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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1장, 종말에는 예언이 위로를 준다

LNCK 2022. 11. 8. 14:12

◈나1장, 종말에는 예언이 위로를 준다                   여러 설교 정리
                                                                                        ◈나훔 설교 모음 
1~8절,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
9~15절, 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


◑본몬 해석

 

▲1.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 (1-8절)

1~8절은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일 뿐만 아니라 
크신 권능을 가지신 분이심을 천명합니다.

1절,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나훔’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훔은 ‘엘고스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엘고스’라는 지명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엘고스가 예루살렘 서남쪽의 작은 마을이라고 하기도 하고,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이라고도 합니다. 
심지어 니느웨 근처의 마을로 보기도 합니다. 

만약 엘고스가 갈릴리 근처의 작은 마을이라면, ‘가버나움’을 뜻할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나훔’이 ‘위로’라는 뜻이니,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엘고스가 어디를 뜻하든지 간에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같이 
모두가 다 아는 곳에서만 사람을 부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집안이 어떠하든,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 
우리의 소유가 어떠하든, 그 모든 것을 다 합해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 역사하심은 그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니느웨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천명하십니다.

2절,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와 민족에게 그들의 고유한 영역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역을 침입해 와서 자기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북이스라엘을 침략해 와서, 
빼앗아서 갔고, 또 유다도 빼앗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복하다’라는 ‘앙갚음하다’, ‘벌주다’, ‘원수갚다’입니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니느웨(아시리아 제국)에 대해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향하여 ‘자기를 거스르는 자’, ‘자기를 대적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행을 저질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마치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살기등등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을 향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3a절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좀처럼 노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권능도 한없이 많으시지만, 
결코 죄를 벌하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분은 아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신 것을 
아주 강력하게 보여주는 예는 니느웨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요나 시대에 니느웨를 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을 보고서 
심판을 미루어 주셨습니다. 

1-2개월이나 1-2년이 아니라 100년도 넘게 미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참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면, 나훔은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합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어떤 권능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3b-5절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하나님께서 다니시는 길이 ‘회오리바람과 광풍’이라고 하십니다. 
태풍이 강하게 불면, 간판도 떨어지고, 나무가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히죠. 

미국 토네이도 바람은, 소도 회오리 바람 속으로 빨려 올라가고, 
심지어 거대한 유조차 트럭도 뒤집힙니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런 바람이 휘몰아치면 속수무책입니다.

또 바다와 강도 말리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의 예는 출애굽 때의 홍해를 가르시고 말리신 것과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요단강을 말리신 것입니다. 
이 외에도 가뭄, 지진, 해일 등등의 천재지변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고, 한없이 작음을 확인합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은 인간을 심판하는 도구도 되지만, 구원하는 도구도 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요단강이 마르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구원, 그 자체이었습니다. 

애굽에 있었던 10가지 재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속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삶이 눈물의 골짜기의 연속인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대로도 함께 준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7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의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에 대한 주권과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시지만, 
그것을 맹목적으로 쏟아부으시는 분은 아니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새겨야 할 것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과 
전능하시기 때문에 피할 만한 곳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지만 전능하신 분이 아니시라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선하신 분이 아니시라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오히려 굶주린 사자 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겠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충분히 피할 곳이 되실 정도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우리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2. 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 (9-15절)

9-15절은 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에 대해 증거합니다.

9절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1절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니느웨가 무슨 계획을 꾸밀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무효화시키고, 
니느웨를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1980-90년대에 최고의 복서 중에 한 명이 마이크 타이슨입니다. 
그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입(얼굴)에 펀치를 맞기 전까지는”
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라고 말했죠.

니느웨가 하나님의 펀치를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모든 계획이 사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절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엉클어진 가시덤불과 술에 취한 사람과 같아서 결국은 불에 타 버린 
마른 지푸라기처럼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엉클어진 가시덤불은 풀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취한 사람은 온전함을 가질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불에 타버린 마른 지푸라기는 회복 불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니느웨가 다시는 유다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다’고 말씀하십니다. 

표면적으로는 니느웨가 괴롭혔지만, ‘니느웨는 하나님의 도구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통해서 유다를 바르게 세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마지막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하나님께서 니느웨에게 더 이상 이름이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손이 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또 우상들은 다 없애버리신다고 합니다. 
사실 본래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까지 파 놓겠다고 하십니다. 

즉 앗수르 제국, 니느웨라는 존재에 마침표를 찍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네가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네가 가볍기 때문이다’입니다.

다니엘에 보면 바벨론 왕 벨사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그릇에다 
술을 따라 마실 때에 벽에 손가락이 나와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썼습니다. 
‘데겔’이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다, 가볍다’의 뜻입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은 세상 그 어떤 나라보다 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니느웨보다 더 무거운 도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지푸라기처럼 가벼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릅니다.

니느웨에 심판을 선언하신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는 약속을 선언하셨습니다.

