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이 세상 바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 속으로 가져오셨고,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살지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대면해서 만나고, 거기서 받는 힘과 능력으로 이 현실 세상을 사는 것이라는 내용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왜냐면 오늘날 우리 복음이 너무 '실생활, 실용적인 면'에 치유쳐 있거든요/주.
(*직접 유튜브로 들어보세요. 녹취록만 읽어서는 무슨 얘긴지 모릅니다)
갈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러분이 복음을 다 받으셨습니까? 그런데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받으셨죠. 대부분 우리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받은 복음'이라고 위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우리가 받은 복음은 아마 '다른 복음'일 가능성이 큽니다.
복음은 무조건 누구를 통해, 내가 전달되어 받았던지, 예수께 받은 것입니다.
본문이 사도 바울의 특별한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그렇게 사도바울이 당한 처지를 똑같이 당하지 않아도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께 받은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는 게 아니고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된다.. 라는 잘못된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때와 마찬가지로 교인들을 복음안으로 지키기 위하여,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때 이 거짓교사들이 싸움을 걸면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공격을 가할 때 사도바울의 사도권도 역시 같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12제자의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서 공격을 한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하게 될 때 그 사도권은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만난 예수님께 받은 것이며 또 그런 사도권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내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께 직접 받은 것이다.' 1:12
왜 이 얘기를 합니까? 12 사도는, 모두가 복음 사건 자체이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증인 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직접 증인으로서 본 것이에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 광경을 직접 목도 하신 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혀 그런 직접적인 목격담이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말에 대해 반박하기 위하여 '나도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내가 전하는 복음도 12제자가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전하는 것과 똑같이 나도 예수님의 직접 증인이다!' 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12제자가 복음을 전할 때, 자기가 직접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계속 그 목격한 내용이, 복음의 내용이 되어버렸단 말이에요. (일례로 베드로전후서)
사도바울은 '나도 그렇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얘기할 때, 지금 바울 당신이 전하시는 복음에 대해서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계시로 말미암았다. 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1:12
▲바울 사도가 하신 이 말씀을, 우리가 바로 이해를 해야 돼요.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 라는 얘기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적도 없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전도 받은 적도 없다는 것이죠.
그 대신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얼마든지 12제자 못지않게 사도로서 불릴 자격이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당신을 위해서 하시는 아닙니다. 당신이 복음을 전했는데,
당신의 사도권에 문제가 생기면, 의심이 생기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 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결과가 빚어지기 때문에 부득불 당신 자신을 변호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내가 그리스도와 직접 만나서 계시를 받았다'는 말씀을 하시는 이 내용을 우리가 잘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다메섹 도상에서 한번 만났을 때, 그 순간에 계시를 다 받았다'는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부터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어요. 그 박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라고 증언한 것을 통해 청년 사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이단의 괴수다. 근데 이 이단의 괴수에 대해서,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근데 그가 이 땅에 와서 말도 안 되게, 아니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라면, 백마를 타고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켜야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느냐?'
'이런 거짓을 퍼트리는 나쁜 사람들이 있는가?' 해서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했다는 얘기를 알고 있었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죠.
▲근데 청년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 예수를 직접 만났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 빛 때문에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거기에다가 계시까지 받았다고..
그런데 지금 우리가 로마서 라든지 고린도전후서 라든지 아니면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여주는 그런 사도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풍성한) 지식들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만남 한순간에 다 주어진 것은 아니고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뒤에, 다메섹 안으로 들어 갔을 때
그 다메섹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가운데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예수님의 대한 증언이 있을 거 아닙니까.
공생애에 대한 얘기, 그런 공생에 대한 얘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든, 문서로든 청년 사울은 그것을 받아들었을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다가, 자기가 알고 있던 구약의 지식들이 총망라되어
융합/연관/재편되어 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증언하고 다니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내용과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예수님에 관한 지식들, 또는 문서로 전해지는 예수님의 관한 지식들, 그리고 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사울에게 총망라 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복음이) 재편 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바울은 자기가 모든 연장자보다 '조상들의 전통' (이게 613가지 율법이에요) 사울은 그걸 누구보다도 열심히 지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 다 버리고 -구약 모세의 말씀과,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와, 당시 문서를 통해 전해지는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죽고 부활했다는 증언이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복음으로' 완전히 다른 지식의 체계로 바뀌는, 재편되어버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갔다'고 그러잖아요. 예루살렘으로 직접 가서, 사도들을 만나서, 사도들에게 복음에 대해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게 아니라
자기는 아라비아로 갔다.. 그래서 아라비아로 가서 한 일이 뭡니까? 바르게 사도로서 준비가 된 거예요. 실제로 복음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재편되어 장착된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라고 하는 복음 이론체계가 사도바울 안에서 형성되는 기간이 아라비아에 가 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게 몇 년인지는 정확히 몰라요.
