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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일어나는 북한 사람들 P2

LNCK 2022. 11. 7. 16:43

[북한선교] 복음안에서 일어나는 북한사람들 [2편 김 선교사] 김북한 목사 - YouTube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북한 사람들 P2       P1보기       <북한선교 더 보기 

 

진행 : 김성근 목사 (검은색 글자, 괄호)
출연 : 김OO 선교사 (파란색 글자, 괄호 없음)

 

막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그 앞을 무사히 통과했어요. 
군인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쳐다보기만 하더라고요.

(원래 그럴 수 없잖아요. 국경 지역이기 때문에 
어디 가냐, 누구냐? 이렇게 물어봐야 되는거 아니에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넘어다니는 길이다 보니까, 
장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단속하는 구간인데, 마을 사람들은... 

제가 새벽 6시 반에 통과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집에 무사히 도착을 한 거죠.
만약 거기서 잡혔다면, 저는 총살이었을 거예요. 

(그건 뭐 끝나는 거죠. 

집에 들어가니까, 집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 거잖아요.)

네, 제가 집에 온다는 것도, 식구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죠. 
제가 이제 문을 막 두드리니까, 엄마가 나오더라고요. 

엄마가 나와서...  그냥 막 아무 말도 못하는거예요. 딱 굳어진 거예요. 
너무 놀라서 그런 거죠.

그 다음에 제가 쉿쉿 하면서 집안에 들어가 가지고 
집에서는 식구들이 울고 불고 난리난 거죠.

3년만에 상봉한 것이니까요!
엄마는 제가 죽은 줄 알았던 거예요. 

제가 그때 상태는 뭐 몸이 40 Kg 정도 됐을 거예요. 
완전히 살이 다 빠지고, 뼈에 가죽이 씌웠을 정도였어요. 
왜냐면 제가 그때 소화가 잘 안돼서 밥을 잘 못 먹었어요. 

중국에서 긴장하고 살다보니까 스트레스를 받았고 
또 이제 북한에 가야된다라는 생각에 긴장이 되고, 밥을 제대로 못 먹다 보니까 
몸이 아주 약한 상태였어요. 

엄마가 그때 그러더라고요. '네가 살아왔구나, 살아서 돌아왔구나!' 

제가 그때 핸드폰을 하나 가져갔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가 전화를 했죠. 
'선생님, 제가 도착했습니다!'

선생님이 막 우시더라고요. 할렐루야! 하시면서요.
네, 선생님이 저를 보내시고 한 잠도 못 잤다는 거예요. 

(당연히 그랬겠지요. 잠이 안 오겠죠.) 

그 선교사님도 밤새 철야 하시면서 기도 하셨고 
그리고 제가 집에 도착하면, 일단 조사부터 받아야 되니까요. 

북한에는 인민반이 잘 되어 있잖아요. 
숨어 있다가 발견이 되면 더 엄중한 처벌을 받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왔다는 이거를 보고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거기도 이제 넘어야 되는, 또 하나의 죽음의 고비인 거죠.

(그럼 중국에 갔다왔다고 말을 해야 돼요?)

네, 말하자면 자수를 해야 돼죠. 
제가 3년 동안 행방불명로 되어있는 거예요.
북한은 마을 마을마다 책임 보위지도원이 있죠.

그래서 제가 엄마랑 같이, 저희 담당 보위지도원을 찾아갔어요. 
보위부로 가는 길에, 저는 그냥 계속 묵상을 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때 시편23편이, 제게는 그냥 안전지대 였어요. 계속 기도하면서 갔죠. 

가니까 보위부에서 종이를 주더라고요. 
A4용지 크기의 누런.. 재질이 좋지 않은 종이였죠.

그런 종이를 주면서, 며칠날 강을 넘어서 중국에 갔으며 
거기서 뭐 하고 뭐 하며 살다가, 또 어디에 있었으며 
왜 또 이렇게 넘어왔는지 이유를 써라.. 즉 자술서를 써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자술서도 쓰고, 조사를 받아야 되니까 
'이걸 어떻게 쓸까?' 잠시 고민을 했죠. 

그런데 선교사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더라고요. 
'네가 자수를 하면 이렇게 쓰게 될 거다.' 

