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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5

LNCK 2022. 10. 27. 14:16

[Ep 5.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내래죽어도 좋습네다 |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5           지난 회 보기


최광 선교사의 중국에서 북한 선교 간증

◑제3장  땅끝을 덮는 하늘의 열정                 
  
1기 (약 1년) 과정을 마친 선생들은, 2기생 탈북민들을 모아서 사역을 시작했다.
기풍 선생은 8명의 북한 형제들로 중경(충칭 직할시)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익두 선생은 5명의 북한 형제들로 허난성 정주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바울 선생은 9명의 북한 형제들로 산동성 제남, 이어서 중경에서 사역을 했다.
권능 선생도 9명의 북한 형제들로 사천성 성도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선주 선생은 제남에서 사역했는데, 권능 선생의 사역을 이어받아 했다.  

이렇게 5명의 성경 선생들이, 총 31명의 북한 형제들로 2기 사역을 시작했다.

(*1999년 6월 경~)

♣새로 모집한 형제들 

(박요한, 진칼빈) 두 선생이 잡혀간 후,  *이들은 북한에서 순교, 연락 두절, 1999

나는 선생들을 독촉해서 하루라도 빨리 위험한 연변 지역을 벗어나게 했다. 
인원이 어느정도 채워진 팀은 서둘러 중국 내륙으로 보냈다. 

익두 선생은 선양에 들러, 북한 형제 한 사람을 데리고, 정주(정저우)로 가기로 했다. 
바울 선생 팀은 며칠 후 제남(산동성 지난)으로 오기로 약속이 되었다. 

아직 감옥에 있는 선주 선생은 장 처장님께 부탁드리고 
나는 권능 선생과 함께 여름이 한창 익어가는 무더운 6월 초순에 
13명의 학생을 데리고 제남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선양으로 가는 도중에 일이 터졌다. 
학생들 중 진명, 영광, 주명, 에녹 형제가 (새로 모집한 학생들) 
권능 선생과 내가 아무리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심하게 떠들며 카드놀이를 했다. 

안전한 남쪽으로 간다고 기분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그러자 철도 공안이 와서 다른 손님의 편의를 위해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형제들이 '조용히 하라'는 중국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상히 여긴 공안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고 
이들은 바로 기차공안실로 연행되었고, 그 길로 곧장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나는, 눈앞에서 형제들이 잡혀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나나 권능 선생은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녀가 같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엄마 앞에서 딸이 잡혀가도 
두눈 멀뚱이 뜨고 쳐다만 봐야 한다던 주광호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세상에 많은 아픔이 있다지만, 이렇게 처참한 아픔을 내가 겪기는 처음이었다. 

권능 선생도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제남에 도착했을 때는 
두 눈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역장이 안전한 곳으로 내려오니, 일단 안심이 되었다. 
나는 권능선생 사역장에서 며칠 묵으며, 선생들이 모집해 온 형제들을 
머릿속으로 꼼꼼히 점검해 보았다. 

제일 먼저 중경으로 내려간 기풍 선생 팀에는 
장만식 아바이, 권능선생의 동생 김영현, 북한에서 넘어온지 3일밖에 안된 유칼빈, 
그리고 김예진, 이현수 형제 등 모두 8명이었다. 

익두 선생 팀은, 홍충신 형제를 데려가기 위해 선양에 들렀다가 
다시 허난성 정저우로 내려갔는데,   
권능 선생의 막내 동생인 김사무엘, 김성근(후에 김북한 목사), 홍만식 형제 등

모두 5명이었다. 

제남으로 함께 온 권능 선생 팀에는, 기차에서 잡혀간 4명을 제외하고도 
요한 선생의 동생인 박다윗 형제를 비롯하여, 정모세, 이만식, 김국철 형제 등 
9명의 형제들이 있었다. 

곧 이어 제남으로 올 바울 선생 팀에도 
김주복, 강석관, 이빌립, 이용섭, 조선족 천상은 형제 등 9명이 있었다. 

이제 선주 선생이 감옥에서 나오면,

학생들을 모집해서 시작될 선주 선생의 팀까지 생각하면 
사역장이 다섯 곳으로 늘어나면서, 전체 인원이 갑자기 많아졌다. 

1기 선생들을 파송 하면서, 내가 예상했던 숫자에는 미치지 못 했지만 
그래도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제 이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다해도 
절반가량의 형제들은 다시 북한선교사로 양육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2기 사역이 끝날 무렵에는 
꽤 많은 북한출신 선교사들이 새롭게 세워질 것이다. 

애초에 시작할 때는 1년 작정으로 중국에 들어왔지만 
사역이 이렇게까지 확장되니,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때부터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 한국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신학교(총신대원 졸업반)도 그만하겠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 선교하다가 바로 천국에 가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새로 세워진 5명의 1기생 선생들이, 북한선교의 키를 잡아 나갈것이다. 
이로써 북한출신 선교사들에 의한 북한 선교가 막이 올랐다고 생각하니 
하나님 앞에서 감사, 또 감사했고 
역사와 민족, 그리고 한국 교회 앞에서, 이들에 대한 나의 책임에 어깨가 무거웠다. 

이제 서역을 시작하는 5명의 선생들은 아직 사역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지난 1년 (정확하게는 만 8개월) 성경통독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러나 앞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차츰 사역을 배워 나갈 것이고 
혹시 실패해도, 그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빚어질 것이다. 

나는 이들을 통해 수많은 북한출신 선교사들이 배출될 것을 꿈꾸며 
연변에서의 가슴 아픈 일들(요한, 칼빈의 북송)은 훌훌 털고,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제남에 온 후, 나는 권능 선생 사역장에 며칠 머물며 
바울 선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며칠 뒤, 바울 선생 팀을 맞아 사역장을 꾸미고 난 후,  
나는 사역비 모금을 위해 한국으로 갔다.

이제부터 드는 사역비는 1기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1기때 반년 동안 생활하던 헌금으로는, 두 달도 버티기 어려웠다. 

한국으로 갈 때마다 매번 사역비 해결은 그리 쉽지 않았지만 
주님께서는 꼭 필요한 만큼 채워주셨다. 

