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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6:7 성직자가 경쟁력을 잃는 이유

LNCK 2022. 10. 28. 11:31

후기기독교시대의 선교전략(13)-성직자가 경쟁력을 잃는 이유 - YouTube

◈성직자가 경쟁력을 잃는 이유      행1:4, 6:7      2022.10.26.  

후기 기독교 시대의 선교전략 13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아멘! 

"성직자가 경쟁력을 잃는이유"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직자가 경쟁력을 잃는 이유를 앎으로, 우리가 경쟁력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흥이 목회자와 성직자를 통해 일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역사적으로 볼 때, 신앙의 부흥이 성직자들 위주로,  
그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사건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예루살렘에 일어난 이 예수 부흥 운동이, 평신도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사도들도 아직 평신도였고, 7 집사도 평신도였고, 
그 당시 성직자로 여김 받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애초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고, 그리고 이 부흥 운동에 동참하지 못하다가 
이후에 '허다한 제사장들이 믿고 돌아왔다'... 라고 본문이 말씀 하고 있습니다. 행6:7

제사장으로부터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지만 
그들이 그것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통해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고 
그 후에 제사장들에게 그 부흥이 전달이 되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후기 기독교 시대는, 문자 그대로 '후기'를 말하는 것이다 보니까 
'전기'에 통했던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후기 기독교 시대가 되었습니까? 누구의 책임입니까? 
양들이 교회를 떠나간 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양들의 책임입니까, 성직자의 책임입니까? 

결국은 양을 잃은 것은 목자들의 책임이에요. 
양들이 교회를 떠난 것을, 양을 탓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목회자들이 그들을 붙들지 못한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들 부터 각성을 해야 되는데 
그들이 각성할 조짐이 보이지 않으니까 
성도들로부터 각성을 하게 되면 
그것이 목회자들에게도 전달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패러다임의 변화, 생각하는 방법, 고정관념이 바뀌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고,
'산이 내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간다'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항상 일어납니다. 

원래 하나님이 남자를 쓰려고 했는데, 남자가 순종하지 않으면 여자를 쓸 수밖에 없죠.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때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당신의 백성으로 불렀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원래 바울이 아시아로 가려고 했는데,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에 
방향을 틀어서 유럽으로 간 것이 아닙니까 
이것 역시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한 것입니다. 

제가 원래는 점잖은 말씀 위주의 사역을 할 줄 알았는데 
주님이 제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 사역을 시키시니까 
제가 그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그 일을 하는 것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후기 기독교 사회의 성직자들이 왜 경쟁력을 잃고, 양을 잃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우리가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서 보게 되면 
결국은 우울한 결론을 내리게 되지만, 

그게 아니고 그들의 실패를 통해 반면교사를 삼으면 
우리가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1. 서구의 성직자들이 경쟁력을 잃은 그 첫 번째 이유는 
그 예수님의 원래 부르심을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 부르심! 

예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이 
그 부르심의 성격과 목적을 분명히 나타낸 것입니다. 

막1:17절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낚는 되게 하리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사도들의 오리지널 소명이었어요. 구령의 열정!

사람을 낚는 일,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
그 목적을 위해 당신의 종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 되는 일이에요. 

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 
어떤 사역을 하던지 이것은 목적으로 삼아야 되는데 
성직자들이 이 목적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왜 소명을 떠나갔느냐? 
가장 큰 이유는 '신자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에요.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다 세례를 받았지 않았느냐? 교회 멤버가 아니냐?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르지 않느냐? 

세례를 줄 때, 마리아, 요셉, 요한, 야고보, 베드로, 바울, 다윗 등 
성경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갖지 않느냐? 

그들이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교회가 장례식을 해 주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들이 다 구원 받은 것이 아니냐? 
이렇게 간주한 것입니다.  이 간주가 틀린 것입니다. 

교회에 교적을 두고 있다고 해서, 거듭났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교회를 출석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기에 언제든지 성직자들이 사람 낚는 일에 우선순위를 둬야 되는데 
신자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간주하게 되면 
이 사명을 잃어 버리고, 다른 일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 우리가 아는 많은 유명인들이 있죠.
베토벤, 처칠, 루스벨트, 피카소, 로댕, 케네디... 
그 사람들이 다 교회에 교적을 두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러나 신앙인이었다는 증거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했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여겼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교회 멤버였는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몸은 교회안에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나온다고, 심지어 세례를 받았다고 
그 사람이 거듭났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오히려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미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확인해야 됩니다. 
정말로 거듭났는지.. 영혼의 구원을 받았는지.. 

