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선생들은 북한 선교사로서 갖춰야 할 자질들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 설교도 그만하면 됐고, 사역장을 이끄는 리더십도 한두 선생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나의 기준에 들어섰다.
※여기서 '선생'은 사역장에서 훈련받은 1기 탈북민 성경교사를 가리킴
이렇게 몇 달만 더 훈련한 후, 이들을 연변으로 파송, (1기 1998.9월~1999.6월) 그 곳에 흩어져 있는 탈북자 형제들을 모아서, 각자 사역장을 새로 만들어 이곳과 똑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2기 사역을 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북한출신 선교사에 의한, 북한선교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되었다.
선생들에게 '바로 당신들이 내가 오래전부터 기도 해오던 북한선교사들로서 북한 기독교 역사에 새로운 장을 펼칠 주인공들이라고' 뜨거운 마음으로 설명하니,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내 말을 새겨들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파송 후에 예상되는 많은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우선 파송된 선생들이, 북한 탈북민 형제들을 이끌고 와서 사역을 시작하려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사역비가 필요했다. 사역장 수가 늘어나니까.
(*실제로 사역장 수가 5개로 늘어났음)
그리고 선생들이 학생 모집을 위해 몇 달간 머물며 활동해야 할 연변은 북한과 접경지대로, 북한 보위부에서 파견한 특무들이 많아 체포될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그 외 우리 선생들이 모집할 탈북민 형제들이, 선생들을 믿고 순순히 따라와 줄 지... 모집한 학생이, 혹시 보위부 특무나, 위험한 인물은 아닌지... 학생으로 훈련받을 자질은 있는지... 하는 것들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또 하나의 문제는, 조선족을 구원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신분이 확실한 중국 사람이므로 북한 형제들처럼 사역장에 갇혀 지내며 성경공부하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험난한 과정을 통해 학생을 모집해 오더라도 한 번도 감당해보지 않은 이 사역을, 선생들이 잘 이끌고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사역장으로 사용할 집을 구하는 일부터 학생들을 이끌어나가며 맞닥뜨리게 될 술 담배 문제, 서로 싸우는 문제 등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전적으로
사역장 책임자인 각 선생들 자신이 책임지고 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지도자로 세워지는 자신들을 위해, 또 다가올 여러 많은 문제들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넉넉히 극복하며 잘 감당해 갈 수 있기 위해 많은 기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역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이들이라 내가 느끼는 기도의 부담만큼 절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모두들 기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고 각자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2~3 일씩 금식하며 기도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오직 하나님이 힘과 지혜를 주시고, 도와주시며, 인도해주셔야만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이, 바로 이 사역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도 시간에 중국 지도를 펴놓고, 중국 어디든, 각자가 사역할 지역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결정하도록 했다.
앞으로 하게 될 사역의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이 기도 하고 하나님께 응답받도록 준비시켰다.
1999년 2월 19일, 파송시 함께 행동할 팀을 구성하고
파송 날짜를 삼 개월 후로 잡았다. (*단 1년 성경훈련 후에,
이렇게 파송까지 받는 것은 정말 초대교회 역사입니다)
1조 유기풍, 김권능 선생 2조 민선주, 박무디 선생 3조 박요한, 진칼빈 선생 (*파송 후 얼마 후에 두 분이 첫 순교자 됨) 4조 허익두, 전요셉 선생 (전요셉은 조선족, 중국어 통역 담당) 5조 최바울 선생
몇 시간의 토론 끝에, 이렇게 팀을 짜서 움직이기로 확정했다. 파송 때 총신대 김의원 총장께서 북한 선교를 할 수 있는 전도사 자격증을 선생들에게 만들어 주시기로 하였다.
이제는 각자의 사역장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된다고 또 다시 설명해주니, 어깨가 무거운 것을 깨닫는지 모두 엄숙한 표정이었다.
선주선생은 이제 전도사 신분증을 가지고 보위부 특무에게 잡히면 무조건 순교이니, 순교의 각오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감사했다. 하나님께 고백하던 북한출신 북한 선교사 양육이 점점 현실로 이루어져 감이 감사했다.
파송 날짜를 잡고 나니, 통독과 기도, 암송등 정해진 일과에 충실할 뿐 아니라 일과가 끝난 후에도 모두 열심히 공부하였다.
"모두 다 항일유격대식으로 공부합시다요!" 무디 형제는 북한식 농담으로 떠들어대면서 이방 저 방 돌아다녔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선생들은 얼마 남지 않은 파송을 의식해서인지,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낮잠시간은 물론, 밤에도 1~2시까지, 심지어 아예 밤을 새가며 공부하기도 했다. 익두 선생은 학생을 맡으면, 뭘 가르칠 지 걱정스럽다고 하기도 했다. 파송을 대비해 사역장 전체가 10일을 금식하기로 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주님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모든 선생이 금식의 필요성을 깨닫고 흔쾌히 동의했다. 10일 금식에 들어간 지 7일 째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칼빈 선생이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면서 쓰러져 버린 것이다.
북한에서부터 폐병을 앓아온 그를 위해 지금까지 한국에서 계속 약을 가져와 먹이고, 잘 먹인다고 고기도 자주 먹였다. C시의 한인교회 방집사님이 특별히 개소주까지 고아주셔서 그것도 먹였지만 병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던 모양이다.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피를 사발로 토해냈다. 온 사역장 아파트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황망히 조선족 요셉선생이 칼빈선생을 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패병 말기 라고 하며, 폐 3/4이 이미 결핵균에 먹혀 없어진 상태라고 했다.
그리고 '정주사람을 다 폐병 환자로 만들 셈이냐? 이 정도면 격리 입원을 시키든지, 정주를 떠나든지 해야지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두었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자기 신분증으로 함께 병원에 갔던 조선족 요셉선생이 몹시 불안해했다. 다른 선생들도 칼빈선생이 매일같이 쏟아내는 피를 보고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칼빈선생은 신분증이 없어, 돈이 있어도 입원은 꿈도 못 꾼다. 이대로 가다가는 며칠도 못 살 것 같았다.
선생중에서 칼빈선생이 영적으로 가장 뛰어났다. 사역장에 오기 전부터 신앙을 가졌던 그는 '걸어다니는 주석'이라 불릴 만큼 성경에 남달리 해박했고 말씀도 아주 잘 전했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북한의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자 하는 열정이 누구보다 뜨거웠다.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큰 몫을 감당할 인재라고, 자타가 인정한 선생인데 파송을 앞두고 이렇게 쓰러진 것이다.
