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를 부르신 이처럼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1장 -벧전후설교모음-
벧전 1장이 한 마디로 무슨 내용인가, 한 줄로 줄이자면
‘너희를 부르신 이처럼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라’ :15 라고 정해 봅니다.
무슨 거룩인가 하면, 신앙 때문에 환난을 당해도
오히려 기뻐하며, 그 받을 영광을 고대하며... 대적, 불평하지 않는 거룩입니다.
마5:48절이 생각나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본문 벧전1:15절은 ‘거룩하라’고 했고,
마5:48절은 ‘온전하라’고 했지만.. 넓게 보면 같은 의미입니다.
<1장의 개요>
1~2절, 인사
3~12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적인 노래 (벧전 전체 내용이 함축되어 있음)
13~25절,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새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시킴 (~2:10까지)
베드로전서의 전체 주제는
올바른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영광에 대한 관점으로
현재 당하는 고난을 생각해보라>고 권면합니다. 5:10
영원에 비교한다면 이 세상에 고난은 잠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난과 핍박을 받을 지라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믿음생활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는 전체적으로 “내세지향적 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를 생각하며,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것이죠. 1:13
13~15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성화론은 ‘선언적 의미’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3~16).
여러분은 혹시 이제껏 거룩하게되려 했던 모든 노력들로 인해
완전히 소진되고 지쳐버린 경험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이미 여러 번 실패했고
이제 성화되려는 노력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16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은, 일차적으로 <선언적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태양아, 우주가운데서 빛을 발하라.
지구야, 형태를 갖추어라. 물들아,지구로 모여라"하고 선언, 선포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라고 말씀하신 이것은 영광스러운 선포입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그 일을 이루어가시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안 될 것을, 불가능한 것을.. 선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태양아 있을 지어다, 물은 모여들지어다, 뭍은 드러날지어다..’
이렇게 말씀 선포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처럼
'너희는 거룩할지어다!' 이렇게 성도의 거룩성을 선포하시며,
앞으로 그를 거룩하게 만들어가시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는 환난이 많죠.
"나는 네가 거룩할 것이다 라고 선포한다.
나는 너의 거룩이 네 속에 생기도록 선포한다.
나는 너를 나처럼 만들어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분명 점점 발전하는 점진적 성화
progressive sanctification>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룩하게 만들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적 노력과 아울러
하나님이, 성령의 역사로, 당신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한 분들의 고백은
'하나님이 나를 한 눈 팔지 못하게 하신다, 좌우로 치우치지 못하게 하신다' 이죠.
자기 의지적 성화의 추구와 더불어,
성화케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때문에 당신은 기쁨과 희망에 부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대적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역사(일)하시는 분이심을 온전히 확신하시고 힘을 내십시오!
▲성화론에 대한 오해 한 가지
기독교계에 여러 가지 논쟁이 있는데, 성화론도 그 중 한 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성화를 이룬다
-성화를 (성령의 인도로) 자기 의지로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둘 다 맞습니다.
동전의 양면인데.. 그 모순되는 측면을 우리는 둘 다 추구해야 성경적입니다.
한 개만 추구하면, '극단적 성화론자'가 되는 거죠.
그런데 ‘믿음으로 성화를 이룬다’고 한쪽 측면만 믿는 분들은
대표적으로 고전1:30절을 주장합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이 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어주셨으니,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와 거룩함을 내가 덫입기만 하면 되는 거고,
어차피 사람은 율법을 한 개만 범해도, 모든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 운운 하면서
‘믿음으로 얻는 의와 거룩함’ 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분들이 좋아하는 구절이 요일3: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그러니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즉 재림의 날에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성화될 터인데..
뭐하러 힘들게 구태여 성화를 추구하느냐는 거죠.
△그런데 위 요일3:2절은,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이 (33세의) 모습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그렇게 청년으로 부활한다는 뜻이지,
우리의 성품까지 예수님의 성품과 거룩을 닮을 것이다’ 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2가지인데
1) 그러면 성경에 ‘거룩하라’ 라고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에 ‘예수님 재림 때까지 어떻게든 기다려라’ 라고 해야 될 텐데...
신약성경은 매 권마다 ‘거룩하게 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도 그렇고요!
2) 이미 거룩한 천사들, 죄 안 짓는 천사들, 100% 순종하는 천사들이
천국에는 가득합니다. 로봇 같은 천사들입니다. 시키는 그대로만 하니까요.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까지 그런 존재로 만드시진 않으십니다. 이미 많으니까!
