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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6

LNCK 2022. 11. 3. 16:41

[Ep 6.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내래죽어도 좋습네다 |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6          지난 회 보기


최광 선교사의 중국에서 북한 선교 간증기


◑제3장 땅 끝을 덮는 하늘의 열정

1기 (약 1년) 과정을 마친 선생들은, 2기생 탈북민들을 모아서 사역을 시작했다.
기풍 선생은 8명의 북한 형제들로 중경(충칭 직할시)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익두 선생은 5명의 북한 형제들로 허난성 정주, 사천성 성도에서 사역을 했다.
바울 선생은 9명의 북한 형제들로 산동성 제남, 이어서 중경에서 사역을 했다.
권능 선생도 9명의 북한 형제들로 사천성 성도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쓰촨성 청두

선주 선생은 제남에서 사역했는데, 권능 선생의 사역을 이어받아 했다.  

이렇게 5명의 성경 선생들이, 총 31명의 북한 형제들로 2기 사역을 시작했다. (*1999년 6월 경~)



♣한국 가면 아편 팔아주세요. 

(사천성 성도에서)

오늘 아침에는 쌓인 피로를 풀고 싶어서, 오랜만에 실컷 늦잠을 잤다. 
며칠 동안 시무륵하게 풀이 죽어 있던 우리집 막내둥이가 
늦게까지 집에 쉬고 있는 나를 기대섞인 목소리로 불렀다. 

'아빠!' 
'와?'            

나는 심신이 지쳐서인지 대답이 퉁명스레 나갔다. 
그래도 명연이는 계속 쫑알거렸다. 
'저기 아파트 끝에 가면 되게 예쁜 공원이 하나 있어요. 
나랑 거기 같이 가서 놀아요!'

낯선 외국 땅에 와서, 친구도 없고 말도 안 통하니 
네 자녀 중에 제일 견디기 힘들어하는 아이가 이 녀석이었다. 

늘 엄마 치마자락을 붙잡고 따라다니며, 집밖에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삐리리링 삐리링' 호출기가 울어댔다. 
순간 아이의 기색이 싹 바뀌었다. 

호출기가 울리면, 아빠는 또 집을 나가야 된다는 걸, 아이는 이젠 잘 안다. 
막내의 얼굴에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말없이 엄마한테로 가버렸다. 
그런 아이를 보니 내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사역장에 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호출기 숫자를 핸드폰에 꾹꾹 입력했다. 

'쌤, 큰일 났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중경의 바울선생이었다.      

'누가 또 사역장에서 튀어나갔나? 아니면 또 학생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나? 
공안에 사람이 잡혔나?' 

짧은 순간이지만 복잡한 생각들이, 무거운 내 마음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목소리로 봐서는 보통 다급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쌤, 학생 두 명이 말도 없이 사역장을 나가 버렸습니다. 
조선족 형제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깁니다. 
학생들이 복잡하게 행동하고 있으니, 빨리 좀 와서 안정 시켜주시고 
우리 사역장도 성도로 이사할 수 있게 조치해 주십시오!' 

다음날 바울선생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선생님 이번에는 기풍선생이 가겠다고 계속 우깁니다. 
사역장에 분위기가 기풍선생 때문에 영 안 좋습니다. 
선생님이 와서 어떻게 해 보세요!' (기풍선생은 베트남 월경 사건 징계로 면직, 학생으로 거기에 있었음)

나는 이제 더 이상은 선생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행여나 기풍선생의 친구인 권능선생은, 기풍선생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여 
권능선생과 함께 중경에 있는 바울선생 사역장으로 갔다. *성도에서 중경까지는 300 Km 

하지만 기풍선생은 
친구인 권능선생과 나의 오랜 시간 설득에도 불구하고, 연길로 떠나버렸다. 

나는 권능선생과 함께, 떠나는 그를 역까지 배웅하고 나니 
정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권능선생 앞이라 애써 참으며, 다시 성도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역장에서 터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다가 
기풍선생까지 떠나가버리는 아픔이 더해져, 나는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다. 

그리고 중국 생활을 너무도 힘들어 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이젠 내 힘에 부쳤다. 
선교사들에게 왜 안식년이 필요한지.. 그제야 절실하게 와닿으면서 
특히 나같은 북한 선교사에게는, 7년이 아니라 1년에 한 번씩 
안식년이 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는 외국에서 온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선교사가 나에게,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돈이 없어서, 네 아이 모두 학교 입학도 못 시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당신은 사명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지만 
아이들은 뭔가 대책을 세워야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며 내게 화를 냈다. 

나도 어느 부모 못지않게 자식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경제적 여유를 허락하시면 
우리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 선교사는, 아이들을 둘 다 미국에서 공부하게 하고 
자기 혼자 중국에 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당신 자식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내 아이들을 더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하나님께 말씀 드렸다. '하나님 제가 감당하는 사역이 
쫓기면서 숨어 다니는 카타콤 사역이며 
또 돈이 많아도,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는 사역이기에 
그때 그때 꼭 필요한 물질만 주심을.. 저분은 몰라도, 저는 잘 압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내 아이들이 학교 공부를 제대로 못해도 감사하겠습니다. 
지구상의 10억 이상이 문맹이라는데, 아이들 넷 중에서 셋은 글을 읽을 줄 알고 
벌써 성경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더 이상 공부 못해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얼마 후에, 아이들을 중국 학교에 보내어 공부시킬 수 있었고 
문 이모(조선족 도우미)의 딸에게 배워서, 셋째 아이까지 중국어를 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으면, 아빠가 하는 선교에 대해 
자기들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법도 한데 
아이들의 비전이 모두 선교사인 것을 보면 
그 당시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것이, 모두 주님의 뜻이었다.고 생각되어 감사하다. 