3년이라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다메섹 도상을 기준으로 해서, 예루살렘을 올라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던 그 때까지 다 포함하는 것인데
그 과정 중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다메섹에 들어가서 이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복음에 대한 지식이 새로운 체계로 재편되기 시작하다가
아라비아로 가서 1년이든지 뭐 1년 반이든지.. 얼만지 모르는 기간 동안에 완전히 지식이 체계를 잡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를 만났다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는 '베드로한테 배웠거나, 야고보한테 배운 게 아니라'고 합니다.
자 이렇게 해서 복음의 신적 기원,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들은 것이 아니다.. 라는 신적 기원을 역설하십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도가 아니고, 그의 복음도, 증인의 복음이 아니라는 비난을 이렇게 나름대로의 복음의 신적 기원을 말씀하시면서 한마디로 자기와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대한 반박을 모두 깨뜨려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사도 바울이 이렇다는 것을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주님께 직접 받았다)
우리가 알겠어요.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죠.
문제는 이런 복음의 속성상,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대로, '복음을 사람에게서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사도바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즉 내게도 적용된다는 거죠.
복음의 속성을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진짜 내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서
'내가 지금 받은 이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우거나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자 이게 좀 어려운 점이에요. 우선 복음의 속성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살아 있는 동안에 세상을 떠나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만들어 질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서 만들어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세상 바깥으로 마음이 빠져나가면 천국이라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천국으로 가자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흠뻑 젖어 있는 사람으로서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불분명한 거예요.
그러므로 이 복음은, 천국에 있는 분 Jesus 이 세상으로 오셔야만 우리가 그 복음을 믿고 세상 바깥 Kingdom of God 으로 나갔을 때,
어디로 가야 되는가가 명확하게 밝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나가면.. 지구 바깥에 뭐 어디로 갈 거예요? 그러니까 지구 바깥으로 나갔을 때 도달해야 될 목적지가 되는 천국!
그 천국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복음이라는 것은 형성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면 복음은 '세상 밖으로 나가자' 라는 것인데 나가서 어디로 갈 것이냐를 모르면, 그게 무슨 복음이 됩니까? (복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천국을 향해서 가자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하죠)
▲다른 종교들 역시 '하늘'을 말하거나 뭐 공자님 같은 경우에 아주 '하늘'을 굉장히 강하게 강조 하지요.
'경천애인, 경천사상'이 두드러진 분이, 바로 공자님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천당과 극락을 얘기합니다.
이렇게 천당과 극락을 말하지만 마호메트도 말하고 있고 그들이 말하는 하늘이나, 천당이나, 극락은 실체적이 아닙니다.
근데 복음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이 아예 그 세상밖에 존재하는 4차원의 세계, 천국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어요.
그러니까 이 복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대단한 사상가나, 어떤 위대한 스승에게서도 배울 수가 없는 거죠. 복음 자체가 그래요.
사도바울은 '나는 사람에게서 배운 게 아니다' 라고 말하지만 복음 자체의 성격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신적 기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는 신적 기원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
복음의 속성을 보자면 그럴 수 있겠는데 그러나 실제로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여러분, 여러 번 제가 말씀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아시겠지만, 사실 저는 "십자가 생활화" 라는 용어를, 누구에게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부터 해서 우리가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봤듯이 십자가를 생활화 해야 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배운 신학적 스승들이나,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십자가 생활화"라는 단어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십자가 생활화"를 말해서, 여러분이 들었다고 해도 사도 바울과 똑같이 여러분은
'내가 전하는 복음, 내가 말하는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얘기가 가능하냐?
먼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반드시 나타나는 일이 뭡니까? 내 마음이, 그 그리스도 연쇄 과정 (예언-탄생-생애-죽음-부활-승천 등) 속의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그러면 그걸 받아들이면, 그 예수님과 내 마음이 연합해서 예수님을 따라서 내가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나는 세상에 대해서는 내 마음이 죽은 자라는 고백이 유지됨으로써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만을 직면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갖는 거예요. 실제로 이렇게 하나님과 개별적인(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보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느냐면
이제부터 하나님과 개별적인(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내가 십자가 복음을 얘기하게 되면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복음'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내가 지금 그 복음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그 복음이... 지금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잖아요. 그 예수님 안에 내가 들어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 복음을 '내가 누구한테 들어서 말하는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복음안에 예수님과 연합했어요.
