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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18~25 영광에 이르는 소망

LNCK 2022. 10. 15. 11:00

영광에 이르는 소망 (로마서 8:18-25)2022.10.09 - YouTube


◈영광에 이르는 소망       롬8:18~25        2022.10.09.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을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앞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미래적인 측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의 측면으로 설명한다면 

1) <과거적 측면에서의 구원>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 구원> 입니다. 

롬1~4장의 내용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칭의구원 
즉 과거적 측면의 구원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2) <현재적 측면의 구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화의 구원>입니다. 

롬5장 ~ 8:17절까지인데,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체험하고 이루어 가는 구원을 설명한 것입니다. 

3) 본문 롬8:18~ 끝 39절은 <미래적 측면의 구원>으로 
이제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스러운 구원, 
그래서 이것을 <영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스러움 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 영광을 상실했고, 영광스럽지 못한 존재가 되었죠.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죠. 

여기서 죄와 '하나님의 영광'을 대조한 것은 
죄가 우리 인간에게 미친 가장 강력한 피해는 
바로 '영광'을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것이.. 다 죄의 모습이라 말할 수가 있죠. 

따라서 우리 죄를 씻음 받고, 또 그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면 
우리에게 회복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 인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씻음 받고, 그리고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구원의 출발>입니다. 
<구원의 절정>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타락해서, 그 영광을 잃어버렸을지라도 
그 '영광'에 대한 굶주림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비참함을 느낍니까? 왜 자존심이 상해 합니까? 
그리고 왜 명예를 추구합니까? 
왜 경쟁을 통해, 어떤 성취를 통해, 영광을 얻고자 합니까? 

이 세상에 어떤 다른 피조물들에게도 보여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명예욕이요, '영광'에 대한 열망입니다.

운동경기를 통해서나, 어떤 경쟁을 통해서나 그 무엇을 통해서든지 
우리는 이 '영광'을 얻는 그것을 추구합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들, 즉 아프리카에 있는 코뿔소들이 
누가 먼저 빨리 달리나 경쟁해서, 1등 한 코뿔소에게 
그 코에 목걸이 달아주고.. 뭐 그런 거 안 하잖아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경쟁을 통해, 1등이 되는 그 영광, 
그것에 삶의 보람을 느끼고, 또 그것을 좋아하고 사모합니다. 
  
정 반대로 자신이 기대대로, 자신의 삶이 나아가지 못할 때 
좌절을 느끼고, 깊은 절망을 느끼고... 왜 그런 것일까요?

세상에 어떤 피조물이 자신의 형편을 비관합니까? 
사막에 사는 동물들이 '나는 왜 이렇게 사막에 살아야 하나?' 하며 좌절하고 
그 모래를 치면서 통곡하는 동물을 보았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좌절이 있고 비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비참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 증거입니다. 파스칼이 그것을 지적했지요. 
'인간이 위대한 존재라는 증거는 인간만이 비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영어로  타락을 fall '떨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비참함과, 자존감의 상함을 느끼고, 그리고 명예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게 다 잃어버린 영광에 대한 굶주림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광'은 하나님께로서만 와야 하는데 
자기 스스로 이 영광을 추구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지배함으로써 
이 영광을 얻으려 한다면.. 이것은 무서운 독이 되며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이 주어지는 겁니다. 

타락 이전의 상태로 다시 되돌아 가는 정도가 아니라 
타락 이전의 상태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영광'에 이르는 소망가운데 사랑합니다. 

▲본문 8:24절에서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말) '이는 우리가 이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소망하겠습니까?'

현재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분명한 영광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정점은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가운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소망으로 구원받는다'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게 된 것, 그리고 성화를 이루는 것, 그리고 영광스럽게 되는' 
그 모든 여정속에, 우리가 그 구원을 바라보는 소망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떠한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고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소망입니다. 

18절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지금 바로 현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 세대를 의미하는 거예요. 
헬라어로 '한 세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는 
타락 이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의 '현 세대'입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한마디로 고난 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가 가져온 사망의 그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종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질병과, 아픔과, 상처와 그리고 수많은 이 악의 시험 속에 
살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뉴스에서 사건, 사고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전쟁과, 기근과, 사고와, 범죄와... 
이 세대는 고난의 세대입니다. 