 

▲며칠 후 연길로 떠났던 기풍선생이 다시 성도로 돌아왔다. 
역으로 마중 나가 반갑게 그를 맞아주며 
그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었다. 

떠나던 날 그는, 중경에서부터 정주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가는 내내 맥주를 마셨다. 
그때 갑자기 그의 눈앞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이 펼쳐졌다. 

「그가 타고 있는 기차가 갑자기 뒤집혀졌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죽어가는데, 그 사람들 틈에는 자기 모습도 있었다. 
맥주병을 입에 문 채,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그의 눈은 터져 나올 듯이 커졌다. 

그는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떨렸다. 그때 깜짝 놀라운 것은

그를 바라보는 앞자리에 중국인이 갑자기 요나 선지자로 바뀌었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그 중국인을 들고 일어나더니 
자기 눈앞에서, 태풍이 부는 기차 밖으로 그대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겁이 와락 났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도망을 가니,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길을 더 가다가는, 방금 본 환상처럼 
하나님이 이 기차를 뒤집어 놓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나는 기풍선생을 놓지 않고,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께 감사드렸다. 
2기 학생들이 선생으로 준비되어 파송될 때, 그를 함께 파송하기로 하고 
그를 다시 바울선생 사역장으로 보냈다. 

▲연일 터지는 사건들속에서도, 다시 제 발로 돌아온 기풍선생으로 인해 
위로를 얻고 있던 나에게, 또다시 기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전부터 이제는 제남에서 석달가량 사역을 했으니        *산동성 지난
다른 도시로 옮기라고 몇번이나 말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주선생은 이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이웃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공안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학생들과 열심히 통독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공안 세 명이 찾아와서 사역장의 문을 쾅쾅 두드려댔다. 

공안들이 들어와서 신분증을 보자고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 
모두들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우리 기도합시다. 이럴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지요! 그러니 기도합시다.' 
선주 선생은 학생들에게 기도를 시키고 
조선족 홍신복 형제와 함께 나가서 공안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당신들, 여기에 모여서 뭣들 하고 있소?' 
당시 중국 정부는 파룬궁 이라는 사이비 종교집단이 
천안문 광장에서 반정부 시위를 한 뒤로 
이 집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공안들은 선주 선생의 사역장 학생들도 파룬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공부를 하고 있소.'
그러자 공안 팀장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어~ 하나님 공부 좋다. 좋다. 하나님 공부 최고다. 하나님 공부 열심히 해라!  
하나님 공부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은 없나?' 

의외의 반응에 놀랐지만 선주선생과 홍신복 형제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동북삼성 지역에서 온 사람들인데 거주증이 없어서 불편하오.' 

'파출소에 와서 나를 찾아라. 내가 해줄 테니 걱정 마라. 내일 찾아오라!' 
그리고 더 이상의 조사도 없이 이내 돌아갔다. 

다음 날 선주 선생과 홍신복 형제는, 어제 공안이 하고 간 말이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파출소로 찾아갔다. 

공안 팀장은, 약속대로 선주선생 사역장 형제들 전원에게 
임시 거주증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면서 아주 친절하게 대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장 형제들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또 하나의 표적이었다. 

학생들은 거주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기뻐하고 감사했다. 
나도 말할 수 없이 기뻤고, 또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했다.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아멘 할렐루야!' 

그러나 북한 선교사들은, 한 단계 더 성숙된 하나님의 일꾼들로 양육되어야 하기에 
나는 조용히 형제들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쫓기는 몸이고 
앞으로 사역을 통해 영입하게 될 탈북자들 역시 쫓기는 몸입니다. 

항상 위험이 따르는 처지에서, 거짓말로 그 상황을 대하고 
(탈북민 모두가 중국인인 것처럼 거짓말했음)
이렇게 거주증을 만들어 이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줄어들거예요.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북한선교, 우리가 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을 테고 
또 지도자로 세워진 후 신분증이 없는 학생들을 모집하여 
'하나님만 의지하고 함께 북한선교 합시다!' 라고 담대히 말할 수도 없을 거예요. 

강요는 않겠지만, 기도 해보고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은 
자진해서 신분증을 반납해 주길 바래요."

내 말이 끝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몇 명이 반납하고 
다음 날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거주증을 가져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기도한 후 
거주증을 가위로 잘라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 다같이 걸음걸음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선주선생 사역장에서 며칠을 지내며 형제들과 함께 통독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토요일에는 산동 대학에 가서 축구도 하였다. 

새벽예배 시간에는 사역비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형제들에게 부탁했다. 
벌써 한국에 다녀온 지 두 달이 지났기에 사역비가 다 떨어졌고 
이제 다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역비를 모금하는 일은 그리 수월치가 않았다. 
교회에서 우리의 사역을 잘 몰랐고, 또 간혹 관심을 가지더라도 
헌금한 대가로 우리 사역을 완전히 공개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2기 사역으로 접어들고 부터는, 성복중앙교회나, 잠실신천교회, 가브리엘선교회 등 
교회나 개인에게서 통장으로 꽤 많은 돈이 후원되어 들어왔지만 
그만큼 학생들도 많아져서, 풍족할 때 보다는 부족할 때가 훨씬 많았다. 