폐병은 전염성이 아주 강한 병이라, 10일 금식이 끝나도 칼빈선생은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식사를 따로 해도, 선생들은 불안해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길이 없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짐을 싸서 떠나겠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눈앞이 캄캄했다. 금식기도는 끝났지만,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주님께 매달렸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역장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눈물로 기도하며. 한국 소록도에도 전화해서 기도를 부탁했다.
그렇게 주님의 심정으로 며칠을 울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칼빈선생의 폐병 치유를 위해 기도시간을 연장하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순간 근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선생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여태까지 떨어져 나간 형제들도 너무 많은데,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요. 폐병 때문에 흩어져야 한다면, 이때까지 공부한 것이 헛수고일 거예요.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그 많은 병자를 고치셨는데 말씀을 믿는다면 기도합시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폐병 하나 못 고친다면 말이 되겠어요? 그러니 기도하면 반드시 고쳐주실 겁니다. 나는 그렇게 확신해요!'
하루 두 시간씩 하던 기도시간을, 그날부터 3시간으로 연장시켰다. 하지만 선생들도, 박선교사와 순교전도사도 (두 사람은 한국인) 칼빈선생의 폐병을 너무 두려워하였다.
마음으로는 아파하고 눈물로 기도해 주면서도 될 수 있는 한 그의 곁에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폐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칼빈선생은 자기 때문에 닥친 사역장의 위기에 더 힘들어했다.
베란다에서 홀로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도 울고 나도 울면서 주님께 매달 렸다.
매일 밤 울면서 칼빈선생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다. 파송을 막 앞둔 시기에, 일이 이렇게 되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즈음 선주선생이, 자기 다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무렵 선주선생은 앉은뱅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다리가 아파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저는 다리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북한 탈출을 결심하고 일곱 번이나 두만강을 넘었으나 자기를 잡으러 오는 보위부 사람들을 뻔히 보면서도, 다리가 불편한 관계로 도망도 못 가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잡혀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불구에 가까운 신체조건 때문에, 매번 풀려나곤 했다. 여덟 번째 만에 간신히 탈북해 중국으로 넘어왔지만 신체 건강한 사람들도 자리 잡기 힘든 중국에서 그는 다른 탈북자보다 더 많은 고생을 했다.
선주선생은 전부터 매일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 기도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깨어 울면서 기도해 왔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사역장의 다른 선생들도 새벽에는 물 마시러 부엌에 들어가지 못할 때가 많았다. 새벽 부엌은 그가 늘 주님께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로 가족을 위해 기도했지, 처음부터 다리를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게 되자 다리가 꼭 나아야만 할 필요성이 생겼다.
교통수단이 열악한 북한은, 1백리 2백리 아무리 먼 거리도 걸어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아픈 다리를 가지고 뭔가를 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필요하다. 건강한 선생들과 똑같이 기도 하고, 똑같이 성경공부해서는 안 되니까 하나님께 조금 더 졸라야겠다. 조금 더 조르는 놈에게 더 주는 게 부모 마음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기로 작정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북한 복음화를 위해 필요하니까 저를 부르셨는데 제가 다리가 이래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 이 다리부터 좀 고쳐주십시오! 하나님, 저는 이 다리 가지고 아무것도 못 함다. 다리가 안 낫고서는, 성경을 배워도 필요 없으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사역장에 전체 금식은 끝났지만, 보식도 마치기 전에 그는 다시 40일 금식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온 사역장이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며 칼빈선생의 폐병 치유와, 선주선생의 다리 치유를 위해 기도했다.
선주선생이 금식을 시작한 지 20여일이 지난 토요일이었다. 일과에 따라 모든 선생들이 정주대학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금식을 해 기운이 없는 데다, 성치 못한 다리 때문에 선주선생은 그날도 벤치에 앉아 있게 했다.
그런데 그가 난데없이 운동장 한가운데로 어정어정 걸어내려왔다.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앞으로 공이 굴러갔다.
그런데 세상에! 선주선생은 공을 몰고 상대방 골문 앞까지 몰고가더니 바로 꼴인 시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와 선생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한동한 멍하니 넋을 잃었다. 선주 선생이 정상인처럼 걷고 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를 얼싸안고 실성한 사람처럼 껄껄껄 웃었다. 선생들도 펄쩍 펄쩍 뛰며 박수를 치고, 할렐루야!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선주선생도 엉엉 울며 자기 다리를 여기저기 만져보았다. 십 년 동안 절름발이로 살던 그였다.
두 달 후에 칼빈선생의 폐병도 기적적으로 나았다. 폐병은 잘 먹고 살이 찌면 낫는 병이다. 우리는 두 달 동안 칼빈선생을 위해, 함께 돼지 두 마리와 염소 다섯마리를 먹었다.
그렇게 계속 먹이면서 기도하니 체중이 약 20 킬로나 늘면서 그의 패병이 깨끗이 사라졌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서 나는 울었다. 칼빈선생을 다시 돌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서 울었다.
그리고 다시 돌려받은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울었다. 칼빈선생의 폐병과 선주 선생의 다리가 완치되자 사역장은 완전히 천국분위기였다.
선생들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보며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다.
칼빈선생의 패병은, 사역장이 해체되는 각오까지 할 정도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막 파송을 앞둔 시기라, 그 좌절감은 나를 더욱 아프게 했고 그 만큼 처절하게 주님께 매달렸다.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데, 가장 큰 저항은 공기라고 한다. 독수리가 평형을 유지하고 쏜살같이 날려면, 공기의 저항을 잘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공기(바람)가 없다면, 독수리는 한 치도 높이 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는 문젯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도약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세상 사람과의 차이점임을 새삼 깨달으며 주님 앞에 엎드렸다. '주님 감사합니다!'
♣돈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한국에서 모목사님이 교회 선교부장 장로님과 우리 사역장에 오셨다.
북경에서 정주공항으로, 정주공항에서 다시 사역장으로 두 분을 모시고 오며 목사님께 '형제들이 신약성경을 백독 가까이 통독했기에 설교도 잘하고 아주 귀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목사님은 놀라는 눈으로 나를 잠깐 보시더니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셨다.
사역장에 도착한 후 목사님은 곧장 예배를 인도하시고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에 대해 설교하시면서 바울선생에게 '요셉의 아버지가 누군지' 물으셨다.
성경을 백독이나 했다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것 같다. 바울선생은 주저없이 답했다. 아담입니다.
갑자기 좌중에서 폭소가 터졌다. 바을 선생을 그윽히 바라보시던 목사님은 이번에는 요한선생에게 눈길을 돌려 다시 물으셨다.
요한선생 역시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브라함입니다' 또다시 사역장 안에 폭소가 터졌다. 어떤 선생은 아예 배꼽을 쥐고 뒤로 넘어가버렸다.
