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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2장, 니느웨가 심판 받은 이유

LNCK 2022. 11. 9. 17:48

◈나2장, 니느웨가 심판 받은 이유           여러 설교 정리

 

B.C. 6백여년 전의 고대 도시 니느웨,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년 전의 고대 도시 니느웨가

오늘날 21세기에 존재한다고 해도 거대한 도시입니다.

 

요나서 3:2-3에 의하면 니느웨는 3일길의 큰 성읍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루에 걷는 거리를 약 40㎞로 보기에, 3일이면 120 ㎞입니다.

 

이것은 아마 니느웨 성의 둘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니느웨 도시의 지름은 약 38㎞ 정도가 될 것이고,

현재의 서울과 비교해 보면 현재 서울은 동서간 37㎞, 남북간 30이니

현재의 서울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의 크기입니다.

 

이것이 2,600여년 전의 규모라니 정말 대단한 규모의 도시가 아닐 수 없죠.

왜냐면 지금 서울은, 과거에는 작았는데 점점 커져서 이렇게 되었기 때문이죠.

 

 

◑본문 해석

 

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이 예언은 바벨론의 나보폴리살(느부갓네살의 부친) 과

메대의 연합군이 니느웨를 침입함으로 성취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패역한 니느웨를 멸망시키기 위해 예비하신

심판의 도구들이었습니다(렘 51:20).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1:15절처럼

전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약탈자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포도나무 가지를 없애 버렸지만,

주님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시며,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붉은색 군복을 입고, 번쩍이는 창을 들고, 병거를 타고 침입하는

바벨론과 메대 군사들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5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새번역) ‘정예부대를 앞세웠으나, 거꾸러지면서도 돌격한다.

벼락같이 성벽에 들이닥쳐 성벽 부수는 장치를 설치한다’

 

'그들이 엎드러질듯이 달려서...예비하도다'

본절이 묘사하는 것이 누구인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스니다.

 

혹자는 침략자를 묘사한다고 하고,

혹자는 그와 반대로 방어자를 묘사한다고 주장합니다.

문맥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공격하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본절은 앗수르의 주요 방어선이 붕괴되고 성의 중심부가 함락되는 모습이죠.

니느웨 성이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이었지만,

성벽은 홍수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그 사이에 바벨론의 공격군에게 함락될 것을 보여줍니다.

 

바벨론-메대 연합군은 니느웨의 수문을 공격하였습니다.

사실 니느웨의 왕궁과 여러 성들은 나라 한가운데를 흐르는 티그리스 강물을

운하로 이끌어 왕궁과 성들을 보호하였는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수문을 다 파괴하여

왕궁과 성들은 물에 무너지고 떠내려가고 잠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슬피 우는도다'

개역성경에서 번역된 '왕후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원문에 없고 의역이죠.

다만, '벌거벗은 몸으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굴레타'가 여성 3인칭으로

'그녀가 벌거벗겨졌다'라는 의미이므로, 이런 유추적인 해석이 나온 것이죠.

 

여기서 왕후에 대한 해석에는 3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실제적으로 앗수르의 왕후로 보는 것으로

만일 왕후가 (겉)옷을 벗긴 채 끌려갔다고 봄

 

2) 니느웨 성을 지키는 여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고대에서 전쟁이 끝나면 이긴 나라가 진 나라의 신상을 끌고 가곤 하였는데,

이러한 차원에서 니느웨 여신을 벌거벗긴 채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3) 니느웨 성 자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도를 지칭할 때

여성형을 사용하기에, 왕후가(이 단어가 본문엔 안 나옴.

‘벌거벗었다’가 3인칭 단수 여성동사이므로, 왕후 또는 니느웨 성으로 추정)

니느웨 성 자체가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났다는 것이죠.

 

어떤 해석이든지 이젠 니느웨가 부분적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가 무너지는 모습을 2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못의 비유이고, *6절

또 하나는 사자 비유입니다. *11~13절

 

못의 비유란 니느웨는 그동안 많은 물을 모아 담은 못이었는데

이젠 그 못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젠 그 못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자 비유로서 니느웨는 그동안 사자 같았는데

그 사자같은 시대도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무너진 최종 모습을 1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공허(사람)하고 황폐(물건)하여 이젠 낙담 도시가 되었고 빛 잃은 도시가 되었다."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저자는 물의 이미지를 살려서 생생하게 니느웨의 운명을 풍자합니다.

본절은 앗수르의 상황이 어렵게 되자, 썰물 때 물이 재빨리 빠져 나가듯이

니느웨 군사들은 자신의 수비 지역을 사수하라는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아나버릴 모습을 묘사합니다.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앗수르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많은 재물을 빼앗기는 모습이니다.

 

사실 앗수르 사람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은 물질로 많은 풍요를 누렸죠.

