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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35장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LNCK 2022. 10. 13. 20:17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민35장     2013.10.13 

출처 https://blog.naver.com/karamos/22031571965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큰 땅을 배분받은 사람은 많이 내놓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내놓고 해서 
마흔 여덟 개의 성읍을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 사방 이천규빗의 들판도 레위 지파 사람들의 가축을 
먹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35:5

이 마흔 여덟 개의 성읍 가운데 여섯 개의 성읍을
 하나님께서 도피성으로 지정하셨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세 개, 그리고 요단강 서편에 세 개입니다. 

▲예화 / 시몬 비젠탈 이야기                                 주1)

△구약성경 중에서 모세오경에만 도피성 제도가 네 군데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35장, 여호수아 20장, 신명기 4장과, 1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만큼 도피성 제도를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도피성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자비는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의 도피성이 되시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알아야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이 존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이 다 존엄합니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고 피를 흘린 사람은 
반드시 똑같이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살인죄는 사형으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의를 시행할 수 있는 주체는, 
국가나 정상적인 자격을 가진 사람(사법기관)이어야 합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는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민35:33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사람(살인자)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그 땅은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민35:31 
또한, 부자라고 살인한 뒤에 돈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이거나 권력이 많은 자라도 남의 생명을 부당하게 빼앗은 사람은 
동일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살인죄가 고살죄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죽이려고 하는 동기나 의도가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 민35장 16~21절에 무엇이 고살죄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제시되어 있죠. 
-손에 연장을 가지고 사람을 죽였다면 그것은 고살죄입니다. 
-미움이나 원한을 가지고 사람을 밀쳤는데 죽었다면 그것도 고살죄입니다. 

하지만 민35:22~23절을 볼 때, 아무런 원한이나 미움이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쳤거나 돌을 던졌는데 맞아서 죽게 되면 
과실치사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과실치사도 무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복수하는 자가 되어 
과실치사자를 만나면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피를 복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민 35:19). 

“피를 복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흘린 죄가 없나니” (민 35:27). 
‘복수하는 자’가 과실치사자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공의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실로 지은 죄든/ 고의로 지은 죄든 
모든 죄에 대해서 정당한 형벌을 부과하실 권세가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6:23). 

어떤 죄든지 그 형벌은 사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육신의 사망을 형벌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는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려면, 늙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늙어 죽는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여 
아담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사망으로만 죗값이 끝나면 
그나마 좋겠지만 육신이 죽고 난 후에 또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죽은 후의 심판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3~14). 

우리의 죗값은 육신의 사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의로 지은 죄든/ 과실로 지은 죄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이런 죗값을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니까 도피성 제도는 
먼저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2.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배분해주실 때 
요셉에게는 두 몫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모두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몫씩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열두지파인데 요셉이 두 몫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땅을 열셋으로 나눠야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가 큰 몫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서 48개의 성읍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35:7

왜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느냐? 
그것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예언할 때 레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창49:7). 

그 결과 레위 지파는 48개 성읍만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레위는, 누이를 겁탈한 자를 그냥 두는 것이 맞느냐며, 정당방위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정당방위를 넘어선 과잉방위였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에게 주신 48개 성읍 가운데 
6개 성읍은 하나님이 도피성으로 지정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이 성읍이라 너희가 레위인에게 모두 사십팔 성읍을 주고 
그 초장도 함께 주되” (민35:6~7). 

레위인들도, 조상이 살인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기 때문에 
과실치사로 살인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짓고 용서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위가 살인죄를 저질러 가나안 땅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에게 준 48개 성읍 가운데 6개 성읍이 도피성으로 지정된 것입니다.

▲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도피성으로 가는 길 외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수20:1~6절을 보게 되면 과실치사를 한 사람은 
도피성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자기가 저지른 사고를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로들이 그의 말을 듣고, 도피성에 들여서 
한 곳을 내어주고 먹을 것을 주며 
복수하는 자가 와서 그 사람을 내어놓으라고 해도 
내어주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회중 앞에서 살인자에 대해 자세한 재판을 합니다. 
회중들이 배심원이 되어 재판하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과실로 살인했다는 것이 인정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복수하는 자가 와서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도피성 밖으로 나가게 되면, 
복수하는 자의 손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있던 사람이 죽게 되면 
그때는 도피성에서 해방되어 자기 집으로 가도 안전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이 자기의 죽음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제도입니다. 

