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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2:14~19 신앙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

LNCK 2022. 11. 7. 09:37

10월14일 -신앙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 사고의 능력 - YouTube

17:50~부터 녹취

 

◈신앙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       딤후2:14~19      2022.10.14.녹취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를, 성령을 강조하는 교회는 
그들의 신앙 스타일 때문에 그런 줄로 생각하고 
교회가 오순절 성향이기 때문에 성령을 강조한다고 말하는데 
오늘날 그같은 오해가 없습니다. 

만약에 초대교회 시대에 그런 말을 했다면, 가장 무지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성령을 강조하셨지요.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오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를 보내 주리라.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예수님 자신이 성령을 강조하셨고, 약속하셨고, 받을 것을 명하셨고 
성령을 통해 능력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성령을 강조하는 교회는, 오순절 교단이기 때문에 그런 줄로 알고, 
오순절 교단이기 때문에 은사를 말하는 줄로 생각하고 
'그건 그들이 오순절 교회이기 때문이야, 은사주의 교회이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며
모두에게 주신 것을,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매도합니다. 

오늘날 이같은 진리의 곡해가 없습니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진리를,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만들으로써 

진리를 왜곡하고, 그 이외에 성도들은 성령을 강조할 필요가 없고 
성령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것처럼.. 치우치는 것처럼.. 
오늘날 이 같은 오류가 없어요. 

적어도 예수님이 창시한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왜 2천년이 지나면서, 교회가 변질되고 능력을 상실했는지 알 수 있죠. 

애초에 기독교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애초에는 다 성령을 받았고, 애초에는 거의 다 방언을 했고, 
애초에는 다 성령세례를 받았고, (성령론을) 가르쳤어요. 

도중에 그것이 중단됐고, 금지되었고, 잊어버리고, 불신하고, 
외면하고, 부인하게 되었죠.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됩니까? 

도중에 발생한 변질을 우리 기준으로 삼아야 됩니까? 
아니면 애초의 신앙에 기준을 맞춰야 됩니까? 

▲우리가 교단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거기에 있습니다. 
'교단'이라는 것도, 그것이 하나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라고 말하기 이전에 
'나는 장로교인이다, 나는 침례교단이다, 나는 가톨릭이다' 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침례교를 만드셨어요? 예수님이 오순절 교회를 만들었어요?
예수님은 그저 '교회'를 세우신 것 뿐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교단을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으로 삼아서 
'나는 몇 대째 감리교라느니, 성결교 라느니, 성공회 라느니...' 
교단이 여러분을 구원합니까? 예수님이 구원하시죠.  (*교단 무용론 아님, 치우치지 말자는 것)

그렇다면 '나는 크리스천이다' 라고 말을 해야죠. 
왜 감리교인이다 라고 말하고, 왜 장로교인이다 라고 말합니까? 
왜곡된 거예요. 이상한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단으로 우리의 신앙을 정의할 수 없다'는 거죠. 
왜냐면 모든 교단은 치우치고, 부분적인 진리만을 주장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얼마만큼 유익한 존재인가?' 

이전에는 '예수 믿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따졌죠. 
'교회에 나가는 게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기도하는 게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그런데 이제 신앙이 성숙된 성도는, 
'내가 예수님께 얼마나 유익한 가?'를 따져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얼마만큼 유익한 존재일까? 
나는 교회에 얼마나 유익한 성도일까?' 

그건 무슨 헌금이나, 봉사로 따지는 게 아닙니다. 
'헌금을 하면 내가 유익한 사람이 될까? 
내가 이런 봉사를 하면 목사님에게 도움이 될까?' 

예수님에게 유익한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에 유익한 것과, 예수님께 유익한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에 유익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예수님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불의한 목적, 개교회 이기주의에 유익한 자가 되게 되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거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하는 것과 별개로, 추님께 별로 유익하지 못한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자존심을 위해서 목회 한다든가, 교회 성장을 위해서 목회를 하게 되면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할 수도 있고, 유명한 설교자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께는 별로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바로 그런 경우에 '내가 너를 모른다' 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고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를 모른다!' ... 얼마든지 발생 가능한 일이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죠. 


