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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결론의 의미 민36장 2017.09.10. 민수기 설교모음
도입 / 하나님은 작은 자의 신음도 듣고 계셨습니다. 주1)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주의해야 할
세 가지 규례를 주셨는데
두 가지는 민수기 35장에 기록되어 있고,
마지막 한 가지 규례는 3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규례는
-레위인들에게 땅을 주지 않는 대신에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진 48개 성읍에 살도록 하신 것과
-그 중 6개 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하여 과실치사를 행한 사람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민36장에 기록된 마지막 규례는 딸들이 땅을 상속받은 경우
다른 지파의 남자에게로 시집가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민수기에는 인구조사와 하나님이 주신 갖가지 명령, 규례, 예언, 족보, 시 등
엄청난 내용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지막 36장의 내용은 좀 사소해 보입니다.
거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민수기의 결론 부분이
딸들이 상속받은 땅을 지키기 위해 다른 지파 남자에게로 시집을 갈 수 없도록
정하셨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은 의아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애들 말로 “이게 다야? 이게 끝이야?”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민수기가 독립된 책이 아니라 모세오경의 큰 내용 속에서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36장의 내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민수기 36장의 내용은 사소한 내용 같아 보여도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40년 간 불순종과 반역을 일삼고 살던 이스라엘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다소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들이 광야 40년의 생활을 벗어나면서
이제 요단 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는데,
오늘은 그것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스라엘 족장들은 ‘확고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
민수기 36장에 기록된 내용은 므낫세 지파의 두령들이
모세와 이스라엘의 족장들에게 나아와서
시민법, 상속법 흠결의 문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이 제시한 흠결의 문제는 이미 민수기 27장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므낫세 지파 슬로브핫이라는 사람의 다섯 딸이 광야에서 죽은 아버지의 땅을
상속받지 못한다면 아버지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이름도 없어지고 땅도 사라지게 될 텐데
그러면 우리가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 내용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고, 하나님은 이들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딸들이 땅을 상속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의 두령들은 다시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므낫세 지파의 땅을 상속 받아서
다른 지파 사람에게로 시집을 가면,
상속받은 땅도 가지고 가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대한 완전체로서 므낫세 지파의 땅이 유지되지 못하고
일부가 타 지파에 귀속되어 중간 중간에 구멍이 숭숭 나게 될 텐데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문제 제기였습니다.
한 마디로 기업에 감소가 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땅을 매도한 후 시집을 가도 되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이스라엘에는 희년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슬로브핫의 딸들로부터 그 땅을 구매했어도
희년의 때가 오면 다시 원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니
매 한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명하여 가로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 사람들의 말이 옳다는 것입니다. 상속받은 땅을 가지고
시집을 가게 되면 기업의 감소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명하시기를
시집을 가되, 오직 그 조상 므낫세 지파 안으로만 시집을 가라고 하셨죠.
므낫세 지파의 남자들에게 시집을 가면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게 되니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 지파의 기업이 삭감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문제를
민수기 2개의 장을 할애해서 기록해 두고 있느냐는 질문이 생깁니다. *27, 36장
그러나 앞서 말씀을 드렸지만 사람 보기에 사소해 보일 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것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 중에는 백성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이 문제를 제기한 시점은 아직 가나안 땅을 차지한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단 강 동편 땅에 거하고 있을 때 일어난 문제들입니다.
아직 가나안 땅을 단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슬로브핫의 딸들을 기특하게 여기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의 1세대 사람들은 과거 40년 전 가나안 땅 입구인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은 내가 너희에게 준 밥이니 가서 먹으라”고 했지만
그 땅을 먹지도 차지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아직 차지하지도 못한 땅을
이미 자기가 소유한 것 인양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땅인 것처럼 믿고 광야에서 소천한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 받게 될 땅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믿음을 기특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36장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제 슬로브핫의 다섯 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족장들이 가나안 땅을 이미 차지한 것처럼 여기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딸들이 가나안 땅을 자기 땅으로 확고히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므낫세 지파니까, 그 중 반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이미 땅을 차지했지만, 어쨌거나
아직 제비는 안 뽑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요단 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금방 차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복전쟁을 무려 7년이나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과 족장들은 전쟁을 몇 년간 치러야 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분명한 경계를 정해서 주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틀림없이 소유하게 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다섯 딸들만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믿음을 다 갖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가나안 땅이 오직 믿음 있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의 대 원리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누가 들어갑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민수기 36장이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예배하며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 중에는 단 한 사람도
“나는 성경 안 믿어! 천국 안 가도 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앉아 계시면 반드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믿음이 없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들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처럼
가나안 땅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 확고한 믿음으로 충만해졌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실한 소망’의 사람들이 되었다
7~9절에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중 무릇 그 기업을 이은 딸들은
자기 조상 지파 가족되는 사람에게로 시집갈 것이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조상의 기업을 보존하게 되어서
그 기업으로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다 각각 자기 지파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할당받은 지파의 땅은 줄어들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지파 모든 백성들이 남녀의 구별 없이
모두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확실히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고 땅을 모두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 한 평 갖지 못했습니다. 노예가 무슨 땅이 있겠습니까?
40년 동안 가나안 땅을 방황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을 모두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갖게 되고 그 땅은 다른 지파, 다른 사람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소망입니까?
제가 만약 여러분들에게 우리 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성도가 되면
1인당 강남 땅 천 평씩 드리겠다고 약조한다면
아마 엄청난 부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약조하면 실현성이 없으니까 아무도 믿지 않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실현성은 확실한 것입니다. 영원히 순종하며 사는 한
그 땅의 소유권이 남에게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소망입니다.
