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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죽습네다 P7

LNCK 2022. 11. 10. 10:58

[Ep 7.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 YouTube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P7         시119:71             <P1~P6 보기 

최광 선교사, 중국에서의 북한 선교 간증기
※꼭 북한선교가 아닌, 다른 국가 선교사역에도 도움이 됩니다.


◑제3장  땅끝을 덮는 하늘의 열정
 '북조선에 예수의 피를 뿌립시다!'


♣노크 라는 건 뭡니까? 

2000년 1월 초순, 나의 처남 나태요 목사가 우리 사역 현장을 방문하였다. 
나목사가 중국으로 출발할 때, 나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바울 선생을 성도(쓰촨성 청두) 공항에 내 보내겠다고 하며 넌지시 물었다. 

'목사님, 북한 사람들 만나 본 적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어요!'

'무섭지 않겠어요?'
'북한사람들은 잘 먹지도 못 해서 힘도 없는 사람들이라던데 뭐가 무서워요? 
제가 부담 없이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고, 말씀 전해 주고 가려고 해요.' 

나 목사는 북한선교를 해 보고 싶어하는 첫 순간부터 
자기 혼자서 북한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공항에 마중 나간 바울선생은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나목사는 어려서부터 싸움꾼인지라, 악수를 나누면서 
바울선생의 손의 촉감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번에 알아 보았다. 

그때부터 그는 태권도 공인 8단이 무색하게 잔뜩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바울선생을 따라 사역장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겁에 질렸다. 

어둑컴컴한 지하통로를 한참이나 허리를 숙이고, 기다시피 들어가는 것이 
완전히 마피아 소굴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들어가니, 희미한 불빛이 보이면서, 음산한 지하 방이 나왔다. 
사역장에 들어서자마자, 통독실에 모여 있던 형제들에게 나목사를 안내했다. 

'미국에서 온 나태요 목사라고 해요!' 본인 소개를 마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제들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다 같이 일어나서 미제국주의 침략자를 타도하자!' :)

간신히 두려움을 참고 있던 미국시민권자 나목사는,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였다. 

소리 지른 형제는, 멀리 미국에서 자기들을 만나러 사역장이 오신 목사님이 
반갑다고... 북한에서 외치던 구호를 농담 삼아 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목사는 바울선생과 한 방에서 자면서, 하도 무서워 짐짓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던 사람이요. 태권도 8단 소유자요.'

'그런 거 어디다 써요? 북한에서는 독침, 칼침으로 하지, 그런 거 안 함다'
바울선생이 이부자리를 펴며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나목사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주님께 '제발 이 사역장에서 살아 나가기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오직 이곳에서 살아 나가기만 간절히 바라며, 가까스로 오해를 참고 지냈는데 
드디어 나목사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다름아닌 2기 학생들에게 <성막 강의>를 해 주기 위해 사역장에 온 
최휘석 전도사였다. *한국인

최전도사는 작년에 1기생 북한 형제들을 만나면서  
나목사가 겪었던 과정을 이미 한 차례 먼저 겪었던지라 
첫날부터 형제들과 웃으면서 대화도 하고 말씀도 전했다. 

다음날부터 나목사는 최전도사가 의지가 되어 
사역장에 온 후 처음으로 설교도 하고, 학생들과 조심스레 이야기도 나누었다. 

학생들은 나목사가 미국에서 왔다 하니, 신기해하며 호기심에 이것저것 물었다. 
'목사님, 미국사람은 인디언 머리가죽을 벗겨서 팔아 먹는다는데 정말입니까? 
미국에서는 흑인을 개나 말처럼 취급한다는데, 정말입니까? 
미국사람은 눈깔들이 다 노랗다는데 정말입니까? 
미국이 살기 좋습니까? 미국 놈들은 왜 그렇게 우리 북조선을 못 살게 합니까?' 

나목사는 이들에게, 미국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을 제공하느라
거의 반나절을 진땀을 뺐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 해도, 형제들은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눈길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점심 때가 되자, 나목사는 학생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어 물었다. 
'형제님들이 제일 먹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오늘 사 줄게요!' 

그러자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외쳤다. 

'계란이요! 목사님 계란, 계란 사 주시오!' 

목사님은 계란을 사러 무턱대고 밖으로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손짓 발짓 온갖 시늉을 다해 시장 가는 길을 물었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대학생을 간신히 만나,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계란을 중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배워, 간신히 계란을 살 수 있었다. 