◑오늘 본문 말씀은 딤후2:14~19절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교회가 태동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주후 70 년경에 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면, 
교회가 탄생한지 약 40년 밖에는 지나지 않았다는 말인데 
근데 벌써 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와 또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디모데에게 지적하고 
디모데가 이 모든 일을 엄하게 다스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딤후2: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charging   주1)

14절에 '엄히 명하다'라는 말은 오늘 첫 구절에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들이 상실한 것 중의 하나는 '엄히 명하는' 권세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안 주셨기 때문이 아니고 
또 교회가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고 

교회와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리고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를 꺼리고 

이것을 엄히 말했다가는 성도들을 잃어버릴까, 성도들이 상처를 받을까, 
시험에 들까를 염려한 나머지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모르는척 넘어가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이 주신 그 권세를, 믿음으로 사용하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사랑과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이다' 라고 말한 것은   딤후1:7

두려운 마음이 있으면, 엄히 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디모데가 이 모든 일을 올바로 분별해서, 엄히 치리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담대함과 능력을 소유해야 되는데 
이것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타이른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목회의 가장 귀중한 노하우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15절에도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딤후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분별력, 분변할 수 있는 능력, 
엄히 다스리기 위해서는, 올바로 분변해야 되는데 
말씀에 근거하여 분변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엄히 명하라고 한 것은 
그 당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해당되는 것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주의 종이 올바로 분별함으로써 
그것을 엄히 치리하고 다스려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용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2천년이 지난 지금에, 그 당시에 40년 밖에 안 되었는데 이미 문제가 발생했다면 
2천년이 지난 지금은 오죽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신학적인 문제와, 신앙의 행태적인 문제가 존재 하겠습니까. 

대한민국 개신교가 전래된지 140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고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말씀에 의거하여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목회자들이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타이르지도 못할 것입니다. 

좋은게 좋은 거지.. 라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아~ 성도들이 힘들게 살다가 일주일에 한번 주일날 
평강을 얻기 위해 교회에 오는데, 그 사람들에게 듣기 어려운 말을 할 수 없지!' 

어떻게 들으면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릇된 신앙,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방치하라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 이단이 들어오던..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들어오던..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할 수 있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걸 그냥 지켜보라는 얘기입니까? 

그냥 '좋은게 좋은 거지..' 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고, 교회의 거룩함이 훼손될 수 있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하여 '엄히 바로잡으라' 라고 명한 것처럼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씀을 올바로 분변하라'고 말한 것은   :15 
바로 그런 사고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 행태 중에 비복음적인 것과, 잘못된 것이 
가라지처럼 자라고 있는 것을 분별할 수가 있어요.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오늘날 교회 안에 직분 제도가 
여러분 세상은 지금 민주화가 되고 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교회는 역행을 해서, 오히려 계급주의 사회가 되고 
그리고 교회 안에 귀족이 발생하고, 불평등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현상을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사고가 아니면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객관적인 사고'라 함은, 내 자신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백화점이나 식당 등에서 CCTV 화면을 무심코 쳐다볼 때 
남인 줄 알고 쳐다봤는데, 내 자신일 때가 있죠. 

카메라에 찍힌 사람이, 나는 남인줄 알았는데 보니까 내 자신이에요. 
'저 분은 척보니 비호감이네.. 저렇게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있지?'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내 모습이에요. 

객관적인 시각이지요. 잠시 내가 제 삼자의 입장에서 나를 본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한번 봐야 됩니다. 
목회자들이, 성도가 특별헌금한 봉투를 읽고 거명을 할 때가 있죠. 

'아무개 집사님이 무슨 무슨 일로 무슨 특정헌금 하셨습니다. 
아무개 권사님이 무슨 일로 감사헌금하셨습니다. 
아무개 장로님이 교회 건축을 위해 건축헌금 하셨습니다.' 

