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심판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물심판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심판 때의)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심판주로)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최후의 심판 때)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이렇게 베드로전서에 13번씩이나 (13구절에서나) ‘최후 심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5번이 본문 벧전 4장에 나오고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는 보통 4절로 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 4절에는, 대부분 찬송가에는 ‘장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일례로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우리가 읽고, 듣고, 배우고, 전하는 “복음”에는 ‘심판’도 그 중에 대단히 중요한 한 요소입니다.
(어제는 1~4장에서 ‘고난’을 중요한 한 요소로 살펴보았지요)
그러니까 콩나물국이나 된장국, 미역국을 끓을 때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요소 ingredient 들이 있습니다. 멸치 다시물, 소금, 간장, 마늘, 고춧가루, 양파, 대파, 그 중에 한 가지라도 빠져버리면... 국이나 나물이 맛이 없어지지요.
마늘이 빠진 시금치나물, 고춧가루가 빠진 콩나물국, 멸치 다시물이 빠진 된장국... 등은 별 맛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꼭 들어가야 할 필수 요소 중 하나가 <심판>이라서... 베드로 사도는, 흩어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서신을 통해 복음을 전하면서 <심판>을 매 장마다 설교하고 있으며,
특별히 본 서신의 마지막 말미가 시작되는 4장부터 본격적으로 <심판>을 언급한 것입니다. 5번씩이나!
그래서 해외의 오랜 전통적인 교회에 가 보면,
주일 예배 시간에 성경을 읽는데,
예수님의 탄생 예언 -- 탄생 -- 생애 -- 십자가 -- 부활 -- 승천 -- 재림, 심판까지
매 주마다 성경을 몇 구절씩, 성도 대표가 나와서 읽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거에 각자 자기 성경이 없던 시절에는, 교회에 와서 성경(복음)을
귀로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어쨌든 그런 전통이 한 가지 좋은 점은,
본문 벧전4장에 나오는 <심판>에 관한 구절들을.. 상기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매 주일마다, 혹은 격주마다!
▲그런데 오늘날 전하는 복음에는 <심판>이 빠져있을 때가 많습니다. ‘믿으면 누구나 구원 받습니다. 그걸로 끝!’하고 종결지어버립니다.
온전한 구원의 복음은.. 회개로부터 시작해서, 믿음, 세례, 성화, (재림)심판... 여기까지 다 들어가야 기본 양념 (마늘, 간장, 고춧가루, 멸치다시) 들이 다 들어간 셈이 됩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빠져버리면... 복음이란 반찬에 맛이 없어져 버립니다. 뭔가 싱겁거나 간이 덜 된.. 그래서 젓가락이 가지 않는 반찬이 되고 맙니다.
△그럼 오늘날의 ‘변질된 복음’에 왜 <심판>이 빠져버린 것일까요? 오늘날 복음의 특징은 ‘실존주의적 복음, 실용주의적 복음’이 대세입니다. 잘못된 복음, 뒤틀린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시대가 실존주의 사조, 실용주의 환경 속에서 현대인들이 살아갑니다. 아무리 복음이라도 ‘그게 나에게 유익하며, 나으 실생활에 관련이 있어야’ 뭔가 내 귀에 솔깃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최후 <심판>이라는 주제는.. 내 피부에 와 닿는 얘기가 아니라, 저 먼 미래의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심판>에는, 서두에 1)번과 2)번의 요소가 다 포함되는데 사람들은 2)번만 ‘심판’이라고 생각하니 ... 듣기 싫은 게지요.
극단적인 예로, 장례식장 근처는 집값이 좀 싸다고 합니다. 다 결국은 장례식장으로 갈 것인데도... 그곳을 쳐다보기가 싫은 것과 같은 심리죠. 나중에 당할 때 당하더라도.. 일단은 좀 피해 가보고 싶은 심리인 것입니다.
