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 (약 1년) 과정을 마친 선생들은, 2기생 탈북민들을 모아서 사역을 시작했다. 기풍 선생은 8명의 북한 형제들로 중경(충칭 직할시)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익두 선생은 5명의 북한 형제들로 허난성 정주, 사천성 성도에서 사역을 했다. 바울 선생은 9명의 북한 형제들로 산동성 제남, 이어서 중경에서 사역을 했다. 권능 선생도 9명의 북한 형제들로 사천성 성도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쓰촨성 청두
선주 선생은 제남에서 사역했는데, 권능 선생의 사역을 이어받아 했다.
이렇게 5명의 성경 선생들이, 총 31명의 북한 형제들로 2기 사역을 시작했다. (*1999년 6월 경~)
♣한국 가면 아편 팔아주세요.
(사천성 성도에서)
오늘 아침에는 쌓인 피로를 풀고 싶어서, 오랜만에 실컷 늦잠을 잤다. 며칠 동안 시무륵하게 풀이 죽어 있던 우리집 막내둥이가 늦게까지 집에 쉬고 있는 나를 기대섞인 목소리로 불렀다.
'아빠!' '와?'
나는 심신이 지쳐서인지 대답이 퉁명스레 나갔다. 그래도 명연이는 계속 쫑알거렸다. '저기 아파트 끝에 가면 되게 예쁜 공원이 하나 있어요. 나랑 거기 같이 가서 놀아요!'
낯선 외국 땅에 와서, 친구도 없고 말도 안 통하니 네 자녀 중에 제일 견디기 힘들어하는 아이가 이 녀석이었다.
늘 엄마 치마자락을 붙잡고 따라다니며, 집밖에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삐리리링 삐리링' 호출기가 울어댔다. 순간 아이의 기색이 싹 바뀌었다.
호출기가 울리면, 아빠는 또 집을 나가야 된다는 걸, 아이는 이젠 잘 안다. 막내의 얼굴에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말없이 엄마한테로 가버렸다. 그런 아이를 보니 내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사역장에 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호출기 숫자를 핸드폰에 꾹꾹 입력했다.
'쌤, 큰일 났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중경의 바울선생이었다.
'누가 또 사역장에서 튀어나갔나? 아니면 또 학생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나? 공안에 사람이 잡혔나?'
짧은 순간이지만 복잡한 생각들이, 무거운 내 마음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목소리로 봐서는 보통 다급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쌤, 학생 두 명이 말도 없이 사역장을 나가 버렸습니다. 조선족 형제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깁니다. 학생들이 복잡하게 행동하고 있으니, 빨리 좀 와서 안정 시켜주시고 우리 사역장도 성도로 이사할 수 있게 조치해 주십시오!'
다음날 바울선생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선생님 이번에는 기풍선생이 가겠다고 계속 우깁니다. 사역장에 분위기가 기풍선생 때문에 영 안 좋습니다. 선생님이 와서 어떻게 해 보세요!' (기풍선생은 베트남 월경 사건 징계로 면직, 학생으로 거기에 있었음)
나는 이제 더 이상은 선생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행여나 기풍선생의 친구인 권능선생은, 기풍선생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여 권능선생과 함께 중경에 있는 바울선생 사역장으로 갔다. *성도에서 중경까지는 300 Km
하지만 기풍선생은 친구인 권능선생과 나의 오랜 시간 설득에도 불구하고, 연길로 떠나버렸다.
나는 권능선생과 함께, 떠나는 그를 역까지 배웅하고 나니 정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권능선생 앞이라 애써 참으며, 다시 성도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역장에서 터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다가 기풍선생까지 떠나가버리는 아픔이 더해져, 나는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다.
그리고 중국 생활을 너무도 힘들어 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이젠 내 힘에 부쳤다. 선교사들에게 왜 안식년이 필요한지.. 그제야 절실하게 와닿으면서 특히 나같은 북한 선교사에게는, 7년이 아니라 1년에 한 번씩 안식년이 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외국에서 온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선교사가 나에게,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돈이 없어서, 네 아이 모두 학교 입학도 못 시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당신은 사명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지만 아이들은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며 내게 화를 냈다.