'그런데 이거는 열 번, 백 번을 써도, 똑같은 내용을 써야 된다.' 
(여기서 이 말 하고, 저기서 저 말 하면 안 된다)

그 선교사님은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을 보내셨어요. 
남한 분이신데, 제 이전에도 몇 십 명을 북한에 보내셨고 
그래서 많은 사례들을, 미리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성경을 가져가다가 두려워서 
산에서 던져버리고 넘어간 친구들도 많은데.. 
그런데 너는 끝까지 가지고 가라!'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네가 할 말들을, 성령께서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생각을 하면서, 정말 간단하게 썼어요. 
반페이지도 안 되게 썼어요. 
제가 삼 년 동안 있었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썼는데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탈북했으며 (이거는 사실이에요) 
넘어가니까 나를 팔더라. 팔려가지고 어느 한족마을에 가서 갇혀 살았다. 
갇혀 살다가 일주일 만에 도망쳐 나오다가 다시 잡혀 들어갔다. 

그러니까 담을 아주 높게 세우고, 아예 못 내보내고 3년 동안 갇혀 있다가 
지금 막 넘어오는 길이다. 그리고 내가 정작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가보니까 
정말 죽을 맛이더라. 내 조국이 좋더라!' 이렇게 쓰고 

그래서 다시 넘어왔다고 말하니까, 제 모습이 야위어서 완전 형편 없었어요. 
거기 중국에서 몇 개월 살다가 넘어와도 기름이 번질하고 살이 쪄서 넘어오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예 뼈에 가죽을 씌운 모습이니까.. 제 상황이 말이 아니었어요. 
한 눈으로 읽을 수 있었어요. 

'고생고생하다가 도망쳐 왔구나, 죽지 못해서 왔구나!'

제가 위장병을 중국에서 앓았던 것도, 그런 모습이 아마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미리 사전에 그렇게 세팅을 하신 거군요!)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제 진술서를 보더니 저보고 '이게 정말이냐?'고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넘어온 사례가 없는데 그리고 
저를 담당했던 보안원이 저를 훑어보더라고요. 

그러면서 머리를 자꾸 갸우뚱 거리면서 '정신이 돌지 않으면 이렇게 올 수 없다!'
이러는 거예요. 

(그렇죠. 제 정신이면 북한으로 되돌아 올 수는 없죠)

제가 '그렇다. 나는 부모 형제가 보고 싶어서 돌아왔다' 그렇게 썼어요.

'네가 그렇게 했어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3년이면 거기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무조건 감옥에 가야 된다.' 

거기서 저는 두려움이 없었어요. 
왜냐면 제가 넘어올 때도 군인들의 눈을 다 멀게 해주셨고 
'내가 감옥에 가든지 어느 곳에 가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이 마음이 제게 너무 충만했었어요.
그래서 아무 두려움이 없었어요. 

거기서 뭐 '제발 살려주세요...' 하고 싹싹 빌어도 살려줄 상황이 아니에요. 
그래서 '네' 하고 있었어요. 빌지 않았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선생님(선교사님)께 제가 훈련을 받을 때,
어떤 기도를 했냐면, 북한에 가서 이제 조사 받을 텐데 
'하나님, 조사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을 만나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를 사전에 다 했어요. 

그러는 중에 보위부원은 '얘한테서 돈을 받아먹고, 얘를 빼줘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는 제게 '너는 감옥에 가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는
일단 병원에 데려가더라고요. 거기서 신체검사를 하게 했어요.

신체검사 해서 간이 나쁘다는 판정이 나오면, 감옥에 안 보낸다 하더라고요. 
저는 뭐 간이 아픈 적도 없었고, 아무튼 여기저기 검사하고 다니는데 
저는 '나는 아픈 데가 없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 보안원이 막 놀라는 거예요. 
'너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병원에 데려가면, 사람들이 막 엄살을 부린대요. 
'여기 아픕니다. 저기 아픕니다' 하는 거죠. 감옥에 안 가려고요. 

그런데 저는 '뭐 아픈데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놀라는 거죠. 
저는 나중에 알았어요. 저도 알았으면 엄살을 좀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한 1년 살다가 나올 작정을 하고 있었거든요.