1)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세 개씩 있습니다. 
왜 도피성을 동편과 서편으로 흩어놨느냐?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혐원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나 
두렵건대 복수자의 마음이 뜨거워서 살인자를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미쳐서 죽일까 하노라” (신 19:6). 

도피성으로 가는 길이 멀면, 복수하는 자로부터 죽임을 당할까봐 
어느 지파에서도 가깝고 쉽게 갈 수 있도록 흩어놓은 것입니다. 

2) 도피성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방인도 가고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도 갈 수 있습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민35:15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타국인이나 여행객이나 
어떤 사람이라도 과실로 죄를 범했을 때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도피성은 24시간 열려있었습니다. 닫혀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도피성 문 앞까지 와서 문이 닫혀 죽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4) 도피성 안에는 과실치사자가 먹고 살 수 있는 음식들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맞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굶어 죽지 않도록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도피성 제도를 빈틈없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십니까!


◑3.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도 ‘더 나은 도피성’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도 ‘더 좋은 도피성’(better refuge)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6:18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피난처에 피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 중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죄가 있지만, 피난처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피난처에는 용서가 있고 소망이 있고 안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난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용서하시겠다고 맹세하셨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분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성도가 피난처를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좋은 피난처이십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롬10:6~7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천국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8~10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우리의 입술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면 
그 즉시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실 정도 만큼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며 도피성이시라는 것을 믿으면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거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과실로> 지은 죄뿐만이 아니라 
<고의로> 지은 죄까지도 공의의 심판에서 해방시키시는 도피성이 되시기 때문이죠. 

구약의 도피성에는 과실로 죄를 지은 사람만 받아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의든 과실이든 큰 죄든 작은 죄든 
모든 죄인들을 다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죄의 결과’는 따르고 징계도 받지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7:25 
아주 극악한 죄인까지도 구원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죄가 큰데, 용서받을 수 있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받습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무슨 죄가 있냐며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은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느냐/ 밖에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어떤 죄라도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일시적인 피난처가 아니라 
영구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6:37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는 사람은 아무도 내어 쫓지 않습니다. 
용서가 있고 평안이 있으며, 소망이 있고 영생이 있으며,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죽긴 죽지만 다시 살아납니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둘째 사망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기 때문에 첫째 사망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그 날개 그늘 아래 피하러 온 성도들을 
영원토록 보호해주십니다.


▲구약의 도피성 제도는 과실로 죄지은 사람에게 
두 가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피성 안으로 자기가 들어와야 됩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도피성에는 부자가 되려고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병 나으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똑똑해지거나 지혜로워지기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죽지 않고 살려면 도피성으로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생명을 보존해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대신 가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아내가 교회 다니기 때문에 천국에 갈 때 아내 치맛자락 붙잡고 
가겠다고 농담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렇게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녀도 저절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들어와야 됩니다. 

둘째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는 도피성을 떠나지 말아야 됩니다.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죄인된 인간에게도 두 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피해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대제사장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성도의 죄가 용서받는 놀라운 진리를 예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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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으로 피하라      민35장

출처 https://blog.naver.com/karamos/80050903288

◑서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허용하신 제도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허용을 하시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폐지하신 제도입니다. 

▲하나는 유대인 족장들의 일부다처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분명히 일부일처제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 족장들에게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신 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정적으로 허락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피에 의한 복수 제도입니다.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경찰제도가 없었습니다. 
검사도 없고 판사제도도 제대로 정립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질서 있게 조사를 하고, 재판을 하며, 
형을 집행하는 제도를 갖출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친족 무르기’ 혹은 ‘기업 무르기’라고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가족을 보호하고 
공의를 시행하는 제도였습니다. 친족 무르기라 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친족이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당했을 때, 그 친족을 도와서 원상을 회복시키는 제도죠.

친족 무르기는 대체로 네 가지 경우에 적용되었습니다. 

1) 첫째로 친족이 빚에 몰려서 노예로 팔렸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빚을 청산해주고, 그를 노예에서 해방해 주는 경우였습니다. 

이때 그 노예를 산 사람은 “나는 돈을 받지 않고 이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겠다”
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무조건 물려줘야 되는 거죠.

2) 둘째로 친족이 빚에 몰려서 땅을 팔았을 때, 
그 가까운 친족이 빚을 갚아주고 땅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경우입니다. 