나도 어느 부모 못지않게 자식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경제적 여유를 허락하시면 우리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선교사는, 아이들을 둘 다 미국에서 공부하게 하고 자기 혼자 중국에 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당신 자식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내 아이들을 더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 드렸다. '하나님 제가 감당하는 사역이 쫓기면서 숨어 다니는 카타콤 사역이며 또 돈이 많아도,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사역이기에 그때 그때 꼭 필요한 물질만 주심을.. 저분은 몰라도, 저는 잘 압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내 아이들이 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해도 감사하겠습니다. 지구상의 10억 이상이 문맹이라는데, 아이들 넷 중에서 셋은 글을 읽을 줄 알고 벌써 성경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더 이상 공부 못해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얼마 후에, 아이들을 중국 학교에 보내어 공부시킬 수 있었고 문 이모(조선족 도우미)의 딸에게 배워서, 셋째 아이까지 중국어를 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으면, 아빠가 하는 선교에 대해 자기들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법도 한데 아이들의 비전이 모두 선교사인 것을 보면 그 당시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것이, 모두 주님의 뜻이었다.고 생각되어 감사하다.
▲며칠 후 연길로 떠났던 기풍선생이 다시 성도로 돌아왔다. 역으로 마중 나가 반갑게 그를 맞아주며 그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었다.
떠나던 날 그는, 중경에서부터 정주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가는 내내 맥주를 마셨다. 그때 갑자기 그의 눈앞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이 펼쳐졌다.
「그가 타고 있는 기차가 갑자기 뒤집혀졌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죽어가는데, 그 사람들 틈에는 자기 모습도 있었다. 맥주병을 입에 문 채,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그의 눈은 터져 나올 듯이 커졌다.
그는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떨렸다. 그때 깜짝 놀라운 것은
그를 바라보는 앞자리에 중국인이 갑자기 요나 선지자로 바뀌었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그 중국인을 들고 일어나더니 자기 눈앞에서, 태풍이 부는 기차 밖으로 그대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겁이 와락 났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도망을 가니,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길을 더 가다가는, 방금 본 환상처럼 하나님이 이 기차를 뒤집어 놓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나는 기풍선생을 놓지 않고,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께 감사드렸다. 2기 학생들이 선생으로 준비되어 파송될 때, 그를 함께 파송하기로 하고 그를 다시 바울선생 사역장으로 보냈다.
▲연일 터지는 사건들속에서도, 다시 제 발로 돌아온 기풍선생으로 인해 위로를 얻고 있던 나에게, 또다시 기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전부터 이제는 제남에서 석달가량 사역을 했으니 *산동성 지난 다른 도시로 옮기라고 몇번이나 말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주선생은 이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이웃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공안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학생들과 열심히 통독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공안 세 명이 찾아와서 사역장의 문을 쾅쾅 두드려댔다.
공안들이 들어와서 신분증을 보자고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 모두들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우리 기도합시다. 이럴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지요! 그러니 기도합시다.' 선주 선생은 학생들에게 기도를 시키고 조선족 홍신복 형제와 함께 나가서 공안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당신들, 여기에 모여서 뭣들 하고 있소?' 당시 중국 정부는 파룬궁 이라는 사이비 종교집단이 천안문 광장에서 반정부 시위를 한 뒤로 이 집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공안들은 선주 선생의 사역장 학생들도 파룬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공부를 하고 있소.' 그러자 공안 팀장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어~ 하나님 공부 좋다. 좋다. 하나님 공부 최고다. 하나님 공부 열심히 해라! 하나님 공부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은 없나?'
의외의 반응에 놀랐지만 선주선생과 홍신복 형제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동북삼성 지역에서 온 사람들인데 거주증이 없어서 불편하오.'
'파출소에 와서 나를 찾아라. 내가 해줄 테니 걱정 마라. 내일 찾아오라!' 그리고 더 이상의 조사도 없이 이내 돌아갔다.
다음 날 선주 선생과 홍신복 형제는, 어제 공안이 하고 간 말이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파출소로 찾아갔다.
공안 팀장은, 약속대로 선주선생 사역장 형제들 전원에게 임시 거주증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면서 아주 친절하게 대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장 형제들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또 하나의 표적이었다.
학생들은 거주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기뻐하고 감사했다. 나도 말할 수 없이 기뻤고, 또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했다.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아멘 할렐루야!'