나도 한참을 웃다가 '이들이 구약에 약하고, 당황해서 그렇다'고 말씀드렸다.
얘기를 듣던 목사님께서 요한선생에게 다시 물으셨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는 알아요?'
이번에는 침착하게 대답을 잘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북한 사람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것에 매우 신기해하셨다.
두 분은 다음 날 북경관광 일정도 취소하고, (호텔에서) 다시 사역장으로 오셨다. 이번에는 한 사람씩 설교를 시키고는, 직접 듣고 평가하시며 늦게 사역장에 영입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웬만한 목사수준 이라며 깜짝 놀라셨다.
점심 식사 후, 목사님은 선생들과 개별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셨다. 그때 목사님이 무디 선생에게 물으셨다.
'돈은 누가 주나?' '하나님이 주십니다!'
목사님은 아무 말이 없다가, 잠시 후 다시 물어보셨다. '돈은 누가 주나?' '하나님이 주십니다!'
역시 같은 대답이 나오자 조금 언짢으셨는지 몇 번이고 다시 물었지만 무디 선생은 고집스럽게 똑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나는 다른 방에 있어서, 이 일을 몰랐는데 무디 선생이 똑같은 대답만 하자 목사님이 이번엔 내게 오셔서 다시 물어보셨다.
'최광 전도사가 사역계획은 하지만, 돈은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주시나?' 나는 '예 그렇습니다!' *총신대원 졸업 직후
그러자 목사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걱정을 많이 하셨다. 다음날 아침, 북경으로 떠나는 두 분을 배웅하기 위해 정주공항으로 모시고 갔다. 공항에서 기다릴 때, 목사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최전도사, 사역은 꼭 전도사가 해야 하나? 최전도사가 다 해야 되나?' 순간 나는 답답하고 속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파송한) 목사이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묻는 듯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셨다.
'우선은 가정을 떠나야 하고 무보수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위험이 있기에, 순교의 각오가 된 분이면 누구라도 좋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출발 직전에 얼마의 헌금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최전도사, 알겠네! 이 사역장은 비밀신학교나 다름없으니 알려져서는 안 되지. 최전도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물질로 동역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가서 총장님과 상의할 테니, 그때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고...'
며칠 후 광호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국 돈 3만 위안을 헌금하겠다는 분과 연결시켜줄 테니, 나더러 만나보라고 했다.
3일 후, 광호 선생은 헌금하겠다는 분을 모시고 사역장으로 찾아왔다. 같이 식사하면서 그분은 내게 여러 가지를 묻더니 '돈은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하였다.
'당신에게 도움을 받고 싶으니, 좀 내게 도와달라는 말을 해라'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 풍부와 궁핍을 다 아시고 적절하게 채우시는 하나님께서 채우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광호 선생은 몹시 서운해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그분은 그 돈을 주지 않고, 그냥 떠나버렸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나의 기준은 '헌금하시는 분이 하나님앞에서 드리도록' 하고 나는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다.
내가 중간에 끼어 다 감사드리고 나면 헌금하시는 분이 하나님앞에서 상급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떠나보내고 나는 유쾌했다.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확신에.. 즐겁기만 하였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아셨다. 돈이 없는 상황도 많이 지냈지만 지나고 보면, 그때그때의 고난도 다 주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풍성하신 하나님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가는 자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반드시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이후에도 많이 경험했다.
두 달 전 길림에 있을 때였다. 김요엘 선교사로부터 수원에 있는 영광교회 목사님이 중국에 북한 선교를 위해 오셔서 지원해줄 만한 장소를 찾으시니
사역장에서 한 시간만 교제하고 은혜를 나누면 매월 30~40만원씩 꾸준히 지원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사역장에, 헌금하겠다는 분이 한 사람 다녀가면 나는 형제들의 감시 대상이 되는 것을 주광호 선생과 형제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았다.
형제들은 '얼마를 받았을까, 또 앞으로 얼마씩 지원받는가?' 늘 궁금해하며 (내가 이런 사역을 통해 혹시 돈을 챙기지나 않는지)
그래서 나와 형제들 서로간에 신뢰가 약해지는 것을 알고 나는 후원하겠다는 어떤 분도, 사역장에 초청하지 않기로 하고 거절했다.
그때부터 김의환 총신대 총장께서 동역자가 되어 주셔서 후원부분은 총장님 채널로 고정되도록 계속 기도했다.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하는 사역 특성상, 여러 곳에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선교방법은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영혼을 위해 제 생명을 쏟아 붓겠습니다. 물질과 환경 여건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직접 채워주세요!' 하는 것이다.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많은 분의 말을 들어보면 '선교현장 50%, 재정후원 50%로 힘을 쏟으며 사역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나는 각자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믿는다.
♣수영장 사건과 17일 금식기도
기풍선생이 일주일간 사역장을 책임지고 이끄는 차례가 되었다. 자신감에 차 있는 그에게 일주일 생활비 5백 위안을 주면서 잘 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평소에 학생들이 먹고 싶어 하던 음식을 사다가 식탁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일과 진행과 달리, 월요일 아침부터 축구를 하러 가자고 했다.
다른 선생들은 금요일까지는 통독을 하고, 토요일에 추구하는 전통을 깨뜨리지 않았지만 그는 좀 다르게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전에 축구를 마치고 나자, 오후에는 또 수영장에 가자고 했다. '저렇게 하는 것은 아닌데..' 싶어 나는 속으로 걱정이 되었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들에게 사역에 총 책임자 위치에서 진행하라고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시시콜콜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선생들이 자기가 맡은 주간에 실수를 많이 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앞으로 각자 사역장을 이끌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경험을 더 많이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짐작대로 수영장에서 사고가 터졌다. 처음에는 한겨울에 수영을 다 해본다며, 모두 신나게 수영하더니 잠시 후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자들을 보고, 모두 정신이 나가 버렸다.
오후 내내 정작 수영은 겨우 20분 정도 하고, 억지로 물에 밀어 넣어도 어느새 다.시 나와 입을 헤 벌리고 앉아, 여자들만 구경하였다.
선생들은 이런 남녀 혼용 실내 수영장에 처음 들어와 본 것이다. 북한에는 실내 수영장도 없거니와, 여자가 밖에서 옷 벗는 행동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수영을 해도 강이나 바다에서 남자들끼리만 한다.
이들에게 실내에서 남녀가 같이 수영하는 것은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줄지어 앉아 여자들 구경만 하는 우리 선생들에게 수영장의 모든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기풍선생을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수영장을 나왔다. 이러다보니 기풍 선생은 이틀 만에 한 주간 생활비를 거의 다 써버렸다.