지난 1년 동안 북한선교사역을 하며 가장 크게 확신했던 것은 
어떤 경우에도 돈은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었다. 

나의 이 경험을 가장 잘 이해하고 깨달은 사람은 권능 선생이었다. 
그는 사역장에 돈이 떨어질 때마다, 제일 불안해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처음 사역장에 왔을 때 내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 만약 하나님이 있다고 합시다. 
그래도 거지처럼 떠돌아다니던 우리들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관심을 주겠습니까? 
세상에 대단한 사람들도 많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고 양식이 떨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꼭꼭 채워 주시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하면서 
권능 선생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심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 대단하신 하나님이, 길거리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던 자기들에게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돌봐주고 계신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사역장에 있는 동안, 깊은 산 속에 숨어 사는 자기 가족들이 
굶어 죽지는 않을까 많이 염려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역장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하면서 
보잘것없는 탈북자 가족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의 필요도 채워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이렇게 걱정 반 기대 반 으로 기도하면서 공부를 끝내고 
학생모집을 위해 연변 근처,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가 걱정했던 식구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쌀이 떨어지고 돈이 떨어질 때마다 (연변 근처 깊은 산속에 살고 있던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선교사와 목사 그리고 조선족 교회를 통해 풍성하게 채워 주셨던 것이다. 
그는 학생모집을 끝내고 나서 감격하여 내게 말했다. 

'최광 선교사님, 그동안 물질의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저도 선교사님처럼, 이제 북한 선교사로 세워졌으니 
앞으로 저도 사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역 하겠습니다. 

물질이 없을 때 사람에게 손 내밀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공급받아 사역을 하겠습니다.' 

나는 많은 것들 중에서 바로 이 부분, 
돈은 사람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권능 선생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내가 이번에 한국에 나가면, 다른 때와 달리 많은 사역비를 모급해 와야 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부족함 없이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권능 선생 사역장 

권능 선생은 제남에 도착한 첫날부터 몹시 힘이 들었다. 
잡혀간 형제들에 대한 근심으로 마음은 무겁지만 했고 
자기를 지도자로 믿고 따라온 형제들에게 미안해서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그의 팀에 학생들은, 모두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그는 당시 24살이었지만, 학생들은 거의 30~ 40대였다.

그래서인지 중요한 일에는 그의 말을 따라 주었지만 
사소한 일들에는 학생들이 잘 따라 주지 않았다. 

기차에서도 권능 선생과 내가 카드놀이 하지 말고, 떠들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건만 

4명의 형제들은 들은 척도 않고 그냥 떠들어대다가 체포된 것이다. 

 

그래도 감사하게 박주환 선교사가 산동대학 근처에 집을 미리 구해 놓아서 
권능 선생은 제남에 도착하자마자 형제들을 거기로 데리고 들어갔다. 

숨돌릴 틈도 없이 집을 손질하고, 

책걸상 등 필요한 가재도구들을 사서 사역장을 꾸미면서, 

그는 자기가 학생으로 있을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새삼스레 느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철없던 학생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바로 그는 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신앙은 고사하고, 사역장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앞으로의 사역장 일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다음날 아침 일과표를 큰 종이에 써서 
학생들 침실과 통독실 벽에 누구나 잘 볼 수 있도록 붙여 놓았다. 

어제 이야기할 때는 건성으로 듣던 학생들이, 벽에 붙은 일과표를 보고서야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어이 권능선생, 기도라는 거 이거 뭐게요. 통독이라는 건 또 뭡니까? 
큐티는 또 뭔데?' 

그는 학생들을 통독실로 모아놓고 사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사역장의 생활 규칙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술과 담배는 금물입니다!'

이 말에 학생들은 왈칵 화를 내며 반발하고 나섰다. 
'아니 도대체 여기가 뭐 하는 곳인데, 
술도 마시지 못 하고,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술이 뭐가 나쁜 물건이라고, 담배가 뭐가 나쁜 물건인데? 
남자가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어떻게 살아요?'

학생들은 어린 권능 선생을 잡아먹을 듯이 공격했다. 
학생들이 이렇게 나올 줄 짐작하고 기도로 많이 준비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참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학생들을 내버려두고 아침 통독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녹음기에서 나오는 소리와 성경책을 번갈아 보더니 
1시간도 채 못 되어 한 사람씩 통독실을 나가 버렸다. 

학생들이 다 나가버리자, 권능 선생도 녹음기를 끄고 나왔다. 
학생들은 모두 침대에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한심해도 너무 한심했다. 

이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막막해서 
권능 선생도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학생들을 모집만 해 오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듭니까? 하나님 제게 기운을 주십시오. 용기를 주십시오!' 
주님께 기도 하노라니 어느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가 학생 때는 사역이 이렇게 어려울 줄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기도해도 저 무지막지한 사람들을 다스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첫날은 이렇게 맥없이 지나가 버렸다. 

다음 날 학생들에게 사역장의 일과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설명하고 
이 일과에 따르지 않을 사람들은, 사역장을 떠나라고 조용히 경고했다. 

여기는 사역하는 곳이지, 그렇게 제멋대로 살라고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곳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나긋하게만 보이던 어린 선생이 무서울 정도로 강경하게 나오자 
학생들은 마지못해 통독과 일과에 참여 하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난 후 담배가 떨어진 만식 형제가 그를 졸라댔다. 
'권능 선생, 앞으로 차차 담배를 끊겠습니다. 담배 조금만 사 주세요. 예? 조금만요!'
'지금 끊으세요!'

그러자 만식 형제가 화를 내며 권능 선생을 욕했다. 
'야 인마 담배 내놔! 네가 뭔데 사람을 이케 힘들게 해? 담배 내놔!' 

그래도 권능 선생이 담배를 주지 않자,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담배 줘, 난 담배를 피워야 한단 말이야, 나 담배 피고 싶어 죽겠다 말이야!' 
고함을 질러대는 만식 형제 때문에 통독을 할 수가 없었다. 

