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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3

LNCK 2022. 10. 13. 13:18

[Ep3.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내래죽어도좋습네다 |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3           롬10:17

최광 선교사의 중국에서 북한 선교 간증

 

◑제2장 찢어진 북쪽 하늘 (계속)

♣특송을 좀 부르갔시오! (제남 사역)            *산동성 지난

 

'선생님, 제가 오늘 특송을 좀 부르갔시오!'
수요일 저녁 예배 때, 바울형제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네?' 나는 깜짝 놀랐다. 

사역장에 들어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그가 이런 말을 하자 
모두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이렇게 좋은 사역장에 보내주신 주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아무래도 특송하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찬송가 545장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격조 있게 부르더니 
1절이 끝나고 2절로 넘어가면서는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울형제가 울고 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들은 웬만 해서 울지 않는다. 
이들은 처절한 죽음의 고비를 넘어온 사람들이라 
마음이 굳어질 대로 굳어져있었다. 

기뻐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슬퍼도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바울형제가 지금 울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다. 

나는 너무나 기뻤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형제들도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나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주님, 이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중얼거리며 2절을 따라 불렀다. 

이젠 통독도 신약이 40독이 넘어가니, 
모두가 녹음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제법 알아듣고 
성경 내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말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이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것을 믿는다.  히4:12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는 것 또한 믿는다. 
눈앞에 어떤 현실보다 이 말씀을 믿는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저들이 주님 앞에 나가게 될 것과 
하나님께서 이들을 북한 선교사로 만드실 것을 

나는 단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때 부터는 더욱 확신이 넘치기 시작했다. 
형제들을 모처럼 하루쯤 쉬게 하면, 조금 놀고 난 후 형제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지겨워 죽겠습니다. 빨리 사역장으로 갑시다.' 
'지겹다니?' 
'빨리 가서 공부해야 돼요. 가서 통독 하려고요!'

서로가 먼저 사역장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들은 어느새 통독과 성경공부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이때 부터는 낮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낮잠시간에 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 시간에 개인 성경연구를 하며, 간간히 주석도 들춰보고 
참고서적들도 뒤적거렸다. 

새벽기도시간도 사뭇 진지해졌다. 
이전에 마지못해 하던 기도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진실한 기도로 바뀌었다. 

또한 자기들의 기도 결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역을 시작한지 대략 3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성경 말씀이 이들 영혼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들이 어려서 말을 배우기 시작한 때부터

20~30 년 이상 세뇌당한 주체사상이... 그들의 머리에서 조금씩 빠져 나갔다. 

'선생님, 이거 모르는 얘기 아닙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입니다.' 
형제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김일성에 하나님을, 김정일에 예수님을, 그리고 당과 주체사상에 성령님을 
대입하면 성경공부가 주체사상 학습과 똑같다고 했다. 

그래서 북한에서 늘 이 얘기만 듣고 살아왔기 때문에 
성경 내용이 오히려 자기들한테 너무 익숙하단다. 

그리고 내가 매일 하는 말씀 암송을 
선주형제가 어느 날인가 부터 따라하면서 사역장 전체에 퍼져
아예 하루에 3~5 절씩 말씀 암송을 숙제로 정하였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도 밤늦게까지 말씀을 암송하거나 
조용히 성경을 공부하는 형제들을 보노라면,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른 때보다 더 기도가 신났고, 형제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기도하노라면 어느새 날이 밝곤 했다. 


♣'왜 그렇게 북한 사람들을 좋아합니까?' 

 

북한 형제들은 느닷없이 '한국이 어떻습니까, 서울은 어떻습니까?' 
라고 내게 묻곤 했다. 

오늘도 권능형제가 저녁밥을 먹다가 불쑥 내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 아들은 지금 깡통차고 다닙니까, 신문팔이 하고 다닙니까?' 

권능형제는 아직 북한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내가 '돈 없는 선교사'라 하니, 
북한에 살 때 들은 남한 어린이들 생각이 난 모양이다. 

권능형제가 이렇게 물을 만도 한 것이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세뇌당하면서 산다. 

그 지상낙원에서 죽을 먹으니, 
지구상 어디도 이밥(쌀밥) 먹고 사는 나라가 없는 줄 안단다. 
죽을 먹을 때, 죽도 못 먹어 굶어 죽는 남한어린이들을 위해 
묵념하고 먹는다고 한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지금 다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옆에서 듣던 순교전도사(한국인)가 급히 설명을 했다. 

식사 후 순교전도사가 방에 들어와서 내게 말했다. 
'학생들이 이렇게까지 뭘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한국에 대해 설명도 좀 해주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선교사님이 좀 가르쳐 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북한에 대해 궁금한 게 많듯, 북한 사람도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 대해서 묻지 말고, 북한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하나님 나라 사람들이니 
성경 얘기만 하며,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들로 다듬어지자고 강조했다. 