그러나 북한 선교사들은, 한 단계 더 성숙된 하나님의 일꾼들로 양육되어야 하기에 나는 조용히 형제들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쫓기는 몸이고 앞으로 사역을 통해 영입하게 될 탈북자들 역시 쫓기는 몸입니다.
항상 위험이 따르는 처지에서, 거짓말로 그 상황을 대하고 (탈북민 모두가 중국인인 것처럼 거짓말했음) 이렇게 거주증을 만들어 이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줄어들거예요.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북한선교, 우리가 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을 테고 또 지도자로 세워진 후 신분증이 없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하나님만 의지하고 함께 북한선교 합시다!' 라고 담대히 말할 수도 없을 거예요.
강요는 않겠지만, 기도 해보고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은 자진해서 신분증을 반납해 주길 바래요."
내 말이 끝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몇 명이 반납하고 다음 날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거주증을 가져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기도한 후 거주증을 가위로 잘라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 다같이 걸음걸음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선주선생 사역장에서 며칠을 지내며 형제들과 함께 통독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토요일에는 산동 대학에 가서 축구도 하였다.
새벽예배 시간에는 사역비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형제들에게 부탁했다. 벌써 한국에 다녀온 지 두 달이 지났기에 사역비가 다 떨어졌고 이제 다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역비를 모금하는 일은 그리 수월치가 않았다. 교회에서 우리의 사역을 잘 몰랐고, 또 간혹 관심을 가지더라도 헌금한 대가로 우리 사역을 완전히 공개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2기 사역으로 접어들고 부터는, 성복중앙교회나, 잠실신천교회, 가브리엘선교회 등 교회나 개인에게서 통장으로 꽤 많은 돈이 후원되어 들어왔지만 그만큼 학생들도 많아져서, 풍족할 때 보다는 부족할 때가 훨씬 많았다.
이런 사정을 형제들에게 얘기하면서, 기도 많이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선주선생 방으로 들어가서,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방문앞에서 서성거리던 모세형제가 살그머니 들어왔다. '저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누가 들을까봐 조용히 말을 꺼냈다.
'선생님, 선생님이 한국에 가시면 아편 좀 팔 수 있습니까? 선생님, 제가 북한에서부터 아편에 손을 댔기 때문에 아편 몇 킬로는 금방 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 말할 사이도 없이 그는 다음 말을 이었다.
'그냥 저한테는 원금만 주시고, 나머지 돈으로는 선생님 선교사역에 쓰십시오. 선생님은 맨날 돈 없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모세 형제, 지금 제정신이에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언성을 높이자, 그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올 때처럼 슬그머니 방을 나가 버렸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 (익두선생) *허난성 정저우
연변에서 선양을 거쳐 정주로 간 후 익두선생은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다른 사역장에 비해 상당히 온순해서 비교적 그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
제남에서 대학생 사역을 하던 박주환 선교사도 주일마다 그 사역장을 찾아와 예배를 인도해주시며 많이 도와주셨다. *450Km
얼마 뒤 박주환 선교사가 한국으로 떠나자 익두선생은 갑자기 혼자 남은 듯한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더욱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고 사역을 진행하리라' 다짐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그리고 아직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믿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그는 설교준비에 전심전력을 쏟았다. 새벽 2~3 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익두선생은 처음 며칠 학생들에게 유예기간을 주어 서서히 사역장 규칙에 적응토록 한 다음 곧이어 사역장 3일 금식을 선포했다.
금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담배와 술을 끊게 하고 사역장 일과에 순종시키려는 의도였다.
모든 형제들이 순순히 잘 따라왔지만, 유독 성근 형제만은 반항적이었다. 옥상에 담배 피우러 간 그에게 '이렇게 하려면 연변으로 돌아가라'고 심하게 야단친 것이 화근이었다.
돌공장에서 익두선생과 형 아우 하며 지냈던 성근형제는 익두 선생이 지난해 우리 사역장에 들어오면서, 익두선생과 돌공장에서 헤어졌다.