학생들이 그렇게도 먹고 싶어하니, 실컷 먹이기로 작정하고 
10KG 통에 계란을 가득 채워서 돌아왔다. 

저녁 시간이 되어, 이들이 계란으로 무슨 요리를 해 먹는지 궁금했다. 
'계란으로 뭘 만들어 먹어요?'

그러자 바울선생(이 사역장 책임자)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몽땅 삶았습니다!' 
'몽땅 다 삶았다고요?'

바울선생에게 물어 볼수록, 나목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많은 계란을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다고요?' 
'그럼요. 그거 얼마나 된다고...' 

나목사는 도저히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식사는 삶은 계란과 간장이 전부였다. 

그들은 둥글게 모여앉아, 삶은 계란이 가득 담긴 큰 통을 가운데 놓고 
계란을 하나씩 까서 간장에 쿡쿡 찍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멍하니 서서 바라만 보고 있는 나목사에게도 친절하게 권했다. 
'같이 먹읍시다. 목사님!' 

 

'많이들 드세요!'
'목사님, 잘 먹겠습니다!' 

나목사는 계란을 사 준 덕분에, 그날 석식을 삶은 계란 두 개로 대체해야 했다. 
(북한에서 못 먹던 계란을 먹느라, 형제들이 다른 밥과 반찬은 하지 않은 상황)

그들은 계란 한 통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다음 날 바울선생이 말했다. 
'나목사님, 계란 정말 잘 먹었습니다. 근데 한 번만 더 사 주시면 안 되겠슴까?' 

나목사는 계란도 사주고, 또 성경카세트테이프도 들을 수 있도록
각 사람에게 소형 녹음기도 하나씩 사 주었다. *2000년은 아직 카세트가 대세

이때부터 형제들 대하기가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고 했지만,  
일주일 후 내가 한국에서 돌아와서, 아내와 함께 바울선생 사역장으로 갔을 때 
나목사는 안색이 중환자처럼 여전히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나목사를 모시고 익두선생 사역장으로 갔다. 
여기서도 나목사는 형제들에게, 미국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하느라 
많은 설명을 해야 했다. 

익두선생 사역장 형제들도, 설명을 열심히 듣기는 해도, 곧이 믿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은, 지나가는 말이라도 잘도 믿는 사람들이 
나목사는 자기가 아무리 진지하게 설명해도 믿지 않자, 화가 잔뜩 났다. 

 

거기다가 환경이 바뀌면서, 음식이 몸에 맞지 않은 것이 겹쳐서  
그만 심한 배탈 설사가 나서 자주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런데 사역장 화장실에서 5분 가량 일을 보는 사이에 
학생들이 4번씩이나 노크도 없이 화장실 문을 벌컥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어! 사람이 있구먼' 
형제들은 목사님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제풀에 놀라 후다닥 나가 버렸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자 
나목사는 네 번째 들어온 형제에게, 작심하고 소리를 질렀다. 
'형제! 제발 노크 좀 하고 들어오세요!' 

후다닥 나갔던 형제가, 다시 화장실 문을 열고 눈이 커다랗게 된 채로 물었다. 
'목사님, 노크 라는 건 뭡니까?' 

그런 형제를 바라보며, 나 목사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용변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와, 그 형제에게 나목사는 따지듯 물었다. 
'아니 형제, 노크도 몰라서, 용변 보는 사람에게 다시 들어와 물어봐요?' 

화난 듯한 나목사의 목소리에, 그 형제 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모두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아예 단체로 물었다. 
'목사님, 노크라는 거, 그거이 뭡니까?' 

북한 사람들은 왜 그런지, 화장실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사역장에 있던 형제들 대부분이, 농촌에서 살던 사람들이서 그랬다. 

농촌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마당 구석에 있는데, 
여름이면 늘 악취가 나기 때문에, 화장실 문이 항상 열려 있게끔 해 놓았다. 
그러다 보니 문이 열려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 
노크할 필요성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목사는 커피를 마시며, 북한 사람들에 대해 너무너무 재미있어 하면서 
나를 나무라셨다. '최선교사, 자네 이들을 북한 선교사로 키울 거라면 
그래도 기본적인 인격 교육은 좀 시켜야 하지 않겠나?' 