'뭐 하는 겁니까? 만식 형제! 나이도 많은 사람이 왜 애처럼 철없이 놉니까? 
이러다가 이웃에서 신고하면 우린 다 잡혀 감다. 조용히 하세요!'

화가 난 권능 선생이 야단을 쳤다. 
'옆집에서 신고한다'는 말에, 옆에 있던 형제들도 만식 형제를 말리고 나섰다. 

만식 형제는 담배 때문에 애가 타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으르렁 거리자 
후다닥 아파트 베란다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베란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 담배 안 주면 죽어 버릴 거야! 나 살기 싫단 말이야!' 

모든 형제들이 깜짝 놀라 그를 베란다 난간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여차하면 뛰어 내릴 자세라 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야 권능이 인마, 너 담배 안 사 주면 나 이대로 뛰어내릴 거야, 
담배 사 줘! 담배 사 주란 말이야, 이 개새끼야!'

다급해진 권능 선생이 학생들에게 회수한 담배 한 개비를 보여 주었다. 
'내려 오세요. 그러면 이 담배 줄 게요'

권능 선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난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담배를 낚아채 같다. 그리고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울면서 담배를 피웠다. 

이 사건이 있고 난 후, 만식 형제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 하겠다고 
권능 선생이 여러 번 하소연 했다. 

그래서 바울 선생과 의논하여, 만식 형제를 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보냈다. 

△권능 선생이 간신히 사역장의 규율을 인지시키고 순종시켜 
일과를 진행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다윗 형제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통독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는 권능 선생을 주먹으로 위협했다. 

새벽기도 시간에 통독실에 들어가, 
온 아파트가 울릴 정도로 녹음기를 크게 틀어놓기도 하고 
통독 시간에는 옆방에서 고래 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권능 선생이 사역장의 안전 문제 때문에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지만, 그때마다 다윗 형제는 사납게 달려들며 행패를 부렸다.

불안해서 옆에 있던 다른 형제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다윗 형제는 또 그 형제에게 마구 달려들었다. 

깡패 출신인 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사나웠다. 
그와 함께 연길의 폭력 조직에서 온 모세 형제 역시, 
의리를 과시하며 매사에 그를 두둔하고 나섰다. 
이렇게 되자 모든 형제들이 다윗 형제에게 겁먹고,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였다. 

책임자 권능 선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역장이 그렇게 싫으면 차비를 주겠으니 떠나라고 했지만, 그는 떠나지도 않았다. 

 

사역장의 분위기는 다윗 형제로 인해 날로 험악해졌다. 
통독 할때면 형제들이 모여 앉아 통독하는 책상 위에 드러눕는가 하면, 
책걸상을 엎어버리기도 했다. 

밤에는 곤히 자는 형제들의 목에 식칼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또 낮에는 어디선가 가서 술을 잔뜩 마시고 
같은 제남 시의 바울 선생 사역장에 택시를 타고 가면서

택시비를 요구하는 기사에게 돈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택시기사가 공안에 고발해서, 바울 선생 사역장에 공안이 덮쳤다. 
이 때문에 바울 선생 사역장 형제들은, 사역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학 주변에서 노숙하며 지냈다. 

다윗 형제는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북한에서 테러집단에서 활동하다 중국에 

온 이후에 조직폭력배에 있으면서 죄라는 죄는 다 짓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귀신도 한 두 마리 정도가 아닌, 완전히 군대 귀신에 잡혀있었다. 

 

하지만 귀신 들린 사람을 본 적 없는 형제들은, 
그렇지 않아도 술 담배 문제와 빡빡한 사역장 일과로 힘든데 
거의 매일 다윗 형제의 횡포가 반복되자, 사역장을 떠나고만 싶어 했다. 

권능 선생은 아무리 주님께 매달리고 기도해도 
다윗 형제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한국에 있던 내게 전화를 했다. 
'사역장이 해체될 위기니 빨리 오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른채, 급히 중국으로 돌아갔다. 
내가 갔을 때, 다윗 형제는 완전히 귀신에 사로잡혀 이미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다윗 형제가 나를 보더니 '선생님, 제남까지 뭣 타고 왔슴까?'
'뭣타고 오긴, 기차 타고 왔지!' 

'어떻게 기차 타고 왔어? 하나님이 보내서 왔지! 나는 사단이 보내서 왔고!'
악한 영들이 다윗 형제를 이용해, 권능선생 사역장을 해체시키려 발악하고 있었다. 

나는 소록도 북성교회와 김요한 목사님이 계신 성복중앙교회에 사연을 알리고 
기도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지금 다윗 형제가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아직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 학생들은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표정들이었다. 

애써 형제들을 위로하며 다시 통독 일과를 시작하는 한 편 
다른 사역장의 형제들에게도 기도 부탁을 하였다. 

형제들이 기도하자 다윗 형제의 반응이 좀 순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욕하고 나왔다. 

'야 인마, 너들이 뭐 안다고 지랄들이야? 너 한 번 시편에 대해서 말해 봐!' 

그는 기도 모임 시간에 형제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앉더니 
모세 형제에게 트집을 잡으며, 자기가 먼저 시편 23편을 줄줄 암송해 보였다. 

여태까지 사역장에서 신약을 3번 통독하고, 시편을 한 번 통독 했을 뿐인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그는 시편 23편을 정확하게 암송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때부터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5분 후면 박주환 선교사가 우리 사역장에 올 거야!' 
정말 5분 후에 박주환 선교사가 사역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다윗 형제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듣던 형제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들어서는 박선교사를 향해 소리쳤다. 
'너 지금 집에서 누구랑 싸우다 왔지? 난 다 봤어!'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계속 뭐라고 소리 소리 질렀다. 

형제들에게 기도를 멈추게 하고, 조용히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성경을 보지도 않고 시편 1편과 23편을 암송 하기도 하고 
간간히 누군가에게 내용을 해석해 주기도 하였다. 

'그가 지금 말하는 게 옳은 것이냐?'고 형제들이 내게 물었다. 

'악한 영들도 성경을 잘 알아요! 그래서 믿음이 견고한 성도들을 공격할 때 
악한 영은 반드시 성경을 이용해서 공격해요. 
사단이 예수님을 공격할 때도 성경말씀으로 했어요..' 