이런 사정을 형제들에게 얘기하면서, 기도 많이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선주선생 방으로 들어가서,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방문앞에서 서성거리던 모세형제가 살그머니 들어왔다. 
'저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누가 들을까봐 조용히 말을 꺼냈다. 

'선생님, 선생님이 한국에 가시면 아편 좀 팔 수 있습니까? 
선생님, 제가 북한에서부터 아편에 손을 댔기 때문에 
아편 몇 킬로는 금방 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 말할 사이도 없이 그는 다음 말을 이었다. 

'그냥 저한테는 원금만 주시고, 나머지 돈으로는 선생님 선교사역에 쓰십시오. 
선생님은 맨날 돈 없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모세 형제, 지금 제정신이에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언성을 높이자, 그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올 때처럼 슬그머니 방을 나가 버렸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 (익두선생)                     *허난성 정저우

연변에서 선양을 거쳐 정주로 간 후 
익두선생은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다른 사역장에 비해 상당히 온순해서 비교적 그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 

제남에서 대학생 사역을 하던 박주환 선교사도 
주일마다 그 사역장을 찾아와 예배를 인도해주시며 많이 도와주셨다.  *450Km

얼마 뒤 박주환 선교사가 한국으로 떠나자 
익두선생은 갑자기 혼자 남은 듯한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더욱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고 사역을 진행하리라' 다짐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그리고 아직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믿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그는 설교준비에 전심전력을 쏟았다. 
새벽 2~3 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익두선생은 처음 며칠 학생들에게 유예기간을 주어 
서서히 사역장 규칙에 적응토록 한 다음 
곧이어 사역장 3일 금식을 선포했다. 

금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담배와 술을 끊게 하고 
사역장 일과에 순종시키려는 의도였다. 

모든 형제들이 순순히 잘 따라왔지만, 유독 성근 형제만은 반항적이었다. 
옥상에 담배 피우러 간 그에게 '이렇게 하려면 연변으로 돌아가라'고 
심하게 야단친 것이 화근이었다. 

돌공장에서 익두선생과 형 아우 하며 지냈던 성근형제는 
익두 선생이 지난해 우리 사역장에 들어오면서, 익두선생과 돌공장에서 헤어졌다. 

그 후 그는 종이 뽑는 기술을 배워, 매달 월급도 받고 저축을 하여 북한 집으로도

보내며 다른 탈북자들보다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익두선생이 학생 모집을 위해 연길에 온 때부터, 
성근형제는 환경이 꼬이기 시작했다. *김성근 목사는 지금 노원구에서 교회개척

그 지역에 대대적인 탈북자 검거열풍이 갑자기 불어닥쳐 
성근형제는 일하던 종이공장에서 도망친 것이다. 

그래도 중국어도 잘하고, 중국인 신분증도 돈 주고 만들어 갖고있던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쉽게 구해지던 일자리가 
이번에는 여기저기 찾아다녀도 좀처럼 구해지지 않았다. 

'야, 성근아! 내가 공부해보니까 진짜 이게 인생의 둘도 없는 공부다. 
다른 거 다 걷어치우고, 내가 올라갈 때까지 니 꼼짝말고 거기 있어라' 

그래서 성근형제는 익두 형만 믿고 따라나서서,

머나먼 사역장에 들어온 것이었다. (연길에서 정주로)

그런데 사역장에 와보니, 그렇게 의지했던 익두 형이 
인간적인 모든 관계를 무시하고 사역장 리더인 자기 말에 순종하기만을 

요구해서 그는 매우 실망스러워 했다. 

며칠 동안 사역장의 분위기를 살피던 성근형제는, 떠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내(최광 선교사)가 오면 만나고 떠나라는 만류에,

언제 올지 기약이 없는 나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그는 다시 사역장에 눌러앉아 당분간 통독을 하였다. 

익두선생은 성근형제와 다른 형제들을 다독이며 열심히 통독사역을 이끌어 갔다.

아직 습관이 안 된 하루 8 시간의 성경통독과 
하루 두 번, 두 시간 기도 등 
사역장에 규칙 때문에 형제들은 매우 힘들어했다. 

추운 동북 삼성 지방에서 살다가, 중국 남쪽 지방으로 오니 
무더운 기후도 만만치 않게 사람을 시달리게 했다. 

특히나 매일 하는 찬송과 통성기도를 생각해서 
아파트 제일 꼭대기 층에 사역장을 잡다보니 
한낮의 태양 열기가 집안으로 그대로 전해져,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실신해 쓰러질 지경으로 더웠다. 

며칠 후 성근형제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역장에 내가 도착하자 
익두 선생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학생 때는 몰랐는데, 사역장에 리더가 되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며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재미있는 것은 성근형제가 제2의 익두형제가 되어 
과거에 익두선생이 학생일 때 속썩이던 모양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선생님, 나 저 성근이놈 때문에 미칠 것 같습니다. 
글쎄 내가 학생 때, 선교사님께 했던 짓을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그대로 흉내내고 있지 않습니까? 