나는 목사님께 '내가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한 기수에 대략 10개월에 불과해서
그 기간 안에 성경말씀 공부와 인성교육을 다 시킬 수 없으며 
인성교육도 처음부터는 불가능하고, 학생들이 말씀 안에서 어느 정도 변화된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나의 말을 듣자, 나목사는 다시 나에게 물으셨다. 
'그런데 자네 말은 그리 잘 믿으면서, 왜 내 말은 그렇게도 안 믿나? 
그래도 내가 목사고, 또 인간적으로 봐도 자네하고는 친척이 아닌가?' 
(*아마 학생들이 스스로 최광 목사의 제자라는 표시를 내색해 비친 듯)

 

어떻게 이들을 한순간에 다 알 수 있으랴? 
지금 같은 신뢰가 쌓이기까지, 
내가 북한 형제들과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는지 천천히 말씀드리자 
그제야 북한선교의 난이도를, 나목사는 조금씩 이해하시는 듯하였다. 


♣위기 그리고 유월 逾越

2000년 8월 중순 새로 조직된 권능선생 팀에는 

자기 담당 형제들 외에도 기풍선생 사역장에서 편입된 장만식 아바이, 
선주선생 사업장에서 편입된 정모세 형제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말부터는 한국에서 온 박명진 전도사가 성경통독을 하며 
권능선생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권능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2001년 4월에 2기 선생들을 파송 시킬 때까지 
단 한 번의 사고도 없이 사역장을 잘 이끌고 나갔다. 

가끔씩 둘러보면 살이 10Kg은 족히 빠져 뼈에 가죽만 남다시피 말라 있었다. 
그런 그를 보노라니, 나는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익두선생과 바울선생 사역장을 사천성 성도로 이사시켜 
이제 모든 사업장을 한 곳에 집결시키니 관리하기가 쉬워졌다.

(익두, 바울, 권능선생.. 이렇게 3곳의 사역장이 성도 시에 흩어짐)

그런 반면, 안전은 여러모로 위험해졌다. 
그때까지 나는 북한 보위부 특무(사복)들이 우리를 추적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중국 공안만 신경 썼었다. 

그러나 한가지 사건을 겪고 나자, 북한 보위부에서 우리 사역장의 존재를 
이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며, 

사람을 보내 계속 추적해 오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위부 특무들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우리를 추적해 오다가 
우리가 성도(쓰촨성 청두)에 전부 모여 있다는 걸 알고, 며칠 전 이곳으로 왔다. 

우리가 이곳에 산다면, 반드시 근처 한국식당에서 밥을 먹을 것이라 생각해서  
먼저 이곳 한국식당부터 돌면서 우리를 찾아 나섰다. 

우리가 연길에서 기차로 나흘이나 걸리는 중국 내륙(성도)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도, 이런 식으로 알아냈다. 

하루는 우리가 자주 냉면을 먹던 조선족 식당 주인 아저씨가 
얼마 전 자기 식당에, 보위부 특무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와서 
'북한 사람들이 모여 성경공부 하는 곳을 좀 안내해 달라'고 말했다며 
조심하라고 내게 일러주었다. 

또 오늘은 성도에 와서 친분이 생긴, 한국 기업에 근무하시는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낮에 북한 사람 두 사람이 자기 회사에 찾아 왔었는데 
자기를 만나자마자 성경공부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집사님은 순간 그 사람들의 모습이나 태도에서 섬뜩함이 느껴져 
'그런 곳은 모른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직장을 좀 마련해 달라고 또 부탁했단다. 

어떤 기술이나 특기가 있냐고 물으니 
자기들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지만 
한 가지 잘 할 줄 아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들의 눈빛이나 태도에서 살벌함이 느껴졌으며, 
대화 중에 정치 사회 문화면에서 아주 박식한 게, 

보통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음 날에는 성도시 교통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국선교사가 
공안들이 학교에 찾아와 '북한 선교사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한국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다고 하면서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급히 권능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의논하자, 권능선생이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의 아이들을 빨리 다른 데로 빼십시오. 
우리는 집 안에 꼭꼭 숨어서 머리빼기도 안 보이면 되지만 
선생님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니까 임차 발각이 됨다. 

이 주변에 중국 학교 다니는 한국 아이들을 찾으면, 
선생님 아이들 밖에 없지 않습니까. 
괜히 선생님 아이들 잡히면 일이 복잡하게 되니까, 빨리 빼 주십시오!' 

당시 성도에 있는 3개의 사역장을 동시에 이사 시킬 경비가 마련 될 때까지 
사역장들을 성도에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전 사역장에 이 사실을 알리고,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토요일에 밖에 나가서 하던 운동도 금지시켰고 
각 사역장에 조선족들만 조심스럽게 나가서, 찬거리를 사오게 하였다. 