앗수르는 초대 왕 디글랏 빌레셀의 치세때(B.C.1115-1076)부터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자랑했고, 앗수르에 복속되었던 나라들은

조공 제도로 그들의 자원을 상당히 수탈당했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그러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앗수르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모든 재물을 노략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본절에서는 앗수르가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 예언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사자와 같은 잔혹성 때문이었죠(사10:5-19).

이런 의도는 다음 절에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앗수르인들이 가지고 있던 잔인성을 사자의 생태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본절은 앗수르가 자기들의 잔인함을 따라 심각한 보응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어 원문에는 '나를 보라'로 변역할 수 있는 '히네니'가 있어서,

본절이 주위를 환기시키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파견자’란

앗수르 군대는 어느 도시든지 점령하면 사람들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살려줘서 도망가도록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앗수르 사람들이 자신들을 칼로 다 죽였다고

소문을 내어 다른 나라들도 벌벌 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파견자’였습니다. 2:13

 

그런데 이제 더 이상 파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앗수르가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국가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적용

 

▲1. 하나님은 나라의 경계를 정하셨고, 개인도 지계표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걸 넘어서 남의 것을 침탈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런 사상은 신32:8, 시74:17에서 기인함)

 

신27: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2022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성경적 원리로 보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결과는 안 좋게 끝나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으니까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고, 오히려 벌주십니다.

 

△영연방 국가가 영국을 제외하고 14개국에 1억3천5백만이라고 합니다.

19세기 패권국 영국도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배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연방이 영어로 commonwealth of nations 인데,

나라들의 공동의 유익(부)을 추구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영연방 국가들은, 스스로 영연방에 잔류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탈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 국민들 주류는 영국과 왕을 존경하죠.

그것은 ‘침략, 침탈’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영국)의 모범이라 볼 수도 있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계획이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국경선이 어디냐? .. 이건 모든 국가들의 논쟁거리죠. 국경은 늘 변하니까요.

 

그렇지만 대만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강제 합병은, 그것도 전쟁을 통해서,

명백한 하나님의 뜻 위반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자기 무력만 믿고 침공했다가는... 앗수르 꼴이 날 것입니다.

 

신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위 구절의 주석 :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의 전개를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특수성을 미리 염두에 두셨던 것입니다.

한편 과거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계 열방을 섭리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날엔 영적 이스라엘 자손의 공동체인 교회를 중심으로 세계를 섭리하시죠.)

 

 

▲2.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 막강한 니느웨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은 – 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2절에서 언급된 대로 택한 나라 택한 백성(포도나무)을 살인하고 약탈하였기에

앗수르는 무너진 것이고,

9절에서 언급된 대로 은금을 노략질하였기에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니느웨 멸망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 한 나라가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을 일삼고 살인하여

한때 부강하게 되고, 그리하여 은금이 풍부하게 된다 할지라도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1.에서 살펴보았는데요.

 

이것은 국가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것을 노략질하여 그들의 눈에 피눈물나게 하고,

특히 믿는 자의 재산을 약탈하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내가 멸할 것이며, 내가 끊으리라!"

 

앗수르가 망하자 그 안에 쌓여있던 은과 금이 약탈당하는데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다고 합니다.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2:9

 

앗수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앗수르의 왕들이 외국을 지배하고 약탈하고

조공을 받고 사로잡아 온 사람들의 수자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사자처럼 자기의 굴에 먹을 것을 채워 넣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니 니느웨가 공허하고 황무하며

거민들이 낙담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고

모든 허리가 아프고 얼굴이 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0

 

그렇게 무수한 금과 은이 그들의 구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강한 군대와 무기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2:13절입니다. 여호와의 대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세상의 힘과 권력을 가지고 스스로 높이면서

하나님을 대적한 세력이 앗수르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교만하여졌습니다.

자기의 힘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력들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 각자도,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있습니다.

앗수르처럼 남의 소유를 빼앗지 않았는데도, 여호와의 대적이 될 수 있는데,

 

벧전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내가 교만하면..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시는 것입니다.

내 교만은.. 내 주변 사람들의 존영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것은 앗수르가.. 주변국의 물질을 약탈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될 ‘존경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광을’

내가 빼앗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다가..

그게 오래 지속되면... 결국에는 앗수르처럼 처벌될 것입니다.

 

△세계인들이 말하는 다혈질 국민성을 가진 나라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꼽습니다. (그 외 남미도 그렇지만)

 

그런데 반대로 젊잖고, 남의 체면을 존중해 주는 아시아 국가들도 많습니다.

한국인들이 동남아에서 현지인들과 부딪히는 것이,

한국인의 다혈질적인 문화, 또는 기질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남아 국가에서는, 아랫사람이나 직원을 꾸짖을 때도, 체면을 세워줍니다.

