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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26~30 도우시는 성령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LNCK 2022. 10. 21. 13:36

도우시는 성령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YouTube               로마서 설교모음

 

◈도우시는 성령님,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롬8:26~30     2022.10.16

 

롬8장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성도의 견인’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 종교개혁의 5대 교리 TULIP 중 P에 해당하는 것이 “성도의 견인”입니다.

 

이 교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탱해주는 소중한 진리입니다.

 

가톨릭은 이러한 진리를 강조하거나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믿게 되면, 연옥 교리라든지, 가톨릭에서 강조하는 많은 부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성도의 견인’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것도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라는

이 구원의 완전함, 온전함, 확실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8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8:1

라는 말씀으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우리를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8:39

 

정죄함이 없는 삶에서 ~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삶까지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안전함, 확실함, 영원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이런 교리가 발전하게 된 것은

당시 가톨릭 교회가, 신생 교단이었던 개신교를 향해서

‘너희는 교회를 떠났으니, 구원을 잃어버렸다’고 협박하니까,

이런 교리가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는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매 구절마다 ‘성령님’이 등장합니다.

 

2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옵니다.

5절에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나오고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나옵니다.

 

15절에서는 ‘양자의 영’이 나오고

16절에서는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23절에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첫 열매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게 한다’

 

이렇게 롬8장의 구절 구절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완전함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안전함”을 설명하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성령장’이라고 말할 때는,

로마서 8장이 거론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가운데서 특별히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심으로써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확신’에 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 연약함은 어떤 연약함 일까요?

-육체의 질병이란 연약함도 있고

-우리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라는 연약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연약함’은 특별히

-기도에 있어서의 연약함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에 있어서의 연약함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기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우리 삶의 관행에 익숙한 나머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기도할지라도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모르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하나님의 일꾼일지라도

때로 어떤 상황에 부딪힐 때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출애굽과 광야시대를 이끌었던 모세라는 지도자 조차도

하나님 앞에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 광야 방랑 시절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직전에

모세는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저로 보게 하소서’

 

‘그 아름다운 땅을 저도 가보고 싶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출애굽과 광야 40년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가

그 땅을 들어가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너는 광야시대까지다.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모세는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전체 역사를 볼 때, 모세가 만일 가나안 땅에 그 백성을 이끌고

들어갔다면, 어쩌면 모세는 백성들의 우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모세가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실 여지가 없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자신이 약속의 땅을 가봐야 하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해라 족하다. 이 문제는 그만 얘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걸 볼 때, 신3:26

모세가 계속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구했던 것을 알게 되죠.

 

▲이처럼 모세와 같은 사람도, 때로는 마땅히 구할 것을 알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었다면, 그런 연약함은 당연히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모르는 우리들...

 

특별히 고난가운데 있을 때는, 더욱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겁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심으로써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시고

또한 그 하나님의 뜻가운데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의 확실함을, 안전함을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체험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을, 대신 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두 분 계시지요.

 

1)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대신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옆에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어떤 일로 우리를 도우십니까?

우리가 지불해야 될 죄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변호사가 되시고, 대언자가 되심으로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중보하시는 분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하심으로써, 도와주십니다.

 

2) 또 한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도우시고

우리가 하는 일을 도우시는 겁니다.

 

성령님은 비인격적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가만히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가지고

누워있는 몸을 뒤집어서, 통성기도 시키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비인격적으로 뒤집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고 하지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님이 도우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도우시는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도록 도우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기를 시작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때로 나의 기도 제목이 A라는 것이었지만,

기도하다 보면 B라는 기도제목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거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기도의 제목이, 기도 가운데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 구하려고 했던 것을, 구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성령님은 병행을 이루시면서

각기 다른 각도에서 우리를 중보하시는 거죠.

 

▲그런데 때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려고 할 때

그저 신음밖에 나오지 못할 때가 있지요.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도 모르고

성령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저 신음과 탄식밖에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님은, ‘친히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씀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나갈 때

‘하나님!’하며 그 분의 이름만 부르고 가만히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눌림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성령님은 친히 탄식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며 기도하신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인공호흡기’ 처럼 생각합니다.

때때로 스스로 호흡이 불편하고 어려울 때, 그런 위기상황에

성령님께서 마치 인공호흡기처럼, 내가 계속 하나님과 교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탄식하며 기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조차도 기도로 들으신다는 거예요.

성령님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우리의 입술로 우리의 마음에도 우리의 생각에도

어떤 기도가 터져 나오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작은 신음과 속삭임마저도

하나님은 기도로 들어주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탄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도우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통로로

하나님이 기도를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의 확실함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말씀이고, 하나는 기도입니다.

 

이 말씀 과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구원이

얼마나 확실하며,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체험해 갈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기도가운데

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더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많은 시간 기도하셔야 했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 가운데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도우시는 이유는

28절 이하에 나오는 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우리가 기도를 통해 체험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8장 28절에 말씀을 우리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줄을 압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 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앞서 대상이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도록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은

원문으로는 번역하기 참 어려운 구절이라서, 여러 번역들이 나옵니다.

 

사실 문장만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져서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이 지금은 어렵지만 그냥 잘 될 거야’ 라는

그런 긍정주의, 낙천주의를 말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죠.

 

물론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모든 걸 섭리하신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래서 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해, 최근 영어 번역본들은

정확한 번역들을 만들어 가는 중입니다. 많이 알려진 NIV는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한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하여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일하시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 일 하신다’ 여기서 ‘선’은 무엇일까요?