서로 궁금한 것을 알려 하다보면, 남북한의 첨예한 부분들로 인해 
괜한 말다툼만 생기고, 성경공부할 시간만 줄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럴 거라고, 순교전도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토요일이 되었다. 모두 이 날이 오기만 기다린다. 
바울형제는 매일 저녁 달력을 들여다보며,
토요일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워보곤 했다. 

이들이 일주일 중 밖에 나가는 기회는, 식사당번으로 시장 갈 때와 토요일,
단 두 번뿐이다. 동북 삼성 지역을 벗어나 제남(산동성 지난 시)으로 오고 부터는 
토요일이면 가까운 대학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했다. 

남한 사람들도 축구를 좋아하지만, 북한 형제들도 축구를 몹시 좋아했다. 
북한에 있을 때, 가죽으로 된 공을 차보는 것이 큰 소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날 모두 대학 운동장에서, 날이 어두워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차고 또 차며
한 주간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고, 저녁은 특별 외식을 한다. 

북한 형제들은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기초적인 욕구만 충족시켜줘도 
아주 만족해 했다. 토요일에 축구 외에 다른 것에는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좀 달랐다. 놀이공원에 가보자고 졸랐다. 
놀이공원은 어린이들이나 가서 노는 곳이지, 어른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북한에는 유일하게 평양에, 일본 조총련계 사람들이 기증한 
대성산 유원지 놀이공원이 있다. 
하지만 북한 사람에게, 평양은 일생에 단 한 번만 가 봐도 큰 자랑거리였다. 

통행허가증 없이는 타 지역을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고 (*공산주의 국가들 특징)
특별한 이유 없이는 통행허가증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같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양에 사는 사람들도 한번 가서 놀기 어려운 이곳에 
이들이 가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TV에서 보기는 많이 보았어도, 실제로는 구경도 못해본 놀이기구들에 
한껏 반해서 계속 졸라댔다. 

하여튼 이들이 마음 먹고 떼를 부리기 시작하면, 나는 도무지 견뎌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러자고 승낙을 했다. 

그런데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올 줄 알았더니 
나이 30~40 세가 다 된 사람들이, 신나게 놀이기구를 타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처음에는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도 그들과 어울렸다. 

그냥 이들과 함께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무도 30~40세의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이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이들을 이해해 주랴?'
아파하는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조용히 와닿았다. 

언젠가 박주환 선교사가 내게 물었다. 
'목사님은 왜 그렇게 북한 사람들을 좋아합니까?' 

갑자기 질문을 받자,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북한사람들에게는 이렇다 칭찬할 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한때는 나도 열심히 그 이유를 찾았지만 
주님이 이들을 사랑하시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는가?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해도, 이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었다. 


♣사과 28상자 (정주 사역)               *鄭州, 허난성 정저우  

우리는 산동성 제남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일단 집을 장만할 정도의 돈은 있으니, 다시 이사 가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기도하다가 허난성 정주가 좋을 것 같아 
형제들에게 이야기하니 대찬성이었다. 

한 달을 지내보고, 사역장에 계속 머물 지의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던 
조선족 요셉 형제에게 '함께 가겠느냐?'고 물으니 가겠다고 했다. 

기도시간마다 엉엉 우는 나의 모습과, 조금씩 변해가는 북한 형제들의 모습에서 
그는 은혜를 많이 받아, 사역을 마칠 때까지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나는) 계산툰에 있는 그의 아버지께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려드렸더니 
몹시 기뻐하셨다. 

우리가 정주로 떠날 때, 광호 선생은 우리와 헤어져 다시 심양으로 갔다. 
그리고 애인과 곧장 결혼하고, 일조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산동성

여기까지 광호 선생은 정말 나를 잘 도와주었다. 
나와 다투던 날, 무뚝뚝한 어조로 '잘 할 겁니다. 앞으로 두고 보시오!] 라던 말처럼 
그는 정말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그는 내가 사역을 잘 하도록 북한 형제들을 이끌면서 
나와 형제들의 관계가 돈독해지도록 최선을 다해주었다. 

사역장의 안전관리, 북한 보위부 특무 식별법, 중국 공안을 대처하는 일, 
조선족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역하는 일 등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광호 선생이 도맡아 처리해 주었다. 

그는 이제 독립적으로 사역장을 꾸리면서도, 
내가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또 그의 사역장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 사역장을 위해 기도해주었다. 

1998년 11월 27일, 아침 일찍 우리는 각자 짐 보따리를 들고 제남 역으로 갔다. 
모두의 짐을 합하니 큰 보따리로 17개 였다. 
형제들은 그걸 보며 어느새 부자가 됐다고 즐거워했다. 

△나도, 형제들도, 이번 여행만큼은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지난 번에는 무디형제의 담배 일로 모두에게 침울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마터면 큰 일이 날 뻔했다. 
다들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역 대합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이리저리 쏘다니며 구경하던 익두형제가, 느닷없이 역전 안경점에서 
2백 위안짜리 무테안경을 150위안으로 할인하니, 당장 그걸 사 달라고 떼를 썼다. 
지금까지 모든 형제에게 일률적으로 50위안짜리 안경을 해주었기에 
익두형제 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설명을 하며, 다음 기회에 보자고 했지만 
지금부터 150 위안을 채울 때까지 자기는 금식하겠다며 계속 졸랐다. 