역시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일이 북한 선생들에게는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였다.
그동안 그저 끼니걱정만 면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돈을 규모있게 쓰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수영장 사건으로, 선생들의 영적 상태가 흐트러지지 않을까 나는 몹시 걱정되었다. 역시나 그 후부터 사역장에 분위기가 산만해지며, 여러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무디선생이 다른 선생들과 한바탕 크게 다투고는, 소주를 사와서 몰래 마셨다. 나는 아픈 소리를 하려고 작정하고, 그를 내 방에 불렀다.
'술을 먹어야 할 것 같으면, 사역장을 떠나서 마시세요.' 내 말을 듣고 그는 놀라고 겁먹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나가라는 겁니까?' '계속해서 술을 마시려면 나가세요!'
갈 곳이 없는 탈북자들은 '나가라'는 말을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차마 나가라는 말까지 할 줄 몰랐는지, 그는 무섭게 화를 냈다.
'예 갑니다. 가요. 가라고 하면 못 갈 줄 알아요? 갑니다. 가요!' 발로 문을 걷어차고 나가더니 이내 보따리를 싸들고 사역장을 나가버렸다.
어두워지자 그는 다시 사역장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갈 곳도 없고, 갈 생각도 없었는데.. 그냥 홧김에 나가버렸단다.
마음 속으로는 다시 돌아와 준 그가 반갑고 고마웠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제부턴 좀 잘 할 수 있겠어요?' '예!' 무디 선생은 크게 한번 말하고는 빙긋 웃었다.
이 일 외에도, 권능선생과 익두선생도 자기들을 왜 이렇게 영적으로 손해보게 했냐며, 기풍선생에게 막 달려들었고 다른 선생들도 돌아가면서 기풍선생과 싸웠다.
기풍선생도 화가 나서
'이 새끼들, 다 패죽이고 사역장에서 나간다'며 난리를 피웠다.
그는 혼자 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누가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겨우 겨우 기풍선생을 달래서 내 방에 불러 놓고 수영장에 간 것이 왜 잘못 되었는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내 말을 다 듣고, 그는 즉흥적으로 행동했던 자기의 잘못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며, 사역자로서의 정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기풍선생이 금식을 시작한 지 18일째 되던 날, 잠시 한국에 갔던 순교전도사(한국인)가 돌아왔다.
순교전도사가 가져온 사탕, 과자 등 맛있는 먹거리중에서 사탕이 너무 먹고 싶었던 기풍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사탕 하나를 입안에 넣고 삼켜버렸다. 이로 인해 40일 금식이 중도에 끝나고 말았다.
토요일 정주대학 운동장에서 축구가 끝난 뒤, 나는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했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그러는지, 아내는 아무 일 없고 아이들도 다 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목소리를 듣고 나니 아내가 더욱 더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태어난 지 몇 개월 밖에 안 된 아들을 고향에 두고 온 요한선생,
여섯 살짜리 귀여운 딸아이를 두고 온 안타까움에 남몰래 애태우며 눈물 흘리는 무디선생
밭고랑에 쓰러진 어머니를 두고 눈물의 강을 건너야 했던 바울선생 이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동안은 이들을 보며, 비록 가족과 떨어져 있어도 늘 감사하며 지내왔고 이들 앞에서 가족들 보고 싶은 내색하기가 미안해서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기도하려고 침대에 엎드리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내를 지켜주시며 하나님의 얼굴 빛을 비추사 은혜주시며, 평강주십시오!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에서, 앞으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 되게 해주세요. 주님~ 주님~ 주님~'
'주님, 가족들이 보고 싶습니다. 저의 가족들이 보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없는 동안 지켜주세요.'
나는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 없이 울면서 아내와 아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이렇게 1기 사역은 나날이 무르익어갔다. *1998.8월~1999.4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라는 말씀처럼 시126:5 1기 사역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우선은 한국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되어 너무도 보고 싶어서 울었다. 처음 6개월은 외로워서, 힘들어서 울었다.
사역비가 없어서 울었고, 형제들이 속 썩일 때마다 울었다. 또 형제들이 죄사함과 구원의 감격 가운데 울 때 나도 감격속에 목 놓아 울었다.
칼빈선생과 선주선생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안타까움에 한없이 울었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깨끗이 치유해 주셨을 때, 감사해서 또 울었다.
이제까지 얼핏 생각해도 3백 번은 족히 울었던 것 같다.
♣파송 (허난성 정주)
박베드로 선교사가 처음 우리 사역장에 오셨다. *나를 중국에 파송해 주신 분
그분은 도착하자마자 곧장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우리가 큰 소리로 찬양하며 기도하니, 깜짝 놀라 창문을 다 닫으셨다.
그리고 '이렇게 해도 되냐고?' 예배 후 심각한 얼굴로 물으셨다. 길림에서부터 이렇게 예배드렸지만, 문제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예배드리다가 체포되어 죽는다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순교가 아니겠냐고 말씀드렸다.
나는 항상 안전에 주의하면서도, 예배드릴 때만은 전심으로 드리라고 가르쳤다. 주님이 기뻐하셔서 철저하게 보호해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이사 가다가도, 예배시간이 되면 갈아타는 역의 광장 한적한 곳에서 예배드리곤 했다.
당시 중국은, 중국인들도 정부에서 운영하는 삼자교회가 아닌, 허가 받지 않은 곳에서 예배드리면 체포되던 상황이었다. 특히 외국인이 선교활동을 하다 적발되면, 과중한 벌금을 내고 즉각 추방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쫓기는 속에서 위험한 사역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북한선교를 할 수가 없었다.
철저히 하나님만 신뢰하게 하기 위해, 나는 선생들을 이렇게 강하게 훈련시켰다. 그러나 역시 각자가 믿는 대로 된다고.. 나는 그 후로도 만 3년 동안 중국에서 탈북자 사역을 했지만 단 한번도 예배 때문에 체포된 일은 없었다.
박베드로 선교사가 다음 날부터 조직신학 강의를 시작하려 하자 선생들이 아직은 말씀을 더 공부하고 나서 조직신학을 하고 싶다며 깊이 있는 말씀 강해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강해로 넘어갔다. 잠시 후 선생들의 질문이 폭포수같이 쏟아지면서 선주선생이 목사님께 질문을 했다.
'목사님, 레위기와 출애굽기의 성막과, 히브리서가 어떻게 연결이 됩니까? 서로의 연관성속에서 히브리서를 해석해 주세요.'