옛날 우리 어르신들이 그랬듯이, 은근히 꾸짖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국인이, 자기에게 돈의 힘이 좀 있다는 것을 믿고서,

동남아 국가에서 고래고래 언성을 높이고, 삿대질을 하고,

특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누구를 꾸짖으면 (관광 가서도 그럴 수 있죠)

 

한국에서는 그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도,

현지인들은 ‘자기 체면에 손상이 갔다. 체면이 아주 깎였다’라고 생각하면

정말 죽기 살기로 달려들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참고 넘어가도,

그 이후로, 자기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보복한다는 것이죠.

그만큼 체면을 중요시 여기는 문화니까요.

 

지금 ‘교만’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남을 꾸짖고 나무라더라도, 그의 체면은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거죠.

 

남의 체면까지 짓밟으면서 험한 말을 하고, 강하게 언쟁하는 것은

‘교만’이며.. 그러면 하나님의 대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벧전5:5

 

나훔서의 주인공 ‘앗수르’는

주변 나라들의 약탈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체면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렸죠.

자기 잔인성의 넘침으로... 그런 남의 체면도 무시함은.. 바로 ‘교만’이었고,

 

본문 7절에도 그런 흔적이 이렇게 나옵니다.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그래서 남의 땅을 빼앗아도 안 되고

-남의 소유물을 빼앗아도 안 되고

-남의 체면과 인격까지 짓밟는 것은, 교만의 죄, 심판 받을 죄임을 살펴보았습니다.

 

 

▲3. 징계의 막대기는.. 사용한 후에 부러뜨려지고, 버려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몽둥이”로 앗수르를 사용하셨습니다. 사10:5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시기를

다윗의 자녀들이 범죄 하면 사울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것 같이 하지는 않으시고

그들의 징계하시되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징계하시겠다 하셨죠(삼하7:14).

 

그 말씀대로 지금 앗수르에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앗수르를 멸망시키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징계를 받았고, 그 징계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막대기로 아들을 징계하지만, 그게 끝나면 막대기를 부러뜨려 버리는 거죠.

 

이사야 10:5-19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6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7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

8 이르기를 나의 방백들은 다 왕이 아니냐

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 내 손이 이미 신상을 섬기는 나라에 미쳤나니

그 조각한 신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우승하였느니라

 

11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12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위에서 앗수르가 왜 멸망하는지 그 이유를 상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징계의 도구로 쓰임 받은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스스로 자고하고, 높이며,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앗수르가 망하게 되면 야곱의 영광이 회복되는데

그 회복이란 어떤 모습입니까? 이어지는 20-23절입니다.

 

사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앗수르)를 의뢰치 아니하고 (*아하스 때 앗수르 의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이것은 우리 각자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범죄하면, 하나님이 나를 칠 ‘몽둥이’를 일으키십니다.

 

그때는, 내가 그 ‘(하나님이 세우신) 몽둥이’와 싸우려 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몽둥이를 순순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라, 내가 겸비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매를 맞아도, 덜 아프게 맞고, 매 맞는 대수 number 도 줄어들 것입니다.

 

삼하16장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피난을 갈 때

시므이가 나와서, 돌을 던지며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하며 저주를 퍼붓습니다. 16:7

 

이때 다윗이 유명한 말을 남기죠.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0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11

 

그런데 아래 말이 더 중요합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12

 

정말 하나님이 시므이를 ‘몽둥이’로 사용하셨는지는.. 퀘스천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다윗의 태도는, 그것을 하나님의 징계의 몽둥이로 받아들인 거죠,

그리고 자기가 그 매를 순순이 받으면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12

자신이 다시 회복될 것을 믿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가 인도에 갔을 때 받은 충격이랍니다.

우리를 태운 뤽사 인력거 운전사가

교통경찰에 의해 사정없이 구타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외국 관광객이 있는데도,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란 것은 그렇게 맞은 그 운전사의 이후 태도였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상심이었습니다.

 

그에게서 분노나 수치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니

그야말로 “No Problem!”이었습니다.

 

마치 돌을 던졌는데 돌이 떨어질 때 잠깐 파문이 일고는

이내 잠잠해지는 깊은 물과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깊은 못이나 큰 호수는.. 웬만한 돌이 떨어져도

파문이 오래 가지 않고 이내 잠잠해집니다.

평화도 이런 큰 마음에서 가능합니다.

 

작은 일에 일일이 시비를 걸지 않고 “그러냐?”

“괜찮아, 그럴 수 있지”하고 받아들이고 견디면 평화롭습니다.

그 어떤 것도 문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얘기하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으로

다 받아들여 참고 견딜 때.. 먼저는 나 자신이 평화롭습니다.

 

병이 들어도, 불쾌한 일이 생겨도, 시비가 생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로 받아들이고 견디면

이내 마음의 산란스러움이 잔잔해지고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안 그러고 막 내가 길길이 날뛰면

소위 요즘 뉴스에 유행하는 말인 ‘2차 피해’를

나 자신부터가 스스로 입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