그런데 사람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간주를 하게 되니까 
사람 낚는 일(영혼 구령 사역)을 소홀히 여기게 된 것입니다. 

△(19~20세기에 서구의 일부) 성직자들이 천국을 믿지 않고 지옥을 믿지 않았어요. 
당시 이성주의 시대사조,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그랬던 것이죠. 중략

신학을 공부 하기 전에 사람이 충분한 신앙을 가져야 
신학공부를 할 때, 강의를 새겨서 들을 수 있지만 

그게 아니고 신학교가 자기의 신앙을 가르쳐 줄줄 기대하고 가게 되면... 
여러분 신학교 교수들은, 학생의 신앙을 책임질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건 그들의 사명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갖추지 않고,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난 경험과, 자기 소명의 확신이 없이 신학공부를 하게 되면

성경에 대한 믿음을 오히려 까먹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까먹고 
나중에는 신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왜 공부하는지.. 그 이유를 상실에 버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목회자들이 경쟁력을 잃은 이유는 
 요21:15절에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 
'내 양을먹이라'고 하셨죠. 

양을 먹이는 일이, 성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말씀의 꼴을 먹이는 일에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양들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사도들이 7 집사를 임명하고, 그들에게 구제의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행6:4
전무는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뜻이죠.  *專務 : 오로지 전, 힘쓸 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요?
말씀 전하는 일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상담하는 일, 심방하는 일, 교회 행정, 교회 프로그램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성도들에게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믿음을 가져라고 요구하지 말고 
말씀을 심어주면 됩니다. 왜냐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에요.

성도들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있으면, 그걸 타박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마음에 들어 오시면 
그 행위가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무엇이 부족합니까? 교회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그걸 말하지 말고 양들을 먹이면, 양을 먹여서 토실토실 하면 
젖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대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죠. 
'너희 양'이라고 하지 않고, '내 양'이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의 양을.. 우리 성직자들, 순장들에게 맡기셨는데 
그들을 먹여야 될 책임이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먹이는 일, 그게 가장 핵심적인 일입니다. 

만약에 교황이, 말씀 전하는 일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한다면
천주교회는 완전히 뒤집어 질 것입니다. 
천주교회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본 바에 의하면, 교황이 다른 많은 일을 하는데 
정작 말씀 전하는 일, 강단에 서서 말씀 전하는 일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고, 거기에 그렇게 힘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아요. 

만일 가톨릭 성도들이, 베드로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믿는다면,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베드로는 기회만 있으면 설교를 했지요.
베드로는 기회만 있으면 말씀을 증거했지요.

오순절에도 말씀을 전했고, 성전 미문 앞에서도 말씀을 전했고
고넬료의 집에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고, 기회만 있으면 말씀을 전했는데, 
그래서 마가복음, 베드로전서, 후서 등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가톨릭 교회가, 저들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믿는다면 
베드로를 흉내 내면 될 것 아닙니까. 

△개신교 목사님들은, 개신교는 말씀을 강조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지 않습니까. 왜 그런데도 양들이 떠나갑니까? 

졸음이 오는 말씀을 가르친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예전에 곽선희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교회가 부흥을 되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추라.
첫째는, 졸지 말아야 된다. 둘째는, 다음 주일에 또 와야 된다. 
세 번째는, 친구를 데리고 와야 된다. 그러면 교회가 부흥한다고 하셨지요. 

굉장히 단순한 원리지만, 그게 안 되면 성도들이 졸고, 
다음 주일에 안 오고, 친구를 데리고 오지도 않으면, 당연히 교회에 성도가 떠나가죠. 

그럼 어떻게 하면 성도가 졸지 않게 할 수 있습니까? 
이건 기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언변, 입심, 엔터테인먼트를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성도들이 졸지 않고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성도들이 들을 때 '이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라고 들으면 
귀를 열고 깨어서 들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10:27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죠.
설교자가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면, 성도들이 알고 들어요.
'저것은 목자의 음성이다, 주님의 음성이다' 하고 알아 들어요.
'주님이 저 분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고 알아들어요. 

성도들이 졸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하면 주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묵상하고, 기다리고... 

엘리야 선지자가 세미한 음성이 올 때까지 기다린 것처럼 
말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고, 설교 준비 않고 강대상에서 즉각) 
직통으로 계시를 받아서, 직통으로 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성령이 운행하기 시작할 때, 지식의 말씀이든, 영분별이든,
즉석에서 말씀해 주실 수 있지만, 
그러나 정도에게 전할 설교말씀을 준비할 때는, 감동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감동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무슨 하늘이 열리는 것 같은.. 그런 엄청난 계시를 주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작은 감동, 겨자씨와 같은 작은 말씀을 기다리면 돼요.