그리고 박선교사가, 안식일 날 예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말씀을 전하고는 질문을 하라고 했을 때, 칼빈선생이 '안식일을, 안식년과 희년과 연관지어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마 톰슨 성경같이, 통독 시간에 성경 아래 있는 주석을 같이 읽은 모양)
박베드로 선교사는, 내 방에 들어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신 놀랍다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한 달간으로 계획했던 조직신학 강의는 이렇게 해서 3일만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선교사님은 다음 날부터 '북한선교 현장 중에서 최고다. 세계에서 최고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찬송을 고래고래 불러도 하나님이 전적으로 보호해 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곳을 세계 어디에서도 아직 보지 못했고, 새벽기도 때 설교하는 그 수준하며,
또 자기가 사역장을 한 주간 씩 이끌어 나가며, 탈북자들이 북한선교사들로 세워져 가는 모습을 보니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셨다.
박선교사는 한 달 정도 사역장에 계시면서 하루에 한 번 이상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그 칭찬을 듣고는, 나도 기뻤지만, 새롭게 세워진 선생들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한국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3 개월이 지났다. 비자 문제로 나는 다시 한국에 가야 했고 곧 파송될 선생들의 활동자금과, 새로 생길 사역장에 대한 사역비도 준비해야 했다.
박베드로 선교사와 박주환 선교사, 김순교 전도사에게 사역장을 부탁하고 나는 한국으로 왔다. *모두 한국인
한국에 와서 집에 도착한 지 30분쯤 지났을 무렵 박베드로 선교사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사역장에 여자 공안이 찾아와서 요셉선생(유일한 조선족)이 나가서 맞이했는데 여느 때보다 한참 얘기를 하고 들어오면서
신발이 많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데 이쪽 저쪽 방은 다 보여주면서, 통독 실은 안 보여주는 것을 이상히 여기며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요셉선생 신분증과, 박베드로, 박주환, 김순교 선교사의 여권을 모조리 회수해가면서, 내일 공안국에 출석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저녁에 박선교사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나에게 상의를 하시는데 나는 알아서 판단해 달라고 말씀 드렸다.
박베드로 선교사는, '선생들 수준도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공안을 사역장에 보내심은, 파송하라는 뜻인 것 같다'며 바로 파송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면 파송 날짜가 예정보다 40~50일 앞당겨지는 셈이다. 우리는 선생들의 파송 날짜를, 연변 지방의 모내기 철이 끝나는 때로 맞추었었다. 모내기 철에는 바쁜 농촌 일손을 도와주라고 공안들도 일부러 북한 사람들을 잡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철이 끝나면 다시 덮쳐서 잡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탈북자들이 갈 데도 없어지니, 학생 모집이 좀 더 수월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선생으로 세워지긴 했지만, 아직 부족한 면이 많으니 앞으로 두 달 가량 더 훈련을 받아, 적어도 총 10개월 정도는 훈련기간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 .. 하는 생각에서였다.
저녁에 박선교사는, 밖으로 나가 대학 주변을 돌아다니던 선생들을 불러들여 간단하게 파송예배를 드렸다.
파송예배시간에 선생들은, 파송의 노래를 부르며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이제 정주에서 연변으로 가면, 얼마나 큰 위험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이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연변에는, 북한에서 파견한 비밀경찰인 보위부 특무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성경공부 할 만한 탈북자들을, 그곳에서 모집해 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선생들은 활동 자금도 없이, 각자 가방만 하나씩 달랑 들고 연변으로 떠났다.
이때가 1999년 4월 7일이었다.
♣인정받는 우리 선생들
정주에서 파송식을 마친 선생들이 연변으로 와서
연변에서 탈북민 학생들을 모집하고 있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여기저기 다니며 사역비를 모금하고 있었다.
김의환 총장님께서 스케줄을 잡아 놓은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선교보고를 했지만 이번에는 사역비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선생들의 독촉 전화가 20여 차례나 왔다. 학생들을 다 모집하였으니, 안전한 중국 남쪽 지역으로 내려가 사역을 시작할 수 있게, 빨리 사역비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독촉 전화가 와도 내게는 중국에 들어갈 여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요셉선생의 아버지 전 집사님(조선족)께 전화를 해서 돈을 좀 구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기풍선생은 집사님께서 구해주신 돈으로 먼저 연길에 임시사역장을 꾸리고, 사역을 시작하였다.
선주선생은 연길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인 안도 조선족 교회에서, 북한 형제 2명과 자매 한 명, 부부 한 쌍을 데리고 사역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에게는 사역비가 허락되지 않았다. 한 시간 한시간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렸지만 한국에 들어온 지 한 달 보름만에야 겨우 240만원이 모금되었다.
이 돈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곧장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 와서 먼저 전 집사님(조선족)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전 집사님께서 그동안 수고를 많이 하고 계셨다.
돈을 구하기 어려운 동네에서 6천5백 위안을 구해서 선생들에게 공급해 주셨고 사방으로 흩어져 활동하는 우리 선생들의 중간연락처 역할도 해주셨다.
그동안 우리 선생들이 집사님에게서 가져가 쓴 돈을 돌려드리고 권능선생을 만났다.
권능선생은, 모집한 학생들을, 자기 가족들이 사는 집에 모아놓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보위부 특무들과 공안들을 피해 깊은 산속에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익두선생은 의란 김집사 댁에 기거하며 활동하고 있었고 칼빈선생과 요한선생은 왕청 삼도구 아주마이 댁에 은거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칼빈선생과 요한선생은, 아직 학생들을 다 모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을 모집하러 연변에 왔지만, 삼도구 조선족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려보니 너무 안타깝고 속상해서, 조선족 교회사역을 먼저 시작했다고 하였다.
당시 연변의 조선족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시는 분은 대부분 집사나 전도사였는데,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부족했다.
그래서 찬송이나 몇 곡 부르고, 간증하고, 성경 한 번 읽는 것으로 예배를 끝내곤 하였다.
칼빈선생이 이것을 목격하고 안타까워 설교를 하자 성도들의 반응이 너무나 뜨거웠다고 한다.
이들은 칼빈과 요한 두 선생이, 알기 쉽게 풀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밤에 두 선생이 은거하는 집에까지 찾아와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나는 학생 모집을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던 두 선생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이런 문제는 칼빈, 요한선생 뿐 아니라 안도에서 사역하는 선주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선주선생의 설교를 한번 듣고 난 후, 그곳 조선족교회는 물론이고 한족교회에서도 예배시간에 선주선생을 자기 교회로 데려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다고 한다.
심지어 술을 조금 마실 일이 있으면, 자기교회 전도사대신 선주 선생에게 허락을 받으러 왔다고 한다.
