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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9:1~22 예정신앙

LNCK 2022. 11. 6. 14:21

예정 신앙 (로마서 9:1-18)│2022.10.30 - YouTube

◈예정신앙          롬9:1~22       2022.10.29.

신앙은 언제나 한쪽 극단으로 치우 질 때 진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런 극단적 신앙에서 잘못 오용되는 것이 '예정' 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지만, 가장 오래되고 잘못 인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고,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는 사람들은 
믿을 사람은 다 믿도록 예정되어 있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든지/ 전하지 않든지 
다 그리스도께로 오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며 
선교적 사명을 도외시합니다. 

반면에 인간의 책임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간과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노력을 믿습니다. 
복음 보다는 인간의 사상을 믿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입니다. 

예정을 잘못 오해하는 사람은, 다른 영혼을 향한 뜨거운 열정에서 주어지는 
전도와 선교를 도외시 합니다. 

또한 예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자신의 운명과 역사의 미래가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로마서 9장~ 11장에 이르기까지 이 3장에 걸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의 진리가, 이 교리가 
어떻게 선교적인 열정으로 이어지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선교사로 사역하는 바울에게는, 끓이지않는 고통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족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서, 회심하고 변화되는 이방인들이 나타났죠. 

그런데 이 놀라운 역사가, 정작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에게는
자신이 생각하고 기대한 만큼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자기 안에 심각한 고민과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동족이기 때문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 받았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영광이 주어지고, 약속과 율법, 예배, 놀라운 특권들이 주어졌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는 통로가 되었던 민족,

먼저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이방인보다 더 회심률이 작은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기에,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롬1~8장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론'에 대한 
전반적인 요지들을 다 설명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난주 로마서 8장 말씀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랑이다. 영원히 안전한 구원이다' 
라는 구원에 대한 확증을, 우리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요? 

그것은 바로 9~1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예정' 대한 진리가 
바로 앞서 1~8장까지 설명한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확실함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9~11장의 내용은, 전혀 앞의 내용과 상관없는 내용이 아니라 
도리어 1~8장까지 진리를 뒷받침해주는 매우 중요한 진리의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동족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면서 사도바울은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이것은 바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던질 수 있는 공통된 질문입니다. 

바울은 불신자의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질문 '예상 질문' 두 가지를 던지면서 
답변하는 형식으로 롬9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롬9장 전반부에 나타난 두 가지 질문을 살펴보고 
다음 주에는 9장 후반부를 살펴보겠습니다.)

롬9장은 11장까지 통째로 이어지는 논지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로마서를 혹시 읽으실 때는, 
9~11장까지 통째로 읽는 습관을 가지셔서, 전체 흐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매주 부분적으로만 이해하면 어려울 수 있고, 또 혼동될 수 있고, 
또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진리를, 우리가 바로 깨닫기 위해서 
좀 고민해야 합니다. 생각해야 하고, 또 깊이 묵상함으로써 
우리 신앙이 더 견고해지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이스라엘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을 보고서) 바울의 첫 번째 질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구약의 구원 약속)이 파기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대답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지금 현재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약속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은 그냥 끝난 것인가? "아닙니다!" 

6절,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파기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위 구절에 답이 있습니다. 왜 현재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구약 하나님의 말씀이 파기된 것이 아닌가요? 

그 답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이 두 번 나오는데 
앞에 이스라엘과 뒤에 이스라엘이 다릅니다.

앞에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 육신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즉 동족 유대인을 뜻하고, 

뒤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동족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다.' 
그것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던, 
즉 혈통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곧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여겼던 
유대인들의 착각을 깨뜨려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자신이 유대인으로 태어나기만 해도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잘못된 선민의식에 빠져 있었죠.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었던 겁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바리새인으로서 
    혈통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만 해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여겼던 것이, 그들의 신학적인 구조였습니다. 

    그것을 깨부수신 거죠. '너희는 거듭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진짜 이스라엘이다' 라고 예수님이 교정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다 이스라엘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현재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폐기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육적 유대인들 가운데서, 참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시다. 

눈으로 볼 때는 그게 비록 소수일 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육적인 유대인들 가운데서 참 이스라엘(남은 자)을 구원하고 계시며 
그렇기에 또한 이방인 가운데서도, 참 이스라엘이 되는 일이 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는 이들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온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씁니다.                          주1)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라 할지라도,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이스라엘은, 육신의 혈통을 따라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니라 
8절에 보면 '약속을 따라 난 자녀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두 가지를 예를 듭니다. 

① 아브라함의 두 자녀,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를 듭니다.
7~9절, 그들은 아브라함의 두 자녀입니다. 

