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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5:5~6 사자와 양의 양면성

LNCK 2022. 11. 2. 08:28

◈사자와 양의 양면성        계5:5~6        김성수 목사님 계30강 17'~33' 

(과거 '냉수한그릇 창고'에 있었던 글을 복원시켜 올립니다)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그런데 한 장로가, 그 책을 펼 자가 없어서, 울고 있는 요한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계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사도요한이 장로의 음성을 들었다. 그 장로가 말하기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 이렇게 말한다. ↑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다지파에서 나셨다. 히7:14 

그런데 예수님이 그 영광을 회복하시고 하늘에 계신데, 
그 분을 지금까지 ‘유대지파의 사자’라고 표현한다. 

▶1. 유대지파의 사자.. 성육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성육신(유대지파로 나신 분)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셨고, 지금도 갖고 계신다. 요16:28 

주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에 관해서 말씀하시는데, 
거기에 쓰인 ‘왔다’는 단어는  에르코마이(오다)의 완료형이다. 

헬라어의 완료형은,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일이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완료형으로 표현한다. 

예수님은 지금도 아니 영원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살게 되셨다. 
물론 육신과 다른 완전한 육신인 부활체를 영원히 입고 계신다. 

하나님이시고, 편재하시고, 무소부재하신 그 분이, 
이제 육신을 입고 그것을 포기하신 것이다. 
(사자 lion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살핌) 

▶2. 그리고 그 분을 ‘다윗의 뿌리’라고 표현한다.. 선재성 
그 분은 다윗의 후손이다. 그런데 다윗의 뿌리란 것은, 뿌리에서 줄기가 난다. 
다윗보다 먼저 있었다는 뜻이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다윗의 뿌리로 부르는 것은, 
선재先在성을 의미한다. 선재성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이사야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렇게 안 맞는 이야기를 한다. (줄기에서 나왔다가, 뿌리에서 또 나온다니..)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면서, 벌써부터 계셨던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선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바로 그 예수님, 그 주님만이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그 주님만이 
그 책을 열 수 있고,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다.. 라고 장로가 말했다. 

▶3. 사자이지만, 양의 모습 

이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창49장에, 야곱의 유언을 보면 좀 더 명확하게 그 뜻을 알 수 있다. 

창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야곱의 유언인데,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다.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율법의 능력을 나타냈던 동물이었다.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사자는, 세상을 통치하며, 악을 파괴하며, 
다음 세상에서 죽은 자를 안전으로 인도하는 그들의 신을 가리키는 동물이었다. 

유대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이란 표현은 
원수를 정복하고 승리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힘, 강함을 나타낸다. 

그것이 요한이 장로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그런데 이제 요한이 그분을 보게 된다. 
보니까, 자기가 장로로부터 들은 것과, 자기가 본 것은 완전히 달랐다. 

계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도살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자의 삶, 

사도요한이 장로로부터 귀로 들은 것은, 분명 사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직접 보니까,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이었다. 
거기서 죽임을 당하다로 번역된 스파조는 도살당하다 라는 아주 잔인한 단어이다. 
승리를 한 사자가, 도살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우리는 승리 하면, 나의 힘을 세워서, 상대방을 묵사발 만드는 것을 연상한다. 
그것을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내가 당하고 내가 죽어서 이루는 승리이다.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사역이 힘든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가르치신 것을 어떻하겠나?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인 것을! 

이것이 천국의 삶의 원리이다. 
사53: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요1: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크리스천들은 이 땅에서 힘을 키워서, 그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자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따라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 삶은 손해보고, 당하고 하면서도, 그 중심을 잃지 않고, 주님이 주신 평안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도살당한 양으로 취급할 것이지만, 
그것이 바로 세상을 굴복시키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미 창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예언한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유다에 관한 야곱의 유언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 사자가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빤다(세탁한다)고 했다. 창49:11 

그 엄청난 힘을 가진 사자가, 나귀새끼를 포도나무에 매고, 그 복장(옷)을 포도주에 빤다. 

▶나귀에 대한 내용은 스가랴서 9장에 나온다. 