조선족뿐 아니라 한족들도, 우리 선생들이 신분증도 없는 탈북자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대접하고 섬겼다.
그만큼 연변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했지만 제대로 말씀을 전해줄 사역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선생들이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여러 선생들을 만나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고 나니 얼마 되지 않던 돈이 이내 바닥이 나고 말았다.
내가 돈이 없어 힘들어하는 것을,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요셉선생이 *유일한 조선족 8천 위안이라는 거금을 구해왔다. *당시 환율 1위안 170원
그래도 모집한 학생들을 데리고 남방으로 내려가 8개 사역장을 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의 아내에게 전화해서, 헌금 들어온 게 있느냐고 물으니 가정생활비로 들어온 돈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내 통장으로 들어온 가정생활비 50만원을 요셉선생의 통장으로 송금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자, 이 돈도 다 없어졌다. 기도하고 C시 한인교회 김무종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우리 사정을 설명하고, 헌금 한 번 가능한가 하고 상의드리자 가능하다고 하셨다. 나는 급히 C시로 내려가니, 목사님은 4만5천 위안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목사님이 너무 고마웠다.
이 돈이면, 당장 필요한 부분들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돈으로 그동안 연길에 머물던 기풍선생 사역장을 제일 먼저 사천성 중경으로 보냈다.
기풍선생은 떠나면서, 학생들이 너무 사랑스럽다는 이야기를 세 번이나 하였다.
중경으로 가기 위해 학생들을 데리고 연길 역으로 들어서던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하기만 했다.
♣여기는 북조선사령부
권능선생은 파송되어 연변에 이르자마자 깊은 산속에 숨어 사는 부모님을 찾아 연길 의란 으로 갔다.
부모님은, 북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내 없는 동안 어떻게 살았슴까?'
권능선생의 아버지 김아바이는 신이 나서 그에게 설명했다. '야야, 말도 마라. 우린 진짜 쉽게 살았다. 아글쎄 여기에 쌀이 다 떨어져 갈때 쯤이면, 마치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랫동네 사는 전도사님이 쌀을 들고 올라오고...
또 떨어질까 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먹으라고 쌀을 주고 그렇게 하다가는 또 카나다라는 나라에서까지 선교사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돈도 주고, 옷도 주잖니? 우리는 정말 너 없는 동안 잘 살았다.
근데 야 그거 진짜 신기하더라. 이 사람 없는 심심산골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살까 하고 걱정했는데, 딱 마치 누가 보는 것처럼 공급해주지 않겠니?'
권능선생은 울컥 눈물이 났다.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너무도 신실하게 응답해주셨던 것이다. 기도를 하면서도 반신반의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산속 집에는 장만식 아바이라고 하는 분이 살고 계셨다. 장아바이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기풍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권능선생과 함께 온 기풍선생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술도 마시지 않을 뿐더러 담배도 피우지 않고 옛날과 완전 딴판이 되어 말할 때도 행동할 때도 정중하고 겸손해져 있었다.
그리고 권능선생과 번갈아 매일 가정예배를 인도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아이쿠 야~ 이놈 봐라! 그렇게 형편없는 개망종 처럼 놀던 저 놈이 이렇게 사람이 돼서 돌아왔어? 야 거 신기하다 야! 그거 너희 공부하는 거기에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풍선생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의아해 했다. 장아바이가 정색을 하고 기풍선생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나도 사역장에 학습하러 가문 안 됩니까, 기풍선생님?' 기풍선생은 나이가 57세나 되는 장아바이가 공부하러 간다고 하자 만류하였다. 젊은 사람들도 견뎌내기 힘든 사역장의 일과를 노인이 어떻게 이겨낼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기풍선생님, 이번에 갈 때 나를 빼놓으면 안 됨다. 나는 죽어도 학습하러 가겠습니다.' 하며 장아바이는 기풍선생의 다리를 붙들며 매달렸다.
김아바이는 권능선생(아들)에게 그가 없는 동안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들려주었다.
김아바이가 사는 산속으로 북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길을 알고 찾아와도 찾기 힘든 곳을, 어떻게 알고 오는지 낮에도 찾아오고, 한밤 중에도 찾아왔다.
김아바이는 아들의 부탁도 있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불쌍하기도 해서 내쫓아버리지 않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잠깐 사이에 20여 명으로 늘었다가 나중에는 80 여 명에 이르는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산 아래 마을이나 파출소에서는 사람들이 떼로 모였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싹 사라지곤 하는 이곳을 '북조선 사령부'라고 불렀다.
80명에 가까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양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공급해 주셨다. 권능선생이 우리 사역장에 들어간 것을 알고부터 의란 조선족 교회에서 선교사나 목사가 탈북자를 만나고 싶어하면 제일 먼저 이곳으로 안내했고 교회에 지원 물자가 들어오면, 이곳에 최우선적으로 보내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움막을 짓도록 비닐까지도 올려 보내주었다.
이 산속 마을은, 산 아래 마을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산 꼭대기에 있었다. 차가 올라올 수도 없는 곳이고, 설령 공안들이 잡으러 와도 밑에서 나는 차 소리를 들으면, 천천히 걸어서 피해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공안들은 이곳에 탈북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잡으러 올라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은, 늘 안전에 대한 염려가 있었기에 김아바이는 산 아래 마을사람들과 관계를 좋게 가지며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가을철 바쁠 때는, 여러 사람이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 일손을 도와주었다. 마을의 장애인이 사는 집에는, 땔나무를 구해서 쓰기 좋게 장작을 패서 주었고, 언제든지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하면, 지체하지 않고 가서 도와주었다.
서로 좋은 관계가 유지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와서 북한 사람이 사는 집이 어딘가 물으면, 알려주지 않았고 공안이 물어도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한번은 공안이 김아바이를 체포하려고 작정하고 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벌써 다른 데로 가고 없으니, 눈 길에 괜히 고생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고 해서, 공안들이 그 말대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의란 시내에 살던 권능선생 당숙을 통해 권능선생 가족들과 그곳에 함께 사는 북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셨다.
당숙은 파출소 고위 관리로, 탈북자 검거선풍이 있으면 미리 알려주곤 하였다. 며칠을 가족들과 지낸 후, 권능선생은 사역장으로 떠나며 말했다.
'아버지,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사는데 안전에 조심하십시오'
'걱정마라. 여기 있는 사람들 잡으려면 헬기를 동원해도 안 된다. 공안들이 우리를 잡겠다고 그러기야 하겠니?' 그때 권능선생과 기풍선생이, 그곳에 있던 장아바이, 유연옥 형제, 김주명 형제와 권능선생의 동생들인 김영윤, 김사무엘 형제를 학생으로 모집하여 왔다.