첫째의 경우처럼 그 땅을 산 사람도 “나는 이 땅 다시 팔지 않겠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3) 친족이 후손이 없이 죽은 경우, 죽은 친족의 아내를 취해서 자손을 낳고 
그 중 첫 아들을, 죽은 후손의 대를 잇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이를 소위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25:5-6절을 보면, 형이 결혼을 했는데 죽어서 아내가 혼자되었을 경우, 
아우가 형수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자식을 낳아 
그 맏아들을 형님의 아들로 입적시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친족이 살인자에 의해 죽었을 때, 가까운 친족이 복수를 해주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을 ‘피의 복수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원수를 갚는다고 할 때에 ‘복수한다’는 표현을 쓰지만 
영어에서는 ‘revenge’라는 단어와 ‘avenge’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둘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감정을 가지고 사람에게 복수한다는 표현은 ‘revenge'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감정을 가지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동일하게 피를 흘려서 공의를 시행할 때는 
‘avenge’(정의의 복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피의 복수자’는 ‘avenge’의 의미에서 원수를 갚아주는 것입니다.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 avenger>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고자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혹자는 ‘사형제도는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성경에서 ‘살인자를 죽이라’고 명하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의도가 아니라 
도리어 생명을 존중하고, 무죄한 피를 흘림으로써 
더러워진 땅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민35:33절에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서 피가 흘려지면 그 땅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더럽혀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살인한 사람의 피를 반드시 흘려야 그 땅이 깨끗하게 되고, 공의가 회복되며, 
생명존중 사상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개인이 복수하고 피를 흘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국가가 제도화되어서 사법제도를 가지고 이를 시행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니 가까운 친족이 복수하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내가 우리 친족의 억울함을 복수해야 되겠다”고 말하지 마세요. 
이것은 그 옛날 국가 제도가 미비한 시대에 하나님의 자구책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인했다고 할지라도 
모두 똑같은 동기와 목적으로 살인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자, 즉 복수하는 자가 죽일 수 있는 대상은 
고의적으로 살인을 한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의 친족이어야 하죠.

‘고의성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 경우에만 ‘복수자’는 그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민35:31절에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경우에는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도피성이 적용 안 됩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의도가 없이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과실치사도 죄는 죄입니다만 
그런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죽이는 경우와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19:5절에 기록된 것처럼, 산에서 벌목을 하는 도중 그만 도끼가 
자루에서 빠지는 바람에 이웃이 죽게 된 경우입니다. 

물론 기업 무르는 친족, 즉 피를 복수하는 사람은 
고살자(故殺者)이건 과실치사자이건 가리지 않고 복수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무리 과실 일지라도 사람이 죽었는데, 가해자에게 원수 갚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원시적인 사법제도 하에서라고 할지라도 
과실치사자는 보호하는 제도를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도피성 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도피성 제도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두신 목적은 본문 11-12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도피성은 어떤 사람이 그릇 살인하거나 우연히 사람을 죽인 경우에 
재판을 받을 때까지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던 것입니다. 

살인자가 도피성에 오면, 이스라엘의 장로와 회중들이 그 살인자를 놓고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판사 한 사람이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로와 회중들이 모여 배심원단을 형성을 한 후, 
그 사건을 듣고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사법제도에도 배심원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왜냐면 판사의 판결을 100%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심원 제도를 시행하는 미국은 판사 혼자서 재판을 하지 않습니다. 
배심원들이 사건을 자세히 듣고 결정하는 대로 판사가 재판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와 회중들이 배심원이 되어서 살인사건을 재판을 할 때에도 
아무런 기준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살인자인지, 
과실치사자인지에 대한 재판의 기준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35:16) 

“피를 복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 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하였음이라. 피를 복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
(35:19-21)고 했습니다. 

고살의 기준은 손에 철 연장이나 돌, 나무 연장을 들었을 경우, 
혹은 맨손이더라도 미움이나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 밀치거나 
무엇을 던져 죽였을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은 도피성으로 들어오더라도 재판을 거쳐서 유죄판결이 나면 
피를 복수하는 자에게 그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가가 사형을 집행하지만, 옛날에는 국가에 그런 제도가 미비했기 때문에 
피를 복수하는 자, 즉 죽은 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에게 사형을 집행하는거죠.

