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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3장, 새 땅을 바라보자

LNCK 2022. 10. 27. 19:11

◈벧후 3장, 새 땅을 바라보자            여러 설교 정리

 

◑벧후 3장 해석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있다”  3:1~10    (점프 가능)

<베드로후서>의 전체 주제는 "거짓교사와 거짓 선지자의 교훈 때문에 
어려움에 처하게 된 교회에, 베드로는 복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서신을 쓸 때 
서신의 수신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으로 인해 
긴박한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서는, 베드로전서와 달리 
환란과 핍박보다 이단으로 인한 가르침의 위험성이 더 큰 이슈였습니다.   

본문 벧후 3장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을 부인함이었죠.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런 신앙의 문제는,
‘그냥 네 마음 가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그러나 베드로는, 종말과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가르칩니다.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기서 ’드러난다‘는 뜻은, 불에 타고나서 남는 것이 드러나는 것인데,
인간의 모든 것이 최후 심판 때 분명히 알려질 것임을 뜻합니다. 
(사본에 따라 ‘드러나리로다 everything in it will be laid bare’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심판이 없다는 자들에게, 노아의 홍수 때를 예로 듭니다. 
그때도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노아가 선언하였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결국 심판은 실행 되었고 
노아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성경의 증거들로 말씀을 전해도 
이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2천 년이나 지났잖아요. 
도대체 예수님은 언제 다시 오신다는 말인가요?'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춰지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질문하는 당신이 
예수님을 믿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앞서 베드로는,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라고도 했죠. 


벧후 3장의 적용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11~18

▲1.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사모하라!   (11~13절)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오늘은 ‘새 땅’에 관해 짧게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을 모호하게, 철학적으로, 어떤 이론으로만 생각합니다만
이 ‘새 땅’을 부동산적인 개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우리는 육체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영의 부활만 아니라
육신의 부활체를 가질 것인데,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요21장에 보면, 예수님도 조반을 드셨거든요.

우리가 육체로 부활한다는 사실은     ☞천국은 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살게 될 ‘새 땅’이, 지금 부동산 개념의 ‘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죠.
다만 옛 하늘과 옛 땅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땅이 아니라, 진짜 땅과 흡사한 ‘새 땅’이죠.

눅19:17에,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이 ‘10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습니다.
이 ‘열 고을 cities’이, 무슨 가상의 사이버 공간의 도시가 아니고, 
진짜 도시라는 것입니다. 위 ‘천국은 이 세상과 다르지 않다’를 읽어보세요.

우리가 육신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처럼, 장차 천국에서 
땅도 디디고 살 것이고, 도시도 거기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거에요. 

물론 부동산 개념의 ‘땅 넓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향력의 넓이’입니다.
천국에서 ‘땅 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더 광범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영향력을 갖게 되겠지만, 또 땅도 가지는 거예요.

본문 13절에 베드로 사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는데,
we are looking for new heavens and a new earth
그 땅을 그저 ‘추상적으로만’ 생각해서는 비성경적이란 말이지요.

그러니 사람이 나이가 들면, 노후 연금 이런 것 준비를 많이 하는데요,
그보다는 ‘새 땅’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적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새 땅’에서 살게 될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새 땅’을 추상적인, 가상적인 공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임박한 베드로 사도는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라고 말씀하면서
we are looking for new heavens and a new earth 
NASB 성경은 현재진행형으로 번역했는데, ‘매일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종말과 심판이 없다’하는 거짓교사들의 주장에 대해서
베드로의 권면은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매일 바라보도다’입니다.  
(*헬라어로 현재 시제인데, 현재 진행 시제도 되죠)
너무 이 땅에서 ‘분양’받으려고 애쓰지 마시고, 천국 새 땅에서 많이 ‘분양’ 받으세요!

사도 베드로는 1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했죠.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여기서 ‘유업’은, 구약에서 ‘기업’이라고도 했고, ‘몫 portion’으로도 나옵니다.
가장 직설적으로 한 마디로 표현하면 ‘땅’입니다. 기업=유업=새 땅
그게 ‘새 땅’인 거죠.
그게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걸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날로 치솟아 올라가는 아파트, 빌딩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건 썩고 더럽게 되고 쇠하는 유업이죠. 1:4참조

히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지으실 도시를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 신도시에 살기 원하는데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으실 도시를
일평생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for he was looking for the city which has foundations,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

이건 히브리서 저자가 말씀한 것이고,
같은 내용을 베드로 사도는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말씀한 것이죠!