우리 둘이서 실랑이 벌이는 사이 기차시간은 다가오고 
익두형제가 어찌나 고집이 센지, 결국은 내가 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150 위안을 주니 안경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러나 잠시 후 개표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모두 기차를 타러 가는데도 
그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들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하였다. 

한참 뒤 개표도 다 끝나고 기차가 떠나기 직전에, 그는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허겁지겁 기차로 뛰어가 올라타자 곧바로 기차가 출발했다. 

기차에서는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약 13시간의 여행 끝에 
무사히 정주에 도착했다. 정주에서 우리는 꽤 그럴듯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방 세 개에 넓은 거실이 있고, 난방시설까지 되어 있는 고급 아파트였다. 
형제들은 '누구 눈치 볼 일 없는 우리 집이 생겼다'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덤벙거리고 다니는 형제들에게 
사역장을 만들기 위한 역할 분담을 해 주었다. 
그러자 한나절도 안 되어 금방 그럴싸한 사역장이 꾸며졌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기도하고 찬송하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아래 위층에서 거센 항의가 들어왔다. 

고민 고민하다가 방음장치를 만들기로 했다. 
누가 하겠냐고 물었더니, 바울형제가 씩씩하게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돈을 주며 스티로폼을 사서, 통독실 벽에 붙이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바울형제와 요한형제, 기풍형제가 
얇고 기다란 각목과 여러 장의 낡은 카펫을 가득 사 들고 돌아왔다. 

내가 놀라며 '이걸로 뭘 할 거냐?'고 하니 
'방음장치를 만들라고 하지 않았냐?'고 바울형제가 도리어 내게 물었다. 

내가 '방음장치는 스티로폼으로 하지 않냐?'고 하자 
형제들은 대답 대신 한숨을 쉬며 물었다. 
'선생님, 스티로폼이 뭔지 영어로 말하지 마시고, 조선말로 해주세요!'
 
내가 '스티로폼이 뭔지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해보지 않은게 문제였다.
 
그에게 하얀 스티로폼을 설명했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동문서답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이들을 데리고 잡화점에 갔지만 
이번에는 스티로폼을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물건을 쌓아놓은 창고로 직접 들어가서 
한참 만에 겨우 스티로폼을 찾아냈다. '이거예요. 이게 바로 스티로폼 이에요.' 

이번에는 그가 놀라서 물었다. 
'이거이 뭡니까? 머리에 터럭 나고 이런 건 본 적 없습니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스티로폼을 가득 사 들고 사역장으로 돌아왔다. 

정주에 와서 좋은 집도 마련했으니, 이제는 좀 안정을 찾겠거니 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평온한 데, 무슨 이유인지 이사 온 지 일주일이 지나도 
개인 짐들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뭐 하나라도 생기면, 짐 속에 꽁꽁 싸놓고 당장 떠날 태세로 생활했다. 
그런 형제들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주님, 어찌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저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며칠을 이 문제로 기도 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께서 '사과를 사라!'는 감동을 내게 주셨다.  *지혜의 말씀
'사과? 사과와 평안이 무슨 관계가 있지?' 

오전 통독이 끝날 때쯤, 형제들에게 '혹시 사과 먹고 싶냐?'고 물어보았다. 
'좋죠. 샘,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나는 뛸 듯이 기뻐하는 형제들을 데리고 장마당에 나갔다. 
사과 값은 예상대로 별로 비싸지 않았다. 

문득 어릴 때 가을이 되면, (경북에서) 부모님이 겨우내 먹을 과일을 
광에다 쌓아놓곤 했던 기억이 났다. 

'그렇지!' 순간 번쩍하며 무언가 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 몇 달치 먹을 사과를 쌓아 놓자! 그러면 여기서 오래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차리고 안정을 찾겠지...' 

주님의 생각은 정말 놀라웠다. 주님은 이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사과를 28상자나 샀다. 
베란다에 사과 궤짝을 가득 쌓아놓고, 나는 형제들에게 툭 한마디 던졌다. 

'이 사과 다 먹으려면, 삼 개월은 걸릴 거예요!'
형제들은 내가 이렇게 많은 사과를 살 줄 몰랐는지, 입을 헤벌리고 좋아하며 
다음 날부터 짬만 나면 사과를 먹어댔다. 

그와 함께 짐 보따리도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졌다. 
옷은 옷장에, 세면도구는 화장실에, 개인 소지품은 각자의 침대 밑 서랍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으면서, 
이곳에 눌러앉아 3개월 동안 사과먹을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는 너무 행복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3개월이라는 시간이 성에 차지 않는지 
이들은 내가 기절할 정도로 사과를 먹어치웠다. 