그제야 형제들은 다윗 형제가 귀신 들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악한 영의 활동을 직접 목격했기에 
그동안 믿지 않았던 영의 세계에 대해, 더 이상 부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형제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다윗 형제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권능 선생도 너무 지쳐, 그를 내보내든가, 사역장을 해체하든가 
빨리 결판을 내자고 했다. 

그런 권능 선생을 위로하며,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권능 선생, 사역장 전원이 다윗 형제를 위해 3일 금식을 합시다. 
우리 형제들이 다른 기도는 하지 말고, 귀신 쫓아내 달라는 기도만 합시다!'

'소록도 북성교회와 성복중앙교회 성도들에게도 기도 부탁을 했는데 
우리도 금식하고 기도합시다!' 

권능 선생도 성경 말씀을 읽어서 잘 알지요?
예수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곳에는, 귀신이 꼼짝할 수도 없어요. 

그러자 권능 선생이 말했다. 
'최광 선생님, 저 사람들 이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 들입니다. 
아직 담배랑 술 땜에도 힘든데, 어떻게 벌써부터 금식 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마 죽어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형제들을 설득하며, 이 사역장에 계속 있고 싶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하자, 형제들은 마지못해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부터 우리는 같은 제남 시의 바울 선생 사역장 형제들과 함께 

3일 작정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마지막 날에는 제남에서 가장 높은 천불산에 올라가 밤 9시 부터 철야기도를 했다. 

계속 보혈 찬송을 부르며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고 
귀신을 꾸짖으며 기도했다. 계속 찬송하고 기도하던 중 새벽 1시 쯤 되니 
다윗 형제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듯 보였다. 

그는 기도하고 있는 형제들에게 멍한 눈빛으로 물었다. 
'너희들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지니?' 

'우와 선교사님 다윗이가 깨어났습니다. 
와~ 기도하니까 진짜로 귀신이 떨어져 나간다야! 
예수님 이름이 이렇게 쎈지 정말 몰랐습니다. 하나님이란 게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선교사님, 진짜 신기함다!' 하며 모든 형제들이 감격했다. 

우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산에서 내려왔다. 
사역장에 돌아왔을 때 다윗 형제는, 이미 완전히 제정신을 찾은 다음이었다. 

'왜들 밤새 나를 위해 기도 했냐?' 
'야 인마, 네가 귀신이 들려 완전히 돌았지 않았니? 
그러니까 인마 너를 살려주려고 기도했지 뭐야? 이젠 정신이 좀 드니?' 

그러면서 모세 형제가, 이제까지 그가 해왔던 행동을 자세히 설명해 주자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펄쩍 펄쩍 뛰었다. 
'야 인마, 미친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언제 그랬니?'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다 붙잡고, 자기가 정말 그랬냐고 물었다. 
모든 형제들이 모세 형제와 똑같은 대답을 해 주자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지, 몹시 당황해 했다. 

그에게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결단 하라고 주시는 싸인 인것 같아요. 
주님과 상관없이, 귀신이 들려 미쳐 돌아다니며 평생을 살든지 
하나님 말씀에 미쳐서 전적인 하나님에 일꾼으로 살아가든지 
결단 할 때인 것 같아요. 선택은 본인이 하세요!'

그 후부터 다윗 형제는 자기가 했던 행동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역장에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려고 애를 썼다. 

△이 일이 정리되고 나자 다윗 형제는 회복되었지만 
권능 선생은 완전히 진이 빠져 버렸다. 

사역 첫 시작부터 다윗 형제 사건은, 그에게 너무 큰 시련이 어떤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다윗 형제 때문에 눌려있던 다른 형제들이 크고 작은 사고를 쳐 됐다. 
가뜩이나 지친 권능 선생은, 더 이상은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며칠 후 하루 일과를 간신히 끝낸 권능 선생이, 어깨가 축 처진 채 말했다. 

'선생님 저, 사역 못 하겠습니다.' 
그는 방바닥만 내려다보면서 힘들게 말했다. 

'다시 한다고 해도 며칠만 쉬게 해주세요. 연길에 올라가 얼마동안 바람을 쐬며 
쉬고 싶어요. 저 이제 이 학생들 대하기 정말 힘듭니다.' 

나도 그를 연길로 보내 좀 쉬게 하고 싶었다. *연변의 서울 
솔직히 나도 이번 (다윗 형제 축귀) 일이 쉽지 않았는데, 
이제 막 사역에 발을 내디딘 그가 얼마나 힘들었으랴...

권능 선생이 없는 동안 사역장은 내가 맡았다. 
제 멋대로 구는 형제들을 타이르기도 하고, 위협을 주기도하면서 
가까스로 진정시켜 나갔다. 


♣우리 가족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다

며칠 되지 않아 연길로 떠났던 권능 선생으로부터 돌아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집에서 두어 달은 족히 쉬다가 올 줄로 생각했기에, 너무 뜻밖이었다. 

그가 부모님이 숨어사는 깊은 산속 집에 가보니 
거기에는 성경통독학교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탈북자들을 모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연변 지역에서는 통독 사역을 할 수 없으니 
그는 쉬지도 못하고, 자원하는 학생들을 모아서,

곧장 제남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8월 중순에 그는, 최순교, 정용철, 강교홍, 김누가, 김궈디(?) 
조선족 최원초, 조선족 최빌립 형제 등 아홉 명의 형제들을 데리고 제남으로 왔다가 
다시 사천성 성도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공안에 체포된 <선주 선생>은, 돈만 쓰면 금방 풀려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계속 감옥에 있었다. 

공안에 체포될 때, 그의 짐 속에서 통독 테이프, 찬양 테이프, 설교노트 등 
기독교 와 관련된 물품들이 큰 배낭으로 하나 가득 나왔기 때문에 
배후의 누가 있는지 캐내기 위해, 공안 당국에서 붙들어 두었던 것이다. 

선주 선생이 용정 변방대 (중국 국경 수비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매일 같이 탈북자들이 잡혀 왔고, 3~4일에 한 번씩 북한 회령으로 이송되었다. 