그런데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울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약속을 따라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 하갈이 종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이방인이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두 번째 아들인 이삭이, 왜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으로 받아들여졌는가? 
그것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넓게 보면 '예정'도 포함됨

세상에 윤리적인, 또 실제 인간적인 책임을 놓고 보면,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 대해 책임이 있고,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이스라엘인가?'

하나님은 '이삭만 이스라엘이다' .. 이렇게 인정하셨죠.
9:8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후손의 약속
이삭이 태어난 이후에 약속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먼저 약속이 주어졌고, 그 후에 이삭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혈통으로 주어지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나는 이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갈3장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께 속한 이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다' 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 이란 이름으로 바꿔 주신 의도도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약속을 따라 
거듭난 자녀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었다.. 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②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예를 듭니다. 에서와 야곱의 예죠. 10~13절
에서와 야곱은 같은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자녀 임에도 
하나님은 에서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다는 겁니다.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또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12 행위로 인하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인해 서게 하시려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했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13절에 보면 말라기1:2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을 했다'                             주2)
 
왜 에서와 야곱 중에, 야곱을 택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통해서 *예정과 비슷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나타나는 어떤 조건이 개입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인간에게 있는 어떤 조건이, 
하나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자신의 조건을 항상 우리는 평가하지요. 

우리가 사회속에 살아갈 때, 나의 사회적인 어떤 상태를 생각하면서 
또 젊은 남녀가 배우자를 택할 때, 내가 이런 형편인데 나를 배우자로 맞이해줄까? 
뭐든지 우리는 인간 관계 속에서, 나의 현 상태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선택, 예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조건, 상태, 인간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선택에는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야곱을 모태에서 택하시고,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고 
야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따라 부름을 받았기에 
이 두가지 케이스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거는 뭡니까? 

이삭과 야곱 그 후손들이, 다른 어떤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분별력이 있고,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아시고, 정하시고, 선택하셔서 찾아오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나아오게 된 것은 
나의 선택과, 나의 뜻과, 나의 결정과, 나의 판단 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정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예정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구원의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과, 부르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롬8:28~30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 우리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다는 거죠.
우리가 믿기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선택과, 결단과, 믿음에 근거한 신앙은 
절대로 견고해질 수 없습니다. 절대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다 잘 압니다. 내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요!
여러분, 자기 자신을 믿고 신앙생활 하시면 반드시 쓰러집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시험에 드는 분들은 
반드시 공통적인 특징이 '자기 의'가 강하다는 거예요. 자기를 신뢰한다는 거예요.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거 같지만 
그 내부의 깊숙한 것을 보면, 자아에 대한 확신이 강한 사람은, 
시험이 오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쓰러집니다. 

그러나 구원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물론 자기가 믿기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신앙고백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 보면,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앞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선택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로 부르셨다' 라는 시각은 다른 거예요.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내가 인정 받지 못하면 
'내가 선택한 교회인데, 내가 버릴 수도 있지' 이런 식의 신앙 생활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시험거리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로 안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이 공동체로 부르셨다' 라는.. 이런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나아가면
교회에서 시험들 것이 없어요. 

'나를 여기로 부르신 것이 담임목사도 아니고, 누군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이곳에, 이 공동체로 부르셨기 때문에.. 난 이 교회에 다닌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거예요. 
그 우선순위가 그 무엇도 빼앗을 수가 없는 것이 될 때 
로마서 8장 후반에 나오는 그 강력한 확신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8장에서, <구원에 관한 복음의 진리>를 다 설명한 이후에 
9~11장 까지 <예정에 대한 진리>, 즉 예정 신앙을 설명하는 거죠.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구원 계획이 
내가 그 분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이 나를 먼저 아셨고 
나를 먼저 택하시고,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구원 받은 거라는 확신을, 그리고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정 신앙'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 개인의 인간의 자율적인 선택이나, 결정을 
무시해 버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인식에 깔려 있는 깊은 인본주의는 
'세상 모든 것은 자기 하기에 달려 있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부 그런 생각이 작용될지는 몰라도 
세상의 중심은 내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기 나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무엇을 택하든지 
우리의 선택이 의미가 있고, 중요하게 되고, 가치 있게 되는 겁니다. 

예정 신앙은 인간의 판단이나 선택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의 모든 판단과 선택을 의미있고 중요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은,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도 쓰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동역자로도 쓰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것저것 다 해 보고 결정하지만 
실상 세상은 나의 선택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그 때는 이미 늦죠.
그러므로 <예정 신앙>을 바르게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정 신앙'이란 또 무엇입니까?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뜻을 따라 살아가야 된다는 거죠.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말할 때 
세상의 중심이 자기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꿈과 비전을 말하지만 

'예정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나를 부르시고 택하신 분이 계시기에 
그 분이 나를 선택함으로 이루기 원하시는 그 뜻을 찾아가는 사람이에요. 