밥 먹은 후에 먹고, 쉬는 시간에 먹고, 통독 하다가도 먹고, 
자다가도 일어나서 사과를 먹었다. 
3개월 갈 줄 알았던 사과는, 한 달이 지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곳에 더 있으려면 사과를 또 사야 했지만, 사과때문에 얻은 것이 너무 많았다. 
짐 보따리만 사라진 게 아니라, 짐 보따리와 함께 
형제들의 크고 작은 다툼들도 함께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죄사함의 기쁨과 처음 맞는 성탄절

박주환 전도사가 교회를 사임하면서, 우리 사역장으로 왔는데 *C시 한인교회
순교자 영화와 일반 영화 CD들을 많이 가져왔다. 

나는 손양원, 이기풍, 최권능, 주기철 목사님들의 일생을 영화로 보며 
새삼 많이 울었다. 형제들도 기대 이상으로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나도록, 밥 먹을 때나 쉬는 시간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여러 질문을 했다. 

'손양원 목사님의 자녀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는가?' 
'주기철 목사님의 식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등등 
마치 청소년들이 스타의 사생활에 대해 궁금해 하듯 
영화 속의 주인공에 대해 꼬치꼬치 내게 캐물었다. 

형제들은 순교자 영화뿐 아니라, 벤허, 쿼바디스, 타이타닉 같은 영화를 볼 때도 
눈물을 많이 흘렸다. 모질게도 울 줄 모르더니 
사역장에서 하루하루 지날수록, 얼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처음에 이들을 만났을 때, 옷차림도 그렇고 말하는 것이나 
정신없이 여기저기 덤벙거리는 것이, 솔직히 귀신 들린 사람 같이 보였다. 

특히 옷차림이 너무 누추해서, 나는 한국에 갔다올 때마다 
선교회나 교회에서 모은 헌옷을 큰 가방에 담아 오곤 했다. 

사역장을 방문하는 한국 사람이 있으면, 
형제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을 갖다 달라고 꼭 부탁을 했다. 

형제들의 옷차림을 깔끔하게 바꿔주고 싶었고 
외출할 때 정장 차림이면, 사람들의 의심을 덜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에는 아무렇게나 입던 형제들이, 이제는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맨 
정장 차림으로 외출하기를 좋아했다. 
머리도 되도록 짧게 깎고(중국 남성 문화), 모든 것에 단정해지려 했었다. 

한국에서 옷이 오면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겠다고 다투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서로 먼저 고르라고 양보도 할 줄 알았다. 

무슨 일이든 일단 화부터 내더니, 이제 모든 일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옛날에 모습과는 너무 많이 달라져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함께 살면서 성경을 통독 한 것밖에 없었다. 
나는 말씀이 친히 저들을 변화시키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경을 통독시키는 일에 집중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나는 이 말씀을 참으로 믿는다. 

이렇게 믿음으로 시작한 통독이, 
5개월 가까이 되자 점차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신약 60~70 독, 구약 10여독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말씀도 2백~3백 절 가량 암송하고 있었다.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집중적인 회개 기도시간을 갖기로 마음 먹고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었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하게 하였다. 

항상 제 1순위로 생각하던 안전을 위한 기도도 뒤로 미루고 
일주일 동안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 기도만 시켰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아 하더니 
서서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북한이나 중국에 살면서 죄라는 죄는 다 짓고 살면서도 
한 번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죄인중에서도 으뜸 죄인이라고 깨닫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그 죄를 깨끗케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회개가 터지고.. 기도 시간마다 울음바다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죄 때문에 근심하며 슬퍼서 눈물 흘리더니 
며칠이 지나자 자신의 죄를 사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울기 시작했다. 

늘 근심과 불안에 떨고 있던 이들의 눈동자에 기쁨의 빛이 반짝거렸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북한선교에 대해 
'시기상조다.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북한 사람들은 너무 힘들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 태평양 바다에 돌 던지기다' 라고 했지만.. 아니었다. 

시기상조도 아니었고, 태평양에 돌 던지기도 아니었다. 
죄 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맛본 이들은, 이때부터 무섭게 변해갔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새벽과 오후기도 시간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전엔 북한에 있는 동포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것만 슬퍼했었는데 
이제는 이러한 구원의 기쁨을 모르고 죽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눈물흘렸다. 

길을 갈 때도 기뻐서 펄쩍 펄쩍 뛰었고, 거지를 만나면 돈을 쥐어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다. 변화되는 자신들의 모습에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나는 이 형제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너무나 소중했다. 
어렵고 힘들어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북한선교를 
형제들 자신들이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김일성 김정일을 위해 총폭탄이 되겠다고 맹세했던 그들이 
이제부터는 새 생명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고 고백했다. 

'순교합시다! 북조선에 예수의 피를 뿌립시다!'
그저 아침저녁 인사로 해왔던 말들이, 이제는 진실한 신앙고백이 되었다. 