근데 예수님과 연합하고 난 뒤로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과 -내가 복음을 남에게 전해들은 다음에, 그 복음을 받아 들여 가지고 복음 안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만난 것과... 똑 같습니다.
사도들이 직접 목격한 예수를 전하는 이유는 뭡니까? 우리는 직접 목격했지만, 직접 목격하지 않은 너희들도 우리가 만난 것과 똑같이 예수님을 만나라는 거죠.
그러므로 남에게 전달받아 배운 대로 복음을 수용했고 그 수용한 복음을 이론으로만 갖고 있고 긍정하고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내가 그 복음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연합해서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다면 지금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중에, 내가 복음을, 십자가를 누구에게 말하거나 얘기한다는 것은
이제 그것은 '내 복음'입니다. 누구한테 들은 게 아니잖아요. 지금 예수님 만나고 있으니까요.
▲이게 참 복음이 갖는 신비한 요소라는 거예요. 이것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늘 본문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1:15~16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졌을 때,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 라고 했는데,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셨다' 이게 무슨 얘기죠? 제가 "십자가 생활화"를 표방하면서, 모토로 내세우면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여러분이 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론으로만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태목사에게 들은 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함께 연합해서 세상에 대해 나는 죽은 자다!' 라는 고백, 또는 자의식을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들이 갖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실제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 앞에 가서 늘 내 마음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내 마음에 체험거리로 소망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게 세상을 빠져나가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리, 세상을 빠져 나가자는 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시기로 정하신 사람이 아니면, 들을(깨달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속담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는다' 라는 얘기를 해요. 우리가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갈 곳이 천국 밖에 없는데
천국에 내가 다리 뻗고 누울 자리가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 복음은 받아들여 지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을 전했든지 간에 생활화 할 것으로서의 복음을 전했을 때 내가 그걸 받아들여서, 복음을 생활화를 한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전했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세전에) 정했지 때문에 사람이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에 먼저 하나님이 하늘에서 (예)정했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게 해야 되겠다'고 정하셨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거죠. 누울 자리가 있기 때문에, 다리를 뻗게 된다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이 누군가 내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여 "생활화"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전했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정했기 때문에, 내가 받아들인 것이고
이렇게 하나님이 (예)정했기 때문에 내가 세상 바깥으로 나가도 갈 곳(천국)이 있다는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죠.
▲이런 경우에 '내가 사람에게서 복음을 받았다'고 얘기하지 않는 거예요. 할 수가 없는 거죠. 왜 그러냐?
예를 들면 우체부 아저씨가 택배를 가져다 줍니다. 어떤 분이 전라도 해남 김치를 택배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우체부 아저씨가 김치를 전달하셨지만, 우체국 아저씨에게서 받은 겁니까? 그 김치를 보낸 해남분에게서 받는 거잖아요.
제가 십자가 복음을 전달합니다. "생활화" 할 것으로서의 십자가 복음을 전달합니다. 여러분이 받았어요. 그러면 그게 제가 전달한 것입니까?
바울이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다'고 해요. :12 즉 하나님께로부터 복음을 받았다는 얘기가, 바로 그런 뜻이죠.
그런데 여기서 잘못된 마음을 가진 목사나, 이단들이 여기서 마치 자기가 복음을 전달하는 것처럼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체부 아저씨가 전달하면서 '이 김치 내가 보내는 겁니다' 라고 말하면 안 돼죠.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 아닙니까?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제가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저는 우체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 복음 사건을 내 마음이 받아들이도록 정하지 않으셨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목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여러분은 그 복음을 "생활화" 하고 계신다면...
그래서 마음이 실제로 자기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이 누울 자리를 하늘에 만들어 놓으시고 저같은 우체부를 통해서 복음을 전달하게 해서.. 여러분이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에게 복음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지요.
그 우체부의 역할을 '사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한 것이고 저처럼 말씀을 전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여서 생활화하며 실제로 내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 지금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었음을 본인이 느껴서
내 마음의 의식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서 육체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고
오직 내 마음에 채우고 바라는 게 하나님 뿐이라면 여러분은 십자가의 복음을 "하나님께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여러분이 십자가 복음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직접적인 주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인가를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