병원 감사를 마치고 이 보안원이 
'너네 집에 이제 누가 찾아갈 거다. 집에 가서 기다려라'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너무 신기했어요. 
이거는 100% 보위부에 구류돼 있어야 되는 그런 상황이었고 
그런데 저를 '집에 가라'고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집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 나는 감옥에 가서 한 1년을 살다가 나와야 될 것 같다'고 얘기를 하니까 

저희 가족들이 막 울고 '네 몸 상태가 지금 말이 아닌데,
거기 가면 너는 일주일도 견디기 힘들다'는 거예요. 

'거기 가면 네가 죽어서 나올 수도 있다'라고 말하며 우는데 
제가 그때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이 한마디를 했어요. 

그러니까 막 울다가 침묵이 흐르는 거예요. 가족들이 다 울음을 멈췄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이런 표정들이었죠. 

그리고 제가 한 마디를 더 했어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 이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식구들이 '얘가 좀 이상하다' 이러면서 지금 듣는 거예요. 
그러다가 저희 언니가 있는데, 놀라운 고백을 하는 거예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이렇게 제 말을 같이 받아 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너 미쳤냐?' 이럴 줄 알았는데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얘기해 주더라고요. 

(언니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소리인가요?)

아니에요. 언니는 전혀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그냥 그렇게만 말하고 끝났어요. 

다음 날 아침에 저희 마을 청년 비서가 찾아왔어요. 
'야, 너 어느 날 없어져가지고,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막 여기 불려가고, 저기 불려가고...' 

그러면서 '사실은 너를 담당한 보위지도원이 우리 매부야!' 
이러면서 '돈 얼마 주면 너를 빼주겠다' 하면서 북한 돈으로 20만원 요구했어요. 

(그게 중국 돈으로 얼마죠?) 

글쎄 이것도 제 간증이에요. 
그 선생님이 저를 북한에 파송하면서 돈을 주셨어요. 달러로 6백 불을 주셨고 
중국 돈으로 5백 위안을 주시더라고요. 

'이 달러는 가져가서 너도 쓰고, 네 주변에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돕고
이 5백 위안은,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걸 써라' 이렇게 하면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따로따로 주시는데, 저는 이해가 안됐어요. 
'하나님이 지켜주실 건데, 무슨 어려움이 있지?' 
북한으로 넘어가기 전에는, 진짜 아무 것도 몰랐어요.

저는 너무 단순했어요. 가자마자 제가 돈도 엄마에게 다 넘겨주고 
5백 위안을 바꿔오라고 했어요. 
엄마가 바꿔왔는데 그때 환율로 북한 돈 20만원을 바꿔왔더라고요. 
당시 100위안에 북한 돈 4만원했거든요. 그래서 딱 20만원이었죠. 

'하나님이 모든 걸 아시는구나... 하나님은 정확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20만원을 줬잖아요. 그 돈을 받고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너는 내일부터 출근해라!' 

그러니 제가 진술서 쓴 것을 은밀하게 다 치워놓은 거예요. 없애버린 거예요. 
그냥 불살라버리고, '이 사람은 그냥 정상으로 출근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조사가 마무리되고, 그 저녁에 제가 가족들 앉혀놓고 얘기를 했죠. 
'내가 북한에 돌아온 이유를 지금부터 얘기하겠다.' 그때부터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사실은 이렇게 이렇게 한국에 가게 됐는데 
그걸 포기하고 여기 온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김일성에게 속혀서 살았다!'

이 얘기를 하니까 저희 엄마가 깜짝 놀라는거에요. 
'야 너 그 얘기를 하면 죽지 않느냐?' 
김일성, 김정일 말은 꺼내지 말라는 거죠.

그러면서 제가 '지금껏 우리가 가짜 하나님을 그냥 그렇게 섬기면서 
죄악가운데서 살았다. 우리가 속혀서 사는 거다.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이 계시고...' 

이런 얘기를 쭉 했어요. 
제가 왜 북한에 돌아왔는지..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셨고... 가족들은 이걸 다 본 거예요. 

'내일 당장 감옥에 간다' 했는데, 내가 고백한 대로 살아났잖아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 이 얘기를 한 그대로 되었잖아요. 

그러면서 하나님 얘기를 하니까, 가족들이 그냥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가 성경하고 MP3를 다 보여줬어요. 