‘새 땅’,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 하나님이 지으실 ‘도시’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이 땅의 집에 그리 크게 관심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관련 예화 ‘모델하우스 철거현장을 보고서’

마포 로터리를 지나다가 모델하우스를 철거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벌써 몇 번째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분양광고를 했다가
그 일이 다 끝나면 철거하고 또 새로운 아파트 회사가 
다른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똑같은 광고를 하는 것입니다.

잘 지어놓은 모델하우스가 철거되는 광경을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허무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아파트가.. 결국은 모델하우스라는 거죠.
진짜 영구 주택은 어디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다.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돈을 들여서 멋지게 꾸몄던 것들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사람들이 모여서 아파트 내부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도 했겠고,
이런 집에서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거닐었을 그 공간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보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모델하우스가 아깝다고 그것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모델하우스는 언제가는 헐려버리고 말 집입니다.
너무 모델하우스에 목메어 살지 말고, 영구한 주택을 바라봅시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2-13


▲2. 자라가라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앞서 1장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자라갈 것’을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1:5~7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물론 자기 의지로, 유교적으로 자라간다는 뜻은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1:10

그리고 주님 오실 때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거룩에 힘써야 합니다.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 단락에 관한 추천설교 2편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3:18 자라게 하시는 은혜

 

☞3:18 은혜와 지식으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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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3장의 주석 : 뭔가 해석이 부족하면.. 아래 주석을 찾아보세요.

▲1절,
개역성경에는 '에데'('이미')가 생략되어 있다. 
이 단어는 본절의 '둘째 편지'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서가 베드로전서가 쓰여진 후 얼마되지 않아서 기록되었음을 나타낸다.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진실한 마음'은 문자적으로 '순전한 생각' 혹은 '순수한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수신자들의 생각이 부도덕한 욕망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타락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일깨워 생각하게'라는 말은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빠지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새롭게 일깨우는 것을 의미한다(유 1:5). 

이것은 본서가 수신자들로 하여금 이단사설에 빠지지 않고 
과거의 진실한 마음을 갖도록 일깨워 순결하게 하기위해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

▲2절,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거룩한'은 거짓 교사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부인한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1:19-21) 
선지자들이 전하여 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 
이것은 '명하신 것'이 사도들에 의해 선포되었으나 주님에게서 나왔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롬 1:2, 유1:17)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말씀의 권위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한 것임을 시사한다. 

▲3절,
'먼저 이것을 알지니’
그것은 '말세에'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다.

'말세에' 
문자적으로 '마지막 날들에'라는 의미이며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벧전 1:5,20, 유 1:18)
이처럼 신약시대를 '말세'라고 표현한 것은 
오순절이후 세상의 심판 때 성취될 주의 재림을 기대함을 암시한다.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조롱하는 자들'은 미래의 종말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며
(2:2, 3, 10, 13-18) 
'조롱한다'는 하나님을 경멸하고 모독하는 교만한 언사를 나타낸다. 

▲4절,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본절은 조롱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기롱은 '주의 강림' 
즉, 모든 피조물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주의 재림을 부정했다. 

그러나 재림에 관해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며(마 24:34) 
승천하실 때 천사가 약속하였으며(행 1:11,  3:20)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굳게믿고 전파하였다
(살전 4:15, 5:1-11, 살후 2:1, 벧전 4:7).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있다 하니' 
본문은 조롱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는 근거이다. 

▲5절,
'이는...저희가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본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저희가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2) 저희가 자기 주장을 위해서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6절,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베드로는 본절에서 세상이 불변하다는 조롱자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홍수로 심판하신 사실을 예로 들어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에서 땅이 드러나게 하신 것처럼(5절) 물을 통해서 세상을 심판하셨다. 

홍수를 통한 심판은 세상이 불변하다는 기롱자의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섭리하심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심을 예표한다(시 47:2,3,8).

▲7절,
'이제' 이것은 전후 문맥을 연결하는 연결사 '데'로서 
현재의 하늘과 땅과 재림 후에 전개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13절). 
미래에 있을 심판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이 불살라지고 새 하늘과 새땅이 약속된다.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그 동일한 말씀'은 5,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명령을 가리킨다. 
한때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물로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미래에 현재의 하늘과 땅을 심판할 것이다. 

