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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31~39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LNCK 2022. 10. 29. 19:17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31-39)│2022.10.23 - YouTube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8:31~39            2022.10.23.

이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 라고 말하지만 
모든 시대의 역사는 불확실한 역사였습니다. 

또한 모든 인간의 삶도 불확실한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어떠한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확실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가장 안정감 있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결핍된 영혼은 불안합니다. 두려움이 많습니다. 흔들리고 늘 휩쓸려 갑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문제는, 한마디로 '사랑의 결핍'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충분한 부모의 사랑 속에 자라지 못한 사람은, 
늘 그 속에 불안이 있고,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래서 작은 유혹에도 쉽게 휩쓸리고, 시험을 이겨낼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고, 그리고 분별력 있는 풍성한 사랑 속에 자란 사람은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길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이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사랑이 가져다 주는 확신'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깨닫고, 확신하고, 그 안에 거하는 영혼은 
어떤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롬8장이 바로 그런 확신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이 구원의 완전한 안전, 
영원한 안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이 구원은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거룩하게 하시며, 영광스럽게 하실 구원은

취소되지 않으며, 영원히 안전한, 보장된 구원임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를 아셨고, 미리 정하셨고,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며, 또한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실 것.. 

이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미리 아심, 택하심, 부르심, 칭의, 성화, 영화 등의 연결)
우리를 창세 전에 미리 아신 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날이 이르도록, 영광의 날에 이르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는 겁니다. 
중간에 어느 단계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불의함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어떤 타락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시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이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마지막 심판 때) 다시 살리겠고, 
이 사랑이 우리를 영원히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9절을 우리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시작했죠.
no condemnation 이렇게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코 끊을 수 없느리라 no separation' 로 마치고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고, 결코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확신하는 자에게는.. 깊은 담대함이 생깁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승리의 삶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 31~39절 까지 5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이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31절 마지막에 보면 '그러면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무슨 대답이 필요하겠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확신에서 나오는 노래와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부를 수 있는 거룩한 승전가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까? 

1.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사랑은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8:31~34절 까지 3가지 질문으로 그렇게 확신을 설명합니다. 

31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22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34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완전한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가, 불완전한 용서요, 연약한 용서라면 
이렇게 담대하게 질문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고소하며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우리를 용서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에 
이 질문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도 사랑이요. 
특히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셨고 
특히 인간을 창조하실 땐 '심히 좋았더라'
여기서 '심히'는 흘러넘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쳐서

인간을 지으시되
인간을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배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유의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죠. 

자기에게 옭아매고, 기계적인 존재로, 굴복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죠. 

또한 하나님은 '그 자유를 가지고, 당신을 배신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므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끊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찾아오시고, 추적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 하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높은 하늘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말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같은 사람이 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실 뿐만 아니라 
의로운 분이 불의한 자를 대신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넘기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온누리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2004년도에 가족과 함께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서 학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 아들이 급성 신장염이 발병해서
계속해서 신장이 망가져 가고 있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어떻게 치료하기가 어려워서, 한국으로 가족을 보내고
저는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중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내 아들이 이렇게 신장이 망가지고 건강이 무너져서 
혹시 생명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염려까지 생겼습니다. 

바로 그때 '아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내 생명을 요구하는 길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신장 이식 수술을 하든 뭐든,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내 생명을 다 내어놓는 일이 요구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서 아들을 살릴 수 있다면, 아들을 살려야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렇게 말 안 듣는 아들이, 나보다 더 중요한 존재더라고요. 
그때 떠오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신' 것은 
'내가 지상으로 가기 어려우니, 네가 좀 가라' 가 아니에요. 
'내 대신 네가 희생해라'가 아닙니다. 