 

확 혼내주고 싶어도 과거의 내 생각이 나서 그러지도 못하겠고.. 정말 속상함다. 
그때 선생님도 지금 내처럼 속상했습니까? 아이고 아이고 속 터져라 속터져!' 

익두선생의 하소연을 듣고 나니, 문득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밤이 깊은 때였다. 

익두선생이 통독실에서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났다. 
통독실로 가보니 형제들은 모두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고 
익두선생은 귀에 헤드폰을 끼고, 녹음기에서 나오는 찬양을 따라부르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익두선생, 다른 사람들이 조용하게 공부하고 있는데 혼자서 이러면 어쩝니까?
좀 조용히 하세요!' 

찬양에 심취해 있던 익두선생은 화들짝 놀라더니, 순간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내게 덤벼들듯 와락 일어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왜 나만 가지고 자꾸 이러십니까? 왜, 왜, 왜? 아이 C'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그의 반격에, 
길길이 날뛰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사역을 시작하고 처음 5개월 동안, 북한 형제들이 무서워 한 마디도 못했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수십 번도 더 짐을 쌌다 풀었다 했었지만 
이때 일이 제일 힘들었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울면서 주님께 기도드렸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도하고 나서, 주님께 말씀 드렸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왜 하필 접니까, 왜 하필 이 자리입니까? 
이번에는 정말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꺼내서 짐을 다 싸놓고, 하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하나님, 오늘이 사역장에서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자리도 많을 텐데, 중고등부를 하든, 대학부를 하든 
저에게 맡겨진 일,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 짐 가방 내려놓아라! 네 자리가 여기인데 어딜 가느냐? 
한국에는 네가 갈 곳이 없다!'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쌌던 짐을 도로 풀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익두 선생이 내 방에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다.
'익두 선생이 알다시피 지금까지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주었고 
형제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있다. 
내가 익두 선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만 해라. 
내 생명까지도 주겠다!' 라고 중심으로 말했다. 

그러자 익두 선생도 울면서 마음을 열고,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그의 큰아버지는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 핵물리학 박사였다. 1960 년대 초에

김일성이 '사회주의 조국으로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본 조총련계 동포들을 북한으로 끌어갈 때 
그의 큰아버지는 그 선전에 속아서, 익두선생 할머니를 비롯한 일가족을 이끌고 
북한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연구소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간첩분자로 모함을 받아서, 정치범들이 가는 탄광촌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평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갓 결혼해 살던 익두 선생 아버지도 
같이 추방되었다. 

익두 선생은 부모님이 모두 재일동포이며 
아버지는 평양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 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시멘트 공장의 하급노동자로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사무쳐서, 어릴 때부터 자주 악몽에 시달리며 
소리를 지르다가 잠에서 깨곤 하였다고 했다. 

그의 유년 시절에는 엄하신 아버지 밑에서 살가운 사랑도 별로 못 받았고 
학교 선생님이나 선배 중에도,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익두선생은 또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처음 이 사역장에 올 때, 며칠 동안 살며 동정을 살피다가 
여차하면 한국놈은 죽여 버리고, 돈을 가지고 달아나려고 계획했다고 한다. 

나와의 장시간의 대화 이후로, 그는 많이 달라져갔다. 
그는 1기형제들 중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생이었다. 

순간순간 폭발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하루에도 여러 번 신경질부리는 그를 위해 
어느 선생보다도 더 많이 기도하고 축복했었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서 '저 사람은 좀 내보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를 쓸 것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라!'는 깨달음을 주셔서 
나는 그때부터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그를 이렇듯 귀하게 선생으로 세워주셨고, 또 계속 다듬어가고 계셨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그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세상에서도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는 동일하지만 
특히 선교사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익두 선생뿐 아니라 이후에 세워진 다른 1기 선생들도 
사역장에 리더가 되면, 반드시 그가 학생 시절에
자신의 선생(나)에게 속을 썩였던 그대로 학생들에게 당하곤 했다. 

그렇게 익두선생을 속 썩이던 성근형제도, 훗날 선생으로 세워져 사역할 때 
자기처럼 엄청 속 썩이는 학생들 때문에, 똑같은 곤혹을 치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성근형제에게 왜 사역장을 떠나려고 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성근형제는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했다. 

'선교사님, 저는 빨리 돈을 벌어서 북한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야 함다. 
안 그러면 두 분이 다 굶어서 돌아감다.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서 공부할 여유가 저한테는 없슴다.' 

그는 외아들로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두고 혼자 중국으로 넘어와서 
연변에서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옆에 있는 탈북자에게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절대 돈을 빌려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함께 사는 탈북자들 속에서 왕따를 당하며, 이런저런 수모도 많이 겪었다. 

 

이렇게 3년 동안 모은 2천 위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북한에서 전문대까지 졸업한 그는 
익두선생의 속을 썩이긴 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도 정말 성경을 공부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딱한 사정을 도울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잖아요..' 내가 말을 하는데,
성근형제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내 말을 끊었다. 

'나는 하나님 본 적 없습니다. 어떻게 본 적도 없는 걸 믿습니까?' 