선주 선생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이제 곧 북한으로 이송되면 생사를 가늠할수없는 탈북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감옥에 있는 한 달 여간에, 호실에 방장이 되어 
남아 있던 사역비로 방 사람들에게 라면도 사서 나눠 주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도도 해 주었다. 

방 사람들이 북한으로 이송될 때는, '예수님은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시인하고, 그분을 믿고 살아야 합나다'
라고 그들의 손을 잡고 영접기도를 시켰다. 

선주 선생은 한 달 만에야 겨우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 
그런데 풀려난지 4일 만에 또 다시 공안에 체포되고 말았다. 

'살려주시면 하나님 일 하라는 것인 줄 알겠습니다'고 기도하며 
연길의 조선족 교회에 학생들을 모집하러 갔다가, 그만 화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원래 있던 용정 변방대로 다시 가게 되었고     
이번에는 다른 탈북자 60여명과 함께 군용트럭에 실려 
북한의 회령 세관 앞에까지 갔다. 

그런데 며칠 전 그를 풀어 준 중국 변방대 대대장이 
북한 군인들에게 탈북자들을 넘기기 직전에, 그 혼자만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선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새삼 더 느껴졌다. 

그를 살려주시기 위해, 주님을 알지도 못하는 대대장의 마음까지도 움직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선주 선생은 이렇게 기적적으로 풀려나서 
학생 두 명과 조선족 홍신복 형제를 데리고 제남으로 왔다. 

나는 그를 권능선생 대신 내가 이끌고 있던 사역장에 책임자로 세워 
사역하게 하였다.  (*선주 선생은 다리를 절다가 기적적으로 치유받았음)

△며칠 후 바울 선생이 찾아와, 
기풍 선생이 있는 중경(충칭)으로 내려가 사역하고 싶다고 했다. 

어차피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할 때도 되었기에 
이사 비용과 몇 달간 사용할 사역비를 주어, 학생들과 함께 중경으로 떠나보냈다. 

나는 다시 한국으로 가서 20여일을 머물며, 사역비를 모금하고 
모금한 돈과 통장으로 들어온 선교헌금을 가지고, 7월말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며칠 후에 가족들도 모두 중국으로 따라 들어왔다. *1999년 7월 말
이제는 5개나 되는 사역장에 많은 학생들을 혼자 관리하기가 힘에 부치기도 하고 
가족들을 더 이상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 가족들과 의논했었다. 

권사님이신 어머니와 아내와 네 자녀, 모두 여섯 식구가
아무 대책도 없이 배를 타고 청도로 들어왔다. 

내가 가족들을 마중하러 나갔을 때는, 이미 주광호 선생이 우리 가족들을 맞아 
자기 사역장에 머무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사역장에서 통역을 돕던 조선족 아주머니를 붙여줘서 
우리 가족을 돕도록 했다. 

며칠동안의 고단한 여행으로 어머니와 아내와 4 아이들은 몹시 지쳐 있었지만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제남의 선주 선생 사업장으로 데리고 갔다. 

권능 선생 사역장을 인계받은 선주 선생의 사역장이 
틀이 잡힐 때까지 좀 더 도와줘야 했기 때문이다. 

선주 선생 사역장 학생들은, 우리 가족이 며칠간 함께 지낸다고 하자 
몹시 기뻐하며, 갑자기 사업장 일과에 잘 참여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3~4일 머물다가, 우리 가족은 다시 13시간의 기차 여행 끝에 
정주의 익두 선생 사역장에 도착했다. 

익두 선생 사역장 형제들도, 우리 가족이 온다고 
하루종일 청소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대대적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야~ 한국애들은 이렇게 생겼구나야, 어디 한번 만져 보자야~' 
우리 가족이 도착하자 형제들은 우리 아이들을 보며 신기해 했다. 

특히 5살짜리 막내를 번갈아가며 안아본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시커먼 낯선 북한 형제들이, 초면에 과잉친절을 보이자 
우리 아이들은 무서워서 다른 방으로 도망을 갔다. 

'저기 사모님,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한국에 잘 산다는데 정말입니까? 
한국 아이들은 다 저렇게 곱게 생겼습니까?' 

이들은 밤새 야간기차를 타고 온 우리 가족에게, 쉴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동안 한국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쏟아 놓았다. 

피곤에 지친 아이들이, 제 발로 침실로 들어가 쓰러져 잘 때가 되서야 

형제들은 질문을 그쳤다. 형제들은 우리 가족에게 자기들의 침실을 내주었다. 

아침이 되어 아이들이 몹시 배고파 하자, 식사 당번인 성근 형제가
정성스럽게 아침을 만들어 대접했다. 

아이들은 청도에서부터 며칠 동안 입에 맞지 않는 중국 음식 때문에 
변변이 먹지 못한 터였다.

성근 형제는 (훗날 한국에 들어와 김북한 목사가 됨)

'선생님, 제가 선생님 가족들이 온다고 특식을 준비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부엌으로 가니 닭고기가 식탁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데 맹물에 그냥 통째로 삶기만 한 거라, 솜을 씹는 것 같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성근 형제에게 물었다. '이건 어떻게 먹는 음식이에요?'

'아~ 한국분들은 닭고기 잡수실 줄 모르는구나!' 
그는 신나게 닭고기 먹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이거요. 그냥 간장에 뚝뚝 찍어 먹으면 맛있슴다, 함 그렇게 잡숴 보세요. 
권사님, 사모님, 많이 드세요. 얘들아 많이들 먹어!' 

나는 이미 북한 형제들과 오랫동안 함께 해왔기에, 이상한 음식들에 익숙해졌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내가 닭고기에 다시 조미료를 넣고, 이리저리 볶아서 주니
형제들은 사모님이 요리사 인가? 하고 대단해 했다.

사역장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와 아내는 익두 선생의 설교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 

중국에 이제 막 도착하여 앞으로의 중국 생활이 막연하게만 생각되었는데 
이렇게 귀하게 세워진 북한 선생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나니 
중국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감사해 했다. 