그 뜻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고, 결단하고, 선택하는 사람! 
그리고 '그 뜻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라는 것을 믿은 거예요.

'예정 신앙'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을 따라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완전하신 그 분의 뜻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겁니다. 

우리의 선택을 배제하거나, 우리의 결단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이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며, 정하시며, 부르시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 
그것이 '예정 신앙' 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택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먼저 택함 받은 사람이 있고, 나중에 택함 받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택하셨지만, 그 부르심을 늦게 깨닫고 오는 사람이 있고 
일찍 깨닫고 오는 사람이 있고... 그렇다는 겁니다. 


◑2.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먼저 택함을 받았는데, 
왜 지금 불신앙 상태에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불의하신 증거가 아닌가? 
라는 예상 질문이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14절이죠.

9: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의 하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혹시 불의하신 분이 아닌가요?' 라는 질문이 나옵니까?
'하나님, 온 세상 사람들을 그냥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도해 버리시고 
다 구원해 버리시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이고, 은혜의 하나님이지 

소수의 사람을 부르셔서, 그 사람들루 하여금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게 하는 
이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혹 그 가운데 복음을 듣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한 영혼이 있다면
'하나님 불의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대드는 겁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냥 (주권적으로) 구원해 주시면 되지..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 그러고.. 회개해야 된다 그러느냐?... 

'그 과정을 거치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불의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질문이 잘못된 것은 
모든 인간은 천국에 가기로, 천국에 가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도리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게 팩트입니다. 

천국은 괜찮은 사람들을,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처해져 있다고 롬1장에서 말씀했죠.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가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그리스도 안에서 대신 치러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신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받지 못하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안 보였죠. 

'전 인류는, 뿌리 자체가 배교적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거죠. 
그리고 정죄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해도,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에 불평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마땅히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은 구원 하시지 않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끝내셔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인간을 구원하시고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택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그 과정이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 과정 속에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버림을 받는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정 신앙'이란 선택하신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임을 믿는 것입니다. 

롬9:15~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모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9:16 그러므로 이것은 원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달음질하는 사람
에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긍휼과 은혜의 차이점을 잘 아셔야 돼요.
긍휼은 mercy,  은혜는 grace 죠.

긍휼 mercy은, 것은, 마땅히 받아야 될 형벌을 받지 않게 해주는 게 긍휼,
은혜 grace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더해 주는 것이 은혜이에요.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먼저 받아야 돼요?
은혜 이전에 긍휼을 받아야 되는 거에요. 

왜냐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이들인데 
그 진노를 받지 않도록 해 주는 긍휼이 먼저 있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주어졌기에 우리가 구원 받았는데 
'왜 택함받은 사람들만 구원하시느냐?' 
그렇게 불평할 수 없고, 하나님을 불의하다..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완악함이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에게 있는 이 타락한 자유의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배반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DNA가 인간 안에 있어요. 

그 완악함이 끝까지 지속 될 때 
하나님은 언젠가는 그 영혼들에게 베푸셨던 은혜의 장막을 거두신다는 겁니다. 

그 예로 바로를 든 것입니다. 17~18절의 말씀입니다. 

9:17 성경에서 바로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이를 위해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인해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9:1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신다'는 이 표현에 또 우리가 들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완악하게 하시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 누군가에게 악을 심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결코 인간에게 악을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악이란,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것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악'은 선의 반역입니다. 
    악은 선에 기생하여 살 수밖에 수가 없어요.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어요. 악이 성립되려면, 선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세상의 악은 절대로 선을 이용하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럼 뭘 보여 주는 거예요?
    악이 원래부터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한 반역으로 나왔다는 거죠. 

    이 악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반동, 반역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악을 만드신 게 아니라
    사단에게 넘어간 인간 스스로가 완악함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완악함을 제어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고 계세요. 
    그 증거가 뭡니까? 
    악한 사람들이 들통 난다는 거죠. 
    나쁜 짓을 한 사람끼리 서로 배신한다는 거예요. 

    세상에 악이,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을 못 이깁니다. 
    계속 거짓말하는 사람에게, 결국은 선한 사람은 속게 돼요.

    그런데 언젠가 악인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은
    더 악한 사람에게 의해서죠. 

    속이는 사람은 한 차원 더 높은 악한 사람에 의해서 
    속임 당해서 실패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완악함을 제어 하시는데 
    끝까지 자기 완악함을 가져고 있겠다고 고집하는 이들에 대해 
    하나님의 때로는, 바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 은혜의 장막을 거두시는 거예요. 