요일3:2절 말씀을 ‘재림 때 성도가 로봇처럼, 천사들처럼 거룩하게 된다’라고
생각하면 무리입니다.
하나님은 로봇 같은, 100% 순종하는 천사들을
당신의 신부로 맞이하시길 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천국에 가득히 많다니까요!
로봇이 아닌 ‘인격을 가진’ 성도들이
성화를 온전히 이루어,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천국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뜻은,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라, 성숙했다는 뜻)
‘영혼불멸설’이란 말이 있는데,
‘인격불멸설’이란 말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내 인격은, 영혼과 함께 그대로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거죠.
그런데 내 인격이, 요일3:2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어느 날 완전히 예수님처럼 변화되리라고 보는 것은,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건 자기 스스로 로봇이 되겠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본문 베드로전서에도 1:13~17절만 보더라도
그냥 제멋대로 살다가, 부활 때 변화될 그 때를 기다려라.. 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재림의 그 날을 기다릴수록, 신부로서 정결하게 준비되라는 것이
본문 벧전1장을 포함한, 신약성경 전체의 맥락이요,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1:13~17
△여러분, 거룩하지 못한 자, 변화되지 못한 자, 성화되지 못한 자가
천국에 못 들어가는 명백한 이유는,
그가(내가)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도적질하고, 음란하고, 살인(미움)하고, 거짓말하고, 탐심이 가득하다면..
거기가 과연 천국이 되겠는가요? 거긴 천국이 아닌게죠.
그러니 천국이 천국 되기 위해서는, 성화되지 못한 자들은 못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반복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럼 천국에 가서 써먹지도 못할 '거룩'을 뭐하러 그렇게 성경에 강조하겠습니까?
써 먹을 데가 있으니까, 강조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믿으면서,
성화를 추구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은데,
장차 새 예루살렘 성 바깥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계22:15
◑소망의 힘!
베드로전서 (1장) 주일설교 - YouTube 에서 부분 발췌, 정리
환난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계속 갖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소망” 때문입니다.
본서의 수신자들의 딜레마 = 오늘날 성도의 딜레마는
성도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한다는 거예요!
▲1.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반드시 핍박받는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다스리고 있는 세상이었어요.
로마제국은 우상숭배 하는 나라예요.
여러분들도 <그리스 로마 신화>책을 보신 적이 있죠?
그 신들의 이야기를 보면요. 신들이 상당히 음란해요.
그러고 막 신들, 자기들끼리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서 막 죽이고 그래요.
증오하고 술수를 부리고...
이런 신들을 숭배하고 쳐다보고 있으니... 그대로 배울 거 아닙니까.
원래 타락한 죄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
또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타락한 신들이니...
로마 사회의 인간성, 도덕성은.. 그야말로 땅바닥에 떨어진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면서, 그것이 범죄라는 것, 죄악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살던 세상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들을 속에 섞여 살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걸 깨달은 사람들인 거예요.
그게 추하고, 죄라는 것을 알았던 거죠.
그러니 더 이상 우상숭배를 안 하고, 음란, 거짓, 미움, 시기, 질투,
나태하고 방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걸 다 청산하고
'우리는 더 이상 절대 그렇게는 안 살 거야!'
그들은 거듭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근면하고 절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겸손하고 그런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을까요?
일부 칭찬을 받겠지만, 아뇨, 곧바로 세상은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할 거예요.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거룩한데?' 하고 공격하는 거죠.
그들 세상 사람들은 매일 술을 마시고, 방탕하고, 육욕으로 살던 사람들이
주위에 그렇게 안 사는 사람을 보니까... 정말 싫어해요.
잘난 체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이게 베드로전후서 당시에 크리스천이 핍박 받던 배경인 것입니다.
▲2. 크리스천은 ‘인간 사회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핍박받는다
불신자들은 ‘인본주의 (휴머니즘, 인도주의)’을 본질적으로 추구합니다.
인도주의, 휴머니즘 ..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말입니까!
그러나 성도들은 ‘신본주의’를 본질적으로 추구합니다.
이게 서로 맞는 면도 있지만, 서로 충돌될 때가 있는 거예요.
이게요, 불신자들이 볼 때는
기독교는 휴머니즘, 인도주의를 버리는 것처럼 오해받는 거예요.
오늘날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차별금지법, 동성애, 성소수자 문제...
불신자들의 눈에는, 기독교인들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보는 거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법에 따르게 하려는 것인데,
그들 눈에는 ‘기독교는 인도주의 파괴, 휴머니즘 파괴!’ 이렇게 보는 거죠.