현 세대가 왜 고난의 세대입니까? 
죄와 죽음이 왕 노릇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들이 왕노릇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고난의 세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24장에서 현 세대의 역사에 대한 미래 전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학자도 아니요. 역사학자도 아니요. 미래학자도 아니셨지만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역사의 미래, 이 세대의 미래를 말씀하셨어요. 
세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하나는 전쟁, 하나는 기근, 하나는 전염병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전쟁이 많아질 것을 말씀하셨고, 도
처에 지진이 더 많아질 것을 말씀하셨고, 
기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고...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우리의 눈과 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의 여러 서신서에서도, '이 세대'에 더욱더 악해질 것을 경고했죠.
'악한 사람들은 더욱 악해지고.. 속이는 사람들은 더 속일 것이며 
죄악은 더 교묘해질 것이며.. 강한 법을 만들어서 처벌을 강하게 하면 
죄들이 사라집니까? 아닙니다. 더 교묘하고, 더 교활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더 악해지고, 속이는 사람들은 더 속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은
핍박의 수준을 살아게 된다는 거죠. 

'현 세대'는 고난의 세대입니다.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고난이 없게 느껴진다면 
어쩌면 우리는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대'는 갈수록 믿는 이들의 소수자가 되어갑니다. 
한때 중세 교회가 세상에 권력을 넘어선 힘과 파워를 자랑했지만 
그것은 결코 진정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아니었죠. 

그 결과 교회는 텅텅 비게 되고, 영향력을 상실하고, 
예배당과 많은 문화는 남아 있지만, 영적 영향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서구 유럽의 소수자 중에 소수자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미국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죠. 

△제가 지난 목요일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1인시위를 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규정한 법이기 때문에 
강하게 반대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미국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이 문자를 보내 와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호소하고 
이런 사회가 되어서 안 된다고 지지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목회하는 주에서 공립학교 교사는 
'나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말하면 처벌을 받는데요. 
차별금지법 때문이죠. 

그런데 '나는 무슬림입니다' 라고 말하면 보호를 받는데요. 
'소수종교 보호법'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러한 합리적이지 않은 왜곡된 흐름들이 
서구 유럽과 북미를 뒤덮고 있습니다. '현 세대'는 고난의 세대입니다. 

우리나라 교육부에서 교과 과정을 개편한다고 지금 연구하고 공청회 하는 
내용을 보면, 각 교과서의 내용마다 '성'을 사회문화적으로 규정하고 
지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야에 계신 분들은, (교과서 편찬 위원회에) 들어가서 의견을 내야 됩니다. 
법은 바꾸지 못하니까 교육과정부터 바꾸는 것이죠.
우리 아이들이 그런 의식 속에 자라나고 있습니다.

뉴저지에서 보내온 목사님의 소식에 의하면,
얼마 전에 뉴저지에 바뀌어진 교과 과정에는 
초등학생부터 성적인 문란함을, 마치 가이드를 잘 해 주는 것처럼 다 가르쳐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세대의 고난'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예배당 건물이 많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세대의 문화는 하나님없는 세상이, 올바른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 없는 삶이, 자유라고 생각을 하는 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이 양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인간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인이 되는 세상,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무너지는 그 세상이 
과연 자유롭고 보호된 세상일까요?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을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대'에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점점 소수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입니다. 

로마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 없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세대에도, 그런 타락한 문화 속에 살아 있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현 세대'가 바로 고난의 세대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것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고난 속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이 세상이, 여러 짐승들로 비유되는 
원수들에 둘러쌓여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의 활동은, 장차 미래 시작되기도 하겠지만, 
현재 이미 시작되었고, 날로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며, 이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도록 
급격하게 이끄는 그런 환경이 되어가고 있는 거죠.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의 없는 사람은 휩쓸려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영혼의 닻'이라 그랬습니다.   *히6:19
배가 끌려가지 않도록 깊이 닻을 내려야 
배가 바다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것처럼 

이 (영광의) '소망의 닻'을게 내려야합니다. 

그것은 이 세대가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으로 가지만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는 구원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19절 부터는 전체 피조물의 세계 까지도 
'영광의 이르는 소망'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19~21절 말씀을 함께 뵙겠습니다. 