▲레이븐힐의 ‘그리스도의 심판대’ 설교
“오 하나님, 제 눈동자에 영원을 새겨넣어 주소서 만약 하나님이 영원을 우리 눈동자에 각인시키신다면, 만약 하나님이 심판을 우리 눈동자에 새겨 넣으신다면,
눈이 아니면, 우리 마음판心碑에 그 영원 혹은 심판을.. 새기신다면 우리는 지금 현재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너무 현실적으로 살아갑니다. 너무 세상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세상적 시각과 똑같이 보며,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똑같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이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 자기 시간을 사용하고 있으며, 세상이 돈을 쓰는 방식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세상과 똑같이 돈을 사용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원래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지금 세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새롭게 인식해야할 시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나님을.. 너무 얕보고 막 대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어느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재판정 앞에서, 우리 각자는 우리의 살아생전의 모든 행위에 대해 재판을 받고, 자기 인생을 변호(직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벧전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롬14: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직접 보고
그러니까 주님은, 왕 중의 왕이시오, 대법관이시며, 청문회 위원장이십니다. 그리고 이 재판 뒤에는 항소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판결은 한 번,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니까, 재판은 한 번으로 완벽히 끝납니다.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서, 후회할 일을 지금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죽고 나서 5분 후에 (심판대 앞에 가서) 후회할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 있을 동안에, 아직 기회가 있을 동안에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회개 안 한 죄로, 심판대 앞에서 추궁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가 주님을 뵙게 될 때, 우리는 즉시 두려움에 휩싸여서 온 몸이 즉시로 마비될 것입니다. 다만 구원받아 영광스럽게 변화된 성도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자기 전에, 자기 자신을 한 번 ‘심판’해 보는 것이 좋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결단할 것은 새롭게 다시 결단하고.. 그래서 심판대 앞에 가서 후회하거나, 변명할 일이 없어야 합니다...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때..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심판날>은 오히려 기쁨이 충만한 날 수험생이 시험을 치르는 날은 긴장 된 날입니다. 그렇지만 동안에 노력한 결과를 시험하는 날이기 때문에 기대되는 날입니다. 그 동안의 수고와 땀의 결과를 대면하는 날이기에 기쁨이 충만한 날입니다. 자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날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심판 날이 다가 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구원의 날이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감사하는 날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마음이 흔들 비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주시고 자비와 용서로 함께해 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나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겔18 :30)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과거는 올가미가 아니라, 새 삶의 디딤돌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여기서 새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과거를 들추어내며 무어라 하든지, 내가 주님 앞에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설교자들은 대체로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를 설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에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가장 자주 설교했던 분야 중 하나는 ‘교회론’이었습니다. 목회자의 관심이 온통 ‘지역교회’에, ‘자기 교회’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안 그런 분도 있지만, 40대 목회자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성공, 성장’ 이런 주제입니다. 보통 인생의 40대는.. 그 인생의 절정기입니다. 패기가 넘치고, 뭘 해도 될 것같은.. 그런 왕성한 활기가 넘치는 시기이죠.
그래서 ‘자기 관심 분야’ 위주로 설교할 경우 복음을 ‘편식’시키기가 쉽습니다. 골고루 먹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기본 원칙 중 한 가지는 ‘내가 전하기 원하는 말씀’이 아니라 ‘본문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그래서 강해설교 식으로.. 본문의 순서대로,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강해설교 전문가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교회 부흥, 기독교 부흥의 방식에는, 2천년 역사상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통한 부흥 : 한국의 기도원 운동, 새벽기도 운동 -전도를 통한 부흥 : CCC등 선교단체 -찬양을 통한 부흥 : 미국의 마라나타, 호주의 힐송 -성령의 나타남을 통한 부흥 : 미국의 펜사콜라, 은사주의 운동 -말씀을 통한 부흥 : 위의 여러 방식도 다 부흥운동의 한 형태이지만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장기간 (↔단기간) 부흥을 이어가는 방식은 ‘말씀을 통한 부흥’입니다. 예수님, 사도바울, 사도베드로..다 말씀 부흥운동을 가장 기본으로 삼으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5:4 이제 한국교회에 노령화로 접어들면서, 신앙 연조가 보통 20년 30년은 기본입니다. 아니 신앙경력이 40년 50년 넘어가는 분들이 교회의 대세입니다.
그러니 ‘척하면 삼척’이란 말이 있듯이, 웬만한 설교는 ‘척하면 삼척’입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니... 설교의 신선도가 떨어집니다.
이런 설교 정체 현상에 빠진 오늘날 시대에 타개책, 다시 부흥의 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5:4 말씀처럼 이제는 말씀을 ‘깊이 있게’ 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두 배가 가득 차는 물고기를 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66권, 1,189장인데 평생 설교를 했으나, 성경 전체의 지극히 일부분, 성경 전체의 5% 이내의 구절만 설교하고 지나갔다면 나중에 은퇴 후에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심판대 앞에서 참으로 죄송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또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서, 성경연구 하기가 과거보다 열 배로 쉬워졌습니다. 그래서 ‘깊은데 그물을 내려서 물고기를 잡는’ 곳에 앞으로 부흥운동이 거기서 일어날 것이라고 조심스레 내다봅니다. 물론 찬양부흥/전도부흥/기도부흥/성령은사부흥도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만 지난 역사를 보면, 다 오래 지속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 부흥은 한때 ‘반짝’하다가.. 이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성서한국, 통일한국을 이루어, 선교한국으로 한국이 전세계에 복음수출국으로 사명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K-팝이 아니라, K-가스펠)
K-복음, K-설교, K-성경강해가 일본, 중국, 대만, 동남아 등 주변 국가들부터 퍼져나가야 됩니다.
과거에는 ‘성전 건축’식 선교를 했다면, 이제는 ‘성경 교육’식 선교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