우리 가족은 기차로 17시간 걸리는 다른 도시로 즉시 이사를 시켰다. 
짐을 꾸리고, 동시에 학교에서 수업 중인 아이들을 데려오고, 
기차표를 사고 하는 시간들은, 그야말로 피말리는 시간들이었다. 

탈북자 중에서, 고생하지 않고 쉽게 중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성경공부 사역장을 찾지 않는다. (행색이 남루하지 않은데도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특무라는 증거다)

이모 저모 말을 들어 보면, 그들이 바로 우리를 추적해 오던 
북한 보위부 특무 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다녀간 식당에서, 우리 선생들의 사역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보위부의 추적이, 우리 곁에까지 바짝 다가온 것이 확실했다.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모든 사역장이 이곳 성도에 집결한 이후에도 
사역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나의 간곡한 만류에도 끝끝내 연변으로 돌아간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 정보가 새 나갔을 수 있었다)

이들이 사역장을 떠날 때, 나름대로 여비도 넉넉하게 주고 
원한다면 통독 테이프도 한 세트 복사해 주는 등,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보냈다. 
하지만 이들이 연변에 돌아가, 보위부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포착했는지 
이상한 두 사람은 계속 우리 사역장 주위를 맴돌았다.

뒤이어 다른 해보다 일찍, 공안들의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우리를 찾고 다니는 두 사람의 출현과 함께 
일제 호구조사가 시작되었고, 예년과 달리 한 집도 거르지 않고 
철저하게 조사한다는 것이다. 

보위부는 중국에서 활동할 때, 반드시 중국 공안과 협조해서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중국 공안에 발각되는 날엔, 자동 북한 보위부에 체포되게 되어 있었다. 

 

며칠 전에는 익두선생 사역장에 공안이 찾아왔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자
그냥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익두선생 사역장 형제들은 며칠째 교통대학 운동장에서 
노숙하며 지내고 있었다. (낮에 집에 없으면, 귀가하는 밤에 들이닥치니까)

추운 겨울, 밖에서 자야하는 형제들 생각에 가슴이 아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체 사역장이 금식에 들어갔다. 
어머니를 비롯해 우리 가족들도, 사역장의 안전문제를 위해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한 사역장도 사고 없이, 이번 호구조사 와 보위부 추적을 넘길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다급히 소록도 북성교회에도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기도요청을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해 놓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탈북자 사역을 하면서, 나는 상상도 못한 수많은 어려움 겪어야만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 외로움의 시간을 당할 때마다

이 모든 과정이, 나와 우리 사역에 반드시 필요하며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사람이 감히 다 측량하지 못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버터 나갔다. 

그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기도하려고 앉으면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울고나면,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평안함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번에도 주님은 우리 사역장들을 보호해 주셨다. 
애굽의 장자를 치던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넘어갔듯이
한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철저히 조사하던 공안들이 
우리 선생들의 사역장은 빼놓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이때만큼은 사역장의 모든 형제들도, 이 일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한 사역장도 아니고 전체 사역장이 (*이 시기에 성도에 3곳 있었음)
신기할 정도로 호구조사에 걸리지 않고 지나간 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들도 잘 알고 있었다. 

권능선생 사역장에서는 공안이 방문한 날,
다같이 새벽기도를 마친 후, 권능선생이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래서 형제들이 두사람씩 차례로 나가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쉽게 눈에 띄니까)
몇 시간 후에 돌아오니, 이미 공안이 다녀간 후였다. 

바울선생 사역장에서는 고창환 목사가 오셔서 교회사 강의를 하고 계실 때였다. 
한창 형제들에게 강의를 하던 고목사에게, 갑자기 이상한 감동이 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빨리 집을 나가라!' 
마음속에서 계속 분명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지금 수업 중인데 어디로 나가?' 
처음 사역 현장에 온 고목사는, 이런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덮쳐 왔다. 

그때 자기 의지와 상관 없는 말이 불쑥 입에서 튀어나갔다. 
'다들 밖으로 나갑시다!'

순간 형제들이 눈빛이 홱 돌아갔다. 
형제들은 늘 불안속에서 살아서인지, 위험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모두 급히 사역장을 뛰쳐나가 뿔뿔이 흩어졌다. 

고목사도 북한 형제들을 따라 허겁지겁 뛰쳐 나왔다. 
고목사는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가 왜 그런 말을 불쑥 내뱉었는지도 이해되지 않았고 
자기 말 한마디에, 모든 형제들이 그토록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도 신기하기만 했다. 