형제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들이 총알받이가 되겠다고 했다. 
형제들의 이런 고백을 듣고 나니, 
그동안의 모든 아픔을, 나는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 것 같았다. 

△나는 지난 5개월간 혹시 (형제들에게) 맞아 죽지나 않을까 무서워 
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한 마디도 못했다. 

장기적인 계획 같은 건 엄두도 못 내며 
그저 하루하루 무사히 지나가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형제들의 변화와 함께, 나의 기도도 변했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며 
이것도 해결 해주시고, 저것도 해결해주십시오!' 라던 내 기도가 

'하나님, 이제부터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이들을 변화시켜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로 바뀌었다. 

'하나님, 저는 1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북한 사람이 북한 선교사로 세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다' 
라고 했었다. 

하지만 주님은 '북한선교는 북한 사람들이 해야 하며, 
또 이들은 할 수 있다!'는 것을.. 기도 가운데 내게 말씀해 주셨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얼마나 북한 선교를 위해 많이 기도해 왔는가?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주님 앞에 기도 했다. 
'주님,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수십년간 북한을 위해 기도해 온 그 기도! 
그 기도의 응답을 다 제게 주십시오! 

지금 세워진 이 북한 출신 선교사들을 통해 
2기, 3기.. 앞으로 많은 북한출신 북한선교사들을 양육하겠습니다...' 

이제 오전 통독 시간이다. 이제는 누구도 졸지 않는다. 
모두가 조용히 앉아 녹음기 소리에 귀 기울이며 
성경책에 메모도 하고, 은혜받은 구절에 표시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될까봐, 화장실도 쉬는 시간에 다녀온다. 

익두형제가 조용히 일어나 나가려했다. 오늘은 그가 식사 당번이기 때문이다. 
나는 갑자기 아내가 끼니때마다 해주던, 계란프라이 생각이 나서 그에게 말했다. 

'익두 형제, 오늘 계란프라이가 먹고 싶은데.. 할 수 있어요?'
'걱정 맙쇼!' 그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다른 형제들은 그게 뭔지 다들 궁금해하면서, 
나와 익두 형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설마 계란프라이를 모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형제들과 박주환 선교사, 순교전도사와 함께 
기대에 부풀어 식탁에 앉았다. 

하지만 잠시 후 식탁에 올라온 것은, 계란프라이가 아닌 
계란으로 만든 두부같이 생긴 누런 덩어리였다. 

(나) '이게 뭐야?'
(형제들) '우와 이게 그거 뭐야? 계란후레이라는 거이가?' 

나는 실망했지만 형제들은 감탄했다. 
살면서 이렇게 외국어가 들어간 음식은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계란 프라이는 이런 게 아니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익두형제가 우기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거 계란 프라이 맞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겁니다.' 
 
북한에서는 1년에 계란 한 두 개도 먹어보기 어렵다고 하니 
계란 프라이라는 말은 애초에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계란 30 개를 한꺼번에 프라이 팬에 깨어 넣고 익혔던 것이다. 

형제들은 맛있게만 먹는다. 
두부처럼 생긴 '익두식 계란프라이'를 바라보니 또 코끝이 찡해왔다. 
'북한식 계란프라이'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기로 작정하니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며칠 뒤 중국에서 북한 형제들과 처음 맞는 성탄절이었다. 
개혁과 개방의 흐름이 시작된 이후로, 중국에서도 성탄절은 큰 명절이었다. 

성탄절이 되면, 호텔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함께 
'축 성탄 노인' 이란 큰 글씨를 붙여놓고,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선전한다. 

북한 형제들은, 예수를 믿고 일생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이 너무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순교전도사가 예배를 인도하며,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 날의 의미에 대해 
여러 면으로 잘 설명해 주었다. 

오후에는 정주 시내 공원에 가서, 사진도 찍고 산책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밤늦게 사역장으로 기분 좋게 돌아왔다. 

그날 공원을 걸으며.. 기풍형제가 북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북한에서는 바나나 하나만 먹어도, 6개월 이상 바나나 먹어 봤다고 자랑한단다. 

그 공원의 가로등 불빛처럼, 그렇게 밝은 불빛은 
북한 어디에도 볼 수 없다고 한다. 
호롱불도 없어서, 해가 지면 다들 잠자리에 든다고 한다. 
기풍형제는 신나게 얘기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가슴이 아파왔다. 

단둥에서 보았던 북한 신의주의 캄캄한 야경이 떠올랐다. 
우리는 저 어둠을 몰아내야 한다! 

많은 선교사가 북한의 이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주님 앞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을 몰아낼 유일한 방법은 빛이다. 빛이 비춰지면 어둠이 물러간다. 
우리 몸에 그 빛을 밝혀.. 어둠 속에 비춰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다! 


♣북한 출신 북한 선교사 (정주 사역)          *鄭州, 허난성 정저우

모든 형제가 사역장의 일과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하루 8 시간의 성경통독과 2시간의 기도, 말씀암송이 완전히 체질화되었다. 