아들을 내주었다는 것은, 자신을 내어준 거 보다 더 큰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희생 보다, 더 큰 희생의 사랑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아들이 죽음의 고통을 통과해서 부활할때 
그분이 우리의 맏형이 되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바라 보셨기 때문에 
그 희생을 감수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옥타비아누스 윈슬로 라는 분이 이렇게 썼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의 내어주었는가? 
유다가 돈 때문에 내어준 것도 아니고 
빌라도가 두려움 때문에 내어 준 것도 아니며,
유대인들이 시기심 때문에 내어 준 것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완전한 용서가 부어지기 위한 
사랑의 통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완전한 용서를 
믿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이 가능한 겁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고소하리요?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이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살겠다는 
뻔뻔한 자기중심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야?' 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나한테만 그렇게 고소하느냐?' 라는 자기합리화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과 연약함, 문제와 죄를 깊이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죄와 허물을 씻으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사랑 때문에 '누구도 나를 정죄할 수 없다' 라고 말하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와 허물과 연약함이 있습니다. 
때로 그래서 사단의 고소를 받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죄가, 나의 양심을 괴롭힙니다. 

 

'내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어? 
내가 그러고도 교회 직분자라 말할 수 있어? 
내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할 수 있어?' 
라는 이런 고소와 정죄 앞에, 때로 우리는 무너집니다. 

'그렇지, 나도 양심이 있지! 내가 그렇게 살고도 
주일에 뻔뻔스럽게 성경책 들고 예배당에 갈 수 있어? 안 가는 게 낫지!' 
그리고 안 오시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가끔 하나님께 인사 드리면 되지 뭐.. 
그렇게 말씀대로 못 살면서, 내가 그렇게 사는 것처럼 갈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가끔 오는 분도 있어요.

어떤 분은 그 양심이 지나치게, 양심이 너무 칼 같아서 
'내가 성경책을 한 번도 정확하게 안 읽었는데, 어떻게 예배에 나갈 수 있어?'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가 그런 양심으로 설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고백은 뻔뻔함의 고백이 아닙니다. 합리화의 고백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에서 나오는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때로 쓰러질지라도 

우리를 정죄하고 고소하는 사단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뻔뻔하게 그 고소를 묵살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나, 우리의 믿음 때문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향하여 끊임 없이 베풀어 주신 완전한 용서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이러한 사랑의 확신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방황하고 흔들릴 때,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 일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일이 3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8:34 '누가 정죄 하겠습니까? 
죽었을 뿐 아니라 살리심을 받으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하고 계신 일이 있다는 겁니다. 
간구하신다, 중보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변호하신다는 겁니다. 
무슨 변호를 하십니까? 

우리가 죄와 허물과 실패와 연약함에 빠져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확신하고 잊지 못하고 
사단의 고소와 정죄 앞에 무너져 갈 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변호시키고, 중보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그 사랑 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이 예배 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높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중보가 있기에, 우리가 때로 힘들고 연약하여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그것은 나의 용기가 아닙니다. 

나의 어떤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편이 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예배당에만 나오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주신다'라는 광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에 
어떠한 사단의 권세와, 지옥의 모든 세력이, 
이 세상의 고소와 정죄에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성도는, 끊을 수 없는 이 사랑 안에 뿌리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정죄 받고 
때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죄 가운데 신음하는 영혼일지라도 
사람들은 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기에
그는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신 사건이 스가랴 3장에 나오는 환상입니다. 
스가랴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있습니다. 
고소 받을 만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제사장은 마땅히 입어야 되는 의복을 입지 않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죽임 당해 마땅합니다. 

모세 시대는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해도 죽임을 당했거늘,
대제사장이 마땅히 입어야 될 옷을 입지 않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 
마땅히 죽임당해야 할 것입니다. 

사단의 고소는 근거가 있습니다. 정당합니다. 의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무죄를 선언하시고, 그리고 사단을 책망하십니다. 

그것은 눈감아주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치 때문입니다. 
천사들에게 명하여 저 더러운 옷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까닭은 
모든 대적을 막아 주시는 까닭은 
우리가 입고 있던 옛 사람의 겉옷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벗겨 주시고, 
의의 옷,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벗겨지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옷이 입혀졌음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믿는 겁니다. 

우리가 사단의 참소 앞에 무릎 꿇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완전하지 않다' 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때로 발걸음이 무거울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 안으로 나올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끊을 수 없는 사랑 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베고픔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겠습니까?