봉투에 적힌 글을 읽고 축복기도를 해주는 것, 
제 삼자가 그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세요? 

'저거 헌금 걷어내기 위한 꼼수 부리는 거다. 
저렇게 읽어줌으로써 성도들을 장려해서 
자기의 헌금과 자신의 믿음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저건 헌금을 걷기 위한 꼼수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고 '아~ 축복해 주는 것이다. 
그의 믿음을 보고 축복해주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제 삼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할 거에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상 주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런데 교회는, 아무개 권사 아무개 집사가 무슨 이유로 헌금했다고
일일이 말하고 축복기도를 해주면, 하나님께 받을 상급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왜 그것을 하는 것입니까? 
믿음을 돕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헌금을 더 걷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지요. 

한 가지 예를 들었지만, 그 외에도 우리의 여러 신앙의 관행 중에서
우리는 잘 믿는 줄로 생각하고 하는 것인데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게 득보다는 해가 되는 경우가 있지요. 

우리의 신앙에 행태 중에 진리를 떠나 잘못 됐는데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바로잡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사고가 없이는 
우리 스스로가 캐치할 수 없는, 너무 익숙하고 습관화된 신앙의 행태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한 가지 더 예를 들어옵니다. 
새벽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아주 귀중한 신앙의 전통이고 
새벽기도를 통해 많은 사람이 기도의 문이 열리고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사실이에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교회만이 갖고 있는 좋은 믿음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떤 부작용이 발생했냐면 
성도들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운 일을 내가 해낸다'는 사실만으로 

자기의 믿음이 성숙하고, 높은 수준에 올라간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듦으로써 
새벽기도에 참석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신앙의 성장이 필요 없고 
이미 자기는 잘 믿는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는 데서, 고행의 면이 있는거죠. 
'힘든 것일수록 경건하다' ..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렇게 힘들게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그것도 개근을 해!' 
그 자체만으로 '그러므로 나는 이미 잘 믿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게 되면 

잘 믿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주님이 판단하실 부분인데 
우리 스스로가 그것이 벼슬이 되고 훈장이 돼서 
'나는 이제 도달했어, 나는 성숙한 믿음에 도달했어, 나는 이제 잘 믿는 사람이야! 
나는 새벽기도를 개근하고 있잖아.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잖아!' 

이렇게 새벽기도 참석 그 자체로써, 마치 자신의 신앙이 의로워진 것처럼 생각하고 
나아가 새벽기도를 안 나오는 사람을 무시하는가 하면, 

그리고 새벽기도를 못 나가는 사람이 스스로를 탓하는 경우도 있죠.
아예 교회에서 말도 꺼내지 못할 겁니다. 

'나는 새벽기도에도 못 나가는 사람입니다. 나 같은 신앙으로...' 
그 자체로 교회안에 계급이 형성됩니다. 

새벽기도로... 의로운 자와 / 불의한 자
잘 믿는 자와 / 못 믿는 자 .. 이렇게 계급이 구성됩니다. 

원래부터 그런 의도로 시작한 건 아니에요. 
새벽기도는 농경시대의 유물입니다. 
농경시대엔 사람들이 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납니다. 
새벽에 일하러 일어났습니다. 닭이 울면 일어났습니다.

전기가 없을 때는, 밤에 들에서 농사 일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밤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났어요.

농경시대에는 사람들의 생활 리듬과 새벽기도가 맞았어요. 
새벽기도 갔다 와서 다시 자는 게 아니었어요. 
일어나서 새벽 기도 갔다와서, 아침을 먹고 밭에 일하러 나갔어요. 

그런데 도시인은 생활 리듬이 많이 달라졌죠. 
청년들 중에는 밤 12시 이전에 자는 사람이 드물 정도입니다. 

만약에 밤 12시 반에 사람이 잠드는데, 4시 반에 일어나야 되면, 
수면부족이 발생하고, 생활 리듬이 깨지고... 