거기서 하루를 더 묶고, 우리 가족은 성도로 떠났다. 
떠날 때 익두 선생 사역장 형제들은 눈물을 흘리며 배웅해 줬다. 

사천성 성도역 에게 도착하니   *쓰촨 성 청두
권능 선생과 조선족 원초 형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미처 집을 구해 놓지 못했기에 우리 가족이 바로 들어갈 집이 없었다. 
'선생님, 사모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제 제깍 가서 집을 구해 놓고 올 겁니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고 떠난 권능 선생과 원초 형제는 
집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지.. 3일만에야 돌아왔다. 

이들이 구한 집은, 한 달 월세가 8백 위안 정도 되는 15평 규모의 

깨끗한 아파트였다. (당시 환율 1위안 170원)

우리 가족들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중국이라는 낯선 곳에 난생 처음 와서 
오랫동안 기차를 타고 다니며 많이 힘들어 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고생시키니, 나는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하지만 한두 달이 지나며, 우리 가족은 나를 많이 이해해 주었고 
하나님의 일이 귀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어려운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했다. 

성도에 정착한 이후, 어머니와 아내는 조선족 이모님의 도움으로 (청도에서 따라 옴)
시장에 나가 이것저것 물건들을 사 왔다. 

어머니는 시장에 갔다 온 이후로, 중국이 너무 너무 좋다고 하셨다. 
시장에 갔더니 한 상자에 30마리인 싱싱한 갈치가, 우리 돈으로 1만5천 원 정도였고
소꼬리 한 개에 한국 돈으로 1500원, 소 뼈도 한 근에 겨우 150원 (안 먹으니 쌈)

쌀 1KG 에 200원, 사과 한 상자에 2천 원밖에 하지 않더라고 하셨다. 
이제 아이들에게 과일을 마음껏 사 먹일 수 있겠다고 너무 좋아하셨다. 


♣베트남으로! 한국으로! 

나는 가족들을 성도에 정착시킨 후 거기 머무르게 하고, 나 혼자서  
기풍 선생 사역장과 바울 선생 사역장을 찾아 중경(충칭)으로 갔다. 

기풍 선생 사역장은, 순교 전도사 편에 한번 생활비를 보냈을 뿐 
6월 초에 중경으로 보낸 후 두 달이 넘었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터였다. 
그 동안 하루속히 가 보고 싶었지만, 여러 일들 때문에 조금도 틈이 나지 않았었다. 

 

기풍 선생 사역장은 순교 전도사가 도와주고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그는 20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순교 전도사는 한국인

기풍 선생 사역장에 사역비가 떨어진지 일주일은 되었을 텐데 
기풍 선생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으니, 나는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기풍 선생을 돕다가 한국에 들어간 순교 전도사에게 전화를 걸어 
기쁨 선생 사역장 주소를 물어보았다. 

순교 전도사는 복잡한 중국어 주소를 기억하기 힘들었는지 
찾아가는 길만 대충 알려 주었다. 

'역에서 내려서요. 그냥 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사거리가 나오고 
다시 우회전 해서 쭉 가다보면 9층짜리 건물이 나올 거예요. 
그 건물 옥탑방 이에요. 찾기 쉬워요.' 

나는 찾기 쉽다는 말만 믿고, 순조롭게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무작정 길을 떠났다. 

하지만 무더운 중경 시에 내려서, 순교 전도사가 가르쳐 준 대로 이리저리 찾아
보았지만 하루종일 헤매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틀 길을 기차 타고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찾아다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9층짜리 아파트 건물을 
옷과 책이 가득 든 큰 가방을 세 개나 들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찾고 또 찾았다. 

하루 종일 뻘뻘 흘린 땀 때문에, 온 몸에 소금이 쌓이고 목에서 단내가 올라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선 땡볕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지칠대로 지친 나는, 한 아파트 밑에 주저앉았다. 
다시 순교 전도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찾아 가는 길을 물었다. 

차근차근 설명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아니 그거 왜 못 찾아요? 그냥 역에서 내려서 그냥 길 따라 쭉 가다보면...' 

하며 순교 전도사는 처음과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였다. 

나는 새파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주님, 더 이상 나는 못 갑니다. 주님이 어떻게 좀 찾아주세요.' 
중얼거리듯 기도하면서 새삼스레 내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너무 덥고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그리고 온몸에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었다. 

어른이 길거리에서 울기 창피했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러나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아브라함도 이렇게 힘들었겠구나' 생각하니 
힘이 좀 생겼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결사적으로 찾아다녔다. 

저녁 7시쯤 되어서 아무 생각 없이 허름한 9층짜리 아파트를 하나 골라 
허우적대며 올라 갔는데, 꼭대기에서 우리말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할렐루야! 안녕하세요!' 기쁨이 넘쳐 반갑게 소리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학생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한창 먹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보더니, 
모두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의 눈길은, 그 거실 밥상 위에서 정지되어 버렸다. 
상 위에는 빈 술병들이 여러 개 놓여있었고 
학생들은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찾아온 기풍 선생의 사역장은, 이렇게 나를 맞아주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기풍 선생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며, 어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화가 났지만, 생각할수록 

'그동안 내가 이 사역장에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하며 자책했다. 

'그동안 술 담배 끊고 사역을 잘 진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사역비는 다 떨어졌는데, 선교사님은 소식도 없으니 
학생들이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학생들은 막 떠나겠다고 하지... 
그래서 위로하는 차원에서 술을 허락했습니다.' 

나는 기풍 선생을 믿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역비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일주일이나 지나서 왔으니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이 중경 사역장을 집중적으로 
다잡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7천 위안 주면서 사역장을 성도로 이사하도록 하였다. 

집을 잡고, 호출기도 구입하고, 꼭 연락하라고 당부하고 
나는 같은 중경 시의 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향했다. 

△바울 선생 사역장의 학생들 역시,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사역장 생활에 정착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이 형제들의 견문을 넓혀 줄 겸 해서 
모두 데리고 장강으로 여행을 갔다. 