15절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유다를 그토록 괴롭히던 니느웨가 물러가고, 평화를 누리게 될 때에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으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니느웨에게 망하고, 유다도 니느웨에게 고통을 당했던 이유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세속적 가치관을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바르게 그리고 제대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트러짐은 모든 것이 흐트러지는 것의 출발과 마침이 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회복은 모든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의 출발과 마침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뒤, 
100-150년 후의 니느웨의 모습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은 목자가 찾아낸 잃은 양과 같았고, 
또 여인이 찾아낸 잃은 드라크마와 같았는데, 
세월이 지나간 후에 그들은 다시 목자를 거부한 양과 같았고, 
다시 여인의 손 안에 있기를 거부한 드라크마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무리 경고를 해도, 그들은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신앙은 한 순간 회복된 것으로 마쳐지지 않고, 회복된 것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신앙의 선을 잘 지켜가는 사람이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께 초점 맞추고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적용1. 하나님의 심판은 바위를 들어서 치십니다.

산에서 집채만한 바위, 그 보다 더 큰 바위가 날아와서 친다고 가정해 보세요.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1) 본문의 니느웨에 대한 심판이 그렇다는 거죠!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나 1:6).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니까 바위가 깨어집니다.
등산을 하다 보면 큰 바위 조각들이 깨져서 위에서 날아 옵니다.
그러면 깨져서 날라오는 바위를 피해야 합니까? 그냥 맞습니까?
피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성경에 보면 차라리 그 바위를 피하지 않고 
맞아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죠.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 6:16~17).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악인들은 차라리 바위가 떨어져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다니엘이 본 환상에 의하면, "뜨인 돌"이 날아와서
거대한 신상(제국들을 의미)을 깨서 가루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뜨인 돌 : a stone was cut out without hands

단2: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위 구절에 '돌이 날아왔다'는 말은 없지만, 아마 날아와서 신상을 쳤을 겁니다.
세상의 제국들이 아무리 크고 거대하다 해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때가 되면 무너뜨려버리고, 가루로 만든다는 거죠.

본문에 앗수르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나훔이 예언하고 있죠. 1:6

4)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돌(바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반석, 또는 바위이신 예수님은 양면성을 가집니다.
믿음이 진실한 사람은, 반석(예수님)위에 집을 지은 자같이 견고합니다. 마7:24

그러나 불순종하는 악인에게는, 예수님이 심판의 바위가 되셔서
마7:24절이 아니라, 마21:44절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가루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적하다가
마7:24절이 아니라, 마21:44절이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결과는 '가루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본문의 앗수르는, 마21:44절이 적용되어져 버렸죠.
그 위세만 떨치지 않았더라도.. 그런 비극적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앗수르에게 바위가 깨어져서 날아가겠지만
이어지는 7절에, 같은 바위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산성이 되어주십니다.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니느웨의 멸망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2~3장에서 자세히 나오므로 
그때 살펴보겠습니다만, 간단히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휙휙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퀴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2~3

한때 여러 세기 동안 고대 근동을 휩쓸며 
많은 성읍들을 피로 물들이고, 시체를 더미로 쌓아놓고 자랑했던 니느웨가 
자신들이 한 것을 똑같이, 고스란히 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에는 니느웨 에서 시체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는 
거리를 다닐 수 없을 만큼 전멸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적용2.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은, 
곧 의로운 자에게 베푸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나훔은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의 메시지를 전하며  *1:15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와 저력을 주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명예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큰 위로를 줍니다. 

그러므로 이미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은 
어떠한 심판이 와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나훔서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의 심판을 선포하는 책입니다. 
'나훔' 이란 이름의 뜻은 '위로' 인데요. 

어떻게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위로'의 선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앗수르의 심판과 멸망이, 곧 이스라엘의 '위로'라 되기 때문입니다. 

나훔서의 저작 연대가, 나훔서에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추정하기를 북왕국의 멸망 이후의 어느 시점이라고 보는데.   *주전722
당시 남왕국은, 앗수르의 침략 앞에 풍전등화와 같이 놓여 있었으므로
이렇게 앗수르의 패망을 예언한 나훔서는, 이스라엘에게 큰 "위로"가 되었겠죠!

세상 끝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무조건 두려워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에서 예언하는 것은 '세상 나라의 멸망'입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나훔서처럼,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나타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월절이 애굽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난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홍해의 기적도, 애굽에게는 심판이었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되었죠. 
그래서 미리암과 성도들은, 홍해를 건넌 후 바닷가에서 노래를 불렀죠. 출15장 

물론 우리가 세상의 멸망을 고소해한다는 뜻은 아니고, 슬퍼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세상 심판의 역사와 더불어 나타남은 부인할 수 없죠.

▲나훔 선지자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형벌 받을 자를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고 선포합니다.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출34:6절에서 인용된 '하나님의 성품(속성)'인데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본문 나훔서 말고도, 시편과 요엘서 등 여러 곳에서 재차 인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족해서 죄를 지었을 때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지만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달게 받아라.. 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까지.. 자기 진심을 다해 회개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기만 하면, 내 죄가 다 용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회개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야 됩니다.
그게 받아들여진 자에게는.. 하나님이 사죄의 확신을 주십니다. 