권능선생은 다시 학생 모집을 나올 때까지, 여기 오는 사람들을 딴 곳에 보내지 말고, 꼭 여기에 데리고 있으라고 또다시 아버지께 부탁을 드렸다.
이후 2000년까지 2백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김아바이와 그 가족, 친척들의 소개로.. 우리 사역장에 들어왔다. 김아바이의 산속 집은, 우리 사역장으로 오기 위한 1차 집결지나 다름 없었다.
♣체포되는 선생들
기풍선생 팀을 보낸 후, (*연변에서 중국 남쪽 안전한 곳으로 보냄) 익두선생과 권능선생 팀도 속히 보내려 서둘렀다.
칼빈선생과 요한선생은 아직 며칠 더 기다려야 학생 모집이 끝난다.
그날 무디선생을 만났다. 그동안 그는 연길 서西시장에 있는 전화방 주인 아저씨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주인 아저씨는, 무디선생이 사역장에 오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다. 그런데 무디선생이 그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아저씨가 그의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따른다는 것이다.
그에게 당신이 활동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운영하는 전화방에 있는 물건들을 쓰고 싶은 대로 다 쓰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전화방 아저씨가 무디선생에게 북경에서 고아원 사역을 한다는 분을 소개해 주었다.
고아원 사역을 하시는 분은, 무디선생이 성경 1백독을 했으며 지금 북한선교를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스카우트 조건으로, 북한에 있는 아내와 딸을 데려다 주고 중국 신분증을 만들어 줄 테니 고아원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인도만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무디선생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몹시도 미안해하며 북경으로 떠났다. 그에게는 정말 거절하기 힘든 조건들이었을 것이다.
떠나가는 그에게, 그래도 바로 서서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면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라고 나는 부탁했다. 그가 하루빨리 아내와 딸을 만나 행복하길 주님께 기도했다.
무디선생이 떠난 이틀 후, 선주선생이 학생 3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선주 : 다리가 기적적으로 나은 분, 길림성 안도安圖에서 사역, 북한과 가까움)
선주선생이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는 온몸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 탈북자 출신 북한선교사들인데 또 얼마나 불쌍한 북한 형제들인데 저들이 사역현장에서 체포되다니...
더군다나 그는 사역장의 지도자로서, 북한에 끌려가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허둥거리며 모 대학의 처장님께 전화를 드려 사정을 설명하고 선주선생 구조를 부탁드렸다.
1인당 2천 위안은 있어야 빼낼 수 있을 거라고 하셔서 요셉선생 아버님(조선족)께 빌려서, 급히 8천 위안을 보내드렸다.
처장님은 선주선생 일을 책임지고 맡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한시름놓고 매하구에서 온 바울선생을 만났다. 길림시 명성교회 목사님들과, 집사님들이 탈북자의 신분으로 북한선교를 위해 뛰어다니는 바울선생을 대견하게 여겨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명성교회 옆에 있는 자그마한 사랑방에 임시 사역장을 꾸리고 새로 모집한 김주복, 강석환, 이빌립 형제들에게 성경통독을 시키고 있었다.
며칠 후 처장님께 연락을 드리니, 선주선생을 비롯하여 아직 한 사람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북송되기 전에 중국에서 빼내는데 드는 돈이 최근에 1인당 2천 위안에서 1만 위안으로 올라 이미 준 돈 8천 위안으로 선주선생만 빼내기로 하고, 이를 처리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선주선생은 아직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으로 호송될 나머지 형제들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1999년 5월 24일, 칼빈선생과 요한선생을 연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뒤늦게 학생 모집에 나선 두 선생도, 벌써 여러 명의 학생을 모집했고 이제 용정에서 한 두 명만 더 모집하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 장소인 전화방 아저씨 집에서 밤새 기다렸지만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까지 기다리다가 불안하고 궁금하여 이들이 은거하던 왕청 삼도구 아주마이 댁으로, 요셉선생과 함께 찾아갔다.
삼도구 사람들도, 어제 오기로 한 사람들이 아직 오지 않는다며 두 선생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급히 장처장님께 전화를 걸어서, 칼빈선생과 요한선생 같은 사람이 공안에 잡히지 않았는지 알아봐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뭐라도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두 선생이 모집한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중 한 사람인 진명 형제 말에 의하면, 두 선생이 없어지던 날 오후에, 자기 고향 친구인 보위부 특무를 연길역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들이 우리 사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지금 우리 선생들이, 여기서 학생 모집중인 것도 알고 있더라고 했다.
진명 형제도, 두 선생이 혹시 북한으로 끌려가지 않았는지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장처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길시 공안국 어디에도 두 선생은 없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중국 공안이 아니라, 북한 보위부 특무에게 바로 체포되었음이 분명해졌다.
다음날 나한테 전화가 왔다. 들어본 적이 없는 거친 북한 말투였다. '누구신가?' 하고 물을 새도 없이, 저쪽에서 먼저 말을 했다.
'여보쇼 나 진창욱이 형이요. 최광 선교사맞죠? 나 좀 봅시다!' 그리고는 연길 북대 시장에 있는 대우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진창욱이면 칼빈선생의 본명이었다. (*폐병이 기적적으로 나은 분) 나는 전화를 끊고 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형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칼빈선생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선생 형도 북한 보위부 특무였다.
그 중에서도 김정일 위원장 직속 외화벌이 마약밀매단 소속 특무였다. 언제나 생명의 위협 속에서 활동해야 하는 이들은 무기도 일반 휴대용 권총 정도가 아니라, 필요시에는 기관단총 사용도 꺼리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마약밀매단에서 탈퇴하여, 연길 조직폭력배에 가담하고 있었지만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약속 장소로 가보니, 내가 나올지 안 나올지에 대해서는 걱정도 하지 않은 듯했다. 나의 활동범위라고 해봤자, 자기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는 나와 우리 선생들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몹시 긴장한 가운데 칼빈선생의 형과 대화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내 예상처럼 나를 위협하려고 찾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대화 시작부터 털털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왔다. 내가 의아해하자, 동생이 폐병으로 죽을 수 있었는데 내가 노력해서 고쳐주었기 때문이라며, 동생이 살도 많이 찌고 건강해진 걸 보고, 여러 번 찾아와 인사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생이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다듬어져 자기가 감동을 많이 받았으며, 동생 문제가 정리되면 자기도 사역장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하였다.
만약 하나님이 동생을 안전하게 보내주시면 감사해서 공부할 것이며 동생에게 만일 무슨 일이 생겨도, 동생이 하던 일을, 자기가 계속 이어서 할 것을 약속한다고 하였다.