 

1)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최고의 선은 구원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 구원

빌1:6에서 ‘너희 속에 착한(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즉 우리 안에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이가, 온전히 이루실(완성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이죠.

 

그러나 이 구원의 연장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해 가는 일에 있어서

일어나는 일들 또한 하나님의 선한 일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원치 않는 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한 일일 수 있어요.

우리를 더 구원해 가시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는..

그런 역사 속에 있다면, 때로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도, 또 원치 않는 일도

하나님의 선을 위하여, 우리들의 선을 위하여..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겁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께서는 이 말씀속에 나타난

5가지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압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성도들 가운데 일하고 계시고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서는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날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이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2) 두 번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세 번째,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우리의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지구상의 일어난 모든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십니다.

 

4) 네 번째로,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 일하십니다.

 

5) 다섯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작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압니다.

 

하나님 밖에서 추구하는 어떤 것으로도, 나에게 행복이 올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 이러한 삶을 사는 이들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거죠.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요, 온전한 구원에 이를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름을 입은 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확신을 주십니다.

 

▲이제 29~30절은, 28절을 보충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았다‘ 라고 하는데

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설명이 바로 29~30절이 되는 것이죠.

 

롬8: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그 아들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기 다섯 단계가 등장하는데 매우 논리적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세계로 탐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받으니 구원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요?

 

1) 하나님의 ‘미리 아심’으로부터 왔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리 아신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누가 예수 믿을지/ 믿지 않을 것을 미리 아셨다, 예정하셨다’라고 이해합니다만

그런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미리아신다’는 것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리고 미리 우리에게 베푸시는 크신 사랑 속에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2) 두 번째 단계는 ‘미리 정하심’이라는 단계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내 결정 이전에 하나님의 결정이 있었다는 거죠.

우리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의 결단,

우리의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을 합하여

사람들은 ‘예정’이라는 말로 교리화 했습니다.

 

‘예정’이 누가 믿을지/ 믿지 않을 지가 결정되었다.. 라는 식으로 해석됨으로써

‘그럼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할 필요가 없겠네요’

라고 해석하면 잘못된 해석이죠. 예정론을 가장 잘못 해석하는 거죠.

 

그렇다면 예정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이러한 구원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이 하나님이 구원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성령안에서 추적해 볼 때

이것은 창세 전에,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나를 미리 아셨고, 나를 미리 정하셨구나’ 라고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예정론은 신앙고백의 표현이지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이제 어떤 사람은 믿기로 결정되었으니

결정된 사람은 다 믿을 것이고, 믿지 않기로 한 분은 다 믿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전도할 필요가 없네’ ... 이게 잘못된 예정론의 해석인 거에요.

 

그래서 <기독교강요>을 쓴 장 칼뱅도, 기독교강요 책에 이 예정론을 쓸 때

구원론을 다 쓰고 나서, 예정론을 쓴 거에요.

 

로마서도 9장에 가서 비로소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에요.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구원받은 자가 성령안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모든 것 안에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깨달으면서 고백하는 말은

 

그것은 ’내가 타락한 이후의 부랴부랴 나를 챙기시는 하나님 차원이 아니라

나를 미리 아셨고, 미리 정하셨고, 그리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

이 예정론을 신앙의 고백으로서 우리가 말할 수 있다는 거에요.

 

3) 그러므로 세 번째 단계가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이 한 세트라면

이제 이 고리가 되는 것이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역할 수 없는, 우리가 거절할 수 없는..

반드시 효력이 나타나는 부르심입니다. effectual calling

 

우리의 선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입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가운데 있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저와 여러분의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겁니다.

 

내가 예수 미끼로 선택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이고

 

내가 예수님을 붙잡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3장에서 ‘붙잡힌 바 된 것을 붙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내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가운데 부르셨다’는 거죠.

 

우리의 이 신앙생활에 주어가 바뀌는 것입니다.

 

4) 그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로마서 1:18~4:25절까지가 우리가 살펴본 바이죠.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눈감아주는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 죄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다 완전히 깨끗이 온전히

담당하심으로써 그 죄가 해결되는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단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5) 마지막 다섯 번째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영화롭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우리에게는 미래에 남아 있는 겁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을 설명할 때

미래 시제를 쓰지 않고, 과거 시제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앞서 5가지 모두 다 과거 시제를 썼습니다. 이것은 뭔가 문법적인 오류가 아니죠.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이지만, 너무나 확실히 일어날 일이기에
과거형으로 쓰는 겁니다.

 

놀랍게도 구약의 예언자들도 예언을 기록할 때

확실히 일어날 미래 일의 예언을 할 때는,

미래형으로 쓰지 않고, 과거형 시제를 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세계와 말씀에서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기에.. 미래형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졌다”는 확신이죠!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결코 끊어지지 않는 것이며

결코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고 :1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 :39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그것을 우리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구원이 확실하다면, 아무렇게도 살아도 된다는 것일까요?

정반대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삽니다.

이러한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더 거룩함에 이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현재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 시제를 과거시제로 쓴 것처럼

확실하게 이루어질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죠.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고, 현재의 고난을 바라보고,

현재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바라보면서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승리하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타난 이 구원의 확실함,

우리에게 주어진 이 영원한 안전함을

우리가 체험해 가는 믿음되기를 원합니다.

 

막연한 신앙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추상적인 믿음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분명하게 마음으로 확신하고, 지식으로 깨닫고,

우리의 삶의 의지로 행하는.. 온전한 믿음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