▲그러나 22-25절을 보십시오.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한 것도 아닌즉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복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복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사람이 원한이 없거나 우연히 기회를 엿봄이 없이 살해를 했다는 것은 
그냥 장난으로 돌을 던졌는데 사람이 맞아 죽었다 이런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고살이 아니기 때문에 도피성 안으로 돌려보내서 
도피성 안에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도피성 안에 사는 것도 일종의 형벌입니다. 
다른 곳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금고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다른 곳으로 나갔다가 피를 복수하는 자가 그를 만나서 죽여도 
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은 도피성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피성 안에서 살게 되면 가족도 만날 수 없고, 사업을 운영할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까 안전할지라도 형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과실치사도 죄가 되기는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도피성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요?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날 때의 대제사장이 살아있는데 그 분이 일 년 만에 돌아가시면 
일 년 만에 도피성에서 해방이 되고, 그 대제사장이 30년 후에 돌아가시면 
삼십년 동안 도피성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의 소원은 
‘대제사장님이 빨리 돌아가게 해 주옵소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이 죽어야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이 해방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과실치사도 죄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피가 흘려지고, 
그가 죽고 난 후에야 속죄가 된다는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져야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도 해방이 된다는 복음입니다. 

대제사장이 죽고 난 후에는 도피성에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그를 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2.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

도피성은 과실치사범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죄인들이 피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도피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하는 증거가 
성경에 있을까요? 

물론 ‘도피성은 예수님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사람들, 
즉 지금 도피성으로 피하여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 즉 나의 도피성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물론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과실치사자만을 보호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께 피하는 자들의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를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용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피성이시지만 구약시대의 도피성보다도 
더 우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에 평강이 없기 마련입니다. 
율법이 복수자가 되어 죄인들을 쫓기 때문입니다. 
“야! 너 죄 지었지? 살인했지? 간음했지? 도적질 했지?”하면서 따라옵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도 쫓아옵니다. “너는 내 종인데 어딜 가려고 하느냐?” 
하며 쫓아옵니다. 율법이 쫓아오는 사람에게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도피성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한나절 거리에 있는 도피성으로 들어갔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주 예수여! 내가 죄로 말미암아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기만 하면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2절 말씀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없이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것입니다.


◑3. 어리석은 네 종류의 사람

▲어떤 한 사람이 고의가 없이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복수하는 자, 즉 그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지금 칼을 들고 쫓아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이렇게 행동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내가 비록 살인은 저질렀지만 할 일도 많으니까 내일 도피성으로 가야 되겠다. 
오늘 집에 들러서 아내에게 인사도 하고, 친척들에게 인사도 하고,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도 좀 먹고 가야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 사람은 집에서 식사하다가 도끼가 날아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1) 첫째로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행24:25절에 나오는 총독 벨릭스가 바로 이런 어리석은 인물입니다. 

바울에게 부활의 복음을 들은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시방은 가라” 시방은 지금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틈이 있으면 부를 테니 
지금은 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로마 총독 벨릭스가 나중에 
다시 바울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 믿기를 주저하고 뒤로 미루십니까? 
어떤 분들은 죽기 바로 직전에 믿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천국에 받아들여질지.. 어떻게 확신하겠습니까?
성경에는 ‘문을 두드려도, 주인이 열어주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마25:11~12

천국은, 내가 문을 언제라도 두드리기만 하면, 열린다고 믿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가 문을 두드려야 하지만.. 그러나 주인이 문을 열어주어야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것은 도피성에 들어가야 될 사람이 
우물쭈물하다가 복수하는 자(마귀)에게 결국은 생명을 빼앗기게 되는 
어리석은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2) 둘째로 도피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 동편에 세 개, 요단 서편에 세 개, 총합 여섯 개의 
도피성을 분명히 만들어 놓으셨는데 
도피성이 없다고 하는 자도 진실로 어리석은 자요, 
앉아서 죽겠다고 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해서 그대로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고 슬퍼한다고 해서 
구원자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셋째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도피성이 아니라 
엉뚱한 도시로 피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이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리로 가면 
그는 복수하는 자의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성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 도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인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부처도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도피성이 아닙니다. 
마호메트도 탁월한 정치가이며 종교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호메트도 도피성은 아닙니다. 