그 후 그는 종이 뽑는 기술을 배워, 매달 월급도 받고 저축을 하여 북한 집으로도
보내며 다른 탈북자들보다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익두선생이 학생 모집을 위해 연길에 온 때부터, 성근형제는 환경이 꼬이기 시작했다. *김성근 목사는 지금 노원구에서 교회개척
그 지역에 대대적인 탈북자 검거열풍이 갑자기 불어닥쳐 성근형제는 일하던 종이공장에서 도망친 것이다.
그래도 중국어도 잘하고, 중국인 신분증도 돈 주고 만들어 갖고있던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쉽게 구해지던 일자리가 이번에는 여기저기 찾아다녀도 좀처럼 구해지지 않았다.
'야, 성근아! 내가 공부해보니까 진짜 이게 인생의 둘도 없는 공부다. 다른 거 다 걷어치우고, 내가 올라갈 때까지 니 꼼짝말고 거기 있어라'
그래서 성근형제는 익두 형만 믿고 따라나서서,
머나먼 사역장에 들어온 것이었다. (연길에서 정주로)
그런데 사역장에 와보니, 그렇게 의지했던 익두 형이 인간적인 모든 관계를 무시하고 사역장 리더인 자기 말에 순종하기만을
요구해서 그는 매우 실망스러워 했다.
며칠 동안 사역장의 분위기를 살피던 성근형제는,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내(최광 선교사)가 오면 만나고 떠나라는 만류에,
언제 올지 기약이 없는 나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그는 다시 사역장에 눌러앉아 당분간 통독을 하였다.
익두선생은 성근형제와 다른 형제들을 다독이며 열심히 통독사역을 이끌어 갔다.
아직 습관이 안 된 하루 8 시간의 성경통독과 하루 두 번, 두 시간 기도 등 사역장에 규칙 때문에 형제들은 매우 힘들어했다.
추운 동북 삼성 지방에서 살다가, 중국 남쪽 지방으로 오니 무더운 기후도 만만치 않게 사람을 시달리게 했다.
특히나 매일 하는 찬송과 통성기도를 생각해서 아파트 제일 꼭대기 층에 사역장을 잡다보니 한낮의 태양 열기가 집안으로 그대로 전해져,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실신해 쓰러질 지경으로 더웠다.
며칠 후 성근형제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역장에 내가 도착하자 익두 선생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학생 때는 몰랐는데, 사역장에 리더가 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며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재미있는 것은 성근형제가 제2의 익두형제가 되어 과거에 익두선생이 학생일 때 속썩이던 모양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선생님, 나 저 성근이놈 때문에 미칠 것 같습니다. 글쎄 내가 학생 때, 선교사님께 했던 짓을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그대로 흉내내고 있지 않습니까?
확 혼내주고 싶어도 과거의 내 생각이 나서 그러지도 못하겠고.. 정말 속상함다. 그때 선생님도 지금 내처럼 속상했습니까? 아이고 아이고 속 터져라 속터져!'
익두선생의 하소연을 듣고 나니, 문득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밤이 깊은 때였다.
익두선생이 통독실에서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났다. 통독실로 가보니 형제들은 모두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고 익두선생은 귀에 헤드폰을 끼고, 녹음기에서 나오는 찬양을 따라부르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익두선생, 다른 사람들이 조용하게 공부하고 있는데 혼자서 이러면 어쩝니까? 좀 조용히 하세요!'
찬양에 심취해 있던 익두선생은 화들짝 놀라더니, 순간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내게 덤벼들듯 와락 일어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왜 나만 가지고 자꾸 이러십니까? 왜, 왜, 왜? 아이 C'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그의 반격에, 길길이 날뛰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사역을 시작하고 처음 5개월 동안, 북한 형제들이 무서워 한 마디도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수십 번도 더 짐을 쌌다 풀었다 했었지만 이때 일이 제일 힘들었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울면서 주님께 기도드렸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도하고 나서, 주님께 말씀 드렸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왜 하필 접니까, 왜 하필 이 자리입니까? 이번에는 정말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꺼내서 짐을 다 싸놓고, 하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하나님, 오늘이 사역장에서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자리도 많을 텐데, 중고등부를 하든, 대학부를 하든 저에게 맡겨진 일,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 짐 가방 내려놓아라! 네 자리가 여기인데 어딜 가느냐? 한국에는 네가 갈 곳이 없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쌌던 짐을 도로 풀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익두 선생이 내 방에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다. '익두 선생이 알다시피 지금까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주었고 형제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있다. 내가 익두 선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만 해라. 내 생명까지도 주겠다!' 라고 중심으로 말했다.