△2천년 전 당시에는, 기독교가
여성, 노예, 어린아이의 인권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차별도 버리는 입장을 취했지요.
예수 안에서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을 오해하면 ‘사회 전복 불순분자’ 이렇게 보이는 거죠.
그게 1%만 그렇게 보여도, 그냥 그런 죄목으로 덮어씌워 버리는 거죠.
왜냐면, 당시 로마시에만 해도, 시민보다 노예 숫자가 더 많았거든요.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보듯이,
노예 봉기는 아마 위정자들의 가장 큰 관심이자, 감시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노예 인권’을 주장하며 싸고 도니까,
위정자들 입장에서 보면 ‘사회 전복 세력’으로 보이는(오해되는) 거죠.
그 외에도 여성 인권, 이방인 차별 철폐 등을 주장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존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로 보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그들 눈에는, 그거는 안 보이고, ‘기존 사회 질서 전복 시도’로만 보이는 거죠.
그게 2%만 보여도, 군대를 투입해서 조기 진압해야 되는.. 그런 불순세력이었죠.
게다가 로마신이나, 황제숭배도 하지 않고, ‘다른 신’을 그들은 섬겼으니까요!
▲3. 성도들의 딜레마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셔서
그런 로마사회의 핍박, 또한 오늘날의 핍박을
성도의 거룩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휴머니즘 사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은
본질적으로 세상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죠.
당시에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거룩하기 살기 때문에
-사회전복 세력이라는 이유로 (*오늘날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했는데,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문제는 핍박 받는 성도의 삶은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이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지로
피난을 가야되는 상황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미 피난 와 있어요, 1:1
로마에서 떠나온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니 시골 변두리로 피난 간 것이지요.
근데 이런 상황이 굉장히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런 상황을 하나님이 개입해서
좀 이렇게 자기들을 괴롭히는 저 불신자들을 좀 혼내주셨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러시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속에서는 회의가 생기는 거죠.
‘왜 하나님은 우리를 돕지 않으시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은 저들을 혼내지 않고, 우리를 돕지도 않으시냐?’
그런 신앙적 갈등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야고보서나 히브리서에 보면,
어떤 성도들은 자기 믿음을 져버리고, 배도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또 자기 신앙을 숨기고,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기 시작한 신자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그들에게 편지를 쓴 거예요.
이 편지를 통해서, 사도 베드로는 무슨 힘과 용기를 심어줬냐면요.
▲4. 소망의 힘!
베드로전후서를 그냥 한마디로 요약해서 압축하면 이런 내용이에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게 거룩)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5:11~12
이 구절을, 베드로전후서의 주제 구절 이라 해도 무방해요.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그런 날이 올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왜 박해를 없애 주시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그걸 이기고 견디어 나가게 하시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놀라운
신비한 힘을 하나 주셨다는 거예요. 소망의 힘이죠!
‘너에게는 그걸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어!’
그 힘이 뭐냐?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1:3~5
‘소망’의 실로 꿰면, 1장 뿐만 아니라, 베드로서 전체가 꿰입니다.
‘소망’이란 단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도,
전체 구절의 밑바탕에 ‘소망’이 배경처럼 설정되어 있어요. 베드로전후서에!
‘소망’이란 이 힘을 우리가 붙잡고 나아갈 때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이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거예요.
결국,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세상은 잠깐이지만, 영광스러운 천국이 영원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소망’은 갖고 살지 않고, ‘희망’만 잔뜩 갖고 살고 있어요.
희망은.. 그야말로 내 소원이죠. 내 바램이고, 내 장밋빛 미래요, 희망사항인데,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희망은 우리를 배신하지만, 소망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희망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에요.
그 희망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그걸 통과해 낼 힘이 나오나요?
전혀 안 나오죠. 오히려 ‘희망 고문’이란 말이 생길만큼,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소망은, 실제적으로 그 소망으로부터 힘이 나오는데,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그 잠자고 있던 소망의 힘이
우리 속에서 깨어나오는 거예요.
이 소망이라는 힘!
이걸 아직 경험 못해보신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반드시 경험하게 될 거예요. 얼마나 신비한 가 하면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이 소망 때문에, 우리가 더 강해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면.. 좌절하고 넘어지고 실족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 소망의 힘 때문에, 더 강해지고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소망의 힘'이, 내가 애써서 일깨워야 하는 면도 있지만,
참 하나님의 자녀라면.. 또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잠자던 그게 언제 저절로 깨어나느냐면,
환란과 핍박을 당할 때입니다.
그게 참 성도가 되었다는 증거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