△영화 <미션>에 보면, 메두사 라는 노예상이
치정 문제로 자기 친동생을 살해하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크게 회개하고, 회심하게 되었으나
좀처럼 자기 마음의 죄책감에서 자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회 선교사를 따라서 정글에 복음 전하러 가는데
무거운 짐을, 마치 자기 죄짐처럼, 다 들쳐메고는 
그 미끄러운 폭포를 기어서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애처러운 모습을 보고서
원주민이 폭포 위에서 칼로, 그의 밧줄을 끊어줍니다.
그때 메두사는 울다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웃음을 짓습니다.
그 순간에 사죄의 확신이, 성령으로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적용3.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라

앗수르의 침략 앞에 절망에 빠진 남유다는
나훔 선지자의 계시(또는 묵시)를 받고서
희망에 부풀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현실적 절망에 처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주로 성경에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시를 풀어서 설명해 주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아래 단락 출처-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영원하리라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과는 아무른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고 늘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이 땅이 
장차 무너질 성이라고 합니다. 불에 타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있고 또한 살려고 하는 세상은 
다 눈에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조차 
눈에 보이는 대치물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롬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이미 구약에서 나훔(대 앗수르) 하박국 (대 바벨론)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강대국들이 큰 소리를 치면서 약한 나라를 괴롭히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자기들보다 더 의로운 나라를 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어떻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이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합2:4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37편에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투기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다고 말씀하죠.

그러면 지금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소망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나훔 선지자의 묵시의 말씀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앗수르가 도저히 무너지지 아니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앗수르가 망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나훔 1:9-10절을 봅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세상만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망할까봐서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가 온전히 멸하시는 것입니다. 

마른 지푸라기처럼 다 타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말씀이 이러하여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이 세상이 망하지 아니하도록 끊임없이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인구가 자꾸 줄어드니 
계속하여 출산장려책을 내어 놓습니다. 
인구가 작아지면 그만큼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인구가 많아서 문제라고 산아제한을 하였습니다. 
결국 세상이란 그 시대마다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계속하여 강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진으로 인한 해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조기 경보체계를 구축한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책들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통할 것 같습니까?

이사야 40:15-17절입니다.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6)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16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열방은 통의 한 방울의 물, 저울을 적은 티끌,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같이 
여기시기에 모든 열방이 없는 것 같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들의 세계를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어서 영원하겠노라는 
그 죄의 유혹을 이겨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력이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을 영원한 것처럼 여기도록 
악을 꾀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랍사게가 그렇게 사악하게 유혹했죠↙)

나훔서 1:11절입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특한(사악한) 것이란 벨리알을 말합니다. 
벨리알은 바울사도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단의 별명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런 벨리알이 본문에서는 앗수르의 왕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왕들 중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이름이 있는데 
그 중에 산헤립의 경우를 봅니다.

왕하19:20-22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2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훼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쳐들어와서는 얼마나 교만한지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들의 신들이 그 나라를 구원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유다를 향하여 항복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 대한 대적이요 교만이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는데 
그 이유는 다윗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성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하루 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 18만 오천 명이 
다 송장이 되고 산헤립은 돌아가 그 신 니스록 묘에 경배하다가 
자기 신하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것입니다.

나훔 1:12-13절입니다. 앗수르왕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 지라도 
반드시 멸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징계하기 위하여 
앗수르를 몽둥이로 사용하셨으나 
이제 몽둥이를 사용한 후에는, 그 몽둥이를 부수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셔서 
하나님만을 의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나훔 1:14절입니다. 앗수르에 대하여 명하십니다. 
그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아니할 것이며 그 신들과 우상들이 다 멸절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처럼 
앗수르는 역사 속에서 멸망당하여 사라졌습니다. 

어느 정도로 사라진 것인지 니느웨성이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되지 까지 
성경에 나타난 앗수르의 내용이 꾸며진 이야기가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나훔1:15절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다
고 합니다. 앗수르가 망한다는 소식이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그 당시에 무너지지 아니할 것 같은 강대국이 무너진다는 것이 
아름다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그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앗수르가 망하고 바벨론이 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하게 절기를 지키거나 서원을 갚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아름다운 소식은 미루어졌습니다. 
부분적으로 회복되기는 하였지만 아름다운 소식은 
또다시 미래로 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2:7절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 아름다운 소식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는 소식입니다. 
그 구원의 소식은 이사야 52장과 53장에 나타나는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이 성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제길 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그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는 것으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10장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이 아름다운 소식을 
복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서 기뻐하기 보다는 
안색이 변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복음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아 망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앗수르만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세상의 것들이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쁘고 아름다운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아름다운 소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서 이 세상의 무너질 것들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고 경영하실 그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계시록 18장에 보시면 바벨론이 무너지는 내용입니다. 
그 바벨론은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이 다 집중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 곳이 무너질 때에 그 바벨론을 의지하고 있던 자들이 함께 통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사모한 자들은 오히려 기뻐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런 자들이 모여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서로 격려하는 것이 
복음안의 교제이며 예배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기쁘고 아름다운 소식으로 들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