 

형제들이 사역장을 빠져나간지 3분 후, 공안들이 사역장을 덮쳤다. 
공안들은 이 집에 많은 청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떼를 지어 왔지만 
바울선생 사역장 형제들 중,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형제들의 시각이 크게 달라졌다. 
보통 때 같으면 너무도 선명한 주님의 역사마저 
우연이라고 밖에 여기지 않던 형제들이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주님이 도와주셔서 일어난 기적이라고 인정하며
사역장의 일과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닥쳐도, 포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쪽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고난 속에서 
그 고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형제들은 더욱 성숙 되었다. 


♣익두선생과 쉬리 사건 

익두선생은 학생들을 잘 가르쳤다. 
학생들이 기계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토론식 학습방법을 도입하였다. 

저녁에 그날 성경통독 시간에,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과, 이해하기 힘든 구절을 
서로 발표하고 토론하게 하고 
마지막에 자신이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한 다음, 결론을 짓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이런 토론식 공부 효과는 대단했다. 
학생들은 이전 같으면 건성 건성 넘어가던 구절도 꼼꼼이 따져보며 
여느 때보다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는 학생들이 말씀을 얼마나 많이 통독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성경 한 구절이라도 정말 잘 이해하고,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애를 많이 썼다. 

통독 횟수가 신약 100 독을 넘어섰을 때는 
일과를 조금 변경시켜 운영하여,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를 주고자 하였다. 

조선족 안선생을 통해, 하루에 40분씩 중국어 공부도 시키고 
기도시간에도 일률적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대신에 
부르짖는 기도와, 묵상기도, 큐티를 자율적으로 선택해서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사역장에 말썽꾸러기 홍만식 형제를 공부시키느라 
늘 개인교사처럼 붙어서 가르쳤다. 

만식 형제는 별명이 '밥통'으로, 배만 부르면 통독시간이건 뭐건 상관 없이 
언제든 잠을 자는.. 매사에 진지함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북한에서 변압기 속에 있는 구리선을 훔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중국으로 도망쳐 나올 때, 주먹이 쑥쑥 들어갈 정도로 항문이 열린
허약 3기 (죽기 직전) 상태로 두만강을 간신히 기어서 넘어 왔다. 

처음에 5곳으로 시작되었던 2기 사역장이 
선주선생과 기풍선생 사역장의 해산으로 3개로 줄었지만 

(선주선생은 1기 학생 때, 20일 금식 후 다리가 기적 회복된 적 있음, 
선주, 기풍선생은 베트남 통해 한국행 기도, 실패하여 북송됨.
기풍선생은 감옥 살고난 후, 다시 탈북, 중국의 캐나다 선교사 아래로 들어감)

세 곳 사역장의 학생 모두가 이제 신약 70독, 구약 8독 이상을 하며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선생들에게 다음 단계인 <지도자 훈련 단계>로 들어가게 했다. 
이제부터는 단순히 학생이 아니라, 언제라도 파송되면 
사역장을 맡아 운영할 북한선교 (예비) 사역자들인 것이다. 

익두선생 사역장 형제들도 본격적인 <지도자 훈련 단계>로 들어갔다. 
익두선생은 우선 설교 훈련을 위해, 설교의 원칙을 가르치고 
철저하게 말씀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강대상에 서게 했다. 

예배 후에는, 나머지 사람들이 그 날의 설교자에게 질문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러면 설교자가 얼마나 잘 이해해서 말씀을 전했는지 
30분간의 질의응답 시간에 다 밝혀졌다. 

처음에는 대충대충 넘어가려던 형제들도 
이런 방식의 말씀 적용 훈련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더욱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이렇듯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도자 훈련을 통해 점점 더 
선생의 면모를 갖추어 갈 즈음

충신형제가 일주일간 사역장을 책임지고 이끌 차례가 되었다. 
밖에 나갔던 충신 형제가 사역장 아래층에 있는 비디오 방에서 
한국 영화 <쉬리>를 한국말 그대로 방영한다고 흥분해서 막 떠들어댔다. 

'익두선생님, 오늘만은 통독 대신 영화 보러 갑시다. 예? 
딱 한 번만 봅시다. 이제는 통독도 70독이나 했지 않습니까? 
그만하면 많이 했으니, 한 번만 좀 봅시다!'

다른 학생들도 덩달아 흥분해서, 익두선생을 조르기 시작했다. 