8: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분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도 소망 가운데 있으니

8:21 이는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피조물, creature'로 번역했습니다만,
'피조 세계, creation'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세계가 고대하고 있다... 의인화 한 거죠. 
이 피조세계가 고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놀라운 표현이죠. 

어떻게 피조세계가 고대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요?
이건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상상력이 아닙니다.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 알려주신 것이죠. 
왜 이 피조세계가 무엇인가를 고대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고대한다는 겁니다.
왜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자녀의 변화를 고대 합니까? 
그것이 자신들의 상태와 운명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때 

이 피조 세계도 현재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동일하게 영광스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피조세계의 지금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도시 속, 콘크리트, 아스팔트 이런 아파트 문화, 빌딩 문화에 
젖어 살아서 느끼지 못할 지 모르지만 
전지구적으로 보면 피조세계는 신음하고 있습니다. 

기근으로 신음하고, 온난화로 신음하고, 수많은 이런 기후의 위기... 
피조세계가 다 신음하고 탄식하는 겁니다. 

땅이 요동치며 지진이 나고, 화살이 폭발하고... 
다 신음하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겁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점점 어떤 급격한 위기의 순간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날,
이 피조세계도 바로 그 탄식하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주1)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피조세계의 탄식하는 상태는, 인간의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왜 피조세계가 이런 상태가 됐는가?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피조세계의 지금 이 상태로만 망가졌기 때문이라는 거죠. 

단지 인간이 환경을 보호하지 않아서.. 그런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한 순간,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도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탄식가운데 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피조세계의 탄식이 바로 죄의 결과라는 겁니다. 
창3:17절에,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여기서 땅은, 흙으로 된 땅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땅이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그것은 피조세계 전반을 말씀하는 거죠.            주2)

인간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영광을 상실했다는 거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만 그 영광을 상실하게 하면 되지, 
피조세계까지 더불어 그렇게 저주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피조세계를 통치하는 대리자로 지음받은 인간이 영광을 상실했는데 
만약 피조세계의 영광이 그대로 있다면, 그건 불균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피조세계는 그렇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다. 제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는 거죠. 
그리고 지배를 받게 되었다, 죽음의 DNA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피조세계, 즉 자연도.. 죽음의 종노릇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 자연을 보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이 자연을 보고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과, 섬세하심과, 전능하심을 맛볼 수 있는데 
그 영광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는 얼마나 놀라올까요?

이 영광을 상실한.. 저주받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 계십니다. 
자연은총, 또는 일반은총 이라고 말합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으로, 이제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그리고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 이 자연의 질서, 
비록 깨어졌지만 그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자연에는,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고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들이 남아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남아있는 이 피조세계에도 영광이 나타나는데 
회복된 영광은 얼마나 놀라울 것인가? .. 우리는 상상 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지금 단식하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함께' 라는 것은, 우주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 피조세계의 탄식은 우주적 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도 우주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가 
다 회복되며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래도 계시록은, 새하늘과 새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피조세계가 탄식하는 것은, 소망의 다른 얼굴인 것입니다.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소망의 탄식입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해산의 고통을 예로 들었죠.  :22
해산의 고통은 절망의 고통이 아닙니다. 

해산은, 생명이 탄생하는 소망의 고통인 것처럼 
이 피조세계가 탄식하는 것은, 장차 나타날 회복의 구원을 바라보는 
탄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피조세계의 탄식은, 다시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망으로 돌아옵니다.
23절 말씀이죠.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우리조차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됨,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우리 영혼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몸의 완전한 구원이며, 회복이며,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소망하는 이유는 뭡니까?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성령의 첫 열매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란 단어는, 원어적 의미로 '보증금'입니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거죠. 계약금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몸의 구속, 
영광스러운 부활을 우리가 미리 맛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증금으로서) 확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강할수록, 탄식하며 소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피조세계의 탄식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탄식이 나옵니다.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소망하며 탄식합니다. 

모두가 다 소망의 한식 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영광에 이르는 소망'으로 인한 탄식이 있는지요? 

이 세대에서 고난을 능이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그런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는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소망가운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것을 소망합니다. 

영광스러운 몸의 구속을 입을 것을 소망합니다. 
이 피조세계가 회복된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현 세대는, 고난의 세대입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미래로 나아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회복시킬 것이며 
모든 피조세계를 해복시키실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광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이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현실로부터 도망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 깊이 참여하여, 이 세상을 소망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로 쓰임을 받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대'에, 
절망 가운데 진정한 소망을 전해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407장에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이것은 '칭의 구원'입니다.

