가서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의 경계를 정확하게 그어 주셨어요.

그리고 13절 이하에서는 모세가 각 지파별로 제비를 뽑아 
그 땅을 분배해 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의 전체 영역은 
남쪽으로는 광야를 지나 애굽 국경에까지 이르는 것이었고,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까지, 
북쪽으로는 유브라데 강 유역까지, 
동쪽으로는 사해까지 이르는 실로 넓은 지역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애굽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가나안'이란 지역을 
이 본문에 나타나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이란 
당시 주위의 이방 사람들에게도 그만큼의 영역이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그 가나안을 어느 정도까지 자기네들이 차지해야 할 땅으로 
알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이어지는 가나안 정복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경계에 훨씬 못 미쳐서 
이미 진격을 중단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결과 이 본문에 기록된 지역 전체가 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것은 
훨씬 나중에 다윗과 솔로몬 왕 시대에 가서야 비슷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리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과 
다윗 왕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자기네들이 살기에 
충분할만한 땅만 차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리고 그저 자기네가 당장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을 만한 터전이 확보되자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더 이상 영역을 확장하려 하지 않고 
거기에 안주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윗의 마음에는 전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기 전에 꼭 한 가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 솔로몬이 나중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자기가 미리 준비를 다 갖추어 놓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스스로 성전을 짓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지만, 
그 대신 나중에 성전을 지을 때에 필요한 금과 은과 놋을 
충분히 준비해 두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나라가 안정된 후에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주위의 이방 민족들을 
정복하러 나갔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처럼 선한 일에 대한 사명감을 붙잡고 나아갔을 때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삼하 6:6,14) 
해 주시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결과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한 은금을 풍부하게 준비했을 뿐 아니라 
그의 왕국도 최대로 확장시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가나안 땅'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축복의 완성은 그저 자기 종족이 땅을 차지하고 
자기 가족이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에만 급급해 하던 이스라엘 세대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다윗이 자신의 남은 생애 전체를 오로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고자 작정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해 주셨던 가나안 땅의 축복이 
바로 그를 통하여 완전히 성취되게 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자기 한 몸, 혹은 자기 가족들이 먹고 살 것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도대체 하나님께서 얼마나 복을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는 
말씀 그대로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가나안의 영역을 스스로 겨우 '밭 한 뙈기' 
정도로 대폭 줄여 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누릴 가나안 땅의 지경을 어느 정도로 선을 그어 놓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 집안에 우환이 없어지고 내 사업이 더 잘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거기가 자신이 받을 가나안의 경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에게도 베풀어 주시는 그 정도의 것만 
받아 누리고 사는 인생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 전에 내가 이 정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섬겨야지..'라고 
목적을 세우면 우리의 인생 영역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크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 어찌하든지 잘 되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도 사실 따지고 보면 
신앙생활을 자기만 만족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제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교인들만 모인 교회는 그저 겨우 자기네들끼리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길 정도의 
교제와 자기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봉사를 위한 능력 이상은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계를 받은 교회'라는 멋진 비전을 함께 가슴에 품고서 
'땅 끝까지 이르는 전도와 선교'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일사불란하게 나아가는 
교회가 될 때 하나님께서도 그에 걸맞은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 3:20)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많이 섬길 것을 생각하고 
크게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 주시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본문 16절부터 29절의 말씀에 보면 그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일을 
맡았던 각 지파의 족장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파별로 배당된 땅을 바로 이 족장들이 
또 자기네 지파 안에서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이 족장들의 인도 아래 
그들이 얻게 된 땅을 나누어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전에, 즉 땅 분배를 위한 책임자를 임명해 주시는 말씀 이전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더 중요한 말씀은 까마득히 잊어 먹고 말았습니다.

그 가나안은 먼저 우상의 잔재까지도 깨끗이 처리하라는 조건과 함께 
주어진 땅인 것을 완전히 잊어 버렸습니다.

또한 그 땅의 최대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훨씬 좁은 영역 안에서 스스로 선을 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축복의 약속을 받았고 가나안 땅도 받았지만, 
그 가나안 땅에서의 진정한 축복, 최고의 축복은 
다윗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땅을 나누는 일, 내 몫을 찾는 것에만 급급해 하면 
그 땅은 절대로 축복의 기업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모든 종류의 우상들을 
부스러기 하나 남김없이 제거하고 청산해야만 
그 곳에 진정한 축복이 쏟아 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나 혼자 먹고 사는 일에만 쓰려 하는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위하여 
최고와 최선의 것을 바치고자 할 때
우리의 축복의 경계도 최대로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교인이 되고 교회생활을 한다고 
절로 다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는 축복을 실제로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 속에서 '우상'을 완전히 제거하는 동시에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서원이 반드시 세워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과 
자신이 받은 생을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바치는 '충성스러운 생활'을 
통하여, 이 연말과 다가오는 새해에도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각자의 땅을 
더욱 크고 넓은 축복의 기업으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