한국의 많은 가수들도 우리보다 못해서 하나님을 믿는 거 아니다. 
이분들도 다 하나님을 알고, 이런 찬송가도 부르고... 다 얘기를 해줬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전세계에 얼마나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천국과 지옥 간증 테이프도 들려줬죠. 

(반응이 어떻던가요?)

놀라워하지죠. 그러면서 다 믿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좀 우려했던 것은, 저희 형부 였어요. 형부는 남이잖아요. 
혹시 형부가 이거 잘못 생각하고, 고소해버리면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고민을 많이 했고, 저희 선교사님이 저를 북한에 보내시면서도 
'형부는 복음전할 때 기도를 많이 해라!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이게 노출이 안 되도록 하면 좋겠다!' 형부는 남이니까요.

근데 왜냐하면 형부가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어요. 
언니, 형부, 조카, 남동생, 엄마 ... 다 같이 살고 있었어요. 

한 집에서 어떻게 따로 눈을 피해서 예배드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뭐 하나님이 지켜 주시라고 이렇게 기도 하고 
제가 얘기를 했는데, 형부가 제일 믿음이 좋았어요. 의외였어요. 
이게 사람 생각하고는 다르더라고요. 

형부가 운전을 했었는데, 자기가 가다가 위험한 상황이 오면 기도 했었대요. 
나중에 얘기하는데, 아무튼 믿음이 제일 좋았어요. 그럴 정도로 확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면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주일은 예배드리는 날이다.' 
그리고 예배 드리니까, 그 때 낮에는 누가 집에 올지 모르니까, 예배를 못 드려요. 

저녁에 딱 예배시간을 정해놓고, 그때 딱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조용히! 
그러니까 저희 예배는, 여기서처럼 찬송을 마음껏 부르면 얼마나 좋겠어요?

북한에서 저희 예배드리는 상황은, 완전 예배가 신음소리였어요. 
신음으로 예배를 드렸죠.

찬송부를 때도 거의 안 들리게 웅얼거리며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이렇게 그냥 소리도 못 내고 찬양을 했어요. 

찬송가를 이렇게 가족들에게 배워주면서 
'찬송합시다.' 이렇게 소리가 이 들릴락말락할 정도예요. 
크게 못 부르는 게 옆집에서 다 들을까봐요. 옆집에 다 붙어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주일마다 신앙을 지켰죠. 

(그 예배에, 하나님의 은혜 같은 게 임하지 않았나요?)

네, 저는 지금도 간증하면서 고백하는 게 그래요. 
예배 형태나 상황을 보면, 정말 화려한 예배가 아니고 
초라한 예배라고 저는 표현을 해요. 

성경 하나 가운데 놓고, 주보는 제가 주중에 몰래 몰래 종이에다가 

찬송가 다 적고 따라불러야 되니까 찬송가 가사를 다 적는 거죠.

그 주보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줘서 해야 되니까 
손으로 써서 주보를 만든 거죠.

(발각되면 증거물로 다 남는데도.. 주보를 만드셨네요) 

네, 예배드리고 나면, 그걸 다 태워버리죠. 
한 장을 놓고 여럿이 돌려 볼 수는 없으니까, 일일이 손으로 썼죠.

성경을 가운데 놓고, 그리고 주보를 보면서
그걸로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고 이렇게 하는데 
'정말 초라한 예배, 한마디로 초라한 예배지만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보실까?' 이 생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선생님이 제게 가르쳐 준 기도가 어떤 기도냐면.. 순서가 있어요. 
첫번 째,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땅을 위해서 기도하라 
두번 째는, 한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세 번째는, 우리 주변 나라들, 중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일본을 위해서 기도 하고 
세계적인 기도가 다 나와요. 

그리고 마지막에 가족기도 하고, 맨 마지막에 제 자신을 위한 기도,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끝나요. 

그렇게 기도문을 쭉 써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신음소리로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수가 없죠. 

다 눈물로 기도드리고...

같이 예배드리는 분들이 다 눈물로 예배를 드렸고... 
그 예배 자체가 긴장이 되고, 다 이게 목숨 건 기도를 드리는 거죠. 