슥9: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메시야는 겸손해서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나귀를 타고 오시는 모습으로 오신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으로 등극할 때는 항상 나귀를 타고 등장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은 섬기는 왕이다’ 라는 예표였다. 

그래서 솔로몬도 나귀를 타고 입성했다. 
그러나 그 모든 왕들 중에 진짜 그 나귀 탄 겸손한 왕의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직 예수님만 그렇게 살다가 가겼다. 

▶그리고 그 사자가 그의 옷을 포도주에 빤다는 구절이 이어진다. 
그 구절은 메시야이신 사자 예수 그리스도가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았는데, 
그 피가 전부 그 메시야의 옷에 튀어버렸다. 
그 말은 진노의 그 심판을 자기가 다 뒤집어 써버렸다는 뜻이다. 

그 사자가, 그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아버렸다. 
그랬는데, 그 피가 전부 자기 옷에 다 튀었다. 그래서 붉은 옷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그 진노, 그 저주가 다 그 분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를 죽여서, 남을 살리는 십자가의 원리, 
십자가의 도로 살아가는 삶, 사자이지만, 어린양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한 삶이 바로 승리의 삶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 어린양이 일곱 뿔(계5:6)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뿔은 항상 힘과 승리를 상징한다. 

신33: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 

시18: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이렇게 뿔은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데, 
그런데 뿔이 일곱이다. 7은 완전수이다. 
그래서 그 어린양의 힘과 능력이 전지전능함을 상징한다.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갖고 계시는데, 도살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부디 그 힘을 키우시기 바란다. 
능히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는 그 십자가의 도로 세상을 살 수 있는 그 힘을 키우셔야 한다. 
그게 일곱 뿔의 진짜 힘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긴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을 도살당한 어린양 취급하며 조롱한다. 
그러나 그들의 조롱하는 입이 지옥의 숯덩이로 이글이글 탈 날이 곧 온다. 

크리스천들은 고지를 점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사업 잘 하고, 명예 얻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만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그런 사람들 아니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 

히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고지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고지를 정령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것을 성취해내자고 주장하는 것은, 
팥죽 한 그릇 같은 유혹이다. 
그 팥죽 한 그릇으로 여러분의 평생을 허비하면 안 된다. 그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들은 망령된 자다. 라고 성경에서 말한다. 

히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3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 되면 좋지만, 도리어 사업이 안 될 수도 있다. 
산업을 빼앗길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라는 원리대로 하면 완전히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는 완전히 엉터리같은 기독교가 전해지고 있다. 
예수를 바로 믿고, 그 원리대로 실제로 살아내면, 우리는 망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환란을 참아야 되는 상황에 들어간다. 그게 기독교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사업도 잘 되고, 건강해야 되고, 병도 안 걸리고, 
그런 기독교는.. 사람이 만든 기독교이다. 

구약에 그런 모습이 일면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신약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이지, 
신약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주의, 번영신학’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수가 그런 넓은 길로 가는데, 
그래서 ‘남은 자 the remnant’들은 늘 소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참 성도들은, 정말 남은 자들처럼 
항상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고통을 참으면서 지냈다. 
그들은 다수를 형성하지 못했다. 

거기가 화려하다고 해서 그게 진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달려간다고 해서, 그게 꼭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여러분은 그 길 따라가면, 결국 망령된 자가 되고, 망하게 될 것이다. 

히11:35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런 사람들이 승리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이다. 
여러분은 이 삶을 정말 원하시는가? 그들이 진정한 크리스천들이다. 

기독교는 고지를 점령해서 보란듯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의 도로,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전해진다. 
기독교는 그 도를 전하는 자의 피를 타고 여태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기독교가 힘을 갖고 있었을 때는, 늘 기독교는 타락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도란, 십자가의 도이다. 
그것이 전해지니까, 하나님 나라가 전파된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런 미련한 놈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힘이고 승리이다. 
여러분, 팥죽 한 그릇 같은 것에 목숨 걸지 마시라. 
받아먹을 때는 맛있지만, 그것은 이내 사라져 버린다. 

낙심되고 좌절될 때마다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책을 열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어놓으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라. 
그 분이 여셨다. 
우리는 여기서 열심히 눈물뿌리면서 추구하고 염원하며 기도하면서 나아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