성도들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천국에서 모두 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라고 찬양도 하지 않습니까?
(*땅도 땅이지만, 그 땅에서 미치게 될 영향력이 더 소중한 것이죠)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땅, 기업은 목숨,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예외 없이 ‘다 각기’, ‘각각’과 같은 부사가 중요합니다.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의 소유권은 절대로 남에게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고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내 이름으로 등기된
넓은 땅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주도에도 내 땅이 있으면 매일 그 땅을 생각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주도의 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업이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뜁니까?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확실한 소망, 산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성도들의 건강한 삶에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이 소망으로 인하여, 현재의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세도 자기가 천국 가면 큰 땅을 차지하려고
애굽의 왕자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봤습니다. 천국에서 땅을 주시고
그 땅을 영원히 남에게 빼앗기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현세의 삶 속에서 고난을 능히 이겨낼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동일한 원리를 말했습니다.
벧전1:3~4절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천국과 지옥과 같은 이야기 좀 그만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이야기만 할까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소망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간직된 것,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은
하늘에 간직된 기업인 줄 믿습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세상을 살면서 잠깐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기업을 간직해 두셨고,
그 기업이 타인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한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롬5:5절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다는 말은 한글로는 해석이 어렵지만,
영어로는 쉽습니다. “Hope never disappoint us”
(소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늘에서 기업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소망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고,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5). 현세의 땅도 가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어도
언젠가는 바뀌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기업은 쇠하지 않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기업을 우리에게 주셔서 영생 부활하며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민수기 36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분명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확실한 순종’의 사람들이 되었다
민수기 36장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보여주는 반응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아버지의 땅을 상속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파의 땅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므낫세 자손 지파의 남자에게만 시집을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순종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10~12절에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 아비 형제의 아들들에게로 시집가되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가족에게로 시집 간 고로
그 기업이 그 아비 가족의 지파에 여전히 있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35장까지 광야 40년의 기록은 사실상 불순종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하고 비난하고 험담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 내용들 뿐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36장의 결론은 매우 아름다운 순종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3333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딸들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나의 결혼까지 참견하시느냐고 불평할 수 있었고,
나는 므낫세 자손의 남자는 싫고 유다 지파의 남자가 좋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결혼에 대한 선택권, 인권도 없습니까?”라고 항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일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믿음으로도 모범을 보여주었고, 순종으로도 모범을 보여주었죠.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복음적인 명령들입니다.
예배하라. 기도하라. 헌금하라. 선교하라. 전도하라. 찬양하라.
모두 복음적인 명령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명령들 말고 신구약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항존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십계명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라고 설교하면
‘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십계명을 기준으로 성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화의 절대적인 기준이 십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의 법대로 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반대로 의는 십계명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십계명에 불순종하면 복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십계명에 순종하면 성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십계명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했죠.
약1:25절에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법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점을 보러 다니고 우상에게 절하고 안식일을 범하며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살인하고 이웃의 것을 탐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주여 주여 하는 자들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게 됩니다.
또 야고보서 1장 22절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자유하게 하는 율법입니다.
십계명에 기록된 대로 사는 것이 불편한 것 같아 보여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이 좋습니까? 뭍에 나와 있는 것이 좋습니까?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뭍에 있는 물고기는 곧 말라 죽을 물고기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가 자유함을 누리는 것은 율법을 따라 살아갈 때만 비로소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중에도 의식법, 시민법은
구약 시대의 법입니다. (그것은 폐지되고, 그 정신만 신약에 계승됩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지키고 사는 것이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거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율법폐기론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반대하면서 어떻게 성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기준이 없는 사람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습니다.
십계명을 어기고 무슨 복을 받겠습니까?
점치러 다니면서 무슨 복을 받겠습니까?
거짓말하고 외도를 일삼으면서 무슨 복을 받겠습니까?
요14:21절에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리입니다. 나의 계명은 바로 십계명을 가리킵니다.
고전7:19절에도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식법은 중요치 않지만 도덕법은 중요하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20세기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만연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율법폐기론입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율법이 아무 쓸모없다는 식으로 여기게 됩니다.
율법과 은혜를 서로 원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일5: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에게는 십계명이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십계명을 지키는 일이 즐겁고 기쁜 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기독교인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요일만 되면 어디로 놀러갈까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런 일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성령을 받으니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기보다
매우 즐거운 일이 되었고,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는 일이 된 것입니다.
이는 결코 무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십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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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소외(疏外)'라는 개념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새로이 겪게 된 문제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대중'이라는 큰 덩어리가 돋보이고 강조되는 사회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혼란스럽게 되고,
그러다 보면 비록 바로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소위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바로 그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도 아무도 날 알아주지도 않는다."
이것이 전도를 받아도 교회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핑계이면서
또 특히 큰 교회에 다니는 일부 교인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불만입니다.
분명히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군중'의 공동체이지만,
'개개의 교인'은 바로 그 교회 안에서도 오히려 고독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광야교회야말로
그런 문제가 생기기 가장 쉬운 교회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몇 백 명, 몇 천 명의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 안에서도
한 교인이 그런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2백만 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모여 있었던 그 공동체 안에서는 어떠했겠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새로 왔는지, 어떤 교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누가 어떤 시험 때문에 교회를 떠나버렸는지 아무도 알아줄 사람도,
알아줄 길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초대형교회가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교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랬습니까?
과연 그처럼 큰 교회 안에서는 교인 한 사람이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그냥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놀랍게도,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대공동체 안에서도 거기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축복을 얼마나 완벽하게 누릴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