나는 그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선교사로서의 리더십 훈련단계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들에게도 나와 동등한 선교사 자격을 주고, 
서로를 부를 때 형제 대신 '선생'으로 부르게 하였다. 

사역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반드시 그들의 동의를 거쳐 일을 진행시켜 가면서 
사역비 문제도 철저하게 함께 의논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그동안 내가 하던 것처럼, 사역장을 책임지고 이끌게 했다. 

나는 학생의 한 사람처럼 뒤로 물러나서 참여했고 
이제 그들이 선교사가 되어, 새벽예배인도부터 시작하여 모든 일과를 진행해 갔다. 

대신 그 주간의 책임을 맡은 '선생'은, 일주일간 나와 함께 방을 쓰며 
매일 그날의 일과 운영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함께 기도했다. 

나를 돕는 순교 전도사와 박주환 선교사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나라의 중대사를 맡긴듯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나도 처음 시도해보는 일인지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조심스러웠지만 
오랫동안 기도로 준비해 왔기에,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계속 밀고 나갔다. 

1월 4일을 첫 설교 날로 잡고, 2주간의 시간을 주어 각자 설교 준비를 하게 했다. 
설교날이 잡히자 모두 밤잠을 자지 않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난생 처음 해보는 설교준비는, 이들에게 쉽지 않은 과제였다. 
'선생님, 설교준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이나 알고 합시다!' 

고민고민하던 '선생'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나는 이들이 말씀을 많이 깨닫고 있기에, 충분히 알아들으리라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이들의 설교준비를 도왔다. 

우선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쓸 지 몰라 난감해 하는 '선생'들에게 
철저하게 다음과 같은 절차를 숙지시켰다. 

1 본문을 설정하고, 그 본문을 무조건 50번 이상 읽는다. 
2 본문의 앞 뒤 연결된 사건들을 20 번 이상 읽는다. 
3 읽은 본문을 한 시간 이상 묵상한다. 
4 본문 중에서 핵심과, 서론 본론 결론을 찾아낸다. 

5 QA 주석을 3번 이상 읽고 틀린 부분이 없는지 점검하고, 관주도 찾아간다. 
6 2시간 이상 기도하며, 먼저 자신에게 적용하고 나서 설교 듣는 대상에게 적용한다. 7 작성한 설교문을 철저하게 암송한다. 

준비하는 '선생'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준비하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선생은 밖에 나가 걸으면서 준비했고 
죽어라 주석과 참고 서적을 뒤적거리며 말거리를 찾아내는 선생도 있었다. 

1999년 1월 4일, 마침내 북조선이 기뻐하고 우리 민족이 기뻐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북한출신 북한선교사들이 
첫 설교를 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왔다. 
북한선교시작 5개월 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였다. 

이들이 2주간에 걸쳐 악전고투하며 준비한 첫 설교를 위해 
박주환 선교사, 순교전도사와 함께 책상을 거실로 옮겨 강대상을 만들고 의자를 옮기고... 

이들의 설교평가를 위해 우리 셋은 노트를 준비하고 제일 앞 줄에 앉았다. 
드디어 한 사람씩 강대상에 올랐다. 

첫번째 강대상에 오른 선생은 얼마나 긴장했는지 설교를 시작하면서 
처음에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앞에 앉아있는 나와 박선교사, 순교전도사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기의 과거에 대해 드라마처럼 쭉 이야기하고는 슬며시 강대상에서 내려갔다. 

두번째 선생은, 그래도 조금은 침착성을 찾았는지, 기도까지 깔끔하게 끝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설교를 진행해 나갔다.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5:1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렇게 말씀을 인용하고 나서 
그 말씀에 비춘 자기 생활이 결함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다른 선생들이 갑자기 키득키도 웃었다. 
'어~ 이건 생활총화 아닙니까? 아이구 이건 주말 생활총화 입니다.' 

북한에서 인민학교 3~4학년 무렵부터 정년 퇴직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주간 생활 총화' 즉 자아비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김일성 수령의 교시을 인용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의 일주일 생활을 돌아보면서, 잘못했던 일들을 반성하고 
역시 그 말씀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서 비판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또 다른 선생의 차례였다. 
이 선생은 강대상에 서서 5분은 족히 묵도하더니, 간신히 기도를 시작하는데 
역시 지난 날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하나님, 나는 북한에서 강도를 했으며, 세 명을 죽인 살인범입니다. 
이런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주의 종으로 설교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기도하는 선생의 표정이나 말하는 태도로 보아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선생의 차례가 왔다. 
그래도 이 선생은 대중 앞에 나선 경험이 몇 번 있었는지.. 설교는 그런대로 잘했다. 

하지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30분 가량 되는 설교시간에 
안경을 70 번은 넘게 고쳐 썼다. 