    그러면 악이 실패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성공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야~ 저렇게 악을 행하고도, 잘 살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지 모르지만 
   죽음 이후에 결말은 무서운 거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의 장막을 거두심으로, 내버려두심으로 심판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우리 악이 실패해야, 하나님의 은혜인 거예요. 
    나쁜 일이 발각되어야, 하나님이 은혜로 함께 하시는 거예요. 

    나쁜 일을 할 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조심해야 돼요.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겁니다. 
    나중에 몰아서 심판이 임할 때는, 무서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하나님께 이렇게 도전하죠.
'하나님의 없는 증거는, 이 세상에 이처럼 혼란스럽고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제하지 못 하시는 거 같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의 완악함을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지금 통제하시고, 은혜로 제어하시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사람들의 악을 제어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숨 쉴 수 없을만큼, 세상은 지옥이 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옥을 만든 하나님은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기에
나는 그분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어릴 때도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지옥의 끔찍한 불에 사람들이 떨어지자마자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그리고 회개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하나님이 좀 봐 주셔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마음 때문에 연옥교리가 사람들에게 먹히는 거예요. 
가톨릭에서 연옥 교리를 만든 이유가 
지옥 불에 떨어지기 전에,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은혜가 아닌가? 
이런 교리가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더 받아들여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고 제가 확신을 얻었어요.
'지옥에는, 지옥 불에 떨어져도 회개가 아닌, 
불평과, 원망과, 미움의 언어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고통이 임하면 회개가 나와야 되는데 
도리어 원망과 불평과 저주만 쏟아붓는 거죠. 바로 그것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악한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 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정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정 받지 못한) 완악한 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선택과, 결단과,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무슨 선택을 해야 되고, 어떠한 결단을 해야 되는지는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움직여진다는 운명론이 아니라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을 향해 가졌던 그 사랑과 열정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거예요. 

선교적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 신앙을 갖지 않은 거예요. 
바울이 지금 롬9장에서,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큰 근심과 고통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예정을 설명했잖아요. 

즉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과 은혜가 주어져 있음에도 
이스라엘이 완악한 가운데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영혼이 없도록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큰 근심과 고통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울의 근심과 고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가족 가운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영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지만, 그 부르심을 거부하고 있는 영혼들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큰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을 향한 근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 방황하는 우리의 자녀들을 보면서 근심이 있습니다. 

저 북녘동포들, 그 이념과 거짓된 사상에 빠져 신음하는 동포들을 바라보며 
근심이 있습니다. 주님, 열방의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셔서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교를 향한 부르심인 줄로 믿습니다. 

선택 받은 우리들은 '나는 구원 받았기에 이제 됐다' 라고 하는 자만심에, 
거짓된 잘못된 예정론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선교로 나간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선교적 열정으로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주1)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서신서들에서 '이스라엘'을 
여러 다른 의미로 폭넓게 사용하기 때문에 
각 서신서마다 '이스라엘'이 무슨 의미의 이스라엘인지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죠.

갈6:16절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할 때 이스라엘은 누구겠습니까?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는 것을 말하고 있기에, 거기서 이스라엘은 
'십자가로 구원받은, 의롭게 된 모든 이들'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주2)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
하나님은 왜 아직 태어나지도 두 자녀를 이렇게 차별하시는가? 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미워하다' 라는 말은
우리말로 '미워하다'로 번역할 수 밖에 없고, 
실제로도 '미워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고대 근동 문화에서 이 단어는 어떻게 사용 되었냐면 
우선순위를 설명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셔서 제자도를 설명 하셨죠. 
'누구든지 나에게 오는 자는,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부모님을 증오하고 미워하고 
자신의 생명을 학대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미움'이라는 것은 '우선순위'를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우선한다는 것이고, 
심지어 자기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냐면 영원한 생명이 결정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 가운데 거할것인가?'
아니면 '나의 육신의 생명이 끊어질 것인가?' 라는 상황이 온다면, 
우리는 무슨 선택을 해야 되는가요?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낫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야곱이 더 예쁘고, 에서가 미운 짓만 골라했다.. 그런 게 아니라 

에서와 야곱의 인성을 볼 때는, 그거는 사람들에게 다르게 평가될 수 있어요. 
야곱은 교활하고 음흉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하고, 
에서는 영적인 분별력은 좀 떨어지지만, 단순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에서가 더 남성적이라며.. 사람들이 볼때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인간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이 '나는 야곱이 더 예뻐!' 그런 게 아니라는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