"영광의 그 날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이것은 영화 구원입니다. 

이 '영화 구원'을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이 찬송을 같이 부르겠습니다. 

1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후렴:언제나 주는날 사랑하사 / 언제나 새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2 맘속에 시험을 받을때와 / 무거운 근심이 있을때에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여러분은 지금, 이 영광에 이르는 소망가운데 살고 계십니까?
이 소망이 나로하여금, 지금 탄식하게 하고 있습니까?

본문에 기록된대로 피조세계의 탄식을, 나는 느끼고 있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이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이 
나의 삶을 움직이는 능력이 되고 있습니까?

나는 '현 세대'의 고난을 바라보고, 탄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럭저럭 이 세상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칭의구원, 성화구원, 영화구원!
이 모든 구원 가운데, 소망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의 소망이, 영원에 있게 하여 주시고 
영광스러운 나라, 그 나라에 이르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잃어버린 영광을 우리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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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미국 위스콘신 주의 장애인들을 돌보는 ‘목자의 집’(The Shepherd’s Home)에는

매일 같이 해결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있다.

닦고 닦아도 더러워지는 창문을 청소하는 일이다.

 

그렇게 자주 더러워지는 까닭은 장애인들 중 몇몇이 매일 유리창에다 코를 박고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둥병자에게 이 땅에서 과연 어떤 가능성을 볼 수 있는가? 

나아가 뇌성마비 환자의 경우 그 비틀어지고 꼬인 육체와 끝없이 공허하며 

중심이 서있지 않은 정신에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그야말로 정말 죽었다가 

천국에서나마 정상적 육신과 정신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는가.
      
비록 그들의 육신과 사고 수준은 정상 이하지만 자신들의 상태가 인간의 힘으로는, 

현대의 최첨단 의술로도 결코 치유 될 수 없는 상태임을 안다. 

완전히 절망적인 자기들의 정신적, 육체적 장애는 

재림하는 예수님만이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기대와 믿음에 단 한 치의 가식과 의심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들의 부족하고도 불편한 육체와 정신을 통해 짜낼 수 있는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진심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그 소원이 뜨겁고 간절하면 유리창에 콧물과 침을 질질 흘려가며 

얼굴을 들이밀고 기다리겠는가? 

혹시라도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못 보고 놓칠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길 원하고, 

어느 누구보다 가장 먼저 만나길 소원하는 마음을 우리가 과연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런데 하루 종일 기다려도 오지 않았지만 그 다음 날 아침에도 실망하지 않고

또 다시 창문가로 갈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우리가 흉내라도 내겠는가?

왜 천재지변이 일어나는가?
또 졸지에 지진이나 홍수가 들이 닥쳐 수만 명의 인생이 한꺼번에 죽음으로 몰리는 

경우를 본다. 이상하게도 그런 일을 당하는 자들 대부분이 가난하고 헐벗어 

힘이 없는 자들이며 연약한 부녀자나 노인들이 더 많이 희생당한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으니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신자들은 그 원인이 아담의 원죄로 인해 피조 세계도 함께 벌을 받아

부패되었기 때문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서 온갖 질병들의 유전자가

대대로 변형되어 내려오면서 장애아나 기형아가 태어난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진, 홍수, 해일, 태풍도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자연의 오염으로 더 심해지고 있음을

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피해자들만 억울한 것 같고 하나님은 공평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라. 지진, 홍수, 태풍, 해일 등 자연 재해가 단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일 순풍이 불고 적당한 비가 내리며 따스한 햇볕이 쬐인다면 

그래서 인간이 씨 뿌리고 경작하는 그대로 수확량이 정확하게 비례해서 거둘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땅의 주인은 인간이고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 있겠구나 라고

교만이 하늘 보좌에까지 뻗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런 천재지변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항력적인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천지와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잠시라도 생각(소망)하게 한다.


     

주2)
창1:1절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을 때 
보이는 하늘과 땅만을 창조했다는 게 아니라 

여기서 하늘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와
땅은 보이는 모든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듯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보이는 모든 피조세계가 바로 저주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