이렇게 한 사람씩 설교가 다 끝나자, 우리의 평가는 
역시 성경을 많이 읽은 선생들이라, 방법만 좀 다듬어지면 
귀한 설교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돌아가며 새벽예배를 인도할 때 
선생들 모두 열심히 기도하며 설교준비를 했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한국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보다도 
충실하게 말씀을 더 잘 전하는 것 같았다. 
한 두 선생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나의 기대 이상이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평양을 십자가로 수 놓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어 
하나님 앞에 감사했다. 

'그동안 하나님, 제 생애에 이 1기생 여덟 명만 하나님의 종들로 세워주세요. 
그리고 저를 천국으로 불러가도 좋습니다.' 라고 기도해 왔기에 더욱 감사가 되었다. 
설교가 끝나고 우리는, 이 날을 명절처럼 잘 보내기로 했다. 
폐병을 앓고 있는 칼빈선생도 잘 먹이고 
설교준비하느라 수고한 다른 선생들도 잘 먹이고 싶었다. 

마침 음식솜씨가 좋은 바울선생이 식사당번 날이라, 모두가 잘 됐다고 좋아했다. 
바울선생은 아침부터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다. 

'이 천하의 바울이가 돼지고기 회를 만들어 줄 테니 기대를 하시오!' 
나는 그 돼지고기 회라는 게 무엇인지.. 아침부터 못내 궁금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돼지고기 회라는 것을 보는 순간 흠짓 놀랐다. 

아무 양념도, 조리도 하지 않고, 피가 묻어 있는 돼지의 날고기를 
뚝뚝 썰어 상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아~ 이 돼지고기를 말임다.. 옆에 있는 식초에다가 뚝뚝 찍어서 잡수시면 되겠슴다'
바울선생은 이렇게 설명하면서 몸소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나는 먹어볼 엄두도 못 내고, 너무도 맛있게 먹는 그를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다. 

순교전도사도 아무 말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이렇게 먹을 수도 있네?' 

바울선생은 이날은 아예 특별 서비스를 하기로 마음 먹었는지 
저녁에는 큰 잉어 두 마리를 사왔다. 

나는 한국에서 먹던 회 생각이 나서, '회를 해서 먹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샘, 내 그렇지 않아도 잉어 회를 하자고 사왔지 않겠습니까' 

그는 자기 생각을 알아준 것이 기쁜지 반색을 했다. 
나는 또 큰 기대를 하고,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잉어를, 초장과 식초에 절이다시피 해서 '회'라고 올린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그에게 한국 회를 설명해 주었지만 
'스티로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회'도 이해하지 못했다. 

'물고기를 어떻게 날 것 채로 먹을 수 있습니까? 그딴 소리는 하지도 마시오.
믿기지도 안 습니다!' 

돼지고기는 날 것을 먹으면서, 잉어는 절대로 날 것을 먹을 수 없다고 박박 우겼다. 
그러나 김치와 된장찌개는 우리 남한 식과 같아서, 별로 불편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무튼 이날은 이모저모로 즐거운 날이었다. 


♣피어나는 생명 (정주 사역)

오늘도 개인 기도 시간에, 습관적으로 사역비 문제로 기도하다가 
문득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사역비가 다 떨어진다는 생각이 났다. 

아내에게 전화하려고 밖으로 나와,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역전으로 갔다. 
요즘 사역장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느라, 대구의 집에 전화할 때나 
조선족 교회 집사님들이나, 주광호 선생 등에게 전화할 때는 
일부러 사람들이 북적대는 역까지 간다. 

중국은 일반 전화, 공중전화할 것 없이 
상대방의 번호가 찍혀서 통화 내용이 도청되었을 때 
사역장의 위치가 (가까운 기지국에) 금방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주에서의 삼 개월 나의 비자 기간도 다 끝나가고 
앞으로 몇 달간 지낼 사역비도 마련해야 했다. 

박전도사와 순교전도사에게 사역장을 부탁하고, 나는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으로 가는 길에 청도에서, 동생 최휘석 전도사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우리 선생들에게, 10 일간 성막 강의를 해주기 위해 중국으로 오는 참이었다. 
기차가 연착되어,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 늦게 청도 공항에 가니 
중국에 처음 와보는 동생은 약간 불안해하고 있었다. 

청도 역으로 가서 기차표를 끊어주며 
여기서부터는 '네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라'고 했다. 

어이없어 하는 그를 남겨 두고, 나는 다시 공항으로 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한국에 도착하여 먼저 김의환 총신대 총장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총장님께서 잠실신천교회 주일오후 예배시간에 
선교보고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셨다. 

주일날 신천교회에서 선교보고를 마치고 나니 
담임목사께서 은혜많이 받았다고 하시며, 계획에는 없지만 
다같이 헌금 한 번 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리고 지갑을 다 턴다.고 하시며 빈지갑을 흔들어보이자 
성도들도 '아멘!' 으로 답하였다. 