(그렇죠. 예배 드리다가 들키면 죽으니까요!
지금 그런 식으로 들어가서 새벽예배, 주일 예배 하시던 분들이 
들켜서 돌아가신 분들을 제가 여러분 알거든요. 
예배를 드리다가 현장에서 잡히는 거에요. 현장에서 잡히면 죽거든요. 

그러니까 그 현장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이걸 알거든요. 
자기들이 들키면 죽는다는 거! 

그런데도 막 예배를 드리는 그 간절함,
그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까지 예배 드리고 싶은 그 마음! 
와~ 대단하네요! 진짜 하나님의 은혜네요.) 

그렇죠. 이제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제껏 속혀서 산 것은 누구나 다 알아요. 
지금 북한 사람들은 '우리가 속혀서 사는 구나' 한국 드라마를 봐도 그렇고... 
이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여기서 복음이 들어가면 '이게 진짜로구나!' 하고 받는 거예요. 

속았다는 것까지는 아는데, 
'그럼 진짜가 뭐냐?' 하는데
복음이 딱 들어오면, '아 이게 진짜구나!' 하는 거죠.

(야~ 오늘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북한의 지금 영적 상황을!) 

그전에는 그냥 속았구나.. 이런 허무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살아갔는데 
진리를 모르죠. 
그런데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할 수가 없으니까... 그게 안타깝죠.

(그러면 그렇게 예배 생활을 시작했잖아요. 
하나님의 은혜, 축복 이런 거는 혹시 안 오셨어요?) 

주일마다 그 예배 지키는 것만큼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예배 드릴 수 있게 해주신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배를 드렸다는 것 자체가 축복인 거지요. 

(그러면 가족들은 지금 아직도 거기서 살고 계시나요?)

아니요. 지금은 다 한국에 왔어요.   *그때는 2006년 경


(가족들을 전도한 다음에, 또 누구한테 이렇게 복음을 전했나요?)

제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는 정말 심사숙고를 해야 되고 
제가 제 목숨을 내놓는 거에요. 그야말로 쉽지가 않았어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저희 집에 자주 놀러오는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그 친구는, 저희 형부 부부에게 놀러 오는데, 나이가 저랑 같았어요. 
그 친구 집도 너무 가난하게 살았어요. 

'어느 날 이 친구에게 복음을 전해봐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을 하면서, 기도를 하면서, 
'정말 이 친구에게 전해야 될까? 이 친구가 혹시 마음을 잘못 먹어서 
고발이라도 하면, 우리 가족이 다 죽는데...' 

어느 날 이 친구가 또 놀러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저주저하다가, 그냥 처음에 물어봤어요. 

'너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혹시 알아?'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는 '죽은 다음에는 끝이겠지 뭐!'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끝이 아닌데...' 이렇게 얘기했어요. 
'끝이 아니면 뭔데?'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중국에 가서 들은 얘기인데 
죽은 다음에 또 어디에 가는 곳이 있다던데?' 
이러면서 제가 그냥 가볍게 말을 던지면서, 그러면서 반응을 봤어요. 

그러니까 너무 호기심에.. 제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이러면서 듣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그냥 그 친구가 '어...' 하고 그냥 멈춰서, 그냥 입만 벌리고 굳어졌어요. 

한동안 아무 말을 안 하는 거에요. 충격을 먹은 거예요. 
이런 얘기를 처음 들은 거예요. 

친구는 '어~' 이러고 있다가 
제가 '너 어떻게 할래? 믿을래?' 그러니까 
그냥 멈추어서 그냥 굳어있다가 '믿어야지!'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같이 기도해야 되는데.. 기도할래?' 하니까 하겠대요. 
그래서 무릎을 꿇어라 하니까 무릎을 꿇더라고요. 
그래서 영접기도를 했죠. 

그래서 같이 '나는 죄인입니다...' 이 영접기도 하고 
'예수님, 나의 주님으로 이제는 내 삶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인도해주세요!'

정말 영접기도를 하고 다 마쳤는데, 친구가 울더라고요. 

(아~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역사하셨군요!) 

네, 울더라고요. 뭔가 몽둥이에 한 대 맞은 것 같다고... 
머리에 아무 생각도 안 난대요.

그러면서 '이제까지 속아서 살아왔구나!' 