나는 너무도 예상 밖의 말에 '과연 이 사람이 칼빈선생이 말했던 그 형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몸아픈 칼빈선생이, 늘 금식해 가며 형을 위해 기도하던 것이 생각났다. 칼빈선생 형은, 나와 헤어진 후에 연길시 조폭들을 모두 풀어 연변에 있는 감옥들을 이잡듯 뒤졌지만 두 선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음 날은 요한선생의 동생을 만났다. 그는 형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형의 180도, 아니 자기가 볼 때는 360도 달라져서 너무 놀랐다며, 자신도 사역장에 들어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을 가끔씩 해 본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연길 조직폭력배에 가담하고 있는 처지라, 쉽지 않다고 하였다. 나는 형(요한)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면서 그와 헤어졌다.
♣첫 순교의 제물
칼빈선생 형을 만난지 보름 후에, 칼빈과 요한 두 선생이 사라진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두 선생이 나를 만나기로 약속한 하루 전 날 학생으로 모집한 윤길 이라는 형제는 보위부 특무였다.
그는 두 선생에게 용정 계산툰에 가면,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세 명의 북한 형제가 있다고 하면서 이들을 유인했다.
계산툰은, 북한과 인접한 두만강 강변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두 선생은 윤길 형제를 따라갔다가, 현장에서 바로 보위부 특무들에게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칼빈선생이 북한보위부에 체포되어 간 것이 확실해지자 그 형이 자기가 알고 있는 인맥을 통해, 동생을 빼내겠다고 북한으로 갔다.
북한으로 가기 전, 그는 나를 찾아와서 동생을 빼내는데 돈이 많이 필요하다며 부탁했지만 내 수중에는 돈이 전혀 없었다.
내가 몹시 미안해하자, 자기가 돌아오면 꼭 사역장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겠다고 다시 약속하고 떠났다.
그 후 혹시라도 동생(칼빈)을 빼내 다시 중국으로 넘어오지 않을까 학수고대 했지만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후에 들리는 말로는, 북한으로 간 그도 보위부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칼빈, 요한 두 선생이 북한으로 잡혀간 것이 확인된 후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뼈가 쑤시고, 근육과 피부까지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님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북한 선교는 안 되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열매 없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몇 명 되지도 않는 이 열매를, 이렇게 하시면 북한선교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하고 나는 울부짖었다.
함께 성경을 읽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북한선교의 사명을 붙들고 기도했던 사람들, '북조선에 예수의 피를 뿌립시다' 라고 매일 함께 고백하던 사람들이었다. 내 자식들보다 더 사랑하는.. 내 생명을 쏟아부어 키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천국으로 먼저 보내는 이들이 겪는 고통을 알 수 있었다.
훗날 권능선생 팀 학생으로서, 기차에서 체포되어 북송되었던 주명형제가 살아 돌아오면서, 도문변방구류소 벽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칼빈, 요한' 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고 전해주었다.
또 회령지방에서 온 한 아주마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칼빈선생과 요한선생이 잡혀간 시기에 회령지방에 포고문이 나붙고, 그와 비슷한 청년 2명을 공개 처형했다고 하였다.
칼빈, 요한 두 선생을 잃어버리고 선주선생을 감옥에 둔 채 2기학생 모집을 마무리하고 나는 연길을 떠났다.
나는 산동성 제남에 온 후, 한동안은 칼빈, 요한선생 생각만 하면 심장을 도려내듯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중에, '초대교회 스데반의 순교의 피를 통해 복음을 이방에까지 확산시키신 하나님께서 저 얼어붙은 북한 땅에, 순교의 피와 감옥 가는 주의 종들 없이는 복음화가 불가능하니... 우리 귀한 선생들의 순교와 감옥과는 이들을 통해 저 땅을 복되게 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칼빈, 요한 두 선생에게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며 '내가 먼저 순교할 것이니, 나를 따라 북조선 복음화를 위해 순교합시다' 하고 나는 형제들에게 더욱 힘있게 선포하였다.
칼빈선생은 당시 나이 26세로 아직은 애티 나는 청년이었다. 사역장에 오기 전부터 뜨거운 신앙을 가졌던 그는 빡빡한 사역장의 일과에도 자투리시간을 만들어 늦게 사역장에 들어온 요한, 기풍, 바울형제를 가르쳤다.
이렇게 일찍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것을 마치 알았던 것처럼 칼빈형제는, 하나님 앞에서 시간이 너무 아깝다며 그들에게 열심히 말씀을 깨우쳐 주었다.
그는 다른 형제들에게 늘 자상하였고, 매사에 모범적이었으며 축구할 때는 연신 큰 소리를 지르며, 아주 적극적이었다.
국수와 냉면은 또 어찌나 좋아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그릇으로 먹을 때 아예 세숫대야에 담아 먹고도, 한 대야를 더 달라고 했다.
그는 지혜도, 공부하는 방법도 남달랐다. 군복무시절에 설계를 했던 전력을 살려 바울의 전도여행 지도처럼, 성경의 모든 사건을 지도로 그려 다른 형제들에게 쉽게 설명해주곤 했다.
나와 함께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 제게 요즘 주체 못할 정도로 많은 은혜를 주신다'며 칼빈 형제가 기뻐서 풀짝폴짝 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5백독 정도 성경을 읽은 후에는 한국이나 미국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요한선생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입술이 두툼했다. 목소리는 언제나 걸걸하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남달리 힘이 세고 몸집도 컸다. 늦게 사역장에 들어온 그는, 사역장 규칙을 잘 몰라 처음에는 너무 엉터리였다. 글자도 잘 읽지 못해서, 가끔씩 소리 내어 읽을 때 자기 차례가 오면 진땀을 빼며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또 칼빈선생과 선주선생에게 일대일로 가르침도 받으면서 짧은 기간에 놀랍게 변화되었다.
자기는 머리가 나쁘니, 남들 한번 할 때 10번 20번은 반복해야 된다며 밤마다 새벽 한두시까지 말씀을 암송하고, 별도 학습을 하곤 했다.
베드로 사도와 같이 열정적이며 적극적인 그가 부흥사처럼 호기롭게 설교하던 모습,
사역장을 방문한 한국 목사님께서 요셉의 아버지가 누군가 물었을 때 '아브라함입니다!' 라고 씩씩하게 대답하던 모습, '저는 꼭 목사가 되어 북조선에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겠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라고 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눈앞에 그려지는 두 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러나 그들의 피가 뿌려져서, 북한에 많은 영혼들이 구원될 줄로 믿고 영광으로 허락하신 첫 순교의 열매로 하나님께 올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