그러자 익두 선생도 울면서 마음을 열고,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그의 큰아버지는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 핵물리학 박사였다. 1960 년대 초에
김일성이 '사회주의 조국으로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 조총련계 동포들을 북한으로 끌어갈 때 그의 큰아버지는 그 선전에 속아서, 익두선생 할머니를 비롯한 일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연구소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간첩분자로 모함을 받아서, 정치범들이 가는 탄광촌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평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갓 결혼해 살던 익두 선생 아버지도 같이 추방되었다.
익두 선생은 부모님이 모두 재일동포이며 아버지는 평양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 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시멘트 공장의 하급노동자로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사무쳐서, 어릴 때부터 자주 악몽에 시달리며 소리를 지르다가 잠에서 깨곤 하였다고 했다.
그의 유년 시절에는 엄하신 아버지 밑에서 살가운 사랑도 별로 못 받았고 학교 선생님이나 선배 중에도,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익두선생은 또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처음 이 사역장에 올 때, 며칠 동안 살며 동정을 살피다가 여차하면 한국놈은 죽여 버리고, 돈을 가지고 달아나려고 계획했다고 한다.
나와의 장시간의 대화 이후로, 그는 많이 달라져갔다. 그는 1기형제들 중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생이었다.
순간순간 폭발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하루에도 여러 번 신경질부리는 그를 위해 어느 선생보다도 더 많이 기도하고 축복했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저 사람은 좀 내보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를 쓸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라!'는 깨달음을 주셔서 나는 그때부터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그를 이렇듯 귀하게 선생으로 세워주셨고, 또 계속 다듬어가고 계셨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그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세상에서도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는 동일하지만 특히 선교사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익두 선생뿐 아니라 이후에 세워진 다른 1기 선생들도 사역장에 리더가 되면, 반드시 그가 학생 시절에 자신의 선생(나)에게 속을 썩였던 그대로 학생들에게 당하곤 했다.
그렇게 익두선생을 속 썩이던 성근형제도, 훗날 선생으로 세워져 사역할 때 자기처럼 엄청 속 썩이는 학생들 때문에, 똑같은 곤혹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성근형제에게 왜 사역장을 떠나려고 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성근형제는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했다.
'선교사님, 저는 빨리 돈을 벌어서 북한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야 함다. 안 그러면 두 분이 다 굶어서 돌아감다.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서 공부할 여유가 저한테는 없슴다.'
그는 외아들로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두고 혼자 중국으로 넘어와서 연변에서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옆에 있는 탈북자에게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절대 돈을 빌려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함께 사는 탈북자들 속에서 왕따를 당하며, 이런저런 수모도 많이 겪었다.
이렇게 3년 동안 모은 2천 위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북한에서 전문대까지 졸업한 그는 익두선생의 속을 썩이긴 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도 정말 성경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딱한 사정을 도울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잖아요..' 내가 말을 하는데, 성근형제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내 말을 끊었다.
'나는 하나님 본 적 없습니다. 어떻게 본 적도 없는 걸 믿습니까?'
'성근형제가 믿든 안 믿든, 그분은 이 세상의 주인이에요. 그러니 성근형제가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돌봐줄 수도 있지만 만약 여기서 하나님을 믿고 성경공부를 한다면,
하나님이 부모님을 꼭 책임져 주실 거예요.
내가 보기에 성근형제가 여기서 성경공부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고집하고 돌아가 부모님을 위해 돈을 번다면 결국 공부도 못하고, 부모님도 온전히 섬기지 못할 거예요.'
나의 말을 듣고 그는 고민을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 말대로 되지 않으면, 내가 책임져 줄게요!'
그제야 그는 사역장에 남아서 공부해 보겠다고 하였다. 한 고비를 넘기자 점차 사역장 생활이 안정되면서 익두선생 사역장 형제들은 하루하루 달라져갔다.
꾸준한 통독과, 익두선생이 심혈을 기울여서 전하는 설교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조금씩 신앙이 싹 터 갔다.
익두 선생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만, 변화되어가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보람도 느끼면서 사역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