겨자씨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감동이 왔을 때, 그 감동을 무시하지 말고 
그 감동을 붙잡고 계속 묵상을 하게 되면 
거기에서 마치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말씀과 지혜가 줄줄 따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말이, 무슨 신비한 선지자의 은사를 받아가지고 
주님이 '자 이제 받아 적어라'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어떤 감동이 묵상 중에 순간적으로 오는 것과 갔습니다.
어떤 깨달음이 설교준비 시간에 순간적으로 오는 것과 같죠.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지요. 
원효대사가 밤에 자다가 무슨 '깨달음을 얻었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깨달음이 매일 올 수 있어요. 
원효대사는 (오랜 세월 가운데) 한 번의 경험을 가지고 자기의 철학을 만들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시시때때로, 성경을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시시때때로 감동을 얻을 수가 있어요.

그걸 우리가 기다려야 됩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으리라고 믿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디 산에 들어가서 말씀만을 청종하는 게 아니고 
내가 평소에 살면서, 경험하면서, 고민하면서, 씨름하는 그 와중에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고,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는 거죠.

다시 말하면, 내가 먼저 먹어 보고,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성도들에게도 은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나는 필요가 없는데, 성도들 만을 위해 주시는 말씀'은 아니라는 거죠.
내가 먼저 그것을 먹어 보고, 내가 먼저 은혜를 받으면 
그 말씀이 성도들에게도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로 성직자들이 경쟁력을 상실하는 이유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 고 했는데 
성령을 기다리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받지 못하고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비극적인 얘기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항의할 거예요. 
'나도 한때 믿고 구했다. 근데 성령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까?' 

행1:4절에 예수께서 뭐라고 부부 하셨냐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만약에 내가 믿고 구했는데, 성령을 못 받았다고 하면 
그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았어야지요. 

왜 임의로 예루살렘을 떠나서, 사역을 시작했다는 겁니까?
애초에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만약에 못 받았다면 떠나지 말았어야지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은 
성령 받기 전까지, 임의로 사역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령 받은 후에 하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성령을 못 받았다면, 사역을 시작하지 말고 기다렸어야 했지요. 
그만큼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빠질 수 없는 일인데... 

사람들이 교육으로 (성령사역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경험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자신의 선한 의도로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내게 주님께 대한 헌신이 있으면, (성령사역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성령 사역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헌신은 헌신대로 해야 되지만
성령은 성령대로 받아야 됩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죠. 
하나님의 아들도 성령 받기 전까지는,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서구 교회는 이 면을 무시했던 것 같아요. 영적인 면을 무시했던 것 같아요. 
성령이라는 분이 하도 애매하고, 또 하도 추상적으로 들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신자들이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통해.. 성령을 받지 못 해도 된다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성령 받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받지 못한 것을 정당화하려는 그런 노력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요.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세례받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주장이죠.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이 모든 걸 가져오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성령도 따라온다...  그럴듯한 논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 자동 따라온다고 믿으면, 
성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지요. 

예수님 안에 성령이 계시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성령을 다른 경험으로 지목하셨어요.
'성령을 내가 보낸다, 보혜사를 보내겠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가 안 온다. 성령의 기다려라' 

이렇게 예수님이 성령을 따로 지목하셨어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동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그 말은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성령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성령받는 일을 '2nd experience'라고 하는데,    *2nd blessing라고도 함
오순절 교단이 '성령세례'를 일컬어서 하는 말입니다.

First 는예수님을 영접해서 거듭나는 것을 뜻하고,
2nd는 행2장에 성령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왜 2nd가 필요하냐?
1st 때 이미 성령님까지 다 포함이 됐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는,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합니다. 고전12:3

다만 성령이 신자 안에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기 때문에 
활성화 할 필요가 있는 것뿐이다... 이런 주장은 얼핏 보면 그럴듯하게 들려요. 

이런 가르침이 '내가 성령을 못 받았구나' 라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겠지만
그러나 예수님 안에 성령이 있지만, 예수는 성령을 '별도의 경험'으로 지정하시고 
'기다리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어봤습니다. 행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구절을 보면,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묻는 이유는
예수님은 믿었는데 성령을 못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한 것이죠.

만약에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이 따라 오신다면 이 질문을 할 필요가 없지요. 
예수님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면, 이런 질문이 무의미하지요.

그러나 바울이 물어봤어요.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그랬더니 
에베소 교인들은 '우리는 성령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어요. 

이게 2천년 전에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요. 

성령에 대해서 한 번도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성직자들이 경쟁력을 상실한 이유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경쟁력을 잃지 않고, 경쟁력을 얻기 위합니다.