36 기록되기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인해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인해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방해물들을 7가지로 열거합니다. 
환란, 곤고, 핍박, 배고픔, 헐벗음 위험, 칼 

이것은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에 믿음의 사람들이 겪는 고난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용어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그 모든 고난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는 거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세상의 고난도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시대의 성도들도, 그 세상이 주는 시험 앞에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요한일서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5:1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원하는 대로 다 이루고 성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상 세상을 정복한 것처럼, 자신의 뜻을 다 이룬 사람처럼 보이는 그 사람들은 
실상은 사상을 정복한 게 아니라, 세상에 의해 정복당한 겁니다. 
세상의 탐심과 야망이 그들을 사로잡아, 세상의 포로가 된 것 뿐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신, 
모든 고난의 종착점은 죽음인데 
그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그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고난 또한 이기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함께 누린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요한복음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16:33 '내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말씀하셨어요.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

로마서 8장은, 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가, 나의 승리로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국가대표 선수 몇 사람, 혹은 때로는 한 사람이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승리를 하면 
온 국민이 다 자신이 이긴 것처럼 기뻐하지 않습니까. 

자기는 한 것도 아무것도 없이, 쇼파에 앉아서 과자 먹으면서 관람 했으면서 
마치 자신이 골을 놓고,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처럼 환호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대표 선수가, 나와 국민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승리가 어떻게 한 나라의 승리가 됩니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이미 세상을 이겼다' 하는 그 승리가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에게는 '나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과 연결됩니까? 믿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옛사람의 죽음임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 속에 그 생명이, 나에게 주어졌음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가, 바로 나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이미 이겼다'라고 하시는 그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끊을 수 없고 
그 사랑은, 바로 우리를, 담대하게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말씀을 기록하며, 그가 익숙하게 암송했던 시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44:22절에 죽음에 이르는 고난 당한 시편 기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탄원하죠. 

'내가 종일 죽음에 이르는 고난 속에 있으니 
하나님, 주의 백성을 구원해주소서!' 라는 시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편을 인용하며, 그 당시에 시편기자는 그렇게 기도했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똑같이 죽음에 이르는 고난 속에 있지만 
이제는 구원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는 세상을 이겼습니다! 라는 승리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을 다시 쓰고 있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는 말씀에는
'모든 일'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범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모든 것' 입니다. 

거기에는 때로 죽음도 있지만, 생명, 좋은 것도 있습니다. 천사도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도 있습니다. 

악한 것들만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끊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한 것들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처음 배반한 에덴동산은, 축복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의 장소였습니다. 

악한 것만이 아니라, 선한 것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수 있습니다. 
고난만이 아니라 축복도, 우리로 하나님을 떠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넉넉히 이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왜냐면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요10:28~29절에서, 이미 말씀한 내용을

바울이 본문에서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먼저 롬8:38~39절에서, 이 모든 것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한번 읽어 봅니다.

8: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도, 천사들이나 악마들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능력도,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사도 바울이 롬8장에서 다시 썼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요10:28~29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구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 보다 더 크신 분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내 손에서도 빼앗을 수 없다. 

그 아버지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랑의 손입니다. 

그리스도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못박혀 죽은 희생의 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건져주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기도의 손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 아버지의 손에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런 영원한 생명(구원)을 확실하게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사랑의 손에 붙잡히는 겁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선하신 손에 붙잡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빨리 포기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봤자 벗어날 수가 없어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 아버지의 손에, 여러분이 붙잡힌 겁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봤자, 본인만 피곤하고 힘든 거예요. 
그 손에 완전히 붙잡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자유를 잃어버린 거 같지만, 진정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을 잃어버리는 거 같지만, 진정 행복한 삶이에요. 
그것이 내 자신의 의지가 사라지는 거 같지만, 
진정 나의 의지가 온전히 회복되는 길인 것입니다. 

이 끊을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을 확신하게 될 때
때로 우리가 죄와 실패, 자기 연약함으로 무너질 때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고, 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완전한 용서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거센 폭풍과, 시험과, 역사의 환란이 다가올지라도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믿음의 길을 계속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 사랑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그 사랑의 손에 붙잡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완전한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온전히 사로잡히고, 깊이 확신하는 그런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풍성하신 사랑, 
끊을 수 없는 사랑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 연약과 실패와 좌절을 불구하고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며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나아갑니다. 
이 세상에 거친 풍파와 시험과 모든 환란 가운데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나갑니다. 

주님,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 사랑으로 승리케 하여 주시옵시고 
그 사랑 안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