 

'성근형제가 믿든 안 믿든, 그분은 이 세상의 주인이에요. 
그러니 성근형제가 돈을 벌어서, 부모님을 돌봐줄 수도 있지만 
만약 여기서 하나님을 믿고 성경공부를 한다면, 

하나님이 부모님을 꼭 책임져 주실 거예요. 

내가 보기에 성근형제가 여기서 성경공부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고집하고 돌아가 부모님을 위해 돈을 번다면 
결국 공부도 못하고, 부모님도 온전히 섬기지 못할 거예요.' 

나의 말을 듣고 그는 고민을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 말대로 되지 않으면, 내가 책임져 줄게요!' 

그제야 그는 사역장에 남아서 공부해 보겠다고 하였다. 
한 고비를 넘기자 점차 사역장 생활이 안정되면서 
익두선생 사역장 형제들은 하루하루 달라져갔다. 

꾸준한 통독과, 익두선생이 심혈을 기울여서 전하는 설교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조금씩 신앙이 싹 터 갔다. 

익두 선생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만, 변화되어가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보람도 느끼면서 사역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정주에서 사역을 시작하고부터 어느덧 5개월이 지나니 
익두선생의 사역장에 대해 수군거리는 이웃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웃 사람들은, 식사 당번이 반찬거리를 사러 나갈 때면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곤 하였다. 

중국말도 전혀 할 줄 모르는 청년들이 여럿이 모여 살면서 
어디 일하러 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보기에 수상한 모양이었다. 

주위에 이런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사역장의 이사는 언제나 유별나게 빠르고 간단하다. 

너무도 자주 이사를 하다보니, 형제들은 모두 몇 시간 내로 
후다닥 이사 가는 방법부터 배우게 되었다. 

익두 선생이 '이사 갑시다!' 하고 말한 지 두 시간 후에 
이들은 이미 정주를 떠나 사천성 성도로 향하고 있었다. 

익두선생 사역장이 성도로 이사갈 때 
MSM (Missionary Support Mission) 선교회 선배이신 이순옥 목사님이 
나와 함께 중국에 들어오셨다. 

목사님은 당시 대학원 신학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교회를 개척 중이셨는데 
학교를 휴학하고, 교회는 다른 분에게 잠깐 맡겨놓고 들어오신 참이었다. 

온유하신 성품의 목사님은, 익두선생 사역장에서 3개월간 함께 생활하시며 
기도와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익두선생 사역장 사람들이 30여 시간의 기차여행 끝에 무사히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늬엇느엇 넘어가고 있는 저녁 무렵이었다. 

우선 저녁식사부터 하고, 서둘러 집을 얻으러 나섰지만 
중년 남자 한 사람(한국 목사님)과, 패기만만한 20대 남자 9 명인 이들에게 
선뜻 방을 내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집주인은, 소개소를 통해 전화 연락이 되어 이들을 만나러 왔다가 
이들의 행색을 보고 그냥 뒤돌아가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당장 그 날 저녁에 들어가 잘 데도 없는 것이 문제였다. 
중국은 여관에 방을 잡으려 해도, 신분증을 요구하기 때문에 
불법 체류자들인 북한 형제들은, 여관에 들어가 잘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할 수 없이 역전 부근에 비디오 방에서 하루를 지내기로 하고 
극장 같이 큰 비디오 방에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 비디오를 보며, 날이 새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밤도 깊어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느닷없이 비디오 방 출입문이 열리면서 
공안 몇 명과 사법 공안 몇 명이 들이닥쳐 신분증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제일 뒷좌석에 심드렁하니 앉아 졸고 있던 형제들의 눈이 불시에 켜졌다. 
익두선생은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거리고 간이 심장에 가 붙는 줄 알았다.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나는 잡혀도 다른 사람은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에도 기도가 먼저 나왔다. 

그러자 속에서는 심장을 비롯해 모든 내장 기관들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데도 
겉으로는 아주 태연해졌다. 

공안들은 맨 앞줄 몇 사람과, 중간쯤 앉아 있는 몇 사람을 골라서 검사하더니 
그대로 나가버렸다. 알고 보니 신분증 검사가 아니라, 비디오방 입장권 검사였다. 

범죄자와 공개수배된 사람들이 이런 데서 잘 자기 때문에 
공안들은 심심하면 들러서 이처럼 한바탕 소동을 피우는 것이었다. 

익두선생은 다음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을 구하리라 단단히 마음먹고 
조선족 안선생과 함께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이를 악물고 집을 구하러 다녔지만, 오전 내내 허탕이었다. 
익두선생이 빈손으로 어깨가 쳐져서 돌아오자 
점심을 먹던 중 이순우 목사님이 불쑥 말을 꺼내셨다. '오후에는 저도 같이 가요!'

'목사님, 당신께서 오셔봤자 중국말 한마디도 못 하시니 
괜히 우리들 다니는데 짐이나 되시는데...'
 
역시나 젊은 남자 두 사람에 중년 남자 한 사람, 
참 누가 봐도 이상한 일행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목사님이 익두선생과 조선족형제에게 큰 소리로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통에, 주변에 있던 중국인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익두선생은 안절부절하다 못해 속이 새까맣게 타는 것 같았다. 
몇 집을 돌아봐도 별 소득이 없자, 
목사님이 이번에는 큰길사거리 앞에 딱 멈춰서시면서 '우리 기도합시다!' 