그 자리에서 311만원이 모아져, 나는 너무 놀라고 또 기뻤다. 
다음날 기쁜 마음으로 MSM선교회 사무실에 가보니 
일본 선교대회를 준비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부족해 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헌금을 좀 하라'는 감동을 주셔서 
이번에는 사역비 모금이 쉽게 될 줄 알고 
신천교회에 모금된 313만원 중에서 2백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더 이상의 헌금은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마냥 헌금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어서,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지만 
여비를 제하고 나니 50만원도 채 남지 않았다. 

이번에 모금된 돈으로 4개월을 살아야 하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 돈을 가지고 사역장에 와보니, 쌀이 다 떨어져 있어서, 우선 쌀부터 사다놓았다.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사역비 가져오기를 고대하던 선생들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미안하면 할수록, 내가 잘못했으면 했을수록 
'진실하게 있던 그대로 보고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욕먹을 결심을 단단히 하고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구동성으로 나를 칭찬해주는 것이 아닌가? 

'샘, 잘했습니다. 걱정 맙시오' 
'아이코 선생님, 정말 잘하셨슴다. 하나님이 또 주실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 우리가 언제 돈 걱정 했으니까? 일 없습니다.' 

나는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나운 북한식 비판만 각오하고, 나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의외였다. 

북한 선생들을 바라보니, 정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표정들이었다. 
알 수 없는 격정이 울컥 치밀어, 나는 황급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이 하염없이 두 볼을 타고 내렸다. 저들에게서 생명이 피어나고 있었다. 

저들은 서로 미워하며,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저들이,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며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선교사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 수많은 고비를 넘으며, 
뼈를 깎는 고통을 웃으며 참는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주님만 바라보며 서 있는다. 
선교사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는 것이다. 

바로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나는 보았던 것이다. 
나는 침대에 큰 대 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의 영혼은, 내가 누운 작은 방을 벗어나, 거대한 우주로 훨훨 날아올랐다. 

'태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 사역장에 오셨습니다. 
우리 사역장에 조용히 자리잡고, 우리와 함께 살고 계셨습니다. 

나는 북한 선생들의 등 뒤에서, 조용히 서 계시면서 
나를 보고 웃으시는 빗 대신 그분을 뵈었습니다!' 

'주님!' 하고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감사합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저들을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그냥 계속 울기만 했다. 

주님의 임재가 너무나 황홀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 주님의 임재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북한 선생들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생들은 서로 소근거리면서 설교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득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지금 주님께서 저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아름답게 자리 잡고 계신지.. 
그리고 주님께서 이 사역장에 얼마나 큰 사랑으로 함께 하고 계신지.. 
그걸 아직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앞으로도 저들이 다 알 수 있을까?' 

나는 온 사역장에 가득한 그분의 기운에, 마음껏 내 몸을 내어드리며 
다시 내 방에 돌아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형제들가운데 (임재해) 계신 주님'을 의식하게 된 것은 
이들이 회개기도를 시작할 때였다. 
자신의 죄악상을 깨닫고 주님 앞에 거꾸러지면서부터였다. 

주님이 가까이 오시자, 선생들은 그동안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사실(죄)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주님이 이들의 눈을 열어주시는 순간이었고 
내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이들은 스스럼없이 주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인정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믿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다시 한국으로는 나갈 수 없으니 
C시에 한번 다녀오겠다.고 선생들에게 말하고 C시로 떠났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몇 분을 만났으나, 헌금은 전혀 없었다. 
3일만에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기차 3층 침대칸에서 반나절은 족히 울었다. 

황금을 딴 데다 써버린 나에게, 선생들이 차라리 욕이라도 실컷 했다면 
이렇게까지 가슴 아프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하나님, 제게는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 가족들에게도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탈북자들.. 얼마나 귀합니까? 
이들이 먹고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은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나는 내내 울면서 정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역장에 돌아와 보니,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박선교사를 통해 6천 위안이 헌금되도록 해놓으신 것이다. 
모든 것을 여호와이레로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선교사가 가장 성숙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 여호와이레의 섭리를 경험할 때라는 
것을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역비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사역을 시작한 후 가족들과 많이 헤어져 보았지만, 이번이 제일 힘들었다. 

아내도 많이 지쳐 있었고, 아이들도 아빠인 내게서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아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사역비 생각에 까맣게 잊고 있다가.. 가족 걱정에 방에 들어가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기도하려 해도 아내와 아이들 얼굴만 떠오르고, 설움이 북받쳐 기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주님께 떼를 썼다. 
'하나님, 저를 북한 선교사로 부르신 거 맞습니까? 
그러면 우리 가족을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무조건 책임져주세요!

저는 이 사역장을 떠날 수 없는 거 잘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하나님!' 

도저히 집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삼 일 금식에 들어갔다. 
사랑하는 아내와, 올해 중학교 들어가는 큰 딸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기로 했다. 

그런데 금식 첫 날부터 몸이 떨리면서,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깨어지듯 아팠다. 
그동안 너무 과로했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금식을 멈추고, 통독 시간이 끝나자마자 방에 들어와 누워버렸다. 
손가락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아파왔다.

P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