'야~ 선생님, 살면서 유람이라는 거는 처음 가 봅니다. 
이거 유람이라는 건 외국 사람들이나 다니는 건 줄로 알고 있었지 않슴까.
우리도 유람 간다. 만세!' 하고 특히 만식 형제가 좋아했다. 

여행 내내 덤덤이 여기저기를 다니던 그는 
장강에서 유람선을 타자, 배 앞머리에서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만세!' 를 외쳐댔다. 

'만식 형제, 뭐가 그렇게 좋아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김정일이도 타 보지 못한 장강 유람선을 
타 보았으니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쳤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들을 섬기고 돌보는 일에,
내 남은 생명을 쏟아붓자고 마음으로 다시 다짐하였다. 

여행을 마친 후, 바울 선생 사역장은 당분간 중경에 그대로 두기로 하고 
나는 가족이 있는 성도로 돌아왔다. 

△그런데 기풍 선생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사하다가 혹시 기차에서 무슨 변을 당한 것은 아닌지 몹시 걱정스러워 
나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가 노심초사 애를 태우고 그 시각, 기풍 선생은 사역장 학생들을 전부 데리고 
하남성 정주를 거쳐 광서장족 자치구를 지나 베트남 향해 가고 있었다. 

내가 가기 전, 사역비가 다 떨어졌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사람도, 돈도 오지 않고 
학생들은 날마다 떠나겠다고 난리를 치자 
기풍 선생은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오지 않는 사람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역장을 떠나자니 떠날 차비도 없었다. 

어떻게 돈을 구할것인가 궁리하다가 
돈이 많이 드는 북한선교 사역을 위해 
자신이 한국에 가서 돈 벌어서, 나에게 부쳐 줘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님이 맨날 이렇게 힘들게 사역하시는데 
우리가 한국 가서 돈 벌어 도와주는 게 어떻습니까? 
한국에 가면, 정착비도 준다고 하는데 
그 돈 모아서 마음껏 북조선 선교 하라고 선교사님께 주고, 
우리는 한국에서 통독하는 게 어떻습니까?' 

'월남 가서 한국 대사관에 들어가면, 바로 한국에 보내 준다고 하는데 
우리 다같이 월남으로 갑시다.' 

 

'맞다. 맞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한 사람이 3,700만원 씩 정착비 받으면 
한 사람당 3천만원씩만 모아도, 우리 9명이 모두 2억 7천만 원이나 

모을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돈 아닙니까? 
그 돈이면 선교사님, 북한선교 맘대로 할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선생님, 한국으로 갈 수만 있다면요. 
그깟 정착비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언제 중국 땅에서 돈이 있어서 살았습니까? 
그만한 돈이야, 한국에 월급이 높다는데, 다시 벌면 되지 않습니까? 

한국에 가서 우리한테 주는 정착비, 다 선교사님께 줍시다. 
우리는 한국에 가고... 
그러면 선교사님도 우리를 욕하지 않을 겁니다. 갑시다. 가요!
우리 기풍 선생 만세! 만세!' 

그의 제안에 학생들도 흥분해서 떠들어대며 맞장구를 쳤다. 
이때부터 기풍선생은 '어떻게 하면 베트남으로 갈 수 있을까?' 

늘 그 방법만 궁리했던 것이다. 

베트남까지는, 지도를 보면서 찾아갈 수 있다지만 
여비가 없으면 갈 수 없는 너무나 먼 길인데 
마침 내가 이사 하라고 많은 돈을 주고 간 것이다. 

그리하여 기풍 선생과 학생들은 모두 베트남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꼬박 3일을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에 도착했다. 

이들 앞에는 이제 국경을 넘는 문제만 남아 있었다. 
국경 까지는 돈 덕분에 무사히 왔지만 
거기서부터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았다. 

우선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의 지뢰들이 그대로 묻혀 있었다. 
잘못 들어섰다가 지뢰가 폭발하는 날에는, 다리가 잘려 나가거나 
시체도 찾을 수 없게 공중분해 되는 수가 있었다. 

설령 지뢰밭을 성공적으로 넘었다 해도 
갖가지 맹수와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무시무시한 정글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마을이 나타난다. 

그러면 이번에는 또 마을을 지키는 베트남의 국경수비대 
그들까지도 무사히 지나야 한다. 그러면 일은 다 된 것이다. 
거기서부터 지도를 따라, 걸어서 가든, 기어서 가든 
수도 하노이까지가서,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  
'우리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요!' 라고 소리만 치면, 한국 행은 따 놓은 것이다. 

무리의 책임자인 기풍 선생이 지뢰밭에 제일 먼저 들어섰다고 한다. 
군인시절 금강산 댐 건설만 해온 그는, 지뢰밭을 통과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저 지뢰의 원리에 대해서 조금 배웠을 뿐이지만 
전쟁영화에서 본 행동을 흉내내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발을 내딛기 전에 뇌관을 이어주는 전기선이 없나? 
먼저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그러면 기풍 선생이 밟고 지나간 자리를, 뒤에서 오는 사람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시 밟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 길은, 베트남과 중국을 넘나드는 마약 밀매꾼들도 들어서기 싫어 할 정도로 
위험한 길이었다. 맨 앞에 가는 기풍 선생은 새로 발을 옮겨 디딜 때마다
온몸을 땀으로 목욕 했다고 한다. 이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가다 보니 
불과 몇 백 미터 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2시간도 더 지나서야 넘을 수 있었다.

기적적으로 단 한사람도 지뢰를 받지 않고 무사히 베트남 국경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 무서운 정글을 밤새도록 조심스럽게 지나 마침내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을을 지나가는 길에, 국경수비대 초소가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새벽이라 초소 앞 또한 무사히 지났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어갔다. 

그리고 철길을 따라, 아무 방향으로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기풍 선생도 알지 못했고, 하룻밤 동안에 초 긴장의 여정에
무리들은 완전히 녹초가 된데다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수도 하노이에 갈 수 있는지 몰라 난감하기만 했다. 

이 곳은 중국 말도 안 통하는 베트남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좀 쉬었다 가기로하고, 모두 철길에서 조금 옆으로 비켜 앉았다. 