목사님은 익두선생과 조선족 형제가 놀라든지 말든지 
다짜고짜 이들의 손을 잡고는 눈을 감고 큰 소리로 기도하시기 시작했다.  *쓰촨성 청두

'주여, 우리가 지금 집을 구하고 있는 중인데...' 목사님이 기도의 운을 떼자, 
주변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이 세 사람에게 몰려와 꽂혔다. 

그날따라 기도가 어찌나 긴지, 익두 선생은 목사님이 아멘 으로 기도를 마무리할 
때까지 간신히 기다렸다. 신기하게도 어렵지 않게 적절한 집을 구하게 되었다. 

 

익두선생은 평소 담대한 것과 우둔한 것은 거의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담대함과 
믿음의 사람들의 담대함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음에 사람들의 담대함은, 실로 믿음에 기초한, 
그 어떤 환경이나 상황, 사람들이 꺾을 수 없는 믿음의 담대함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뱀술을 먹은 학생들              (중경 바울선생)

모든 사역장에 안정이 찾아왔다. 
바울선생 사역장도 이전보다 많이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사역이 진행되었다. 

바울선생은 흐뭇했다. 드디어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오늘부터 금식하겠다고 스스로 작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성경의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진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금식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형제들이 10일 금식을 했고, 어떤 학생은 2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학생들의 금식이 끝나자, 바울선생은 이들의 보식 문제로 바빠졌다. 

자식처럼 귀엽고 사랑스럽기만한 학생들이 
자칫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몹시 염려스러웠다. 

그는 평소에도 학생들을 잘 섬긴다고.. 내내 부엌일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매일 콩을 갈아 직접 두부를 만들고, 신선한 야채를 18가지 이상 갖추어
각종 반찬을 다 해 먹였다. 

'어떻게 뭘 먹이면 몸을 속히 회복시킬 수 있을까?' 한참 생각하던 그에게 
과거에, 몸이 허약한 사람이 뱀술과 자라를 먹던 것이 언뜻 생각났다. 

'옳지 바로 이거다! 뱀술과 자라탕을 먹이자, 그럼 얼른 원기가 회복되겠지!' 
그는 형제들에게 몸을 보양하는 차원에서 뱀술을 먹자고 제안했다. 

사역장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자진해서 술을 사주겠다고 하니, 
마시고 싶어도 사역장 규율 때문에 간신히 참고 있던 학생들로서는 
얼씨구나 하며 좋아할 일이었다. 

그렇게 뱀술을 마신 지 며칠 후에, 내가 사역장에 들르게 되었다. 
'선생님, 지금 바울선생이, 학생들에게 뱀술을 마시게 하고 있습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옳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것 보세요. 이렇게 큰 병으로 하나씩 말입니다!' 

빌립형제가 자기가 받은 뱀술 병을 나에게 흔들어보였다.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학생이 선동한 것도 아니고, 선생이 솔선수범하여 술을 마시게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었다. 

'바울선생, 몸보신하는데 왜 쇠고기 돼지고기를 놔두고, 하필이면 뱀술이에요?' 

 

그는 머리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바울선생은, 다른 학생들 몰래, 혼자 나가서 술 담배 하면서 
사역해오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통독 시간에 그는 통독을 하지 않고,
부엌에서 음식만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울선생이 먼저 확실하게 술 담배를 끊고, 학생들과 같이 앉아 통독을 해야 
제대로 성경공부가 되고, 
음식 잘 해 먹이는 것보다, 말씀을 잘 먹이는 것이 
학생들을 제대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나는 누누이 얘기했지만 
그는 내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리더인 그의 영적 상태가, 사역장에 그대로 반영되어 
형제들 중 여럿이 자주 악몽을 꾸고, 수시로 이상한 환상을 보았고 
나는 그 사역장에 들어가기만 해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유독 이 사역장데만 공안이 덮쳐서 
벌써 세 번째 집을 옮기느라고 
4개 사역장의 한 달 생활비에 해당하는 5백 만원 가량을 써버렸다. 

중국에서는 집을 빌릴 때, 몇 달치 집세를 선불로 내야 하기 때문에 
사역장을 한번 꾸리려면, 우리 돈으로 100~150만원이 소요되었다. 

선생이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니, 학생들도 바울선생 밑에서 배우기 싫다며 
다른 사역장에 보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완강하게 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바울선생이 회복해서,

선생으로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학생들을 다독거리고, 이 사역장을 위해 더 많이 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바울선생, 사역 그만두는 게 어때요? 이렇게 하려면 그만 두세요!
술 마시면서 사역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세요!' 

'아니 그럼 내 이 사역장은 어떻게 합니까?' 
'해산할 겁니다!'

순간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서 선생님,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뱀술을 좀 마시게 했기로서니, 사람을 이렇게 쫓아내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내가 뱀술 마시게 한 거, 그것 정말 잘못했어요. 
근데 이것 때문에 정말 이렇게 사역장이 해산되고 쫓겨나기까지 해야겠어요?'

바울선생은, 자신의 잘못을 알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펄쩍 뛰었다. 

'그는 술 좀 마시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오나?' 
하고 서운해 했지만, 그건 성경 말씀을 잘 모르는 소리였다. 