도시인 또 직장인들은 그 상태로 하루 생활을 살기가 어려운 일이 발생합니다. 
이건 신앙과 정성을 떠나, 현실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경시대에 가능했던 신앙의 행태를 
도시화된 현대시대에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 ..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그리고 이것이 교회 안에 의인과 / 의롭지 못한 사람을 나누게 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 를 고민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침기도, 오전기도'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나는 새벽기도 나가는데, 넌 새벽기도도 안 하면서 무슨 말을 하느냐?' 라고 나오면 
이상한 일이 발생하게 되죠. 

여러분, 세상은 민주화와 평등화를 향해 나아가는데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 계급제도를 만들어서 
'누가 위냐/ 누가 아래냐? 누가 잘 믿느냐/ 못 믿느냐?'를 따진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는 어디 간 것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다 평등하게 죄인이고 
또한 다 평등하게 의인이에요.
복음의 진리는 모든 사람의 평등함을 절대적으로 확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등함을 원치 않고, 불평등을 원합니다.
남보다 낫고 싶어하고.. 남보다 높아지고 싶어하고 
남들 위에 제 코가 높아지고 싶어하고.. 남들 위에 의기양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 안에 계급을 형성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쇼핑을 가면 '사모님,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권사님, 장로님!' 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죠.

이건 계급주의, 신분사회입니다.  그런 인간의 본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해요. 

'이게 과연 옳으냐? 
왜 우리가 이것을 하느냐? 이것이 얼마만큼 성경적이냐? 
이 일이 어떤 부작용을 낼 수 있고, 어떤 부작용이 있느냐? 
이로 인해 사람들의 신앙에 플러스가 되느냐/ 마이너스가 되느냐?'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돼요. 

▲신앙을 비판하기 위한 게 아니고, 신앙인의 실수를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에베소 교회는 교회는, 교회가 탄생한지 몇 십 년 밖에 안 되는데 
이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고, 
바울이 디모데가 그것을 파악한 게 아니고 바울이 파악을 했어요. 
에베소 교회의 담임목사인 디모데가 했었어야죠. 

이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다툼을 하면 안 된다, 망령되고 헛된 말...
이걸 디모데가 분별을 해야 되는데, 디모데가 하지 않고 바울이 분별을 했으니...

바울이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라'고 했으니   딤후2:14
디모데는 아마 이런 것을 대처할 만한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믿음은, 맹목적일 수 없습니다. 
잘 믿는 것이 맹목적인 게 아니에요. 

맹목적이라는 말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교주가 시키는 대로.. 이걸 믿으라 하면 믿죠.
이단이 전부 다 맹목적이죠. 그래서 이단처럼 잘 믿는 단체가 없어요. 
그런데 다 맹목적이에요. 비판적인 사고를 금지 하죠. 몹시 싫어합니다.

그러나 딤후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분변한다'는 말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걸 알고, 파악하고,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거해서, 세상 조류에 의거한 게 아니라 
무슨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한 게 아니고, 성경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거하여 
판단할 수 있어야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이건 어긋나는데, 복음의 진리에 어긋나는데 
이게 상당한 문제의 가능성이 있고, 이미 문제가 발생을 했는데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교회에서 시험을 받고 
교회를 싫어하고 등지게 되는데.. 

교회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이조 시대처럼 그것을 지속하고 있다면 
그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것입니까? 

목회자들이 겁이 나서 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거 하다가 혹시 쫓겨날까?'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 그릇된 관행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이거 하다가 쫓겨나..' 우려하기 때문이죠.

그럼 누가 그런 권한이 있습니까? 
교회에 누가 어른 행세를 하길래, 교회에 누가 실세를 가졌길래 
의로운 주의 종이, 마음은 있어도, 그것을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바울 같은 스승이 필요하고, 바울 같은 스승이 있으므로 
젊은 목회자 데모데에게 바른길을 보여주고... 

왜냐하면 그 권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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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엄히 명하여' 단어가 쓰인 다른 구절

'디아마르투로마이'
testify earnestly, religiously to charge
to attest, testify to, solemnly affirm

눅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8: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살전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딤전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딤후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히2: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