한편 심판의 방법은 과거에는 물이었던 반면에 미래에는 불사름이다. 
'불사르기 위하여'는 '불에 의한' 세상의 심판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경건치 않은 자들만 심판하시고 
하늘과 땅을 남겨두신 것은, 
미래에 있을 불에 의한 심판을 위해서 간직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정된 심판이 있을 미래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로서 
현재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일지라도 
이는 불심판이 유보된 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욕을 좇으며 기롱하는 불경건한 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잊으려 해도 끝내는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25:31-46,  고전 3:13, 살후 1:8).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불 심판은 이미 구약성경의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예언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 29:6,  30:30, 34:4, 단 7:9,10, 욜 2:30,31).

▲8절,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는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 후 사랑하는 수신자들을 위해 
시 90:4을 인용하여 재림 지연에 대한 미혹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천 년이 하루 같은'은 실제로 주의 재림이 연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때를 인간들의 시간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설정해 주신 제한된 인간의 시간 개념은 어떤 법칙이나 
제한에 얽매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천 년은 하나님의 하루에 불과한 것이다(시 90: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의 시간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달려 있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거나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거짓 교사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경계해야 한다(요 7:1-9 주제 강해 ''카이로스'에 관하여' 참조).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거짓선지자들은 주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더디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시는 것'이다. 

'참으심'은 죄인들을 향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주의 재림의 지연은, 믿음 없는 자들이 보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태만이나 
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래 참으시는 긍휼이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본문은 하나님을 기롱하고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미혹되어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해답이다. 

그것은 회개하여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원하는 대상에 대하여 
혹자는 이미 선택받은 자들중에서 아직 회개치 않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
타락한 모든 인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많은 차이점이 생기기 때문이다(겔 18:23,32, 33:11, 롬 11:32, 딤전 2:4, 딤후2:25). 

하나님께서 전인류가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인류의 보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를 향해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이 
공허한 하나님의 약속임을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회를 불신자들에게 알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성화된 삶을 영위해야 한다.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주의 날'은 일반적으로 심판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사 2:12, 겔 13:5, 욜 1:15, 말 3:2, 행 2:20, 고전 5:5, 살전 5:2, 살후 2:2)

본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도적이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오는 것처럼 
예기치 않게 임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갑작스러운 재림은 이미 예수 자신이 말씀하셨고(마 24:43, 눅 12:39), 
바울과(살전 5:2) 요한이(계 3:3, 16:15) 강조한 것으로 
베드로는 이런 표현을 재삼 강조하여 수신자들이 
기롱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깨어 준비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본문의 '큰 소리로'의 헬라어 '로이제돈'은 강풍이나, 강한 물살 
혹은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세상이 파멸되거나 진멸될 때 나타나는 소리를 암시한다. 
이는 곧 주의 재림에 나타나게 될 심판의 무서운 상태를 암시한다(계 6:14, 20:11).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체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이아'는 
세상을 구성하는 원물질 곧 흙, 공기, 불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리킨다(갈 4:3, 골2:8, 히 5:12). 

이것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주의 재림 때에 온 세상이 불에 타 해체됨을 시사한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드러나리로다'의 헬라어 '휴레데세타이'는 사본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본절 역시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태워 버리다' 이 경우는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살라짐
2)'발견하다' 이 경우는 인간의 모든 것이 심판 때 분명히 알려질 것임을 나타난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불로 태워질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1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거룩한'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헌신된 것을 가리키며 
'경건한'은 하나님을 닮아가며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확실히 파멸될 것이기 때문에 
악을 떠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12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나님의 날'은 구약성경의 '여호와의 날'과 같은 의미로 
10절에서는 '주의 날'로 나타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계16:14). 

한편 '바라보고'의 헬라어 '프로스도콘타스'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구약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다. 

또한 '간절히 사모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퓨돈타스'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면서 
오래 참으시는 성품과 관련된 것으로(9절) 문자적으로 '서두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 60:22의 반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종말을 앞당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사 10:23, LXX, 행 3:19,20).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영위할 뿐만 아니라 
주의 재림에 관한 소망을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통해서만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종말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그 날에'는 문자적으로 '날 때문에'라는 의미로 
그 날 곧 '하나님의 날이오기 때문에'라는 의미로 
그 날 곧 '하나님의 날이 오기 때문에' 또는 '그 날의 임재 때문에'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온 세상은 불을 통한 심판을 받아 사라지게 된다(10절).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날에 경건한 자들에게 약속된 것에 대해 
구약성경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의에 근거한 약속으로(사 11:4,5, 45:8, 렘 23:5-7, 
33:16, 단 9:24) 노아 시대에 대 홍수로 불경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죄악된 세상을 새롭게 하셨듯이 
주께서 재림하는 하나님의 날에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의가 영원한 집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킬 약속을 말한다(사 65:17, 66:22, 계 21:1).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약성경(사 65:17, 66:22)과 유대 묵시 문학에 나타나며
(위경 에녹1서 45:4,5, 72:1, 91:16, 바룩 2묵시록 32:6, 44:12, 57:2, 에스라 4서 7::75) 
신약성경에서도 받아들여져 나타난다(마 19:28, 롬 8:21, 계 21:1). 