제가 '우리 가족들은 이렇게 일요일만 되면 이렇게 예배 드리는데 
너 올 수 있니?' 하니까, 친구가 오겠대요. 
그래서 와서 같이 계속 예배를 드렸죠. 

제가 가서 설을 지냈는데, 신년예배까지 같이 드렸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복음 전하는 데는 희생이 따르고 
희생이 없는 전함은 없고 
말로 복음전하면 사람들이 쉽게 안 받아들여요. 

한국도 마찬가지고요. 
한국 성도님들이, 가족 중에 믿지 않는 가족들이 있다면... 희생을 해야 돼요. 

그냥 말로 복음은 전해지지 않아요. 내가 희생을 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믿게 하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 같아요. 

(맞아요. 아멘!  그 말이 맞는 게 
희생 없는 복음은 능력이 없어요.
진짜 성경에 나오는 그 사도바울의 그 능력, 
또 엄청난 희생속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거든요. 
그걸 깨달으신 거죠?)

네 저는 그거를 확실하게 알고, 희생이 없는 복음은 없고, 
지금은 말로 많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만 
그게 이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저희가 복음통일이 된다고 해도,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건 통일의 문이 열려도, 우리에게 꽃길이 활짝 열리는 게 아니라 
희생의 길이 열리는 거에요.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데는, 이건 좁은 길이고, 고난의 길이고, 희생의 길이에요. 
그래야 생명으로 가지.. 내가 꽃길만 걸어가다가는 생명이 없어요. 

그 꽃길만 가다가는 지옥이고, 
좁은 길로, 험난한 고난의 길을 갈 때, 
그 길의 끝에서 하나님이 생명의 길로 맞아주시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 것도 
환난을 말씀하시면서 '환난 가운데서도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이렇게 계속 말씀하시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희생을 각오해야 되고, 환난을 각오해야 되고 
넓은 평탄한 길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야~ 정말 큰 깨달음입니다. 정말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입니다!
거기 북한에서 깨달으신 거죠?)

네 거기 가서도 받은 거고, 지금도 계속해서 받고 있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 너무 감동스러워요.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한국으로 오시게 되신 건가요?) 

제가 한 1년 반동안 북한에서 예배 드리다가, 넘어오게 된 계기는 
선교사님과의 연결이 끊겼어요. 

한 1년 동안 단절이 돼서, 선교사님과 연결이 안 되고 
계속해서 이제 북한의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제가 가지고 갔던 재정도 얼마 안 되니까 
그걸로 장사를 한다 해도 더 어려워지고 
누군가가 돕는 손길이 없으면 어려워요. 

그래서 제가 '다시 중국에 가서 가족을 도와야 되겠다'
이런 마음으로 제가 다시 넘어가게 된 것이죠.

(만약 그때 정기적인 후원이 계속 갔더라면, 그냥 있었겠네요.)

네. 그냥 거기 있었죠. 누군가가 돕는 손길이 있어야 될텐데 
돕는 손길이 없으니까, 저라도 중국에 나가서 도와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탈북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북한에 지하교회가 있다. 지하성도들이 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지만 
몇 명이 있다.. 이거는 알 수 없어요. 

몇 명을 두셨는지는 하나님만 아시고 
은밀하게 곳곳에서 예배드린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가 이 채널을 통해서, 아주 일부분만, 조금씩 이렇게 보여드리지만 
사실 굉장히 많아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놀랐던 게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이상으로, 하나님이 많은 일들을 해 오셨고 
그곳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지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지금 북한에서 지금 그렇게 생존해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 세상이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남한 사회나 국제 사회가 이것을 알아야 된다는 걸 
제가 절감하고 있어요...)

특별히 한국교회가 알고, 더욱 깨어서 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실 거예요. 

(그리고 북한선교를 희생없이 감당하려고 하는 그 태도부터 고쳐야 된다고... 
그냥 말로만 하는 복음, 그건 안 된다는 것을 
그걸 이제는 몸으로 이렇게 들어가서 체험을 해봤잖아요. 

가족들인데도 불구하고,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희생없이는 저들한테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 귀한 깨달음을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교사님! 오늘 이렇게 참 긴 시간 
저희한테 큰 깨달음과 큰 감동을 주셨어요.) 

저도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