이건 목회자들, 신학생들에게 해야 돼 얘기가 아닙니까? 아니에요. 
서두에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죠. 

만약에 목회자를 통해 부흥이 오지 않는다면 
평신도들을 통해서라도 부흥이 올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 나중에 믿게 된 것처럼, 
애초에는 어부들이 믿었고...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 후에 제사장의 큰 무리가 믿게 되었다고 한 것처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남자가 안 하면 여자가! 
유대인이 아니면 이방인이! 
성직자가 안 하면 평신도 하면 돼요! 
주님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주의 일을 해야 되느냐? 누가 이 일을 해야 되느냐? 
누가 사역자가 되어야 되느냐? 

제가 한 번은 트위터를 하다가 (요즘에는 트위터를 안 해요) 
한때 트위터가 처음 시작될 때, 트위터에 이런 글을 썼어요. 

1) '목회보다 더 잘하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해야 된다' 

그 글을 올릴 때, 누구를 염두에 두고 쓴 말인데
근데 그 사람이 그걸 귀신처럼 알아 들었어요.
트위터의 친구였는데, 자기 얘기란 것을 알아들었어요.

제가 좀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나 사실이에요. 
누가 사역을 해야 되느냐?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 사역을 제일 잘 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 비교해서 잘 한다는 게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사역 말고는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다른 잘 하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하면 돼요.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일을 제일 잘하는 사람, 그 사람이 사역을 해야 돼요. 

목회나 사역 말고는 다른 잘 하는 일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 사역자가 되어야, 본인도 행복하고 교인들도 행복해요. 

모든 걸 다 잘하는 팔방미인은, 하나님 나라에 별로 소용이 없어요.
팔방미인은 우물을 여러 개를 파려고 하기 때문에... 정작 한 우물도 못 파요!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적성에 맞고, 내가 가장 잘 하는 거야!' 
그 사람이 사역을 해야 합니다.

2) 두번째는 사역을 좋아해야 돼요. 당연한 얘기지만 
좋아한다는 게, 커피를 마실 때 커피 원두의 쓴 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크림의 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아래 고여 있는 설탕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죠.
좋아하는 부분은 다를 수 있어요. 그러나 좋아하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거죠.

마찬가지로 주님의 일에,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어요. 
그러나 좋아하는 게 있어야 돼요. 
그래야 그걸 지속해서 할 수가 있어요. 

만약에 좋아하지 않으면, 그걸 마치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남편을 위해서 코를 막으면서 매일 고기를 구워서 상에 올리는 것과 같죠.
그게 하루 이틀이지, 그 일을 어떻게 매일 같이 계속하면 고역 아니겠습니까.

3)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해야 됩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 은혜를 받으려면, 
나를 좋아해야 돼요.

내가 아무리 믿음이 좋고, 내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더라도 
남들이 나를 안 좋아하면 소용이 없어요. 사역자는, 남들이 나를 좋아해야 돼요.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나를 좋아해야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요. 그리고 내게 가까이 와요. 

그러면 우리가 좋은 사역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남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돼야 돼요. 

우리의 말투, 우리의 행실, 친절함, 따뜻한 예절, 
그리고 여러 가지 면으로 사람들에게 거북함을 줄 만한 요소를 최소화 하고 

가급적이면 친절하고, 친화적이 되고, 스위트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야, 마음을 열고 은혜를 받을 것 아닙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엘리야가 얼마나 괴팍한 사람입니까. 
엘리사도 얼마나 괴팍하고 무서운 사람입니까? 

청년들을 저주했더니, 곰이 나와서 삼켜버렸다고 했어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엘리사를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수넴 여인이 자기 집을 오픈하고 대접을 하고, 사람 찾아오고, 고쳐 달라고 하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런 모든 이유는 
근본적으로 엘리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나오는 대사에, 주인공 막시무스가 검투사가 되잖아요. 
아주 잘 싸우는 검투사가 됐어요. 

그런데 막 심통을 부리고, 관중석에 칼을 집어던지고 그러잖아요. 
그걸 보고 검투사의 주인이 뭐라고 말 하냐면 
'네가 잘 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람들이 너를 좋아해야 된다'

아주 본인에게는 굉장히 혁신적인 조언을 해 주었어요.
'잘 싸우는 것만 가지고 안 되고, 사람들이 너를 좋아해야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 예요. 당연히 잘 믿어야 하고, 당연히 열심히 믿어야죠.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해야 돼요. 
그래야 마음을 열고 찾아오고, 도와 달라고 하고, 
우리 말을 믿고, 사역을 받아들이고, 사역이 발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