이것은 하늘과 땅이 새롭게 창조되어(시 102:26, 사 51:6, 히 1:11, 계 20:11) 
새로와지고 완전해짐을 시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날'이 죄악된 세상과 피조물에 대해서는 
멸망과 재앙의의 날이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악과 세상의 고난을 도말하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임을 
기억하고 기대하며 사모해야 한다(벧전 1:7).

▲14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는 새하늘과 새 땅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경건한 삶을 실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한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는 거짓 교사들이나 기롱자들의 미혹되고 방종하는 삶과 
대조되는 삶으로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다. 

이런 삶은 그 기준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가리킨다
(민 19:2, 빌 2:15, 벧전 1:19). 

한편 '평강 가운데서'는 소망과 인내에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근거한 상태를 의미한다(1:2).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재림의 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될 
구원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15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베드로는 9절에 이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연기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부가적으로 설명한다. 

조롱자들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며, 
하나님의 인내이다. 따라서 재림의 지연을 재림을 부정하거나 
핑계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16절,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바울도 자신의 서신에서 여호와의 날, 
즉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장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지역은 물론 그 외 많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회람되고 있었던 바울 서신에도 진술되어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언급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히 성취될 것임을 증거한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본문은 바울이 쓴 서신들 가운데 이해하기 힘든 주제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바울에게 교리적 문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신을 받는 독자들이 바울이 의도한 바와 다르게 이해할수 있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를 말할 때(롬 3:20-24,28) 
그것을 성화의 삶을 소홀히 여기는 듯한 주장으로 이해하거나,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주장을(롬 7:4, 8:1,2, 갈 3:10) 
도덕폐기론으로 이해하는 것 등이다(롬 6:1-7, 고전 6:13-20). 

바울이 쓴 주제들이 난해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때문
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억지로 풀다가'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트레블루신'은 
'왜곡하다', '비틀다'라는 의미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바울 서신과 다른 성경을 자신들의 뜻에 맞게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무지한 생각과 논리로 성경의 교훈들을 왜곡시키고 복잡하게 만들어 
고집함으로 멸망당함을 의미한다. 

베드로의 이 같은 단호한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이 난해한 말씀을 접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것이 아니다. 단지 성령의 도우심과 조명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바르게 해석할 것을 권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17~18절,
베드로는 본절에서 본서 전체에 대한 요약과 함께 마지막 두 가지 권면을 하고 있다.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무법한 자들'은 이제까지 언급된 거짓 교사들, 조롱하는 자들, 
무식하고 굳세지 못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들로서 
영적으로 실족시키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생각과 논리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실족케 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떠나게한다. 

한편 '삼가라'는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대처하고 
깨어 경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대처하는 방법은 
1)그들의 활동을 미리 알며 
2)그들의 부도덕한 삶을 경고하며(2장) 
3)사도들의 메시지를 일깨우고(1:16-18) 
4)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선포하며(3:2, 1:19) 
5)그런 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본문의 두번째 권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은혜와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유격에 의해서 수식받고 있다. 
이는 '은혜와 지식'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시사한다. 

한편 '자라가라'의 헬라어 '아욱사네테'는 '아욱사노'('자라다')의 미완료로서 
계속적으로 자라가야 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에만 만족하여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에 대한 지식 안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여 굳세게 서서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는자가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는 마지막 인사말에서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 고백을 한다. 
'영광'의 헬라어 '헤 독사'는 문자적으로 '그 영광'이란 의미로 
오직 주님에게만 영광이 있을 것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암시한다. 

한편 '영원한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헤메란 아니오노스'는 
문자적으로 '그 시대의 날까지'라는 의미로 
'여호와의 날' 곧 주의 날인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7,10,12).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주님이 종말에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서 나타날 
'여호와의 날'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모든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부인하여 미혹하려는 거짓 교사들의 교훈에 
미혹되지 않고 영광 가운데서 인내할 것을 권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