고전6:10절은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잠언23:31~32절은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것이오 독사같이 쏠것이며' 
라고 말씀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성경말씀을 통해서도 얘기하고 
또 우리 교단(장로교 합동)의 전통과, 나의 젊어서의 경험도 얘기하면서 
왜 술을 마시면 안 되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사역에 쓰이는 모든 돈은, 한국의 성도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한 푼 두 푼 모은 것인데,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 잘 배우고 
선교사로 활동하는 데 쓰라고 이 돈을 보냈지 
술 먹고 낭비하라고 보내지 않았으며 

학생이 그랬다면 또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선생이 나서서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라고 
반나절이 다되도록 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얼굴에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짓고 
말없이 내 말을 듣고 있던 바울선생이 말했다.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잘못했어요. 
정말 알고 보니 내가 나쁜 짓 한 게 맞시오. 
내가 영적으로 흐트러져 있었던 모양임다. 
그렇다고 사역장을 해산하고 쫓아내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내가 흐트러져 있으면, 사역장에서 다시 회복해야지 
나가면 세상인데... 그러면 나보고 영적으로 죽으라는 말입니까? 
회복을 해도 여기서 해야 되지 않습니까?' 

나는 이번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내 입술에 권세를 주셔서, 내가 하는 말이 주님께서 하시는 말로 들리도록 
해달라고 며칠을 기도 하고 
기풍선생을 해임시킬 때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왔었다. 

그러나 '회복을 해도 여기서 해야 되지 않느냐?'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져 
더 이상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잘 할 수 있겠어요?' 
'옛 잘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요. 다음은 없어요!' 

어느 사역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탈북자 사역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단 하루도 무사하기가 어려운 사역이다. 
나는 바울선생이 회복해서 정말 사역을 잘 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사역장을 나왔다. 


♣베트남으로! 북한으로! 

선주 선생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산동성 지난에서
'선생님 저 더 이상 사역 못하겠습니다!' 

'아니 왜요? 왜 그래요?' 
선주선생은 학생들에게 형편없이 맞았다고만 할 뿐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기도하면서 대책을 간구하다가, 기풍선생을 데리고 제남으로 급히 달려갔다. 
가보니 사역장의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했고 
모세형제는 나를 보자마자 격분해서 떠들어댔다. 

'선생님, 저 따위 것도 책임자입니까?' 
모세형제와 선주선생에게서 일의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선주선생이 실수를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는 속썩이는 학생들 때문에, 사역장에 애정을 쏟지 않고 계속 밖으로 나돌았다. 
'너 따위 것들 다 돌아가도, 데려올 사람들은 흔하니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사역을 잘 이끌어 줄 것을 권고하는 학생들에게 그가 한 말이었다. 

이 말에 깡패출신인 다윗형제와 모세형제가 이성을 잃고 
선주선생을 아예 죽일 작정으로 두들겨 패다가 
다른 형제들이 말려서야 가까스로 진정된 것이었다. 

선주선생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리더직을 포기하고 
이 사역장에 학생으로 남겠다고 하였다. 

다음 날, 기풍선생을 선주 선생대신 리더로 세웠다
'선생님 이번에는 기도하면서 잘 해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 사역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 모습을, 제가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기풍선생이 믿음직스러웠다. 
워낙 리더십이 탁월한 선생이니, 이 정도의 어려움 쯤은 
쉽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기풍선생의 사역을 잘 도와주고 싶어서, 기풍선생에게 물었다. 
'기풍선생, 사역장을 내가 사는 성도로 옮기는 게 어때요? 
그러면 나도 자주 방문할 수 있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바울선생이 있는 중경으로 가겠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인지, 계속 중경으로 가겠다고 고집했다. 

 

성도에는 권능선생과 익두선생 사역장을 두고 
중경에는 바울선생과 기풍선생 사역장을 두면 
그래도 이전보다는 관리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성도에서 가까우니.. 중국 내륙으로 들어옴)

그래서 나는 승낙하면서 그에게 이사비용을 주고, 나는 성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서, 선주선생 사역장 학생들로부터 또다시 전화가 왔다. 

'아이고 선생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아 그 씨부랑 기풍선생이라는 자식이 민선주 선생하고 조선족 홍신복이 하고 
이양원이를 데리고 월남으로 도망갔습니다.'  *2차로 베트남 행

정말 기풍선생이 또다시 이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전화를 받을 때, 순간 내 몸이 그 자리에서 굳어져서는, 펴지지 않았다. 

나는 마치 남의 몸처럼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이끌고 
기풍선생 사역장의 학생들을 만나러 중경으로 갔다. 

기차에서 나는 계속 울면서 주님께 물었다. 
'주님, 이 사역을 제가 계속 해야 합니까? 주님 싸인을 주세요. 
저는 이제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중경에 도착하여 학생들을 만나보았다. 
기풍선생과 선주선생은 학생들을 중경까지 데리고 와서 
같은 도시 중경에서 사역하던 바울선생 사역장에 나머지 학생들을 남겨두고, 

선주선생과 양원형제, 베트남까지 길 안내를 위해 조선족 신복형제를 데리고 
베트남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선주선생은 20일 금식 후 다리가 기적 회복됨

'형제들은 왜 기풍선생과 선주선생을 따라 한국으로 가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한국에 갈 수 있다면, 지난 번에 벌써 갔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지뢰밭을 안전하게 넘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설사 안전하게 넘어갔더라도 한국에 간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 무모한 길을 누가 따라 갑니까?'