조금만 쉰다던 것이, 그 자리에 쓰러져 다 잠이 들어 버렸다. 
이들이 눈을 떴을 때는, 베트남 수비대 군인들이 이들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끝으로 흔들어 깨울 때였다. 

빙 둘러선 군인 들이 그들에게 뭐라고 물어봤지만 
모두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베트남 말에, 모두가 눈만 멀뚱이 뜨고 있었다. 

베트남 군인들은 이들을 꽁꽁 묶어 초소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이들을 조그만 방에 가두고, 중국어를 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기풍 선생과 학생들은, 자기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북한에서 온 탈북자라고, 짧은 중국어로 열심히 설명하였다. 
자기들이 탈북자라는 것을 알면, 

한국 대사관으로 인도해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게 된 군인들은, 갑자기 골치가 아팠다. 
북한 한국 두 나라 다 수교국이니, 이들을 한국 대사관으로 데려가야 할지 
북한 대사관으로 데려 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냥 두자니, 이들 때문에 국제적으로 시끄러워질 것이 뻔했다. 
베트남 군인들은, 조용히 잘 살고 있는 자기나라에 
갑자기 들이닥친 이 불청객들을, 왔던 데로 다시 돌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중국과의 국경지역으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기풍 선생 일행은, 그것도 모르고 북한 사람들이라고 신원도 확인 시켰고 
한국으로 망명 신청도 했으니, 
이제 자기들을 한국 대사관으로 모셔다 줄 것으로 알고, 잔뜩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군인들이 이들을 데려다 놓은 곳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중국과 베트남 국경의 지뢰밭 입구였다. 

군인들은 총대로 쿡쿡 찌르면서, 저쪽으로 다시 넘어가려는 시늉을 하면서 
지뢰밭으로 내몰았다.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그들은, 죽어도 중국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베트남 군인들이 계속 총끝으로 밀어대자, 그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서 
찬송을 부르며, 통성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이런 모습을 2시간 이상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소리를 지르고 곤봉으로 때리며 
어깨동무하고 있는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안 간다고 끝까지 버텼지만, 끝내 이들은 지뢰밭으로 다시 떠밀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던 때 처럼 다시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조심 지뢰밭을 넘어 중국 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들 일행을 예의 주시하던 중국 국경수비대에 의해 이내 체포되고 말았다. 
중국 군인들에게, 자기들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인데 
베트남으로 도망갔다가 잡혀서 쫓겨오는 길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 중국 군인들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조차 몰랐다. 
처음 들어보는 나라이기 때문에, 국제문제에 휘말려 들기도 싫고 

이들을 다시 자기나라(북한)로 쫓아 보내려 해도 
멀리 떨어진 동북지방까지 호송해 가려면, 돈이 많이 들게 생겼다. 

이래저래 귀찮아진 중국 군인들은 왔던 데로 다시 쫓아 버리기로 작정하고 
이들을 베트남과 중국 국경 교두(아마 다리)로 데리고 가서 
베트남 쪽으로 쫓아내다시피해서 보내버렸다. 

이들이 중국 군인들로부터 베트남쪽으로 쫓겨 오자 
베트남 군인들은 중국 쪽으로 내쫓았다. 

결국 이들은 두 나라의 국경 교두 사이에서 
양쪽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한나절을 교두(다리) 한 가운데 앉아 있어야 했다. 

보다 못해 화가 난 중국 군인들이 '너희들 가고 싶은 데로 가라'며 
이들을 붙잡아 중국 쪽으로 내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주님의 은혜 왔다. 

중국 군인들이 합법적인 절차로 이들을 체포했다면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강제북송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으로 도주하다 체포된 이들의 최후는 기약할 수 없었다. 
이들은 베트남 군인들에게 돈이고 물건이고 모조리 다 빼앗기고 
심지어 신발까지 빼앗겨, 완전히 거지 행색으로 중국 광동성 변방에 
작은 도시를 헤매고 다니며 노숙하며 지냈다. 

그러나 며칠째 굶어 쓰러질 것 같자, 기풍 선생이 할 수 없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사라진 기풍 선생 팀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았으나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에, 나는 너무 반갑고 기뻤다. 

내가 즉시 돈을 송금하여, 3일 후 모두 무사히 성도에 도착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의 사연을 듣자 기가 막혔다. 

나는 이 일로 쇼크를 받아, 머리와 목은 물론 등까지 마비되어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중풍환자 처럼 거동도 불편해졌다. 
한국에 나와 일주일 동안 입원 치료를 해서야, 조금 움직일 수가 있었다. 

나는 기풍 선생이 영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그에게서 '선생 자격'을 박탈시켰다.
세워진 '선생'을 해임시키는 일은, 예수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한 명의 탈북자를 
선생으로 세우는 일 보다 훨씬 어려웠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떠돌던 탈북자들이 
'(성경) 선생'으로 세워져서 같은 북한 형제들을 또 다른 선생으로 양육해 갈 때
'지도자'라는 것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북한에는 김정일 지도자 동지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도자라는 호칭을 
붙이지 못 하는데, 

자신이 지도자로 세워지고나니,

마치 김정일과 동급이 된 것 같다고 기뻐할 정도였다. 

그래서 기풍 선생을 해임시킬 때, 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아주 아주 많이 했다. 
'하나님, 이 일이 정말 힘듭니다. 만약 해임시키다가 맞아 죽어도 
저는 천국에 가지 않습니까? 혹시 맞아 죽는 일이 생기면 순교로 받아주세요!'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실행하겠다는 각오로, 그를 해임시켰다. 
사역장에 계속 남아 있겠다는 형제들은 
권능 선생, 익두 선생, 바울 선생의 사역장에 분산시켜 보냈다. 

장만식 아바이는 권능 선생 사역장으로, 
김영현 형제는 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유칼빈, 김예진, 이현수 형제는 익두 선생 사역장으로 보냈다. 

나머지 형제들은 이 사건을 겪고, 더 이상 공부하기 싫어졌는지, 떠나겠다고 했다. 
기풍 선생은 바울 선생 사역장으로 보내서, 학생으로 공부하게 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사역자로서 마음가짐을 되찾길 

나는 간절히 기도하며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