공자와 맹자는 얼마나 탁월한 학자입니까? 공자와 맹자의 글을 읽으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지혜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도 도피성은 아닙니다. 
그리로 피하는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도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줄로 확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도피성으로 피해봐야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4) 넷째로 죽을죄를 짓고도 죄를 부인하고, 심판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부인하며 희희낙락하는 사람도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도 “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에 무슨 심판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며 술 마시며 즐기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율법의 추격을 당하고 있는 죄인입니다. 
율법은 계명을 들이대면서 우리를 쫓아옵니다. 마귀도 옆에서 같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율법의 추격을 받고, 마귀의 추격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시고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복수하는 자가 죽일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사망, 지옥 형벌을 조만간에 당하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가 장례를 여러 번 치렀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돌아가신 분들이 천국 가셨다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다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은 돌아가시기 3일 전쯤에 깨어나 평온한 모습으로 
“천국에서 하나님이 날 부르신다”고 간증 하시면서 
평안하게 천국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손들이 더욱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욱 헌신하며 
믿음으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 것입니다.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육신이 사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망해서 지옥에서 영영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런 소리 못 들었습니다”라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행여 여러분이 지옥에 간다 해도 저는 여러분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습니다. 
오늘 확실하게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용서가 있고, 보호가 있고, 안전이 있고, 
돌보심이 있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 들어와 있으면 벌벌 떨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워 할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도피성 안에 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살면 좋고, 죽어도 더 좋은 것입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도피성은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근심이 있어도, 절망이 있어도 도피성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죄가 있고,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도피성 되신 예수님 안에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도피성 바깥에 있는 사람들, 죄를 짓고도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도피성 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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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al)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몬 비젠탈은 2차 대전 때 아유슈비츠에서 아내와 부모와 자녀를 모두 잃습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이 수용소에서 살아만 나간다면 나찌들에게 반드시 복수하리라’ 
결심하고 절치부심(切齒腐心) 하면서 하루 하루를 견딥니다.

그러다가 1945년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2차 대전이 끝나게 되지요.
전후(戰後)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동족들이 
그렇게 많이 학살됐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연합군측으로부터 자료를 넘겨 받은 후에야 약 600만에 달하는 동족이 
희생됐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답니다.

그때로부터 이 비젠탈을 비롯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아직 살아남은 독일 전범(戰犯)들을 찾아서 복수하려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시몬 비젠탈은 이곳 비엔나와 린쯔에 ‘전범 기록 연구소’라는 연구소를 만들고 
유태인을 학살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모으기 시작하지요.

물론 히틀러는 자살해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아래 아주 중요한 전범들 상당수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배에 금괴를 싣고 
남미의 브라질이나 칠레,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로 가서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원수들을 찾아서 복수하는 게 비젠탈의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1960년 5월, 이 비젠탈은 전 세계 사람들이 놀랄 만한 일을 터뜨리죠.

유태인 학살에 가장 앞장 섰던 나찌의 제 2인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하게 됩니다.

당시 전쟁이 끝난 지 15년이 된 시점에서 아이히만은 
변장을 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히만이 잡혔다는 소식이 뉴스를 타고 전 세계에 알려지자 
유대인들 사이에는 “저 아이히만은 죽일 놈이다 히틀러보다 더 나쁜 놈이다”
 그러면서 그의 처리에 대해 논란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아마 돌로 쳐 죽이거나 찢어 죽이거나 아니면 생매장을 한다 해도 
유대인들의 분노는 삭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비젠탈이 웬일인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주 유명한 말인데.. 우리도 일본을 향해서 가끔 이 사람의 말을 인용하지요? 
“용서하자! 그러나 절대로 잊지는 말자!” 그럽니다.

그리고 이 처리는 인간적 감정으로 복수할 게 아니라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서 처벌을 받도록 하자고 호소합니다.

결국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아이히만은 재판에 회부됐고, 
체포된 지 2년 만에 뉘른베르크의 전범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형 집행을 당해 죽습니다.

비젠탈이 쓴 책 중에 ‘나는 아이히만을 사냥했다’ 라는 책이 있는데 
그 얘기는 영화로도 나와서 저도 아주 오래 전에 본 기억이 납니다.

왜 비젠탈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전 생애를 다 바치면서 잡은 원수를 
자기들이 처리하지 않고 그렇게 국제 사회의 재판정에 세웠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오늘 드릴 말씀과 연관해서 
비젠탈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선조들의 뜻을 일부 따른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과실치사자들을 위한 도피성의 원칙을, 살인자인 아이히만에게도 적용해서 
오히려 동족들로 이 사실을 더 오래 동안 기억하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인자가 정당한 재판을 받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기다리는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