모세형제를 비롯해 모두가 이렇게 말했다. 
두 선생이 이렇게 떠나가자, 일부 학생들은 공부에 흥미를 잃고 

연변으로 떠나버렸다. 

하지만 국철, 다윗, 모세형제는 계속 남아서 공부하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제일 말썽을 부리던 사람들이 
그래도 끝까지 남아서 공부하겠다고 하니, 나는 그들이 대견스러웠다. 

다윗형제와 모세형제는, 권능선생 사역장(성도)으로 가서 공부하고 싶어했다. 
두 형제를 그 사역장으로 보내려 하니, 권능선생이 펄쩍 뛰었다. 

'아이구 그 귀신같은 두 사람을 내보고 또 맡으라는 거예요. 
저는 못 맡아요. 못 맡아요!'

'권능선생, 두 형제가 이제는 많이 다듬어져서 괜찮을 거예요.'

그러나 사역초기에 두 형제에게 혼쭐이 난 그는 
내가 아무리 권해도 다윗형제만은 절대로 받을 수가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다윗형제는 바울선생 사역장에 남기고 
모세형제만 권능선생 사역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중경에 혼자 남게 된 바울선생 사역장도, 성도로 이사하도록 조치하였다. 

▲베트남으로 떠나간 두 선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훗날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님께서 역시 두 선생을 붙들고 계셨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 기풍선생과 선주선생은 
약속대로 국경 근처에서 신복형제는 돌려보냈다. 

그리고 양원형제와 함께 이번에도 지뢰밭을 무사히 넘었고 
지난 번의 경험을 살려, 베트남 국경수비대에 잡히지 않고 국경도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한국대사관이 있는 하노이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기풍선생이 '철길을 따라가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하노이는 수도인 만큼,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도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근 한 달 동안 철길을 따라 걸어가서 하노이에 도착했고 
천신만고 끝에 한국 대사관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구세주처럼 생각하고 뛰어들어간 하노이 한국대사관에서는 
30 분도 채 안 되어 이들을 내쫓아버렸다. 

할 수 없이 몇 천리 길을 다시 걸어서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그 와중에 지칠 대로 지친 기풍선생은 하반신이 마비되어서 
길에서 몇 번씩 쓰러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광주(광저우)에 가면 한국 사람들이 많으니 
차비라도 좀 얻을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광주를 향해 걸어가던 중 세 사람은, 배가 너무 고파서 공안국에 자진해서 들어갔다. 
'우리는 북한 탈북자들이요!' 
감옥에 라도 들어가면 밥은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나 생뚱맞은 말을 하는 이들을 
공안들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거지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두꺼운 책 한권씩을 들고 있자 
한 공안이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선주 선생이 기다렸다는듯 웃으며 말했다. 
'이건 성경책이오. 당신도 예수 믿으시오!' 

'야 임마, 네 꼴을 보니 예수 믿고 싶은 생각 하나도 없다. 썩 나가!' 
공안은 돈 몇 푼 쥐어주고는, 이들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이들은 몰래 화물기차 꼭대기에 올라타고, 천신만고 끝에 광주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한지 3시간만에 모두 공안에 체포되고 말았다. 

공안이 이들을 다른 노숙자 무리에 섞어서, 중국의 여기저기로 보내 버려서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졌다. 

선주선생은 교도소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나온 후 상해로 갔다. 
추운 겨울날 여기저기 거리를 떠돌다가 너무 춥고 배고파서
공안에게 두 팔을 모아 내밀며 애걸하였다. 
'나는 북한에서 도망쳐온 사람입니다. 제발 날 좀 잡아가 주십시오' 

선주선생은 그렇게 공안에 체포되어, 상해 감옥에 한 달간 갇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풍선생이 거기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선주야! 네가 어떻게 여기 있니? 아이고 자식아 반갑다야! 
근데 니는 왜 잡혀 들어왔니?' 

다시 만난 두 선생은 기쁘고 반갑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 넓은 중국 대륙에서 서로 헤어졌지만 
결국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여벌이 없는 외길이었던 모양이다. 

한국으로 떠났던 이들의 여정은, 결국 북한 행이 되고 말았다. 
두 선생은 신의주 보위부 집결소에서 1주일쯤 취조를 받고 
곧 안전부 집결소로 옮겨져, 석방될 때까지 한 달 가량 함께 있었다. 

집결소에서 기풍선생은, 그동안 통독과 암송을 통해 깨닫고 있던 말씀을 통해 
믿음이 회복되었고, 회개기도를 드릴 때 

그의 마비되었던 한쪽 다리도 많이 풀어졌다. 

그는 집결소 반장 밑에서 호실장을 맡아, 반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아파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자기 옷을 팔아 먹을 것을 사주기도 하고 
또 자기 식사 중 절반을 아픈 아이에게 나누어 주는 등,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반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관계로,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었고 
선주선생이 아플 때도 기도해주고 약도 구해주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감옥생활을 하던 중 
2000년 2월 16일, 김정일 생일 특사로 석방되어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심양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와 장로를 만나게 되어 
그들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사역장을 꾸려
탈북자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육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2000년 말에는 내가 사역하고 있던 섬서성 서한으로 사역장을 옮겨
5개월간 함께 사역하다가, 이후 다시 절강성으로 사역장을 옮겨 사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