익두선생은 평일에는 공부하고, 토요일이나 주일에 운동하는 
지금까지 일과를 허물어뜨리기 싫었지만 
학생들이 하도 졸라대자,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그런데 큰 기대를 가지고 비디오 방에 도착해보니 
어찌된 일인지 영화는 시작부터 중국어로 더빙되어 나왔다. 

충신형제가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거짓말 했는지, 

잘못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중국어를 모르는 학생들은, 영화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충신 형제, 알아들을 수도 없는데, 사역장으로 돌아갑시다!'
'아임다. 선생님, 다른 곳에 가면 분명히 한국 말로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다른 데 가 봅시다!'

'아니 그럼 왜 잘 알아도 보지 않고, (한국 영화가) 있다는 말을 했습니까?' 

 

'아~ C 좀 봅시다. 어차피 밖에 나온 거 가지고, 왜 이렇게 까다롭게 놉니까? 
제가 다른 비디오 방으로 가서 한번 더 찾아보겠습니다.' 
충신형제는 계속 고집을 부리며 불손한 태도로 나왔다. 

익두선생은 그만 화가 폭발해서,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충신형제를 발로 걷어 차고, 학생들을 강제로 다 끌고 사역장으로 올라갔다. 

이순홍 목사(한국인)가 옆에 계셨지만, 

화가 나니 목사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생들은 평소에 강압적으로 사역장을 이끌던 익두선생에게 
가뜩이나 불만이 쌓여 있었는데 
충신형제를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자, 그간 쌓였던 불만이 터져 버렸다. 

'야 야 난 간다. 더럽다. 저런 깡패 같은 놈이 선생이야? 나 공부 안 한다.' 

'우리도 안 한다. 이따위 공부 맨날 해서 뭘 해?
선생이란 놈이 저 모양인데 우리도 안 한다!'

'우리를 내 보내 주시오!' 
현수형제부터 시작해서 사역장 학생 전원이 일과에 불참하기 시작했다. 

익두선생 사역장은, 새천년 희망 찬 새해벽두부터 (*2000년 벽두 시점,
1999년 6월부터 2기 사역이 시작되었음)
'쉬리 사건' 때문에 무겁게 가라앉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는 사역장의 상황이 역전 되기를 바라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10일 단식 기도에 들어갔다. 

스스로도 알지만 고쳐지지 않는 자기 혈기와, 
사람들을 다스리고 이끌어 가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 
하나님의 사랑과 참다운 능력과 인내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그러나 음식은 고사하고,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는 단식기도는 
몸에 있는 수분이 다 빠져나가면서, 

혀가 바짝바짝 타들어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3일까지는 잘 버티다가, 

4일 째 되던 날 욕조 속에 몸을 적시러 들어갔다가
그만 물을 한 모금 꼴깍 마시는 바람에 단식기도는 끝이 나버렸다. 

단식기간 동안 그를 보호해주시고, "선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간간히 돌려놓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지만 
침체되었던 사역장의 분위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지도자 훈련단계로 들어가면서, 이때부터 형제들을 '선생'으로 부르기 시작함)

선생들은 예배시간에 턱을 괴고 딴 생각을 하는 가 하면 
귀를 쑤시거나, 어렵게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우는 등 
날마다 영적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역력히 드러냈다. 

학생들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익두선생은 
하루하루 온몸을 쥐어짜는듯한 긴장과 압박감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는 다시 7일작정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금식기도 6일째 되던 날 
그는 형제들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일일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남자의 체면과, 선생의 권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그로서는 
정말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익두선생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진정으로 사죄하자
선생들은 그를 용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역장의 분위기는 '쉬리 사건'이 있은지 거의 보름 만에 
간신히 정상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성근선생만은, 끝까지 익두선생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리더가 되어 1주일간 사역장을 이끌 때, (돌아가며 리더를 시킴)  
통독시간에 성경책 대신 아예 중국어 책을 펴놓기도 했다. 

'성근선생, 다른사람들은 다 성경공부하는데, 혼자 중국어 공부하면 어떻게 해요?' 
'상관 마십시오. 당신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으니까!' 

성근선생은 끝끝내 익두선생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마도 연변 돌공장에서부터 친형처럼 믿고 의지했던 사람인지라 
그만큼 실망도 컸던 것 같았다. 

이후 이 사역장이 서안으로 이사 갈 때 
성근선생이 익두선생을 따라가지 않아서 
할 수 없이 그를 권능선생의 사역장으로 보냈다. 

익두선생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규율이나 원리원칙 보다는 
사랑이 먼저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한 말로 안되면 주먹이 나가던 습관도 완전히 고치게 되었다.